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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소리 없이 중국에 다가서는 미국과 일본, 한국은?

중앙일보

입력

지난해 11월 17일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기시다 후미오(왼쪽) 일본 총리가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 정상회담 기간 양자 회담에 앞서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해 11월 17일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기시다 후미오(왼쪽) 일본 총리가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 정상회담 기간 양자 회담에 앞서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중국과 일본이 가까워지고 있다. 미국의 대중 압박에 동참하고 있는 일본과 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중국이 손을 잡았다. 중국과 일본의 외교부 국장이 지난 7월 22일 도쿄에서 만났다. 류진쑹 중국 외교부 아주사(아시아국) 사장과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그들이다.

이들은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오염수(일본은 처리수)의 해양 방류 문제 등을 협의했다고 알려졌다. 이들의 만남 이후 조심스럽게 중‧일 정상회담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시기는 9월 9~10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11월 14~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다. 중‧일 정상회담이 흘러나오는 이유는 올해가 중‧일 평화우호조약 체결 45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평화우호조약 체결에 앞서 일본 다나카 총리, 오히라 외무상, 니카이도 관방장관은 1972년 9월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를 만나 국교 정상화를 체결했다. 하지만 그 이후 양국의 국내 정치가 혼란스러워지면서 후속 조치가 뒤따르지 않았다.

일본은 록히드 사건으로 다나카 정권이 붕괴해 국내 정치가 잠깐 불안정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대혼란이 수습되기는 했지만, 4인방의 득세,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의 사망, 4인방의 실각 등 정치적으로 암흑기였다. 중국이 1978년에 접어들면서 정치적 안정을 되찾고 그해 8월 12일 양국은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바로 1972년 2월 닉슨의 방중이다. 일본에 ‘쇼크’ 그 자체였다. 닉슨 대통령은 1971년 7월 15일 TV 생방송으로 방중 사실을 알렸다. 당시 사토 일본 총리는 닉슨 대통령의 TV 연설이 시작되기 3분 전에 알았다.

후에 총리가 되는 다케시타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을 하던 중 기자단의 질문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서…”라며 얼버무렸다. 자민당의 나카소네 총무회장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일본에 미안해하면서 비밀 유지가 최우선이라고 판단했다. 키신저는 나중에 “공식 발표하기 수 시간 전에 사토에게 미리 전달했더라면 예의에도 어긋나지 않고 친근감도 느끼게 했을 것”이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당시 일본의 반응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중국과 한 편이 되어 일본과 전쟁을 치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질서 구축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희망과 반대로 중국이 1949년 공산화됐다. 미국은 이번에는 일본을 동반자로 선택했다. 미국으로서는 아시아의 동반자로서 일본과 중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길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닉슨 쇼크’는 미국이 또다시 일본을 배반하고 중국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일본에 심어주었다. 그것은 일본 외교의 트라우마가 돼 버렸다. 그렇다고 미‧일 관계가 결정적으로 악화하지 않았다. 대신에 일본은 ‘독한 마음’을 먹게 됐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더욱 독립적인 외교를 추구하기로. 일본은 얼마나 급했던지 곧바로 중국과 국교 정상화를 체결하고 중국과 화해 노선을 걸었다.

최근 일본은 1972년의 ‘닉슨 쇼크’는 아닐지라도 ‘작은 쇼크’를 경험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재닛 옐런 재무장관 등의 잇따른 중국 방문이다. 미‧중 갈등이 첨예화되는 상황에서 미국 권력 4위의 국무장관이 방중한 것은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까지 방중했다. 성급한 예측일지 모르지만, 미‧중 화해의 신호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를 지켜보는 일본의 심중은 편치 않다. 미국은 미‧중 화해의 시그널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일본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닉슨 쇼크’가 떠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외무상 출신인 기시다 총리는 같은 외무상 출신에 총리까지 역임한 오히라 마사요시(1910~1980)를 멘토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그 오히라 외무상이 ‘닉슨 쇼크’의 충격을 딛고 중‧일 국교 정상화를 진행했다. 기시다‧오히라는 일본 자민당의 파벌 가운데 하나인 고치가이 출신이다. 오히라와 같은 파벌 출신인 기시다는 ‘닉슨 쇼크’를 트라우마로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은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별도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려고 한다.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 겸 중의원 의장은 지난 7월 대기업 임원 80여 명을 데리고 중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리창 총리와 왕원타오 상무부장 등을 만났다. 리창 총리가 현직이 아닌 고노 요헤이를 만난 것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중‧일 간에 정치적 갈등은 깊어지더라도 경제 협력은 계속돼야 한다는 의미다. 고노 요헤이는 고노 다로 디지털담당상(장관)의 아버지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지난 6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이들은 장관급 인사가 아닌 쑨웨이둥 외교부 부부장(차관)을 만났다. 방문 목적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중국이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은 지난 10일 한국에 중국인 단체관광을 허용했다. 중국이 이번에 발표한 국가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일본‧독일 등 78개국이다. 한미일이 포함되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오는 11월 미국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는 미‧중 정상회담까지 예상된다.

미‧일의 중국 접근이 예사롭지 않다. 북‧중 국경 봉쇄도 9월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해제할 전망이다. 동북아시아의 수면 아래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다. 소리 없이 움직이니 외교가 어렵다. ‘전략적 모호성’에서 ‘전략적 명확성’으로 방향을 튼 윤석열 정부가 미‧일의 대중 접근을 예의 주시하며 한국의 국익을 최대한 확보하기를 바란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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