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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윤의 내 친구, 중국인] 우리나라도 ‘꽌시’ 사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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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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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국과 많이 다른가?

美美與共 天下大同

‘우리’의 아름다움과 ‘타인’의 아름다움을 함께 하면, 천하는 크게 하나가 된다. -중국 인류학자 페이샤오퉁(費孝通)-

서로 다른 문화를 서로가 공감하면, 세계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을 것이다.

첫 칼럼을 쓰고 나니 어떤 이는 ‘중국인 중에도 좋은 이가 있고 나쁜 이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도 그렇다’는 식의 시시한 얘기 하려면 그만두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왜 시시한 얘기일까? 어느 나라 사람은 모두 맞고 어느 나라 사람은 모두 틀렸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누구는 늘 옳고, 누구는 늘 틀릴 수도 없다.

1992년, 대만과 단교(斷交)하자 대만에 있던 많은 한국인은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대만 사람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한국인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일본과의 관계가 나쁠 때, 일본 제품을 불매하는 운동과 일제 차량을 부수는 폭력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의 주범으로 잡혀간 어느 중국인이 형을 마치고 출소했더니 주위에서 위로를 해줬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고생한 것 없다. 감방의 모든 사람이 너무 잘 대해줘서 어리둥절했다”라는 소감을 말했다고 한다. 일본을 상대로 분풀이한 것에 대해 감방의 모든 이들이 칭송(?)한 것이다.

‘최소한 아직은’ 사드 이후 지속되는 이런저런 양국의 갈등 중에도 중국에서 한국인이 구타당했다거나, 우리나라 차량 등 제품이 훼손당했다거나,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의 중국에 대한 평가를, 필자도 전혀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의 전방위적인 반중 현상은 정도가 지나치다. 특히나 중국인에 대한 편견은 편향된 정도가 심각하다. 나쁜 중국인(혹은 기업)한테 속은 우리나라 사람(혹은 기업)도 많지만, 나쁜 우리나라 사람한테 속은 중국인도 많다. 균형감 있는 비판은 몰라도, 흥밋거리로 소비하려는 비난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당연히 공평하지도 않다.

취향(혹은 성향)은 ‘선택’에는 영향을 주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판단’에 이르면 안 된다. ‘좋아한다’와 ‘싫어한다’는 성향이고 취향일 수 있지만, 이것을 가지고 ‘맞다 또는 틀리다’ 혹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당신 자신의 그 근거에 대한 넉넉한 증거를 추구한다면, 당신의 의심이라는 것도 처음에 생각했던 것만큼 그다지 확고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식과 지혜의 부족으로 인한 편견이자 오만이다(티머시 켈러 목사)”.

학문적 결과물도 때로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이지 않다.

심리학의 ‘기본 귀인 오류(基本歸因誤謬)’는 최소한 중국인에게는 없는 오류다.

사회심리학에서 중요한 주장 한 가지는, 인간은 타인의 행동을 평가할 때 ‘개인의 성향이나 성격’의 중요성은 과장하는 한편, ‘상황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를 ‘기본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부른다. ‘개인의 성향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일 뿐, 주변 환경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오류(즉, 주변 환경도 중요하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 학자들이 지적하는 ‘기본 귀인 오류’는 중국인에게는 아예 성립이 안 되는 듯싶다. 중국인은 ‘개인의 성향보다는 주변의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를 소개해본다.

살해 사건에 대한, 미국과 중국 매체의 분석

사례1: 중국인이 가해자

루깡이라는 중국인 미국 유학생의 사례다. “1991년 미국 아이오아 대학 물리학과 박사 과정에 있던 중국인 학생 루깡은 우수 논문 경연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했다. 그는 즉각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후에 그는 교수직을 얻는 데도 실패했다. 그해 10월 31일, 그는 학과 건물에 들어가서 자신의 지도교수를 총으로 쏘고 근처에 있던 다른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한 후 결국 자살했다…. 동일한 살인 사건에 대해 미국 신문(뉴욕 타임스)은 범인의 인격적인 결함을 부각하는 보도를 했다. 반면에, 중국 신문(월드 저널)은 범인이 처했던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다(『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동일한 사건을 다루는 미국과 중국 매체의 초점은 명백하게 달랐다. 미국 언론은 ‘개인의 인격적 결함’을 부각하려 했다. 중국 언론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미국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에 그 책임을 돌리고 있다.

하필 범인이 중국인이기 때문에, 두 매체가 각각 의도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유도한다고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반된 언론의 태도는 상대 국가에 대한 선입관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문화 속에서는 ‘본래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문화가 달라서 ‘상대 국가에 대한 편견’이 없는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사례 2 : 미국인이 가해자

두 번째의 사례는 ‘편견’이 아니라 ‘사유 방식의 차이’가 그렇게 판단하도록 했음을 증명해준다. 이번에는 가해자가 미국인이었다.

“미시간주의 오크벨리라는 도시에서 우편배달부로 일하던 토머스 매킬베인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자 부당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결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해 11월 14일, 그는 자신이 일하던 우체국에 들어가 상사와 동료, 그리고 고객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국 신문 기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가해자의 내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중국 매체는 매킬베인에게 영향을 주었을 법한 상황적 요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했다(『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미국인과 중국인의 사고방식, 달라도 아주 다르다.

한편, ‘만약 이러저러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사후 가정적(counterfactual) 질문을 던졌을 때 더욱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루깡이 직장을 잡았더라면’ 혹은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그와 주변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더라면’ 등등 “그를 둘러싼 환경이 달랐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결과, 중국 학생들은 “루깡의 상황이 달랐더라면 살인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인 반면에, 미국 학생들은 “살인 사건의 원인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그 사람의 내부적 특성 때문인 만큼 상황이 달랐어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났을 것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개인주의’의 상대 개념은 ‘집단주의’가 아니라 ‘관계주의’다.

인과적 설명에서 양국의 차이가 극명했다. 개인은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정체성을 가졌다고 전제하는 미국은 ‘개인주의’인 반면, 중국은 소위 ‘관계(꽌시)주의’ 다. 개인은 여러 환경 속에서(또는 관계 속에서) 관계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저명한 철학가이자 사상가인 량쑤어밍(梁漱溟)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 사회는 ‘개인주의’도 아니고…바로 ‘관계주의’다. 관계주의의 사회 시스템에서 강조하는 중점은 주로 특수한 개체 간의 관계에 있다…. 중점은 어느 한쪽에 두지 않고, 그 관계로부터 오는데, 피차가 서로 교환한다. 그 중점은 사실상 관계에 두고 있다(『중국문화요의(要義)』)”.

한편, 한국인과 미국인의 비교도 있다. “어떤 사람의 성격은 고유한 영역으로 살아가는 동안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얼마나 동의하는지 물어보았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성격이 바뀔 수도 있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 미국인들은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는 반응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보였다(『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중국은 꽌시 사회다. 그래서 정의롭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은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이라기보다 관계를 겪어 내는 여정입니다. 문제는 풀지 못해도 살 수 있지만, 관계는 견디지 못하면 못 삽니다(『길을 찾는 사람』, 조정민 목사)”.

“심리학적으로 보면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성은 가족확장성과 관계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는 조직보다 관계가 중요하다. 즉, 집단주의보다는 관계주의다…. 고 최상진 교수는 ‘한국 사람들은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고 관리하는 심리적 도구까지 발전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체면이다’… (『어쩌다 한국인』, 하태균)”.

‘전면적인 꽌시 사회’ 와 ‘(일부 특권층만 향유하는) 부분적인 꽌시 사회’  

중국은 스스로 ‘꽌시 주의’라 정의하고, 모든 이들이 그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중국이 ‘가족을 중심으로 확장되는 꽌시 주의 문화’라고 여기고 있지만, 권위 있는 학자는 ‘우리나라도 그렇다’라고 말한다.

한편, 보통의 한국인은 우리 사회의 꽌시 문화를 부정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꽌시는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인가 싶다. 일부 사회적 강자와 권력층은 자기들끼리는 꽌시를 거리낌 없이 자주 활용한다. 꽌시가 있는 이들은 법조차 안중에 없는 듯하다. 그들에게 법은 검이요 방패다. 꽌시 없는 보통의 한국인들은 맨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꽌시 있는 이들의 검과 방패는 평범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방패는 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칼날은 결국 대중을 향한다.

양쪽에서 배척당할 것인가? 아니면 양쪽을 다 아우를 것인가?

우리는 ‘주변인(혹은 경계인. Marginal man)’이다. 주변인 혹은 경계인이란, “두 개 이상의 이질적인 사회나 집단에 동시에 속하여 양쪽 문화의 영향을 함께 받으면서도 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소속되어 있지 못한 사람(〈두산 백과〉)”이라고 정의한다. 어느 한쪽으로의 뚜렷한 특징이 없을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태생적으로 ‘양쪽을 다 잘 아는’ 부류다.

세계적인 석학인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한국명 이만열)의 글이다. “한국은 대표적인 유교 국가면서도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기독교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은 매우 이질적이고 상충하는 가치가 공존해왔고 앞으로도 공존할 수 있는 특이한 곳이다(『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

우리는 중국인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을 (서구의 다른 나라에 비해) 잘 알 수 있다. 한편, 근대화 이후 교육 및 정치 사회 등 거의 전 분야에서 서구를 쫓아가고 있다. 서구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크게 보면 두 국가 혹은 진영 사이에서의 ‘주변인’이다. 그런데 현실은, 미국과 중국을 어느 한쪽도 제대로 이해 못 하는 듯 보이고,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지도 못한 듯하다.

한쪽의 잣대로 다른 한쪽을 재단하려 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양쪽을 다 잘 아는 주변인’의 장점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신발 가게에 가서 ‘신발이 몇 문인가?’만 확인하고 사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직접 신어 보고, 내 발이 편한지를 알고 사야 한다. ‘신발의 단위’보다 내 판단이 내 감각이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寧信度 不自信(크기를 재는 도구는 믿을지언정, 내 발은 믿지 않는다). 그러면, 어리석다. ‘주변인의 장점’을 발휘해서 미국은 미국식으로 바라보고, 중국은 중국식으로 바라보자. 누구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양쪽 시력이 똑같이 좋은데, 굳이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류재윤 협상·비즈니스 문화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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