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술 읽는 삼국지](92) 촉오가 다시 화친하고 조비는 장강에서 혼쭐이 나다

    [술술 읽는 삼국지](92) 촉오가 다시 화친하고 조비는 장강에서 혼쭐이 나다

    손권은 육손이 유비를 물리친 데 이어 위군까지 물리치자 육손을 보국장군(輔國將軍)으로 삼고 강릉후에 봉했습니다. 아울러 형주목을 겸임하게 했습니다. 병권(兵權)도 모두 육손이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조비가 사마의의 계략을 받아들여 오로(五路)로 공략하기로 하고 손권에게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함께 촉을 공격하여 무너뜨린 후, 촉의 영토를 반반씩 나누어 가지는 조건이었습니다. 손권은 육손을 불러 의견을 물었습니다.   육손은 우선 승낙하고 사로(四路)의 전투 상황을 보다가 제갈량이 불리하면 즉각 군사를 진격시켜 성도를 함락하고, 사로의 군사가 패한다면 다시 상의하도록 했습니다. 손권은 그 말을 따르기로 하고 각 곳에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네 곳이 모두 패하거나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손권은 군사를 움직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때, 촉에서 등지가 사신으로 왔습니다. 장소는 등지가 세객(說客)으로 온 것으로 믿고 손권에게 대응방법을 말했습니다.   우선 전각 앞에 큰 세발솥(鼎)을 가져다 놓으십시오. 수백 근의 기름을 붓고 숯을 피워 끓이면서, 우락부락하고 건장한 무사 1천 명을 골라 칼을 들고 궁문 앞에서 전상(殿上)까지 곧장 늘어세운 다음 등지를 부르십시오.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역이기는 제나라를 달랬다가 기름 가마에 삶겨 죽었다고 꾸짖으시고 그가 뭐라고 대답하는지 두고 보소서.   손권은 장소의 말대로 준비하고 등지를 불렀습니다. 등지가 궁문 앞에 이르러 이 광경을 보고는 그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두려움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유유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기름 가마를 보고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전각 앞에 이르자 손권이 준비한 말로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등지가 크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끓는 기름 솥도 두려워하지 않는 등지. 출처=예슝(葉雄) 화백   사람들이 모두 동오에는 훌륭한 사람이 많다고 하더니 하나의 유생을 무서워할 줄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내가 어찌 하찮은 놈을 무서워하겠느냐?   나는 촉의 한 유생으로 특별히 오나라의 이해(利害)를 말씀드리러 왔는데, 군사를 늘어세우고 기름 가마까지 끓이면서 한 사람의 사신을 막고 있으니, 어째서 이렇게 통이 좁으십니까? 어디 남을 용납이나 하시겠습니까?   손권은 황당하고 부끄러워 무사들을 물리치고 등지를 전각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등지는 손권에게 촉오동맹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설명했습니다. 손권은 답례 인사로 중랑장(中郎將) 장온을 사신으로 삼아 등지와 함께 촉으로 보냈습니다. 후주와 제갈량은 장온을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장온이 다시 등지와 귀국하여 손권에게 후주와 제갈량의 덕망을 설명하고 영원한 우호로 맺어지기를 바란다고 보고했습니다. 손권은 연회를 열어 등지를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만일 오와 촉, 두 나라가 마음을 합해 위를 멸하고 천하태평을 이룩하여 두 임금이 나누어 다스린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소?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습니다. 만일 위를 멸하게 된다면 그다음의 천명은 누구에게 돌아갈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되는 이는 덕을 쌓고, 신하가 되는 이는 충성을 다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구려!   한편, 조비는 촉과 오가 우호 관계를 맺은 사실을 알고 크게 화가 났습니다. 두 나라가 손잡고 위를 공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조비는 촉오가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선공을 하기로 했습니다. 사마의가 오를 치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함을 말하고 전선(戰船)을 선발하여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습니다. 조비는 그 말을 따라 길이 20여 장(丈)이나 되는 용주(龍舟) 10척을 만들었습니다. 삼천 척의 전선을 모아 강남으로 향했습니다.   손권은 소식을 듣고 문무 관료들을 불러 상의했습니다. 육손은 형주를 지키고 있어서 가벼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고옹이 촉과 우호를 맺었으니 제갈량으로 하여금 한중으로 출격하여 위군을 공격하게 하도록 요청하자고 했습니다. 이때 서성이 나섰습니다.   신이 비록 재주는 없지만 일군(一軍)을 거느리고 위군을 막겠습니다. 만일 조비가 직접 장강을 건너온다면 신이 꼭 사로잡아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만일 장강을 건너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위군을 절반쯤 죽여 감히 다시는 동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서성. 출처=예슝(葉雄) 화백   손권은 서성을 안동장군(安東將軍)으로 삼아 건업과 남서의 군마를 총독하게 했습니다. 서성은 곧바로 군관들을 불러 명령을 내렸습니다.   무기류와 깃발들을 많이 설치하고 강변을 단단히 지킬 수 있도록 대책을 세우라!   오늘 대왕께서 장군에게 중책을 맡기신 것은 위군을 무찌르고 조비를 잡으라는 것이오. 장군은 왜 일찌감치 군마를 출동시켜 강을 건너가 회남지방에서 적을 맞으려 하지 않으십니까? 여기서 조비의 군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아마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왕의 조카인 손소가 반문했습니다. 서성은 조비의 군사가 강대하니 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하고 북쪽 강기슭에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 공격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손소는 자신이 지리를 잘 알고 있으니 3천 명의 군사로 강을 건너가 공격하겠다고 했습니다. 서성은 계속 손소가 고집을 부리며 명령을 따르지 않자 무사들에게 손소를 끌어내 목을 베라고 명령했습니다. 손권이 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습니다.   대왕께서는 신을 도독으로 명하시어 군사를 거느리고 위를 막으라 하셨습니다. 이제 양무장군 손소가 군법을 따르지 않고 명령을 어겼으니 이는 참형에 해당합니다. 대왕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용서해 주시옵니까?   손소가 혈기만 믿고 잘못하여 군법을 어겼으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오.   법은 신이 세운 것도 아니고, 또한 대왕께서 세우신 것도 아닙니다. 바로 국가의 전형(典刑)입니다. 만일 친하다고 용서해 준다면 어떻게 많은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손소가 법을 어겼으니 응당 장군이 처치하는 대로 맡겨 두어야 하오. 그러나 어찌하겠소. 형님의 자식이지만 나를 위해서도 공적을 꽤 세웠소. 지금 만약 죽인다면 형님과의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오.   우선 대왕의 체면을 보아 형 집행은 미루어 두겠습니다.   그날 밤, 손소는 자신의 정예병 3천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너갔습니다. 서성은 혹시 실수라도 있으면 손권을 뵐 면목이 없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즉시 정봉에게 3천 명의 군사와 비밀 지시를 내려 장강을 건너가게 했습니다. 서성의 마음도 편할 리가 없었습니다.   한편, 조비는 장강을 따라 순탄하게 오다가 서성이 강가 성루에 세워 논 수많은 허수아비를 보고 진짜인 줄 알고는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이때, 급히 파발마가 달려와 고했습니다.   조운이 군사를 이끌고 양평관으로 나와 곧장 장안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손권의 치소였던 남경의 석두성. 허우범 작가   조비는 보고를 받자 얼굴빛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즉시 철군을 명령했습니다. 그때, 손소가 몰아쳐 들어왔습니다. 조비는 힘을 다해 빠져나갔습니다. 30리를 갔을 때 또다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용주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조비는 허둥지둥 말로 갈아타고 달아났습니다. 이때 정봉이 공격해 왔습니다. 장료와 서황이 조비를 구원하여 달아났습니다. 손소와 정봉은 위군을 무찌르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했습니다. 손권은 서성에게 후한 상을 내렸습니다.   한편, 조운은 군사를 이끌고 양평관을 나오던 중 갑자기 승상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익주군의 늙은 족장 옹개가 만왕 맹획과 반란을 일으켰으니 양평관은 마초에게 맡기고 속히 돌아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운은 서둘러 군대를 성도로 돌렸습니다. 제갈량은 직접 남정(南征)을 준비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남만 정벌이 시작되었습니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3.11.29 07:00

  • [술술 읽는 삼국지](91) 유비는 백제성에서 눈 감고, 제갈량이 후주와 촉을 이끌다

    [술술 읽는 삼국지](91) 유비는 백제성에서 눈 감고, 제갈량이 후주와 촉을 이끌다

    유비는 육손의 공격에 크게 패하고 백제성으로 도피했습니다. 마량이 성도에서 돌아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유비도 승상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성도로 돌아가서 여러 신하를 볼 낯도 없었습니다. 백제성에 머물기로 하고 역관(驛館)을 고쳐 영안궁(永安宮)이라고 했습니다.   조비는 가후에게 촉과 오 중에서 어디를 먼저 공격해야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가후는 촉에는 제갈량이 있고 오에는 육손이 있으며, 요충지마다 군사들을 둔치고 있어 단시일에 쳐부수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면서 두 나라의 변화를 기다리다가 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조비가 오를 공격하기 위해 삼로(三路)로 군을 진군시켰다고 하자, 상서 유엽도 오의 육손이 이미 방비를 했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조비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경은 전에 짐에게 오를 치라고 권하더니 지금은 어째서 치지 말라고 간하시오?   형편이 그때와는 아주 다릅니다. 그때는 동오가 촉에게 여러 번 패해 기세가 크게 꺾여 있었기 때문에 공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승을 거두어 사기가 한껏 올라있기 때문에 공격하면 안 됩니다.   척후병이 달려와 동오가 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유엽은 현 상황에서 중지할 것을 청했지만 조비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갔습니다. 동오는 여범에게 군사를 이끌고 조휴를 막게 하고, 제갈근에게 군사를 이끌고 남군에서 조진을 막게 하고, 주환에게 군사를 이끌고 유수에서 조인을 막도록 했습니다. 결국, 조비가 보낸 군사들은 동오의 방어에 막혀 모두 패하고 말았습니다. 조비는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로부터 오와 위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한편, 영안궁에 있는 유비가 병이 들어 앓아 누었습니다. 병세가 점점 위중했습니다. 비몽사몽 간에 관우와 장비의 혼령과 만났습니다. 유비는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알고는 성도로 사자를 보냈습니다. 승상 제갈량과 상서령 이엄 등을 불렀습니다. 제갈량은 태자 유선에게는 성도를 지키게 하고 유비의 둘째, 셋째 아들인 노왕 유영과 양왕 유리를 데리고 영안궁으로 왔습니다.   ‘새가 죽을 때는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고 하셨네. 짐은 본래 경들과 함께 역적 조가를 섬멸하고 한나라를 붙들어 세우기로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중도에서 이별해야겠네. 수고스럽지만 승상은 이 조서를 태자 선에게 전해주고, 예사로운 말처럼 여기지 말도록 모든 일을 승상이 더욱 지도해 주기 바라네.   폐하! 용체를 쉬시도록 하소서. 신 등은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해 폐하의 지우지은(知遇知恩)에 보답하겠나이다.   승상은 조비보다 열 배는 나은 재주를 가졌으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는 큰일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일세. 만일 우리 큰 자식을 도울만하면 돕고, 그렇지 못하면 자네가 직접 성도의 주인이 되도록 하시게.   신이 어찌 감히 고굉(股肱)의 힘을 다하지 않고 충정(忠貞)한 절의(節義)를 다하여 대를 이어 목숨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너희들은 명심해라! 짐이 죽으면 너희 3형제는 모두 나처럼 승상을 섬기도록 하거라. 절대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비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백제성에서 제갈량에게 유언하는 유비. 출처=예슝(葉雄) 화백   유비가 오를 치고자 삼협으로 향하나 蜀主窺吳向三峽 애끓게도 죽은 곳은 영안궁이었네. 崩年亦在永安宮 황제의 깃발 빈 산 너머 펄럭이니 翠華想像空山外 옥빛 대궐도 공허한 들판 절에 있었구나. 玉殿虛無野寺中 낡은 사당 숲속에는 왜가리가 깃들고 古廟杉松巢水鶴 명절이면 촌로들만 이곳을 찾네. 歲時伏臘走村翁 무후의 사당이 언제나 옆에 있어 武侯祠屋長隣近 군신의 구별 없이 함께 제사 받드네. 一體君臣祭祀同   서기 223년. 이릉대전에서 대패하고 백제성으로 피신한 유비는 병과 한이 깊어 63세의 나이로 붕어(崩御)했습니다. 제갈량은 영구를 성도로 모셔 혜릉에 장사 지내고 소열황제(昭烈皇帝)로 추존했습니다. 이어 태자 유선을 황제로 세웠습니다. 조비는 유비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걱정거리가 없어졌으니 이참에 군사를 일으켜 공격할 생각이었습니다. 가후가 말렸습니다. 제갈량이 지키고 있기도 하지만 상란(喪亂) 중에 공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가후의 말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오른 유선. 출처=예슝(葉雄) 화백   이런 기회에 쳐들어가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오! 어떤 계책이 좋겠는가?   중원의 군사들만 일으켜서는 단시일 안에 승리를 거두기는 어렵습니다. 반드시 오로(五路)의 대군으로 사방에서 협공해야만 제갈량이 앞뒤에서 구원할 수 없을 터이니, 그때 도모할 수 있습니다.   조비는 사방으로 비밀리에 사람들을 파견하고 조진에게는 1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평관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곧장 촉에도 알려졌습니다. 후주 유선은 매우 놀라 제갈량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병이 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했습니다. 후주가 제갈량을 만나러 갔습니다. 제갈량을 만난 후주는 제갈량을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제갈량이 말했습니다.   강왕 가비능, 만왕 맹획, 반장 맹달, 위장 조진, 이 사로(四路)의 군마는 신이 이미 모두 물리쳤습니다. 다만 손권 쪽의 군마가 남아 있는데 신은 물리칠 계책을 이미 세워 놓았으나 말 잘하는 사람이 꼭 하나 있어야 되겠는데, 그런 사람을 구하지 못해 곰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폐하! 무엇하러 걱정하십니까?   상부의 계책은 정말 귀신도 예측하지 못하겠군요.   위의 공격에 대비책을 마련하고 후주를 안심시키는 제갈량. 출처=예슝(葉雄) 화백   후주는 제갈량을 만나자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제갈량은 손권에게 보낼 사자로 등지를 생각해두고 그에게 한나라를 중흥시키려면 어느 나라를 먼저 공격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등지가 자기 생각을 밝혔습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위는 비록 한나라의 역적이지만 세력이 너무 커 단시일 안에 흔들어 놓기는 어려우니 천천히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주상께서 갓 보위에 오르시어 민심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동오와 연합하여 순치(脣齒)의 관계를 맺고 선제 때의 원한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것이 바로 장래를 위한 계책이라 여겨집니다. 승상의 뜻은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갈량은 등지의 말을 듣고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동오 설득사(說得使)로 임명하여 손권에게 보냈습니다. 등지는 어떻게 예전처럼 촉오동맹을 맺을 수 있을까요.   모종강은 유비가 제갈량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하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선주가 제갈량에게 어린 아들을 부탁하는 말을 보면 동오정벌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위의 정벌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주는 제갈량에게 “자네 재주는 조비보다 열 배는 낫다”고 말했다. 어째서 손권보다 열 배는 낫다고 말하지 않았겠는가? 한나라의 원수는 위나라이고, 자신의 상대는 조씨(曺氏)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선주는 또 “사자(嗣子)를 도울만하면 돕고, 그렇지 못하면 직접 그 자리를 차지하라”라고 했다. 그 말은 역적을 토벌할 만하면 돕고, 역적을 토벌할 위인이 못되면 직접 그 자리를 차지하라는 말과 같다. 역적을 토벌하느냐 못하느냐에 중범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아들이 황제 자리를 잇는 것에 대해서는 큰 무게를 두지 않았다. 이것이 제갈량이 전후 출사표를 올리며 그만두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3.11.27 07:00

  • '中인구 4억 감소' 얘기도 나왔다…"올 신생아 49년이후 최저" [신경진의 차이나는 차이나]

    '中인구 4억 감소' 얘기도 나왔다…"올 신생아 49년이후 최저" [신경진의 차이나는 차이나]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중국의 저출산 현상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올해 태어난 신생아가 지난해보다 10% 이상 줄면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할 것이란 전문가들의 경고가 나왔다. 지난해 1000만 명에 이어 올해 900만 명 선이 무너질 전망이다.   결혼을 꺼리는 비혼(非婚)도 증가 추세다. 지난해 중국의 초혼 인구는 1051만7600명. 사상 처음으로 1100만 명 선이 깨졌다. 이혼율도 늘고 있다. 출산 적령기 여성 인구도 감소 추세다. 결혼할 여성이 줄고, 여성이 있어도 결혼이 줄고, 결혼을 해도 출산을 기피하고, 이제 신생아가 줄어든다. 풍부한 노동력과 거대한 소비시장을 뒷받침한 ‘인구 프리미엄’을 자랑하던 중국의 성장 엔진이 식고 있다. 중국의 한 신혼부부 커플이 혼인신고를 마친 후 결혼등기증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61년만에 마이너스 인구성장을 기록한 이후 올해 1949년 이후 최저 출생률을 기록할 전망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정근영 디자이너   차준홍 기자  ━  “어지러운 사회, 아이까지 겪게 않겠다”   중국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배경에는 미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안감이 자리한다. 연초 제로 코로나 정책을 기하며 ‘리오프닝’ 효과를 기대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청년 취업난이 치솟았다. 한국처럼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 대출이 유행했던 부동산 시장도 만신창이가 됐다. 2년 차 직장인 왕산어(王杉兒·25, 가명)는 중앙일보에 “내 아이를 키울 정도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다”며 “어지러운 사회에 아이까지 어려움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고 토로했다.   차오제 베이징대 의학원 주임 겸 중국공정원 원사. 의학과학보 캡처 의학계와 인구 전문가들의 전망도 잿빛이다. 차오제(喬傑) 베이징대 의학부 주임 교수 겸 중국공정원 원사는 지난 8월 “중국 신생아가 최근 5년 만에 약 40% 줄었다. 올해는 700만~800만 명 선에 그칠 것”이라며 “여성의 수태 능력을 촉진하는 연구가 인구 증진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했다. 차오 교수는 불임(不姙) 연구에 획기적 투자를 촉구했다.  ━  여성 줄고, 결혼 줄고, 출산 기피    인구 전문 싱크탱크인 ‘위와(育媧)인구연구’의 인구전문가 허야푸(何亞福)는 “올해 신생아는 지난해 보다 약 10% 줄어든 850만 명 내외”로 전망했다. 허야푸는 “가임적령기 여성의 지속적인 감소, 결혼을 꺼리는 비혼 풍조, 젊은 부부의 출산 기피 추세가 인구 감소의 3대 원인”으로 지적했다.   위와인구연구는 당국이 실질적인 출산 장려 정책을 내놓지 못할 경우 2040년 12.77억 명→2050년 11.72억 명→2060년 10.32억 명→2070년 8.78억 명으로 인구 감소를 전망했다. 위와의 추산에 따르면 2070년 중국은 신생아 234만 명, 노동 인구 4.56억 명, 노인 인구 3.82억 명의 나라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지난 5월 제기한 중국의 성장이 이미 정점에 이르렀다는 ‘피크 차이나’ 이론의 중국 버전인 셈이다. 중국의 신혼부부 커플들이 베이징 자금성 성벽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61년만에 마이너스 인구성장을 기록한 이후 올해 다시 1949년 이후 최저 출생율을 기록할 전망이다. EPA=연합뉴스   한 여성이 평생 평균 몇 명의 자녀를 낳는가를 나타내는 합계출산율(TFR)은 지난해 중국이 1.09로 한국의 0.778을 뒤쫓고 있다. 인도는 지난해 2.0을 기록했다. 유엔 인구 보고에 따르면 지난해 이미 인도가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 인구 대국을 차지했다.  ━  지난해 유아원 5610곳 문 닫아   신생아가 줄자 보육 시설의 감소세도 빨라지고 있다. 전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안후이(安徽)성 푸양(阜陽)시 린촨(臨泉)현(229만 명)에서만 올해 들어 50개 유아원이 문을 닫았다. 현 내 사립 유아원 전체의 4분의 1에 육박한다고 중국 경제지 21세기경제보도가 최근 보도했다. 2022년 한 해 동안 전 중국에서 유아원 5610곳이 문을 닫았다. 저출산에 따른 연쇄반응은 머지않아 초·중·고교와 대학교 등 중국의 교육 생태계 전반에 파급될 전망이다.   차준홍 기자 출산 양극화도 시작됐다. 첫째는 줄고 다자녀는 증가세다(표). 지난달 국가위생건강위원회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신생아 956만 명 중 둘째는 38.9%, 셋째 이상이 15.0%를 차지했다. 첫째의 비율과 각각의 수치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허야푸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첫째 비중은 46.1%로 2016년 이후 시작된 절반 이하 추세를 이어갔다. 첫째 비중은 2013년 924만 명에서 441만명으로 10년 만에 52.27% 감소했다. 첫째의 비중이 줄어든다는 건 아예 출산 자체를 꺼리는 딩크(Double Income No Kid) 부부가 늘고 있음을 뜻한다.   2016년 시작한 두 자녀 정책도 반짝 효과에 그쳤다. 2016년 1015만 명이었던 둘째는 지난해 372만명으로 줄었다. 세 자녀 정책도 마찬가지다. 세 자녀 정책을 도입한 2021년 전후로 셋째 이상은 149만→154만→143만 명으로 큰 변화를 보이지 못했다.   지난달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개막한 제13차 전국부녀자연합회 전국대표자대회 개막식에 참석한 여성들이 기립 박수를 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  2년 전 대비 이혼율 25% 폭증   이혼율 증가도 우려된다. 중국 민정부에 따르면 올해 1~9월 197만 쌍이 이혼했다. 2021년 같은 기간 대비 25% 늘어난 수치다. 지난 2021년 1월 발효된 개정 민법은 충동 이혼을 막기 위해 ‘냉정기간’을 마련해 이혼신고서를 제출한 지 30일 이내에 철회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때문에 지난해 줄어들었던 이혼율은 올해 다시 반등했다. 출산적령기 여성도 감소 추세다. 20~39세 여성은 오는 2030년까지 20% 이상 줄어들 전망이다.   여기에 지난해 연말 충분한 대비 없이 ‘제로코로나’ 방역 정책을 폐지하면서 급증한 사망자 통계는 아직 공식 발표 전이다. 내년 1월 2023년 인구 통계에 187만 명대로 추산되는 코로나19 사망자를 반영할 경우 저출산에 더해 중국의 인구 감소 폭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지난해는 61년 만에 처음으로 85만명 인구가 감소했다.  ━  전통적 가족관 부활, 효과 미지수   중국 당국은 저출산 해법으로 전통적인 가족관의 부활을 제시했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달 30일 신임 여성단체 지도부를 집무실인 중난하이로 불러 “젊은이들의 결혼·출산·가정관에 대한 지도를 강화하고 출산 지원을 촉진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국가 차원의 파격적인 출산 장려책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리창(李强) 총리는 지난 3월 전인대 첫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인구증감이 초래할 문제에 대해 깊은 분석과 연구 판단을 거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라는 원론적 입장만 밝혔다.   일각에선 저출산 해법은 아직 개최 여부가 불분명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3중전회)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1978년 이후 3중전회는 체제 개혁을 논의하는 장이었다. 이젠 저출산 대책이 중국 체제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현안이 됐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2023.11.27 00:16

  • [중국읽기] 영토 넓혀가는 화웨이의 ‘훙멍OS’

    [중국읽기] 영토 넓혀가는 화웨이의 ‘훙멍OS’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중국에도 천지창조 신화가 있다. 반고(盤古)라는 이름의 신이 하늘을 열고 땅을 펼쳤다. 반고 이전의 시기는 ‘훙멍(鴻蒙)’이라 했다. 원시의 기(氣)가 뭉쳐있는 혼돈의 세계다. 화웨이가 독자 개발한 스마트폰 운영체제(OS)를 ‘훙멍’이라고 이름 지은 연유다.   ‘훙멍OS 기술자를 찾습니다.’ 징둥·메이퇀·알리바바 등 중국의 전자상거래 플랫폼 기업들이 훙멍 앱 개발자 구하기에 나섰다. 1억 연봉은 기본. 훙멍의 흡입력은 그만큼 크다.   아직 화웨이 스마트폰이 전부다. 다른 브랜드 폰은 여전히 구글 안드로이드, 또는 iOS(애플)를 쓴다. 그런데도 훙멍을 무시할 수 없는 건 국가가 뒤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공업정보화부 산하 조직인 ‘개방 원자 재단(Open Atom Foundation)’이 그 실체다.   화웨이 ‘훙멍OS’가 스마트폰에서 가전·자동차·스마트공장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화웨이는 훙멍 소스를 모두 이 재단에 ‘헌납’했다. 그다음부터는 재단이 나선다. 산업별 적용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조율하고, 해당 소스를 공개한다. 원하는 기업 누구든 가져다 쓸 수 있다. 민간 기술 훙멍은 그렇게 국가 재산이 된다. 바이두의 블록체인 플랫폼인 ‘슈퍼체인’, 텐센트의 저전력 사물인터넷(IOT) 시스템 ‘타이니’ 등도 같은 방식으로 뿌려지고 있다. 중국 특유의 국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화웨이는 훙멍OS를 사용하는 단말기가 모두 7억 개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최근 세계를 놀라게 한 5G 스마트폰 ‘메이트60 프로’가 핵심축이다. 영토는 이제 스마트폰을 넘는다. 화웨이와 자동차 회사가 함께 만든 ‘즈제(智界)’ ‘아이토(AITO)’ 같은 전기차에도 훙멍OS가 깔렸다. 이들 차량의 내비게이션·에어컨·영상 등은 화웨이폰과 완벽하게 연동된다. 훙멍이 얼마나 빨리 확산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산물이다. 2019년 5월 미국은 화웨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압박 강도를 높였다. 안드로이드 생태계에서 몰아내겠다고 별렀다. 이에 화웨이는 훙멍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그해 8월 첫 버전을 내놨다. 현재 중국 시장점유율 16%. 미국이 훙멍의 약진을 도운 꼴이다.   훙멍의 성공 여부는 더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미국의 기술 제재가 중국 스마트 기술의 표준 독립을 앞당기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반도체·전기차·AI 등에서도 목격되는 현상이다. 훙멍이 만든 자기들만의 세상에서는 블록 외부 기업과의 협력 공간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훙멍의 영토 확장을 경계하는 이유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3.11.27 00:14

  • 계엄령시대 대만 ‘기재’ 리아오, 언론탄압 맹공 곡절 겪어

    계엄령시대 대만 ‘기재’ 리아오, 언론탄압 맹공 곡절 겪어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8〉   하얼빈을 뒤로한 후 베이징에서 한자리에 모인 리아오(앞줄 왼쪽 모친 무릎) 일가. [사진 김명호] 2018년 3월 기재(奇才) 리아오(李敖·이오)가 타이베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만은 물론 대륙과 홍콩, 화교사회의 매체들이 요란을 떨었다. 원로 언론인의 추도사 비슷한 글 일부를 소개한다. “고교 시절, 전통 복장에 파카 만년필 꼽은 리아오라는 단정한 대학생이 학계와 사상계의 거목 후스(胡適·호적)와 치고받은 논쟁 내용 읽고 충격이 컸다. 꿈속에 그리던 미래의 영웅이 분명하다고 의심치 않았다.”   이 미래 영웅의 삶은 곡절투성이였다. 위대한 잡지 ‘문성(文星)’을 주관하며 소송이 그치지 않았다. 법정 출석만도 700회 이상을 기록했다. 강호(江湖)에서 퇴출당한 후에도 분주했다. 거리에서 국수 팔고, 전기수리공 하다 비 오는 날 전봇대에서 떨어지고, 사상범으로 감옥에 들어가고, 출옥 후 강호에 복귀했다가 또 감옥에 갔다. 친구도 많고, 적도 많고, 여자 친구는 더 많았다. 동거한 여인도 7명이 넘고, 오밤중에 잠옷 바람으로 들이닥친 중화권 최고의 여배우 후인멍(胡茵夢·호인몽)과 결혼 100일 만에 이혼하고, 격조 넘치는 언사로 당권자(黨權者)들과 투쟁하고, 거대한 언론기관을 압도하고도 남을 원고를 생산했다. 소위 명기자라 껍죽대던 사람들을 속으로 주눅 들게 만든, 대만 사회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만약 리아오가 없었다면 계엄령시대의 대만은 너무 적막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동·서양 고전 두루 섭렵   문성서점과 잡지 문성을 창간한 샤오멍넝과 부친 샤오통즈(蕭同玆). [사진 김명호] 리아오는 1935년 하얼빈(哈爾賓)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마적, 경찰, 시골 훈장, 이발사, 목욕탕 주인 등 직업이 다양했다. 부친은 베이징대학을 졸업한 국어교사였다. 1936년 가을 돌쟁이 아들 품에 안고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부친 덕에 베이징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리는 국·공전쟁 막바지였던 1948년 가을 명문 ‘제4중학’에 수석합격했지만 전란을 피해 상하이의 중학으로 전학했다. 상하이의 중학 생활도 짧았다. 4개월 만에 상하이를 떠나 대만에 뿌리를 내렸다.   대만대학 사학과 재학시절의 리아오. [사진 김명호] 리아오는 소학(초등학교) 시절부터 독서가 몸에 뱄다. 사탕보다 책을 좋아했다. 용돈만 생기면 서점으로 갔다. 소학 6학년 때 “나 혼자만의 도서관을 갖고 싶다”고 해 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교장이 최근에 읽은 책을 물었다. 대답이 거침없었다. “현재 ‘손중산전서(孫中山全書)’와 ‘나의 투쟁’을 읽는 중이다. 잡지는 ‘관찰(觀察)’이 좋고 신문은 ‘신화일보(新華日報)’가 볼 만하니 선생님도 꼭 보도록 해라.” 1949년 4월 대륙을 떠날 때 14세 소년 리아오는 자신의 장서 500여권을 한 권도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짐을 줄이라는 가족들의 불만은 귀에 담지도 않았다.   대만 중부도시 타이중에서 중학 생활 시작한 리아오는 살맛이 났다. 도서관에 없는 책이 없었다. 사서를 자청하며 4년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잡지에 ‘존 듀이의 교육사상’을 가명으로 기고했다. 듀이가 제창한 ‘진보적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국민당의 중앙집권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제도에 반감 드러낸 글로 교육계가 발칵 뒤집혔다. 교육부는 기겁했다. 대만 전역의 교사를 상대로 필자 색출에 나섰다. 성공할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흥해도 리아오, 망해도 리아오”   결혼증서 받고 즐거워하는 리아오와 후인멍. [사진 김명호] 고등학교 생활에 염증을 느낀 리아오는 3학년이 되자 결단을 내렸다. 개학 10일 만에 학교를 때려치웠다. 융통성 많은 교장이 한숨 내쉬며 리아오를 격려했다. “훗날, 중국이 배출한 인재를 퇴학처리했다는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다. 1년간 하고 싶은 일 하다 대학에 진학해라.” 1년 후 리아오는 대만대학 법학과에 합격했다. 다녀보니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술자 양성소와 별 차이 없었다. 학생이건 교수건 실망이 컸다. 걷어치우고 이듬해 가을 중문과에 응시해 합격했다. 다녀 보니 특이한 학과였다. 교수들은 대륙 명문대학 교수 시절과 달랐다. 애주가는 술꾼으로, 미식가는 탐식가로 변해 있었다. 학생들도 여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조교 3명은 빼어난 미인이었다. 담배 물면 교수란 사람이 불 붙여 주고 가관이었다. 미모가 학생 선발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이 들자 다니기 싫었다. 대만대학은 전과제도가 없었다. 자퇴하고 사학과에 들어갔다. 사학과는 체질에 맞았다. 느슨해진 학계의 대가와 국민당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는 문자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한, 성질 급한 청년의 글이다 보니 특징이 있었다. 누구나 읽기 쉬운 평이한 문체로, 있었던 사실을 품위 있고 코믹하게 비판했다. 독자가 솜사탕처럼 불어났다.   1961년 막바지 문성서점(文星書店) 주인 샤오멍넝(蕭孟能·소맹능)과 주완젠(朱婉堅·주완견) 부부가 지지부진하던 잡지 ‘문성(文星)’의 주간으로 리아오를 초빙했다. ‘이겨도 한니발, 져도 한니발’인 것처럼 ‘흥해도 리아오, 망해도 리아오’였다. 후스와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의 영향을 받은 리아오는 전반서화(全般西化)의 신봉자였다. 샤오멍넝, 주완젠과 철의 삼각을 형성하며 국민당의 내로라하는 정론가(政論家)들을 링으로 유인했다. 지저분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으며 벌린 ‘중서문화논전(中西文化論戰)’을 통해 공개적으로 국민당의 언론탄압을 맹공했다. 논전은 리아오와 문성의 압승이었다. 국민당은 리아오화 문성에 실린 글들이 법통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무기한 정간조치했다. 문성서점도 폐쇄시켰다.   이런저런 죄목으로 철창에서 만난 샤오멍넝과 리아오의 행동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샤오는 억울하다며 울기만 했다. 리아오는 “문성시대는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지난 일은 잊으라”며 이 악물고 웃기를 반복했다. 리아오 관련 서적과 연구논문 쏟아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2023.11.25 00:01

  • [글로벌 아이] 포스트 차이나 시대

    [글로벌 아이] 포스트 차이나 시대

    박성훈 베이징 특파원 날씨만큼이나 중국 경제가 차갑다. 지난 주말 베이징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궈마오상청(国贸商城). 전 세계 명품숍이 즐비한 베이징 쇼핑 중심가지만 인적이 한산했다. 가게에는 멀뚱거리며 서 있는 직원이 손님보다 많았다. 데이트에 나선 젊은층,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드문드문 보였을 뿐 중국 수도의 대표 쇼핑센터는 한량 하기 그지없다.   베이징 한인타운 왕징에서 대형 요식업을 하는 대표는 코로나가 끝나고 매출이 많이 올랐냐는 질문에 “아니다. 코로나 때보다 더 힘들다”고 답답해했다. 올 상반기 회복 조짐을 보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매출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돈의 흐름이 이를 반영한다.   베이징 시내 중심가. 가운데 두번째로 높은 것이 80층짜리 궈마오(국제무역센터) 건물이다. 박성훈 특파원 올 초 중국 주식시장으로 유입된 외화는 현재 4분의 3 이상 사라졌다. 중국의 노력에도 글로벌 투자자들은 몇 달 새 250억 달러 상당의 주식을 팔아치웠다. 지난 10일 기준 달러 유입액은 75억 달러 선으로 2016년 이래 최저치이자 코로나가 중국을 뒤덮은 2020년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정치적 불안정, 디플레이션 위기, 부동산 침체로 외국 기업이 투자금을 빼면서 상하이·선전 주식시장 CSI 300 지수는 연초 대비 11% 급락했다. 골드만삭스는 중국에서 빠진 자금이 인도와 한국 시장으로 몰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 성장에 제동이 걸린 징후도 지표로 나타난다.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점유율은 1990년 1.9%에서 2021년 18.4%로 10배 가까이 커졌다. 지금껏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올해 점유율은 17%로 세계 GDP에서 중국의 비중이 2년 만에 1.4% 감소했다. 1960년대 이후 처음이다. 중국이 물가상승률을 적용한 실질 GDP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이를 배제한 명목 GDP가 상대적인 국가 경제력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척도라고 지적한다.   중국은 마음이 급해 보인다. 이달 초 성장 둔화를 막기 위해 1조 위안(1400억 달러)의 경제 부양 지원책을 발표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4조 위안을 푼 이래 최대 규모다. 그러나 투자 주도 경제가 활력을 잃고 세입까지 압박받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재정 여력이 충분할지 지켜볼 일이다. 록펠러 인터내셔널 회장인 루치르 샤르마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중국의 부상이 역전되고 있다. 지난 반세기 가장 글로벌한 스토리가 막을 내리고 있다”고 썼다. 중국의 경제력 약화는 세계정세를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 차이나 시대를 목도하고 있는 것인가. 박성훈 베이징 특파원

    2023.11.24 00:18

  • [술술 읽는 삼국지](90) 칠백리 영채를 불태운 육손, 살기 위해 백제성으로 도망간 유비

    [술술 읽는 삼국지](90) 칠백리 영채를 불태운 육손, 살기 위해 백제성으로 도망간 유비

    유비가 칠백 리에 걸쳐 40여 곳이 넘는 영채를 수풀이 우거진 산기슭으로 옮기자 육손은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즉시 군사를 이끌고 직접 동정을 살폈습니다. 평지 둔덕에 허약한 군사들이 있었습니다. 주태가 가서 무찌르겠다고 했습니다만 육손은 복병이 있음을 간파하고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촉군이 더없이 와서 욕하며 꾸짖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비의 매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육손은 유비가 영채를 완전히 옮기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부하 장수들은 영채가 완성되면 어떻게 무찌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육손이 말했습니다.   칠백리 영채가 화공에 무너진 채 도망치는 유비. 출처=예슝(葉雄) 화백   여러분은 병법을 모르시오. 유비는 바로 이 세상의 사납고 야심 찬 영웅인 데다가 지략까지 겸하고 있소. 그의 군사가 처음 왔을 때는 규율이 매우 엄했지만, 지금은 싸우고 싶어도 싸우지 못하고 오랫동안 지키기만 하여 군사들은 피곤하고 사기도 떨어져 있소. 지금이 바로 무찌를 기회요.   유비는 효정에서 수군을 모두 일으켜 앞장세우고 장강을 따라 오나라 경계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황권이 퇴각하기 어려움을 들어 후진(後陣)에 남으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습니다. 군사를 둘로 나눠 강 북쪽은 황권에게 지휘토록 하고, 강 남쪽의 군사는 본인이 직접 지휘하며 진격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조비는 고개를 젖히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유비는 병법을 모른다. 진지를 7백 리나 늘어놓고 싸우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고원이나 습지 험한 곳에 군사를 둔친다는 것은 병법에서 대단히 꺼리는 일이다. 유비는 반드시 동오 육손의 손에 패할 것이다. 열흘 안에 반드시 소식이 올 것이다.   여러 신하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군사를 파견하여 대비하라고 청했습니다. 조비는 이참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육손이 만약 이기게 되면 반드시 동오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서천으로 쳐들어갈 것이다. 오군이 멀리 가면 나라 안은 텅 빌 터이니, 짐은 싸움을 돕겠다고 핑계를 대고 일제히 삼로(三路)로 쳐들어가면 동오는 힘 안 들이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조인은 유수(濡須)로 나가고, 조휴는 동정호(洞庭湖) 어귀로 나가고, 조진은 남군(南郡)으로 나가되, 삼로의 군마는 날짜를 맞추어 몰래 동오를 기습하라. 짐이 뒤따라 지원하러 가겠다.   한편, 마량은 제갈량을 만나 유비의 진세를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제갈량은 그림을 보다가 탁자를 내리치며 비명처럼 외쳤습니다.   누가 주상께 이렇게 영채를 치라고 했는가? 당장 그의 목을 쳐야겠다.   모두 주상께서 직접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계책이 아닙니다.   아, 이럴 수가! 이제 한나라의 운수도 끝장났구나!   동오의 육손은 촉군의 태만해진 모습을 보자 더는 방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공격에 나설 차례가 된 것입니다. 육손은 전투에 능숙하지 못한 순우단에게 촉군의 영채 하나를 뺏도록 명령했습니다. 용장인 서성과 정봉에게는 순우단이 패하고 오면 구원만 해서 오도록 명령했습니다. 육손의 생각대로 순우단은 촉군에게 패하고 돌아왔습니다. 서성과 장봉이 걱정했지만 육손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나의 이번 계책을 꿰뚫어 볼 사람은 제갈량뿐이다. 그런데 천행으로 그가 이곳에 없으니 그것은 하늘이 나에게 큰 공을 세우라는 것이다.   육손은 동남풍이 불면 곧장 촉군의 영채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유비를 잡을 때까지 밤낮으로 쉬지 말고 뒤따라 공격하라고 했습니다. 유비는 육손의 깔보고 그의 계략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참모인 정기가 간했지만 무시했습니다. 결국 유비는 육손의 맹공을 받고 괴멸되었습니다. 조운의 용맹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백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백제성으로 피신했습니다. 일개 서생일 뿐이라고 조롱당하던 육손이 유비의 대군을 괴멸시키자 후세 사람들이 그를 우러르는 시를 지었습니다.   이릉대전서 패한 유비가 피신한 백제성. 허우범 작가   화공으로 칠백 리 영채를 무찌르니 持矛擧火破連營 현덕은 살기 위해 백제성으로 도망가네. 玄德窮奔白帝城 그 이름 하루아침에 촉과 위를 놀라게 하니 一旦威名驚蜀魏 오왕이 어찌 육손을 공경하지 않겠는가. 吳王寧不敬書生   대승을 거둔 육손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추격을 계속했습니다. 한참을 뒤쫓다 보니 살기가 느껴졌습니다. 재삼재사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그곳에는 수십 개의 돌무더기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육손은 제갈량의 속임수라 믿고 석진(石陣)을 통과하려고 하였습니다. 순간, 일진광풍에 휩싸여 빠져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갈량의 팔진도(八陣圖)에 걸려든 것입니다. 육손은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갈량을 존경했던 두보는 이 구절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공은 위촉오 삼국을 뒤덮고 功蓋三分國 이름은 팔진도로 드높였네. 名成八陣圖 강물이 흘러도 돌은 아니 구르니 江流石不轉 오를 무찌르지 못해 한이 된 것이네. 遺恨失呑吳   육손은 즉각 추격을 금지하고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이제껏 두 나라의 싸움을 지켜보던 위나라의 조비가 기습해 올 것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손이 군사를 물린 지 이틀이 되던 날, 세 곳에서 위군이 국경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육손의 생각이 적중했던 것입니다. 육손은 어떻게 삼로로 몰려오는 위군을 막을 수 있을까요. 모종강은 육손이 순우단을 보내 일부로 패하게 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이릉대전을 승리로 이끈 육손. 출처=예슝(葉雄) 화백   ‘적의 사기를 꺾어 놓는 전략을 쓰는 사람은 앞으로 있을 대접전을 위해 먼저 소규모 접전을 벌여 적의 사기를 꺾어 놓는다. 장차 있을 대접전에서 이기기 위해 먼저 소규모 전쟁을 벌여 이김으로써 적의 사기를 꺾어 놓는 것이다. 이것이 주유가 썼던 전략이다. 적을 교만하게 만드는 전략을 쓰는 사람은 앞으로 있을 대접전을 위해 먼저 겁을 먹고 나가지 않는 것처럼 하여 적의 마음에 교만을 심어 놓는다. 장차 있을 총공격에서 이기기 위해 먼저 소규모 전쟁을 벌임으로써 적을 교만하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이것이 육손이 썼던 전술이다. 적이 처음 왔을 때는 당연히 그 예봉을 피해야 하는데 도리어 그 예봉을 꺾어 놓았으니 이것이 기이했던 주유의 전략이고, 적이 여러 번 이긴 다음에는 그 교만을 무찔러야 하는데 도리어 그 교만을 부추겼으니 이것은 육손이 보여준 변화된 전술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3.11.22 07:00

  • [술술 읽는 삼국지](89) 유비는 말실수로 황충마저 잃고 손권은 서생 육손을 등용하다

    [술술 읽는 삼국지](89) 유비는 말실수로 황충마저 잃고 손권은 서생 육손을 등용하다

    옛날부터 짐을 따르던 여러 장수는 모두 늙고 쇠약해서 쓸모가 없게 되었는데, 다시 두 조카가 이렇게 영웅다우니 짐이 손권을 무엇하러 걱정하겠느냐?   황충은 유비의 이 말에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곧장 말을 타고 이릉의 영채로 달려갔습니다. 황충은 동오의 선발대 반장이 왔다는 것을 알고 멀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반장은 부하 장수 사적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사적은 황충이 늙은이라고 깔보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채 3합을 버티지 못하고 황충의 칼에 목이 잘렸습니다. 반장이 관우가 쓰던 청룡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습니다. 하지만 당해내지 못하자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습니다. 황충은 기세를 몰아 한바탕 몰아치며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습니다.   노익장의 대명사 황충. 출처=예슝(葉雄) 화백   관흥과 장포가 황충을 만나 유비의 말을 전했습니다. 황충은 다음날도 분연히 혼자 싸웠습니다. 관흥과 장포가 도우려고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반장은 몇 합 싸우지 않고 다시 도망쳤습니다. 황충이 30여 리를 추격했을 때, 사방에서 함성이 진동하며 주태, 한당, 능통이 황충을 에워싸고 덤벼들었습니다. 반장도 다시 공격해 왔습니다. 황충은 서둘러 퇴각했습니다. 이때, 산언덕에서 마충이 쏜 화살이 황충의 어깨를 맞혔습니다. 황충이 위기에 이른 순간, 관흥과 장포가 나타나서 적군을 무찌르고 재빨리 황충을 구해냈습니다. 황충은 쇠약한 데다가 화살을 맞아 병이 위중했습니다. 유비가 직접 찾아와 말했습니다.   짐의 잘못으로 노장군이 다치게 되었구려!   신은 한낱 무부(武夫)일 뿐입니다. 다행히 폐하를 만났고, 금년의 나이가 75세이니 살 만큼 살았습니다. 바라오니 폐하께서는 용체를 보존하시어 꼭 중원을 도모하소서.   황충은 말을 마치자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날 밤, 영채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유비는 슬퍼하며 성도에서 장사 지내라고 명했습니다. 이제 오호대장 중에 두 명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유비는 곧장 효정으로 향했습니다. 한당과 주태가 맞았지만 유비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장포와 관흥이 선봉에 서서 연전연승을 거뒀습니다. 감녕이 배 안에서 이질을 치료하고 있다가 촉군이 몰려온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나왔다가 유비와 연합한 만병(蠻兵)의 대장 번왕(藩王) 사마가와 마주쳤습니다. 감녕은 사마가의 대단한 기세에 질려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습니다. 사마가는 달아나는 감녕을 향해 활을 쏘았습니다. 날아간 화살은 정확하게 감녕의 뒤통수를 맞혔습니다. 감녕은 화실이 박힌 채 달아나다가 큰 나무 밑에 앉아 죽었습니다. 드디어 유비가 효정을 함락했습니다.   한편, 오군과 격전을 펼치던 와중에 관흥은 부친의 원수인 반장과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를 추격하여 산골짜기로 갔다가 밤이 되고 길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노인이 사는 민가가 있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관우의 신상을 붙여놓고 공양하고 있었습니다. 관흥은 울면서 사실을 말하고 노인이 주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때, 길을 잃었던 반장이 노인의 민가로 찾아왔다가 관흥을 보고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문밖에는 관우의 혼령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반장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이, 관흥이 반장을 죽여 부친의 신상 앞에 올리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관우의 혼령에 놀란 반장을 죽이는 관흥. 출처=예슝(葉雄) 화백   한편, 손권에게 투항했던 부사인과 미방은 군사들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하자, 관우를 사로잡았던 마충의 수급을 가지고 유비에게 바치며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유비는 선량한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유비는 크게 노해 소리쳤습니다.   짐은 성도를 떠난 이후 여태까지 너희 두 놈이 어째서 죄를 청하러 오지 않는가 했다. 이제 형세가 위태로우니까 와서 씨도 안 먹히는 말로 목숨을 부지하려 드는구나. 만약 너희들을 용서해 주면 구천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관공을 대하겠느냐!   유비는 손수 이들을 죽여 마충의 수급과 함께 관우의 위패 앞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갑자기 장포가 울면서 자신의 부친 원수도 갚아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조카야! 걱정하지 말라. 짐이 강남을 평정하여 오나라 개들을 모조리 죽이고라도 두 놈을 꼭 잡아 너에게 줄 터이니, 네 손으로 젓을 담아 네 아비의 제사를 지내도록 해라.   유비의 위세가 대단하여 강남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손권도 겁이 났습니다. 보즐이 계책을 냈습니다. 유비가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대부분 죽고, 이제 남은 것은 범강과 장달뿐이니 두 사람을 잡아 장비의 수급과 함께 보내고, 아울러 형주도 돌려주고 손부인도 돌려보낼 터이니 전처럼 화친하여 함께 위나라를 치자는 것이었습니다. 손권은 보즐의 말을 따라 효정으로 사자를 보냈습니다. 장포는 범강과 장달을 죽이고 아버지 영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유비의 노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짐이 이를 갈아온 원수는 바로 손권이다. 지금 만약 그와 화친한다면 이것은 두 아우와 했던 맹세를 저버리는 것이다. 이제 먼저 오를 멸하고 다음에 위를 멸하겠다.   손권은 매우 놀라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감택이 육손을 추천했습니다. 하지만 장소, 고옹, 보즐 등이 서생 육손은 나이도 어리고 적임자도 아니라고 반대했습니다. 감택은 자신의 전 가족의 목숨을 걸고 재차 추천했습니다. 손권도 육손이 기재(奇才)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그를 대도독으로 삼고 전군의 통솔권을 주었습니다.   육손은 서성과 정봉을 호위로 삼아 즉시 출동했습니다. 하지만 전군은 수비에만 치중하고 절대로 싸우지 말 것을 통보했습니다. 한당과 주태 등 여러 장수가 반면 서생 육손의 전략을 비웃었습니다. 육손은 장수들이 자신의 말을 비웃으며 동조하지 않자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검을 뽑아들고 장수들을 호령하는 육손. 출처=예슝(葉雄) 화백   내가 비록 일개 서생이지만 주상께서 중임을 맡기신 것은 나에게 조금이나마 취할만한 점이 있고 또한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을 줄 알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각자 병목지대 등 요충을 단단히 지키고 경솔하게 움직이지 말라! 만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모두 목을 베겠다!   한편, 유비는 효정에서 사천까지 칠백리에 걸쳐 군마를 포진시키고 있었습니다. 육손이 대도독이 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더욱 얕보았습니다. 마량이 그렇지 않음을 아뢰었습니다.   육손은 대단한 지략가입니다. 폐하께서는 봄부터 먼 원정길에 올라, 여름이 한창입니다. 저들이 숨은 채 나오지 않는 것은 우리 진영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시옵소서.   저들이 무슨 계책이 있다더냐? 다만 싸우기를 겁내는 것이다. 이제껏 저들이 패했으니 감히 다시 싸울 마음이 있겠느냐?   유비는 칠백 리에 걸쳐 40여 곳이 넘는 영채를 수풀이 우거진 산기슭 냇가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무더위를 피하고 가을이 되면 총력 진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곧 육손에게 보고되었습니다. 드디어 부하 장수들로부터도 일개 서생으로 치부되었던 육손이 전략을 펼칠 때가 다가왔습니다.   모종강은 육손이 등장하는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예부터 치욕을 참지 못하고 중책을 맡은 사람은 없다. 한신이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지 않았다면 한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없었을 것이고, 장량이 다리 밑으로 벗어 던진 신발을 주어다가 주지 않았다면 한(韓)나라에 보답하는 공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중책을 못 맡을 사람이 치욕을 참아내는 경우도 없다. 오자서는 오직 초나라 망칠 방법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단양에서 빌어먹을 수 있었고, 범여는 오직 오나라 망칠 계책만 생각했기 때문에 기꺼이 돌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예나 이제나 크게 장래성이 있는 사람은 일생의 모든 역량을 중책을 맡는데 쏟아붓고, 일생의 학문은 다만 치욕을 참는데 두고 있다. 한 권의 노자(老子)를 익히 읽었으면 곧바로 한 권의 음부경(陰符經)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3.11.20 07:00

  • [중국읽기] 대만해협 파고 잦아들까

    [중국읽기] 대만해협 파고 잦아들까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바이든 대통령을 신뢰하나?” “시진핑 주석을 믿는가?” 지난 15일 미·중 정상에 던져진 기습 질문이다. 시 주석이 미소로 응수한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시 주석을 “독재자”라 부르는 것으로 답했다. 둘 다 상대에 신뢰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만났다. 왜? 국익은 물론 각자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싫어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氣) 싸움만 요란했을 뿐 별 성과는 없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시 주석의 발언 하나는 눈에 띈다. “앞으로 수년간 대만공격 계획은 없다”는 거다. 시 주석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과거 시 주석이 미국에 한 약속을 뒤집고 남중국해 인공섬을 군사기지화 한 전례가 있지 않으냐는 지적이 당장 나온다. 하지만 시 주석이 세계가 지켜보는 회담에서 그저 빈말만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대만이 분열의 길을 가지 않는 한 양안(兩岸) 사이에 ‘제3의 전장’을 만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왼쪽부터 주리룬 국민당 주석, 허우유이 국민당 후보, 마잉주 전 총통, 커원저 민중당 후보. [연합뉴스] 같은 날 대만에선 꽤 의미 있는 일이 벌어졌다. 내년 1월 13일 대만 총통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자 둘이 전격적으로 단일화에 합의했다. 이제까지 판세는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라이칭더(賴淸德) 민진당 후보가 단연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친중 성향의 국민당 허우유이(侯友宜)와 중도인 민중당의 커원저(柯文哲)가 2, 3위를 다투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라이칭더가 승리하고 양안 간엔 화약 냄새가 진동할 게 뻔하다.   한데 국민당과 민중당이 이날 후보 단일화를 발표했다. 당초 18일엔 여론조사를 토대로 총통과 부총통 후보까지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다소 이견이 발생해 미뤄졌다. 그렇다고 단일화 자체가 물 건너간 건 아니다. 커원저가 “국민당도 밉지만, 민진당을 더욱 원망한다”고 말하고 있어 총통 후보 등록 마감일인 24일까지는 단일화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대선판이 크게 출렁이게 됐다.   앞선 조사에서 국민당과 민중당이 힘을 합칠 경우 어느 후보가 나서든 민진당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야권이 승리할 경우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총통 집권 때와 같은 양안 밀월기가 오지 않겠냐는 섣부른 전망마저 나온다. 자연히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총통 집권 내내 바람 잘 날 없던 대만해협 파고가 과연 내년부터는 잦아들 수 있을까 비상한 관심을 끈다.   대만에 전쟁이 터지면 ‘제4의 전장’은 한반도가 될 것이란 일각의 예측이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2023.11.20 00:22

  • 장제스 “공산 비적 선전술 뛰어나도 이념은 우리가 옳아”

    장제스 “공산 비적 선전술 뛰어나도 이념은 우리가 옳아”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7〉   2·28 사건 후 경총 부사령관 펑멍지(彭孟緝)의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한 화가 황융위(黃永玉)가 타이베이의 거리 풍경을 판화로 남겼다. [사진 김명호] 2·28사건과 4·6사건을 경험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대만 통치를 강화하고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국민당 원로와 당 간부, 군 지휘관들에게 절실한 심정을 토로했다. “지구상에 국민당처럼 노후하고 퇴폐적인 정당은 있어 본 적이 없다. 오늘의 국민당처럼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는 정당도 없었다. 혁명정신이 완전히 시들어 버린, 이런 썩어 빠진 정당은 진작 쓸어버렸어야 했다.” 군 지휘관들은 호된 질책을 당했다. “모든 면에서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장비, 전투능력, 경험에서 공산군은 우리의 비교 대상이 못 됐다. 장교들의 기량과 지식이 부족했다. 세심한 검토와 준비도 철저하지 않았다. 지금 군사령관이나 사단장직에 있는 너희들이 외국에서 자신의 지식과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면 연대장이나 대대장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중국이 워낙 낙후되고 인재가 없다 보니 너희 같은 것들에게 중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 반공·국학 서적 출간 열 올려   한 자리에 모인 대만 계엄령 시대의 주역들. 왼쪽부터 총 정치부 주임 장징궈, 총참모총장으로 승진한 펑멍지. 펑후(澎湖)방위사령관 후쭝난(胡宗南), 국방부 부부장 위안서우첸(袁守謙), 경총사령관 황제(黃杰). [사진 김명호] 남이 했으면 백번 죽어도 모자랄, 공산당 칭찬도 했다. “공산 비적들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과 국민당엔 없는 조직, 기율, 도덕성을 갖췄다. 문제를 철저히 연구하고 계획도 완벽히 실행한다.” 후회도 숨기지 않았다. “군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했다. 지휘권 통일을 위해 군대의 모든 단위에 있었던 정치위원 제도를 없앴기 때문이다. 지휘관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불가능했다. 보고의 정확성 여부를 판단할 방법이 없다 보니 부패와 퇴폐가 성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공산 비적들의 조직과 훈련, 선전술이 우리보다 뛰어나도 이념과 사상, 정치노선은 우리가 옳고 민족의 필요성에 더 부합된다.”   1950년 장제스는 국민당 총재 권한으로 ‘국민당 중앙개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장에 충성덩어리 천청(陳誠·진성)을 임명했다. “그간 아는 사람만 요직에 기용한 내 잘못이 크다. 생면부지의 숨어 있는 인재를 발굴해라.” 당내에는 장제스에 반대하는 파벌이 한둘이 아니었다. 장은 개혁위원회의 ‘개조운동’을 이용해 반대파들을 철저히 당에서 쓸어 냈다. 군 정치위원 제도도 부활시켰다. ‘총 정치부 주임’에 장징궈(蔣經國·장경국)를 임명했다. 당시는 계엄령시대 초기였다. 총 정치부 주임이 대만의 모든 정보기관을 총괄했다. 대륙에서 내로라했던 고위 장성과 원로당원들은 부친보다 더 지독한 장징궈의 개성을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온갖 이유 대며 미국이나 일본 여행을 신청했다. 공통점이 있었다. 일단 출국하면 귀국은 거의 없었다.   문성서점 시절의 샤오멍넝과 주완젠 부부. [사진 김명호] 국민당은 중국민족 전통과 문화의 계승자이며 ‘정통(正統)’과 ‘도통(道統)’의 상징을 자임한 지 오래였다. 당 혁신운동 마치자 대만을 공산당이 말살시킨 ‘민족문화 부흥기지’로 설정했다. 당과 군정치부, 정부기관이 운영하는 대형 출판기구와 언론기관들이 반공(反共)과 국학(國學) 관련 서적 출간에 열을 올렸다. 대만 청년들을 중국 고전과 반공서적에 매몰시켰다.   정보기관 총괄 장징궈, 부친보다 지독   잡지 ‘문성’ 주간 리아오는 두 번 감옥 밥을 먹었다. 1980년 대 초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리아오. [사진 김명호] 백색공포가 기승을 부리던 1952년 국민당 중앙상무위원의 아들 샤오멍넝(蕭孟能·소맹능)이 부인 주완젠(朱婉堅·주완견)의 권유로 일을 벌였다. 타이베이 중심가에 서점을 열었다. 대시인이며 대서예가인 감찰원장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의 친필휘호, ‘문성서점(文星書店)’ 4자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문성서점은 서구 유명 학술서적과 문학작품을 영인(影印)하고 번역해서 출시했다.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서점은 문전성시였다. 영어문화권에 갈증을 느낀 대만 청년들은 12시간 자리 지키는 주완젠의 친절에 감복했다. 학창시절 문성서점 단골이었던 노작가가 서점풍경을 구술로 남겼다. “서점에 갈 때마다 친구에게 분명히 있다고 들은 책이 없을까 조마조마했다. 주완젠은 품위 넘치는 이웃집 누님 같았다. 여러 권 들고 온 계산대에서 돈이 모자라 우물쭈물하면 씩 웃으며 책을 포장해 줬다. 같은 경험한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주 여사는 서점에 만족하지 않았다. 개점 5년이 지나자 남편에게 잡지 출간을 제의했다. 언론계의 대부였다는 시아버지는 물론 남편도 반대하지 않았다. 살벌했던 백색공포시대에 선보인 한 권의 잡지가 대만의 젊은 지식인과 중화권을 들썩거리게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1957년 11월 5일 문성서점이 잡지 ‘문성(文星)’을 선보이자 청년들은 환호했다. 생활, 문학, 예술을 표방하며 경총(경비 총사령부)이나 보안처에 개처럼 끌려가 숨이 간당간당할 때까지 얻어터지거나  행방불명되기 딱 좋은 구호를 내걸었다.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 우리의 규칙이다.” ‘문성’ 사장 샤오멍넝은 사업자금이 풍부하고 백이 좋았다. 정보기관도 샤오 부자(父子)의 성품을 잘 알았다.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뒀다. 예상이 적중했다. ‘문성’은 4년간 48권을 내면서 독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1961년 겨울 샤오멍넝은 새로운 주간을 물색했다. 한 편의 글로 대만과 홍콩을 떠들썩하게 만든 31세의 리아오(李敖·이오)를 주간으로 영입했다. ‘문성시대’가 열리고도 남을 징조였다.

    2023.11.18 00:01

  • [술술 읽는 삼국지](88) 손권을 철천지원수로 삼은 유비, 손권은 제갈근을 천하의 신교(神交)로 믿다

    [술술 읽는 삼국지](88) 손권을 철천지원수로 삼은 유비, 손권은 제갈근을 천하의 신교(神交)로 믿다

    유비는 대군을 일으켜 장강을 따라 내려와 백제성에 군사를 주둔시켰습니다. 이때 손권이 보낸 제갈근이 사신으로 왔습니다. 유비는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황권이 사신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다고 하자 그제야 제갈근을 만났습니다. 유비를 만난 제갈근은 관우가 혼사를 허락하지 않은 일, 여몽과의 사이가 나빴던 일을 말하고 형주와 함께 손부인과 항복한 장수들도 돌려 드릴 테니 다시 손을 잡고 조비를 물리치자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비가 노해서 소리쳤습니다.   내 아우를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가 없다. 짐에게 전쟁을 그만두라는 말이냐? 죽어 없어지면 그만두겠다. 승상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네 머리부터 먼저 베겠다만 이제 너를 그대로 돌려보낸다. 손권에게 가서 목이나 씻고 칼 받을 준비나 하라고 해라!   제갈근은 유비가 전쟁을 멈출 생각이 없음을 알고 강남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손권의 참모인 장소는 제갈근이 오를 배반하고 촉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손권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나와 제갈근은 죽어도 변치 말자는 맹세를 했소. 내가 그를 배반하지 않는 한, 그도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오. 옛날 그가 시상에 있을 때 제갈량이 오로 왔었는데 내가 근을 시켜 량을 잡아두려 하였소. 그러자 그가 말하길, ‘아우는 유비를 섬기고 있으니 두 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아우를 잡을 수 없는 것은 제가 가지 않을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신명(神明)이 통하기에 충분했소. 오늘 어찌 촉에 항복하겠소? 나와 제갈근은 신교(神交)라 할 만하오. 다른 사람이 이간시킬 수 있는 사이가 아니오.   손권이 말을 마치자마자 제갈근이 도착했습니다. 장소는 수치심에 얼굴이 빨개진 채 물러갔습니다. 제갈근은 유비가 화친할 의향이 없다고 알렸습니다. 손권도 대비했습니다. 먼저 중대부(中大夫) 조자를 사신으로 삼아 신(臣)이라 칭하는 표를 써서 위나라로 보냈습니다. 조비는 손권을 오왕(吳王)에 봉하고 구석(九錫)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위나라 조비에게서 오왕의 작위를 받는 손권. 출처=예슝(葉雄) 화백   모종강은 조비가 손권에게 구석을 준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위왕도 구석을 받고 오왕 역시 구석을 받았다. 위왕이 구석을 받자 사람들은 조조가 황제가 되려 한다고 비방하고, 오왕이 구석을 받자 사람들은 손권이 황제가 되려 하지 않는다고 비웃는다. 어째서인가?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항문이 되지 않기 위해 한후(韓侯)는 스스로 분기했다. 강동의 땅이 어찌 한(韓)나라보다 작겠는가? 더욱이 위에 항복하는 것이 오에 유익하다면 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오에 유익한 것도 없이 공연히 무릎을 꿇는 치욕이나 당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탄스러운 일인가? 조조의 구석은 조조 자신이 덧붙인 것이고, 손권의 구석은 손권 자신이 덧붙인 것이 아니라 위가 덧붙여 준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덧붙인 것과 남이 덧붙여 준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조조의 구석은 천자가 감히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손권의 구석은 위가 주려는 것을 손권이 감히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감히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주는 것을 감히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에는 또한 큰 차이가 있다. 더욱이 한(漢)의 구석을 받았다면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위의 구석을 받았다면 치욕스러운 일이다. 한나라를 찬탈하기 위해 한나라의 구석을 받았다면 강자라 하겠지만, 위에 항복하며 위의 구석을 받았다면 약자라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손권을 위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대부 유엽이 조비에게 이참에 오를 협공하면 열흘 안에 무너뜨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조비가 그 이유를 말했습니다.   손권이 이미 예를 다해 짐에게 항복했다. 짐이 만약 공격한다면 천하의 항복하려는 마음을 막는 것이 되니 받아들이는 것이 낫고 옳은 것이다.   조비의 생각은 어느 쪽도 돕지 않고 두 나라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나라가 망하고 한 나라가 남으면 그때 가서 그 나라를 제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편안하게 앉아서 촉오의 전쟁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촉오전쟁을 막으려 한 제갈근. 출처=예슝(葉雄) 화백   손권은 손환과 주연, 이이와 사정으로 하여금 촉군과 싸우도록 했습니다. 촉군의 선봉은 오반이었고 좌우는 관흥과 장포가 맡았습니다. 전투는 처음부터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갚으려는 관흥과 장포의 한 서린 칼과 활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환은 크게 패하여 수하의 장수와 많은 병사를 잃고 이릉성으로 달아났습니다, 손권은 한당과 주태를 구원병으로 보냈습니다.   유비는 초반 전투에서 승리하고 장강의 무협에서 이릉까지 이르는 70여 리에 40개의 영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관흥과 장포가 세운 공을 높이 치켜세웠습니다.   옛날부터 짐을 따르던 여러 장수는 모두 늙고 쇠약해서 쓸모가 없게 되었는데, 다시 두 조카가 이렇게 영웅다우니 짐이 손권을 무엇하러 걱정하겠느냐?   이때, 한당과 주태가 쳐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노장 황충이 대여섯 사람을 이끌고 나갔습니다. 황충이 유비의 말을 듣고 자신이 늙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싸우러 나간 것이었습니다. 유비는 관흥과 장포를 불러 황충을 도와주도록 했습니다. 노장 황충은 과연 혼자서 적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유비 앞에서 형제를 맹세하는 장포와 관흥. 출처=예슝(葉雄) 화백   모종강은 손권이 제갈근을 신교(神交)로 사귀는 장면에 있어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손책은 태사자를 의심하지 않았고, 손권은 제갈근을 의심하지 않았으니 두 경우는 같은 것인가? 아니다. 손책은 당시 군세(軍勢)가 한창 강력하던 때였으니 태사자를 믿기가 쉬웠지만, 손권은 당시 나라의 형편이 걱정되던 때였으니 제갈근을 믿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덕은 형이 촉에 있었는데도 위를 배반하지 않았고, 제갈근은 아우가 촉에 있었는데도 오를 배반하지 않았으니 두 경우는 같은 것인가? 아니다. 방덕은 끝내 마초를 섬기지 않았으니 방덕의 의리는 의리라고 할 수 없고, 제갈근은 한결같이 손권을 섬겼으니 제갈근의 충성은 참된 충성이라고 할 만하다. 또한 제갈근은 옛날 ‘자신이 가지 않을 마음으로 아우가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듯이 손권은 오늘날 제갈근이 아우가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듯이 제갈근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군신 간의 믿음이 자못 형제간의 믿음에서 결정되고 있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3.11.15 07:00

  • [술술 읽는 삼국지](87) 동오 공격을 막아선 조운, 술버릇 못 고쳐 먼저 죽은 장비

    [술술 읽는 삼국지](87) 동오 공격을 막아선 조운, 술버릇 못 고쳐 먼저 죽은 장비

    폐하! 이제 도적 조비를 치는 것은 천하의 대의를 밝히는 것이니 민심이 모두 폐하께 향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사사로이 원한 갚기에만 바쁜 나머지 손권을 치시면 천하의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손권을 치는 일은 뒤로 미루어야만 합니다.   짐이 아우를 위해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비록 만리 강산을 얻는다 한들 뭐가 그리 가치 있겠느냐?   유비가 군사를 일으켜 동오를 치려 하자 조운이 막아섰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조운의 간청을 듣지 않고 출동명령을 내렸습니다. 한편, 장비는 낭중에서 관우가 손권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술로 화를 풀었습니다. 거슬리는 것이면 장수건, 사병이건 닥치는 대로 매질을 하여 맞아 죽는 사람이 많이 생겼습니다. 유비는 장비를 거기장군으로 삼았습니다. 장비는 당장 동오로 쳐들어가지 않는 것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동오정벌을 반대한 조운. 출처=예슝(葉雄) 화백   제갈량을 비롯한 모든 신료가 동오 정벌을 말렸습니다. 조금 마음이 돌아설 즈음, 장비가 찾아와 대성통곡을 하며 유비의 마음에 다시 불을 지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지난날의 맹세를 알겠습니까? 만약 폐하께서 가시지 않는다면 신이 목숨을 버려 둘째 형님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만약 원수를 갚지 못하게 된다면 신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폐하를 뵙지 않겠습니다.   짐은 경과 함께 가겠다. 경은 소속 병사들을 데리고 낭중에서 나오라. 짐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가겠으니 강주(江州)에서 만나자. 함께 동오를 정벌하여 이 한을 풀어야겠다.   모종강은 장비가 동오를 치자고 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장비가 위를 먼저 치지 않고 오를 먼저 치자고 청한 것은 그가 형제의 의리만 있고 군신의 의리를 몰라서가 아니다. 그가 오를 치자고 한뜻은 위는 분명한 한나라의 역적이지만, 오는 위의 당(黨)이므로 역시 한적(漢賊)이기 때문이다. 예부터 잔포한 것들을 쓸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그 당을 잘라버렸다. 가령 은(殷)이 걸(桀)을 칠 때 먼저 위(韋)를 치고, 고(顧)를 치고 곤오(昆吾)를 쳤다든지, 주(周)가 주(紂)를 칠 때 먼저 숭(崇)을 치고 밀(密)을 친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위해서도 오를 먼저 쳐야 할 뿐만 아니라 군신을 위해서도 오를 먼저 쳐야 했기 때문이다.’   유비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이제 신료들의 간청도 소용없었습니다. 종사제주(從事祭酒) 진복이 재차 아뢰었지만 겨우 죽음만 모면했을 뿐입니다. 제갈량이 다시 표문을 올렸지만 땅바닥에 뒹구는 휴지가 되어버렸습니다. 황제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유비이건만, 오직 동오를 공격하여 관우의 원수를 갚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비는 75만명의 병력을 출동시켜 동오로 향했습니다.   한편, 낭중으로 돌아온 장비는 사흘 안에 백기(白旗)와 백갑(白甲)을 만들라고 군중에 명을 내렸습니다. 하급 장교인 범강과 장달이 시일이 촉박하니 조금 늦춰달라고 했습니다. 장비가 호통쳤습니다.   장비. 출처=예슝(葉雄) 화백   나는 복수가 한시 급하다. 내일 당장 역적의 땅으로 쳐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네가 어찌 감히 나의 장령을 어기려 드느냐? 저 두 놈을 당장 끌어내다 50대씩 때려라! 그리고 내일까지 완비해 놓지 못하면 그 즉시 너희 두 놈을 죽여 본때를 보여주겠다.   장비는 평소에도 술에 취하면 병사들을 마구 대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유비는 항상 장비의 술버릇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특별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 장교들을 피가 토하도록 매를 때렸으니 장교들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형벌을 받았지만 내일까지 어떻게 조달할 수 있겠나? 그 사람 성미가 불같이 난폭하니 만약 내일까지 다 만들어 놓지 못하면 자네와 나는 모두 죽고 살아남지 못할 것일세.   그렇다면 그가 우리를 죽이기 전에 우리가 그를 죽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우리 두 사람이 만일 죽을 괘가 아니라면 그는 술에 취해 침상 위에 곤드레만드레 되어 있을 것이고, 우리가 죽을 괘라면 그는 취하지 않았을 것일세.   장비는 그날 밤도 술에 떡이 되어 자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품었던 단도를 꺼내어 장비의 배를 깊이 찔렀습니다. 장비는 외마디 소리를 크게 지르며 죽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55세였습니다.   고약한 술버릇 때문에 부하에게 죽는 장비. 출처=예슝(葉雄) 화백   안희현에서 독우를 때렸다고 하더니 安喜曾聞鞭督郵 황건적 소탕하고 한나라 살리려 애썼네. 黃巾消盡佐炎劉 호뢰관의 명성은 이미 진동했고 虎牢關上聲先震 장판교에서는 강물도 역류했네. 長坂橋邊水逆流 엄안을 놓아 주어 서촉을 보듬고 義釋嚴顔安蜀境 지혜로 장합 속여 중원을 장악했네. 智欺張郃定中州 오나라 치기 전에 몸이 먼저 죽으니 伐吳未克身先死 가을 풀은 낭중 땅에 한으로만 남았네. 秋草長遺閬地愁   손권을 치기도 전에 장비까지 잃자 유비는 또다시 통곡했습니다. 한날한시에 죽겠노라는 맹세에도 불구하고 두 아우를 잃은 유비는 평정심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대의(大義)는 오나라를 치는 것뿐이었습니다. 진진이 청성산에 사는 도인 이의를 불러 그 도인의 말로 유비를 진정시키고자 했습니다. 어렵게 모셔온 이의는 천수(天數)라며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유비가 재삼 가르쳐달라고 청하자 종이와 붓을 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처음에는 병마(兵馬)와 무기 등을 40여 장 그리더니 일일이 찢어버렸습니다. 그다음엔 거인 한 사람이 땅 위에 누워 있고 그 옆에서 한 사람이 땅을 파고 묻으려고 하는 그림을 그리고는 위에 커다랗게 ‘白’자를 쓰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떠났습니다. 유비는 몹시 언짢아하며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미친 늙은이다.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즉시 태워버려라!   한편, 손권은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고 하자 매우 걱정되었습니다. 이때, 제갈근이 다시 나서서 청했습니다.   원하옵건대 제가 목숨을 걸고 촉주를 찾아가 만나 뵙고, 어떻게 하는 것이 이롭고 해로운지 달래어 양국이 화친하고 힘을 합쳐 조비를 토벌하여 죄를 묻도록 하겠습니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제갈근을 사자로 보내 유비와의 화친을 성사시키라고 했습니다. 과연 이번에는 제갈근이 성공할까요.   모종강은 장비의 죽음이 유비가 더욱 오를 공격하게 했다고 평했습니다. 그의 평을 살펴보겠습니다.   ‘장비가 죽은 것을 보면 유비가 오를 치려는 계획을 더욱 확고히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장비가 죽은 것은 관우를 위해 죽은 것이고, 관우를 위해 죽었다면 그것은 손권이 죽인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한 아우를 죽인 원수도 참을 수 없는데, 두 아우를 죽인 원수를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일신의 사사로운 은혜를 위해 조조를 놓아주었다고 관우를 질책하지 않았다면, 세 사람의 의리를 위해 손권을 토벌하려는 유비도 비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3.11.13 07:00

  • [중국읽기] “한국 시장은 참 쉽다”

    [중국읽기] “한국 시장은 참 쉽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중국 웨이하이(威海)에서 물류 회사를 운영하는 가오(高) 사장. 한국 소비자가 주문한 중국 직구 상품을 인천으로 보내는 일을 한다. 직접 인터넷 스토어를 운영하기도 한다. 요즘 사업이 어떠냐는 물음에 엉뚱하게 대답한다.   “한국 시장은 참 쉽다.”   한국에서 장사하기 쉽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는 질문에 그는 ‘비어 있는 시장’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가성비 제품과 경쟁할 만한 한국 상품군이 없다는 얘기였다. 확인을 위해 인터넷 쇼핑 사이트를 뒤졌다. 그랬다. 골대는 비어 있었다.   지난 11일 ‘솽스이’ 특수를 맞아 물품 준비에 분주한 중국의 한 인형회사. [신화통신=연합뉴스] 전기면도기를 보자. 브라운, 필립스, 파나소닉…. 한국에서 인기 있는 제품은 대부분 해외 브랜드다. 이들의 쿠팡 가격은 쓸 만하다 싶으면 6만원이 넘는다. 고급형은 40만, 50만원에 달한다. 한국 기술이 만든 중저가 브랜드는 없다. 중국 구매사이트 알리익스프레스(이하 알리)는 달랐다. 검색창에 ‘전기면도기’를 치니 1만원대 중국 제품이 수두룩하게 떠오른다. 좀 고급스럽다는 ‘샤오미’ 제품도 3만원 선이다. ‘손색없는 품질, 그런데도 터무니없는 가격’. 가오 사장이 말한 비어 있는 시장이다.   거의 ‘폭격’ 수준이다. 우리는 올 1~9월 약 2조2217억원 어치의 중국 상품을 해외 직구로 샀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우리의 최대 해외 직구 대상국은 이제 미국이 아닌 중국이다. 아마존보다 알리를 더 찾은 셈이다. 중국의 ‘솽스이(11월 11일)’ 쇼핑 축제에 한국 소비자들이 열광할 정도다.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품 원가 자체가 경쟁이 안 되기 때문이다. 중국 기업들은 거대 대륙 시장이 있기에 더 많이 팔 수 있고, 그만큼 원가를 줄일 수 있다. ‘규모의 경제’다. 국내 기업은 도저히 그 원가를 맞출 수 없으니 시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쉽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중국 의존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핵심 소재를 중국에 의존하고, 중간재 수출도 중국에 기댄다. 이젠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도 중국에 의존해야 할 판이다. 한국 소비시장이 대륙의 ‘규모의 경제’에 편입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극복 방법은 하나, 혁신이다. 기술 혁신, 산업 구조 개혁만이 ‘규모의 경제’를 이길 수 있다. 그게 안 되니 ‘쉬운 한국’이라는 말을 듣는다. 요즘엔 오히려 중국 기업이 더 혁신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언젠가 가성비 높은 BYD 전기차를 알리에서 주문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골대가 비어 있으면 골은 먹히기 마련이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3.11.13 00:32

  • [신경진의 민감(敏感) 중국어] 선화혁명

    [신경진의 민감(敏感) 중국어] 선화혁명

    민감중국어 지난달 27일 중국 안후이성의 수도인 허페이시 도심 훙싱로 80번지. 가방을 맨 어린 학생이 어머니가 챙겨주는 국화를 벽에 고이 세우고 허리를 숙였다. 68세의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된 리커창(李克强, 1955~2023) 중국 7대 총리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훙싱로 80번지에는 이후 일주일 동안 추모객의 선화(鮮花), 즉 생화가 산을 이뤘다.   47년 전 베이징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초대 총리가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구차가 천안문 앞 장안가를 지나자 추모 인파가 ‘십리장가송총리(十里長街送總理)’ 정경을 이뤘다. 당시 문화대혁명 10년간 쌓인 불만이 4월 청명절에 천안문에서 폭발했다. 군 통수권이 없던 장칭(江靑) 등 사인방은 ‘반혁명행위’라며 민병과 공안을 동원해 진압했다. 책임을 덩샤오핑 당시 부총리에게 씌워 축출했다. 9월 마오가 죽자 상황이 급변했다. 사인방 타도에 이어 2년 뒤인 1978년 말 당은 천안문 4·5 운동을 완전한 혁명운동으로 복권했다.   리커창은 저우언라이가 아니다. 다만 청렴과 당내 자유파의 대표라는 이미지가 겹친다. 리커창 타계 사흘 뒤 대만의 한 라디오(RTI)가 꽃의 혁명이라며 ‘선화혁명(鮮花革命)’을 처음 언급했다. “리커창으로 인해 중국이 생화의 바다를 이뤘다. 중국의 운명을 바꾸는 한바탕 선화혁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때로는 침묵도 혁명이며, 백지부터 생화까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중국인의 마음이 이미 바뀌었음을 보여줬다”며 “리커창이 중국인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라고 했다. 덩위원(鄧聿文) 시사평론가도 ‘선화혁명론’에 동조했다. A4 백지를 온몸에 붙인 청년, 방역 요원 등 상하이 청년들의 핼러윈 행진을 보며 “중국 청년이 정치에 관심을 잊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다.   민심은 쉽게 바뀐다. 리커창을 애도하는 ‘선화혁명’과 상하이의 핼러윈 행진에 당국은 SNS 통제와 베이징 지키기에 주력했다. 훙싱로를 가득 메운 생화 주위에는 푸른 조끼를 입은 감시요원을 세웠고 영결식이 끝나자마자 생화를 말끔히 치웠다.   그럼에도 리커창의 영결식 당일 베이징의 한 대학 캠퍼스 사진이 퍼졌다. “내 무덤에 서서 울지 마오. 나는 거기 없다오, 나는 떠나지 않았소.” 영문학자인 고인의 부인이 번역한 ‘천 개의 바람이 되어’로 잘 알려진 추모시였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3.11.11 00:02

  • 백색공포 시대 저물자 “역사 속 위인도 악인도 그놈이 그놈”

    백색공포 시대 저물자 “역사 속 위인도 악인도 그놈이 그놈”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6〉   대만 경비총사령관 황제(黃杰)의 생일에 함께한 백색공포의 주역들. 왼쪽 둘째가 국방부 총정치부 주임 장징궈. 얼굴만 보이는 사람(왼쪽 넷째)이 계엄령 시대의 저승사자 펑멍지(彭孟緝). [사진 김명호] 1987년 여름 대만의 중화민국 총통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단안을 내렸다. 38년간 지속시킨 계엄령 시대를 제 손으로 종식시키고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철혈(鐵血)정치가’의 결자해지와 죽음은 비장미가 넘쳤다. 2·28사건을 시작으로 대만 전역을 휘감았던 백색공포(白色恐怖)시대의 사건들을 희석시키기에 충분했다. 한동안 회자되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역사는 감상용이다. 절대 믿으면 안 된다. 현자(賢者)는 역사를 즐기지 믿지는 않는다.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이나 악인도 깊이 들어가 보면 그놈이 그놈이다.” 지난날에 관심이 덜해도 사실은 어쩔 수 없었다. 안개 속에 있던 일들이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펑밍민, 밀우 리덩후이보다 조건 좋아   말년의 펑밍민(왼쪽)과 리덩후이. [사진 김명호] 계엄령 시대의 사법부는 군인, 경찰, 특무기관의 노예였다. 종사자 대부분이 공통점이 있었다. 얼굴 하나는 두꺼웠다. 계엄 해제 후 불법부(不法府)나 무법부(無法府)였다고 손가락질해도 대부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양심적인, 가벼운 반발도 있었다. “법은 신성하다. 우리는 징치반란조례(懲治叛亂條例)에 따라 조사하고 재판을 거쳐 형을 선고했을 뿐이다. 우리 모르게 처형당했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많다는 것 알아도 군사법정은 우리와 상관없다며 모른 체했다. 우리도 사람이다. 양심이 있고 실수도 범할 수 있다. 사과하면 흐지부지되는 실수가 태반이다. 우리는 경우가 다르다. 인정하면 파장이 크다 보니 철면피가 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들이다.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선배에게 법은 철학이라는 말 듣고 이 길 택한 것이 후회된다. 법은 신성하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우쭐대기 좋아하는 속물이 신성한 것을 다루자니 너무 힘들다. 사죄는 못 해도 돌팔매는 맞겠다.”   통계에 의하면 백색공포 시절 군사법정은 정치적 사건 2만9407건을 판결했다. 무고한 희생자가 14만 명을 웃돌았다. 당시 대만 인구가 400만을 겨우 넘을 때였다. 국민당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대만 전역의 감옥이 만원이었다. 타이베이는 권력의 중심지였다. 수감자들은 타이베이에 와서 조사받고 재판받았다. 지금의 타이베이역 건너편 구 힐튼호텔 자리는 정치범만 재판하던 군법처였다. 명동 격인 시먼딩(西門町)의 스즈린(獅子林) 일대에는 고문으로 유명한 보안처가 있었다. 1952년 군법처에는 재판 대기자가 워낙 많았다. 정치범들을 교외에 있는 전 일본군 장교감옥으로 옮겼다. 유일하게 기록이 남아 있는 1955년 수감자 2411명 중 875명의 죄명이 반란죄였다. 반란범은 무조건 사형이었다.   1970년 1월 대만 탈출 후 스웨덴에 도착한 펑밍민. [사진 김명호] 백색공포 기간 보안처와 군법처를 거친 정치범 중 4만여명이 총살로 목숨을 잃었다. 운 좋은 사람은 12년에서 15년형이 기본이었다. 워낙 숫자가 많다 보니 수용할 감옥이 부족했다. 방은 좁고 수감자는 많았다. 동시 취침이 불가능했다. 교대로 자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반은 자고 반은 앉아 있다. 시내 곳곳, 일본인이 쓰던 건물들을 감옥으로 개조했다. 처형장도 도처에 있었다. 초대 대만행정장관 천이(陳儀·진의)도 온전치 못했다. 1950년 6월 18일 신뎬(新店)의 군인감옥 잔디밭에서 공산당과 내통한 죄로 의연히 총탄세례를 받았다. 자존심 강한 장제스는 천이의 정치적 배신행위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대만인 선무(宣撫)에 이용했다. 무고한 인명이 희생된 2·28 사건의 책임추궁이라고 발표했다.   국민당은 대만독립 주장하는 대독파(臺獨派)를 간첩과 동급으로 취급했다. 대독파의 대부 펑밍민(彭明敏·팽명민)은 예외였다. 대만의 유복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펑은 어릴 때부터 서구문화에 익숙했다. 형이 유학 중인 일본 고등학교 재학 시절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부친과 형의 반대로 프랑스문학 연구가 좌절되자 도쿄제국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1944년 일본이 그간 유예시켰던 인문계 학생 징집령을 내렸다. 징집통지서는 염라대왕의 초청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형이 있는 나가사키로 피신 가던 도중 미군의 공습으로 왼쪽 팔을 잃었다.   펑, 장징궈 감옥 시찰한 날 석방돼   계엄령 해제 후 장제스를 ‘히틀러 같은 도살자’라고 규탄하는 현수막 걸고 시위하는 피해자 유족들.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후 대만대학은 일본의 제국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의 전학을 허락했다. 펑밍민은 대만대학 정치학과 재학 중 밀우(密友) 리덩후이(李登輝·이등휘)와 함께 국민당의 중점 배양 대상이었다. 조건은 펑밍민이 리덩후이보다 좋았다. 대만대학 졸업 후 캐나다와 프랑스 유학을 마치자 국민당이 34세의 펑에게 입당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유엔대표단 고문’과 ‘대만대학 정치학과 주임’ ‘대만10대걸출청년’ 선전 등 선물보따리를 안겨 줬다. 펑은 “학술에만 전념하겠다”며 권력의 농락을 거절했다.   1964년 초 제자 2명과 대만의 미래를 토론하던 중 대만인민자구운동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내용이 엄청났다. “세계는 한 개의 중국과 한 개의 대만을 인정해라. 대만에서 국민당 정권이 유지되는 이유는 미국의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책은 점차 중공 승인으로 기울 것이 확실하다. 국민당이 주장하는 대륙수복은 절대 불가능하다. 국민당 정부는 이미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다. 대만을 대표하는 정부도 아니다. 1947년 선거 2년 후 중국에서 쫓겨나자 패잔병들이 대만을 점거했다. 현재 대만 인구의 85%가 대만인이다. 중앙 입법원의 대표 중 대만인은 3%에 불과하다. 대만인과 대륙인의 합작이라는 국민당의 선전은 갈등을 부추기는 책략이다. 장제스는 이미 황제다. 우리는 사망하기만 기다릴 뿐이다. 절망한 장징궈가 대만을 대륙에 넘겨줄까 우려된다. 청년 시절 장징궈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추종자였다. 아직도 혈액에 공산주의자의 피가 섞여 있다.”   정부가 무고도 상관없다며 고발을 독려하던 시대였다. 선언문 보고 놀란 인쇄소 주인의 밀고로 펑밍민은 구속됐다. 10년형 선고받자 장징궈가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했다. 펑이 수용된 감옥을 시찰 나왔다. 그날 밤 펑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대만의 출입국 관리는 철저했다. 펑은 외부출입 안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변장하고 대만 탈출에 성공했다. 변장술이 탁월했던지 그날따라 공항 경비가 허술했는지, 선언문 일부 내용에 공감한 장징궈가 무슨 작용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2023.11.11 00:01

  • [글로벌 아이] 중국은 정보 공백 지대? 이해의 적자

    [글로벌 아이] 중국은 정보 공백 지대? 이해의 적자

    신경진 베이징총국장  지난해 9월 말 중국공산당의 최대 정치 이벤트인 20차 당 대회를 보름여 앞두고 FT는 중국 관련 ‘정보의 진공’을 우려했다. 중국이 외국 전문가의 중국 연구를 막으면서 베이징을 이해할 수 없게 됐다는 지적이다. 비용은 크다. 외국의 정책결정자 사이에서 중국과 교류를 주장하는 관여(Engagement)는 이미 더러운 용어로 전락했다. 반면 세계 도처에 퍼진 중국의 정보원들은 시시콜콜한 소식을 모두 중국에 타전한다. 이해의 적자(赤字) 현상이다.   최근에는 유학의 적자로 번졌다. 베이징대·칭화대 등 중국 명문대에서 석·박사 학위 과정을 밟는 많은 한국 유학생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 중국 전문가의 꿈에 부풀어 선택한 중국 유학이 점점 두터워지는 만리장성급 벽에 부딪혀서다. 중국 당국은 지난해부터 학위 논문 심사를 기존의 예심·본심 2단계에 교육부 심사를 추가했다. 다섯 명으로 구성된 교육부 심사관 중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학위는 물 건너간다. 해당 학과 전체가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지도교수조차 심사관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리커창 전 총리 타계 다음날인 지난달 28일 베이징대학 서문에 몰린 관광객들. 신경진 기자 결국 교수들은 당국이 꺼리는 주제를 피하라고 권한다. 현지조사나 설문, 인터뷰 등 연구 방법이 불가능해졌다. 신방첩법(반간첩법 개정안) 시행 이후 국가안전부가 나서자 중국인끼리도 말을 조심하는 요즘이다. 외국인 중국 전문가는 싹부터 사라질 처지다.   역으로 중국 유학생은 해외 도처로 나가 첨단 학문과 민감한 이슈를 연구한다. 박사로 돌아와 중국을 위해 봉사한다. 이해의 적자, 유학의 적자가 누적되는 구조다.   외국계 컨설팅 회사의 철수는 빙산의 일각이다. 중국에 쓴소리를 하면 비자를 막는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다룬 『천안문 페이퍼스』를 펴낸 앤드류 네이선(80) 컬럼비아대 교수는 비자 발급이 막혀 중국을 갈 수 없는 중국 전문가가 됐다. 한국에도 비자 장벽에 중국을 갈 수 없는 중국 전문가가 있다는 후문이다.   외국 특파원의 취재도 녹록지 않다. 얼마 전 영국 국적의 화교 외신 특파원을 만났다. 중국인 전문가 코멘트 등 취재의 ABC조차 힘들어지는 처지를 함께 개탄했다.   중국공산당은 지난해 당 대회 정치보고에서 “평화적자, 발전적자, 안보적자, 거버넌스 적자가 늘면서 인류 사회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정작 이해의 적자는 무시했다. 만리장성에 막힌 실크로드가 매력을 잃고 있다. 신경진 베이징 총국장

    2023.11.10 00:40

  • [술술 읽는 삼국지](86) 조비는 황제에 오르고 유비는 동오 총공격을 명하다

    [술술 읽는 삼국지](86) 조비는 황제에 오르고 유비는 동오 총공격을 명하다

    조비는 위왕에 오르자 곧바로 마각을 드러냈습니다. 조비의 돌격대장은 화흠이었습니다. 조비가 즉위한 다음으로 기린(麒麟)이 내려오고 봉황(鳳凰)이 날아들고, 황룡(黃龍)이 나타나고 가화(嘉禾)가 자라나고 감로(甘露)가 내리니 이는 곧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으로 위가 한을 대신해야 한다는 상징들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리고 ‘위(魏)가 허도(許)에서 번창(昌)한다’는 것으로 선위를 압박했습니다. 헌제는 듣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상서라든지 도참 따위는 모두 허망(虛妄)한 것들이다. 어떻게 허망한 일들 때문에 짐이 서둘러 조상들이 물려 준 기업을 버릴 수 있겠느냐?   자고이래로 흥성했다가는 반드시 쇠망했나이다. 어찌 패망하지 않는 나라와 가정이 있겠습니까? 한 왕실은 4백여 년이나 전해져 폐하에게 이르렀습니다. 기수가 이미 다했으니 주저하지 마시고 일찌감치 물러나소서. 늦으시면 변이 생기옵니다.   헌제는 통곡하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힘이 없음을 한탄하며 위왕에게 선양하기로 했습니다.   한나라의 기수가 이미 쇠퇴하여 천하의 질서가 어지럽고 흉포한 무리가 멋대로 역모를 저지르는 이때, 조조가 나라를 어려움으로부터 구하여 안정시켰으매 오늘의 천하는 필시 그의 덕이니라. 이제 조비는 이를 받들어 더욱 명심하고 대업을 넓혀 밝게 비추라. 이는 요순시대의 선위와 같은 것이요 천하는 덕 있는 자가 다스리는 것이니 조비는 엄숙한 마음으로 천명을 받들지어다.   헌제에게서 선위를 받는 조비. 출처=예슝(葉雄) 화백   서기 220년 10월 28일 새벽. 조비는 허도의 번양(繁陽)에 쌓은 수선대에서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에 올랐습니다. 선양책(禪讓冊)을 읽고 옥새를 바치는 헌제의 두 눈엔 뜨거운 눈물이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그뿐, 만세소리 드높게 위나라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모든 절차는 평화적이고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선위가 끝나자 헌제는 산양공(山陽公)에 봉해졌습니다. 그러자 화흠이 칼을 잡고 헌제를 가리키며 목청을 돋웠습니다.   한 황제가 서면 한 황제는 폐하는 것이 예부터 정해진 법도이다. 금상(今上)께서 인자하셔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너를 산양공으로 봉하셨으니, 오늘 당장 떠나도록 하라! 황제가 부르시지 않는 한 다시는 조정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   헌제의 두 볼에는 회한의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한나라 사백년 사직, 32년의 천하가 눈물에 잠겨 떠내려갔습니다. 주악소리는 망국의 황제가 된 헌제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넋조차 사라지게 했습니다.   한나라 사직 자못 순탄치 않았는데 兩漢經營事頗難 하루아침에 옛 강산을 모두 잃어버렸네. 一朝失却舊江山 조비가 요순의 선양을 본뜨려 한다지만 黃初欲學唐虞事 사마씨가 그대로 본뜨는 것 보리라. 司馬將來作樣看   황제에 오른 조비는 자신이 연강(延康)이라 했던 연호를 황초(黃初)로 고치고 나라 이름을 대위(大魏)라고 했습니다. 문무백관의 벼슬을 올려주고 천하에 대사면을 내려 민심을 다스렸습니다. 나라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지명의 이름도 바꿨습니다. 번양을 번창(繁昌)으로, 허도를 허창(許昌)으로 고쳤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도에 보고되었습니다. 한술 더 떠서 헌제가 살해되었다고 했습니다. 한중왕 유비는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리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갈량을 비롯한 참모들은 한중왕을 황제에 추대했습니다.   경들은 나를 불충불의(不忠不義)하게 만들 셈이오?   아닙니다. 조비가 한나라를 찬탈하여 스스로 그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주상께서는 바로 한 황실의 후예이시니 대통을 계승하여 한나라 사직을 이어 가심이 이치에 합당합니다.   내가 어찌 역적들이 한 짓을 따라 하겠소?   지금 한나라 천자는 이미 조비에게 시해당하셨습니다. 주상께서 제위에 오르시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역적들을 토벌하지 않으신다면 충의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천하에는 주상을 황제로 삼아 효민황제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만약 신들의 건의를 따르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백성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일입니다.   황제가 된 조비. 출처=예슝(葉雄) 화백   제갈량은 유비가 고집을 꺾지 않자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한중왕은 제갈량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직접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군사! 무슨 병으로 앓고 계시오?   근심 걱정으로 애가 타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군사가 걱정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오?   제갈량은 삼고초려 후 유비를 따라 한중왕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말하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유비는 제갈량의 말이 끝나자 말했습니다.   내가 핑계를 대며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하 사람들의 비평이 두려울 뿐이오.   성인께서 말씀하시길,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도 조리가 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명분도 바르고 말도 조리가 서는데 무슨 비판할 것이 있겠습니까? 어찌 ‘하늘이 주시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게 된다.’는 말도 못 들으셨습니까?   군사의 병이 나은 뒤에 거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제갈량은 그 즉시 병상에서 일어났습니다. 병풍을 손으로 치자 밖에 기다리고 있던 문무 관료가 모두 들어와 절하고 즉시 날을 잡아 황제에 오를 것을 주청했습니다. 서기 220년 4월, 한중왕 유비는 황제에 올랐습니다. 왕비 오씨는 황후가 되었고, 맏아들 유선은 황태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유영은 노왕(魯王)에, 셋째 유리는 양왕(梁王)으로 삼았습니다. 제갈량은 승상이 되었고, 허정은 사도에 올랐습니다. 대소 관료를 모두 승진시키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했습니다. 다음날, 황제에 오른 유비는 천자가 되어 첫 번째 명령을 내렸습니다.   짐은 도원에서 관우·장비와 의형제를 맺으면서 생사를 같이 하기로 맹세했는데, 불행하게도 둘째 아우 운장이 동오의 손권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만약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이것은 맹세를 저버리는 것이다. 짐은 전국의 군사를 남김없이 일으켜 동오를 쳐부수고 역적을 사로잡아 이 한을 풀려고 한다!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황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열에 있던 조운이 계단 밑에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조운은 무슨 말로 황제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요. 모종강은 황제에 오른 유비와 조비를 비교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유비는 성도에서 황제 노릇을 했고, 조비는 낙양에서 황제 노릇을 했으니 똑같은 황제다. 그런데 사가(史家)의 붓은 유비를 취하고 조비는 취하지 않았다. 정통을 계승한 것과 참칭한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비가 서천을 뺏은 것에 대해 논하자면 유씨가 유씨의 것을 뺏었으니 어떤 사람은 역리로 빼앗아 순리로 지켰다고 여기고 있고, 유비가 제위에 오른 것에 대해 논하자면 유씨가 유씨를 계승했으니 곧 순리를 취해 순리로 지킨 것이라고 한다. 의논할만한 것은 유비가 고조와 광무제의 업을 계승하여 그 대통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조상을 높였다고 할 만하지만, 유모(劉瑁)의 아내를 맞아들여 황후로 세웠으니 조상을 모독했다는 꾸지람 또한 면치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3.11.08 07:00

  • [술술 읽는 삼국지](85) 위왕에 오른 조비, 조식은 칠보시(七步詩)로 목숨을 구하다

    [술술 읽는 삼국지](85) 위왕에 오른 조비, 조식은 칠보시(七步詩)로 목숨을 구하다

    조조가 숨을 거두자 시신은 곧바로 업성으로 옮겨졌습니다. 조비는 상고 소식을 듣자 방성통곡을 했습니다. 영구를 맞아들여 편전에 안치하고 곡을 할 때, 사마부가 울음을 그치고 큰일부터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빨리 왕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대왕께서 밖에서 흉서하셨으니 사랑하는 아들들이 사사로이 왕이 되어 피차가 변을 일으키면 사직이 위태로워집니다.   난세의 간웅 조조. 출처=예슝(葉雄) 화백   눈치 빠른 화흠이 헌제로부터 조비를 위왕에 봉한다는 조서를 받아왔습니다. 조비는 그날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때, 동생인 언릉후 조창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장안에서 왔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조비는 조창이 왕위를 다투려는 것으로 알고 긴장했습니다. 간의대부(諫議大夫) 가규가 조창을 설득하기로 했습니다.   선왕의 옥새는 어디 있는가?   가정에는 장자가 있고, 나라에는 세자와 여러 왕자가 계십니다. 선왕의 옥새는 군후께서 물으실 일이 아닙니다.   ……   군후께서는 상고 때문에 오셨습니까? 아니면 왕위를 다투러 오셨습니까?   나는 선왕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경황없이 달려오는 길일세. 달리 품은 마음은 없네.   다른 마음이 없으시면 어째서 군사를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오시나이까?   조창은 가규의 말에 장수와 병사들을 꾸짖어 물리치고 조비를 군왕으로 예우했습니다. 조비에게 부하 군마를 넘겨주고 언릉으로 돌아갔습니다. 조비는 대소 관료들을 모두 승진시키고 선왕인 조조의 시호를 무왕(武王)이라 지어서 업성의 고릉에 장사 지냈습니다. 우금에게는 능을 관리 감독하게 했습니다. 우금은 명을 받들어 능으로 갔습니다. 도착해서 보니 능의 재실 백분벽(白粉壁)에 관우가 7군을 물로 휩쓸며 우금을 사로잡는 장면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이 사뭇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관우는 의젓하게 상좌에 앉아 있고, 방덕은 성을 내며 무릎을 꿇지 않았으나 우금 자신은 땅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우금은 그림을 보자 부끄럽고 원망스럽고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곧 병이 생겨 오래지 않아 죽었습니다. 우금의 행동을 비루하게 여겼던 조비가 그림을 그리게 해놓고 일부로 우금을 보냈던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시를 지어 한탄했습니다.   30년을 사귀어온 오랜 교분으로 말하자면 三十年來說舊交 어려움 당해 조조에 불충한 게 안타깝지만 可憐臨難不忠曹 사람을 안다고 속내까지 아는 건 아니니 知人未向心中識 이제부터 범을 그릴 땐 뼈까지 그리시오 畵虎從今骨裏描   언릉후 조창은 이미 군사와 말들을 넘겨주고 갔건만, 임치후 조식과 소회후 조웅은 상고 소식을 듣고도 달려오지 않았습니다. 화흠이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한다고 청하자 조비는 그 말을 따랐습니다. 조비는 즉시 사자를 보냈습니다. 소식을 접한 조웅은 죄를 무서워하여 자결했습니다. 하지만 조식은 정의·정이 형제와 술에 취하여 법도를 지키지 않고 무례했습니다. 조비의 명령을 받은 허저가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술에 취해 있는 이들을 잡아 왔습니다. 정의·정이 형제부터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인 변씨가 깜짝 놀라 조비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네 아우 식은 평소 술을 너무 좋아해 행동이 거칠고 난잡하다. 모두 제 재주를 믿고 멋대로 구는 것이니, 너는 한 뱃속에서 태어난 정을 생각해서라도 그 애를 살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구천에 가더라도 눈을 감을 것이다.   저 역시 그 동생의 재주를 깊이 사랑합니다. 어찌 그 동생을 해치겠습니까? 지금은 바로 그 동생의 버릇을 고쳐 주려는 것뿐입니다. 어머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화흠이 이 말을 듣고는 살려두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조비는 어머님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다며, 진정 동생의 재주를 확인한 후에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잠시 후, 조식이 들어와 엎드려 죄를 청했습니다. 조비는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시 한 수를 지으면 목숨은 살려주겠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시제(詩題)가 내려지고 조식은 일곱 걸음을 옮기며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뭇 신하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그러자 조비가 다시 말했습니다.   조비 앞에서 시를 읊는 조식. 출처=예슝(葉雄) 화백   너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 한 수를 지어라.   시제를 주십시오.   나와 너는 형제다. 이것을 제목으로 삼아라. 역시 형(兄)자나 제(弟)자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콩을 볶는다고 콩깍지를 태우니 煮豆燃豆萁 콩이 가마 속에서 흐느끼네. 豆在釜中泣 본래가 한 뿌리에서 나왔거늘 本是同根生 어찌 이리도 호되게 들볶는가. 相煎何太急   조비는 비분과 애원이 넘치는 조식의 시를 접하고는 안향후(安鄕侯)로 관직을 강등하여 풀어주었습니다.   성도에서도 조비가 왕위를 계승한 것을 알았습니다. 문무 관리들과 상의하고 있을 때의 요화가 땅에 엎드려 울면서 간청했습니다.   관공부자가 해를 입은 것은 실로 유봉과 맹달의 죄이오니, 바라옵건대 이 두 놈부터 목을 베소서.   안됩니다. 당분간 그대로 두고 천천히 도모하소서. 서두르면 변이 생깁니다. 이 두 사람을 태수로 승진시켜 나누어 보내소서. 그런 다음에나 잡을 수 있습니다.   유비는 제갈량의 말을 따랐습니다. 유봉을 승진시켜 면죽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맹달은 그를 돕는 사람들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 위왕 조비에게 투항했습니다. 유비가 이를 알고 노발대발했습니다. 제갈량은 유봉이 맹달과 싸우게 하여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유봉이 맹달과 싸우려 하자 하후상과 서황이 맹달과 합세하여 공격하는 바람에 당해내지 못하고 서천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유비가 대로하여 꾸짖었습니다.   유봉을 꾸짖으며 죄를 묻는 유비. 출처=예슝(葉雄) 화백   치욕스런 자식아! 무슨 면목으로 돌아와 다시 나를 대하느냐?   어려움에 빠진 숙부를 제가 구원하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맹달이 못 가게 말렸기 때문에 못 갔습니다.   이런 놈을 봤나! 너는 사람이 먹는 밥을 먹고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있으니 나무로 만든 장승이 아니다. 어찌 역적 놈이 말린다고 그 말을 들을 수 있느냐? 당장 끌어내 목 베어 죽여라!   모종강은 여기까지 읽은 후에 유비와 조비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유비와 조비를 보면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다. 유비는 정이 깊어 성이 다른 형인데도 아우의 죽음을 가슴 깊이 슬퍼했고, 조비는 박정하여 한 배에서 나온 형인데도 서둘러 아우를 죽이려고 했다. 한 사람은 의동생(義弟)의 죽음을 슬퍼하며 양자(養子)의 은혜마저 돌아보지 않았고, 한 사람은 친동생을 죽이려고 어머니의 사랑도 돌아보지 않았다. 천륜(天倫)에 대한 감회가 없지 않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3.11.06 07:00

  • [중국읽기] 중국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중국읽기] 중국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철판도(鐵板圖)는 뭐고 추배도(推背圖)는 또 뭔가. 최근 여러 중화권 사이트를 살피다 보면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 말들이다. 둘 다 예언서란 공통점이 있다. 2017년 알려진 철판도는 예언이 철판에 못을 박듯 딱딱 들어맞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화제가 된 건 철판도의 마지막 장 그림 때문이다. 네 마리의 검은 새는 날고 있는데 한 마리 흰 깃털의 새(白羽毛鳥)는 산에 부닥쳐 추락한다.   여기서 백(白)과 우(羽)를 더하면 습(習)이 된다. 은연중 중국의 5세대 지도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겨냥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철판도를 봤다는 이의 일방적 주장인 데다 철판도의 존재 자체도 의심을 사 문제다. 한데 근자엔 당대(唐代) 이래 천서(天書)로 중국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란 말을 듣는 추배도 또한 거론된다. 추배도 이름은 왕조의 흥망을 다룬 60장의 그림 중 마지막이 사람의 등을 떠미는 모습에서 나왔다.   당대( 唐代) 제작 된 추배도(推背圖)는 중국판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란 말을 듣는다. [사진 바이두] 추배도는 현재 6종의 판본이 존재하는데 46번째 그림이 문제다. 여기엔 “한 군인이 활을 갖고 나는 백두옹(白頭翁)이라 하니 동쪽 문 안에 금검(金劍)이 숨겨져 있고 용사는 후문에서 황궁으로 들어온다(有一軍人身帶弓 只言我是白頭翁 東邊門裏伏金劍 勇士後門入帝宮)”는 글이 적혔다. 어떤 군인이 황제를 해치려고 활과 칼을 숨겨 뒷문으로 들어온다는 내용이다.   이게 현재 상황을 예언한 거냐 여부로 중화권 뒷골목이 시끌시끌하다. 호사가들은 시 주석이 현재 중국 로켓군 장군들을 비롯해 군부에 대한 반부패 숙청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게 군(軍)에서 나올 자객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란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또 황제를 해할 용사가 누구냐, 중국의 프리고진은 누구인가를 따진다. 황당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예언서들이 횡행하게 된 시대 분위기다.   시진핑의 집권 3기 1년이 이제 막 지났다. 그동안 백지 시위를 야기한 코로나 사태 재폭발, 부동산이 고꾸라지며 벌어진 경기 침체, 역대 최악의 청년 실업률에 이어 여름엔 홍수가 베이징 근교를 집어삼켰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과 리커창 전 총리가 세상을 떴고, 친강 외교부장과 리상푸 국방부장이 혼외 스캔들과 부패 추문 속에 낙마하는 등 우환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시진핑은 새 지도부를 자신의 친위대인 시자쥔(習家軍)으로 꾸렸지만, 누가 활을 든 용사인가 색출에 혈안이 될 정도로 안전에 대한 우려는 오히려 더 커졌다는 말이 나온다. 예언서가 판을 치게 된 배경이겠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2023.11.06 00:20

  • 군경, 대만사범대 무자비 진압…38년간 ‘백색공포’ 시달려

    군경, 대만사범대 무자비 진압…38년간 ‘백색공포’ 시달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5〉    ‘4·6사건’ 진압 후 경총 부사령관 펑멍지(가운데)는 선배들을 제치고 군과 외교계 오가며 승승장구했다. 주일대사 시절 전 중국주둔 일본군 사령관(오른쪽)과 교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1949년 5월 18일 ‘중국인민해방군 4야전군’이 대륙의 배꼽 우한(武漢)에 깃발을 꽂았다. 이틀 후 대만성 주석 천청(陳誠·진성)이 섬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간단한 포고문이 뒤를 이었다. “계엄 기간 파업을 엄금하고 0시부터 5시까지 통금을 실시한다. 위반자는 사형에 처한다. 출입국 관리를 엄격히 강화한다. 벽보와 삐라 살포를 엄금한다. 무기와 탄약의 휴대와 운반을 금지한다. 외출 시 신분증을 지참해라. 위반자는 군법으로 엄격히 다스린다.”   일반적으로 1987년 7월 15일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38년간을 ‘백색공포(白色恐怖) 시기’라고 불렀다. 기간을 더 길게 잡는 학자들도 있다. “1949년 4월 6일 대만대학과 대만사범대학 학생사건부터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시작되는 1992년까지를 백색공포(白色恐怖) 시기로 봐야 한다.” 진상이 밝혀질수록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다. 계엄령의 도화선을 아직도 2·28 사건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외국의 얼치기 좌파 연구자라면 모를까, 대만과 대륙의 비중 있는 학자 중에는 그런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 2·28사건 이후 대만공산당 지도부는 대륙으로 도망갔지만 좌풍(左風)은 유행했다. 중공과 상관없는, 실의에 빠진 청년들을 좌익사조에 내포된 얄궂은 낭만적 요소가 유혹했기 때문이다.   대만 학생들이 영향받은 난징의 반정부 학생시위. [사진 김명호] 학생들은 사회단체나 학생회 등 자치조직을 통해 시름을 달랬다. 선언문 발표하고, 표어 부치고, 시위하며 국민당의 실정을 비판했다. 극소수의, 공산당이 직장이나 마찬가지였던 학생들은 학원가에 사단이 일어나기를 고대했다. 사소한 사건이라도 일단 터지기만 하면 대형사태로 확대시키기 좋은 환경이었다. 기회가 일찍 왔다. 3월 20일 밤 10시쯤 경찰관이 자전거 1대에 같이 타고 가던 대만대학과 사범대학 학생을 교통위반이라며 제지했다. 말다툼이 주먹질로 비화되자 주변에 있던 경찰관들이 몰려왔다. 실컷 얻어터진 두 명의 학생은 타이베이 경찰국 제4분국으로 끌려갔다. 경찰 중에는 프락치가 있었다. 날이 밝자 두 대학에 소문이 낭자했다. 학생들이 경찰국으로 몰려갔다.   장제스 총애받는 펑멍지 부사령관에 지시   ‘4·6사건’ 후 중공 간첩으로 밝혀진 참모차장 우스(吳石)의 처형 직전 모습. [사진 김명호] 경찰국을 포위한 학생들이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학생 두 명을 석방해라. 폭력 경찰 징계해라. 의료비를 배상해라. 경찰국장이 직접 부하들의 잘못을 사과해라.” 공산당이 고대하던 사건의 막이 올랐다. 이튿날 민간인까지 합세한 시위가 벌어졌다. 군인과 경찰 정보요원들은 대륙의 반기아운동과 반정부운동 때 익히 듣던 구호가 등장하자 긴장했다. 노래도 격렬했던 난징(南京)의 반미시위 때 부르던 것과 같았다. 경찰국장은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줘도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학생과 군경의 대립도 해소는커녕 더 악화됐다. 학생들이 먼저 문제를 일으켰다. 3월 28일 밤 대만대학과 사범대학은 물론 타이베이의 중학교(우리의 고등학교까지 포함) 자치연합회(서클에 해당)까지 연합해 청년절 경축행사를 열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온갖 구호 외친 후 열린 회의에서 ‘대만성 학생연합회’ 성립을 의결했다. “상황 개선이 시급하다. 우리의 역량을 결집시켜 정부 당국을 압박하자. 승리의 여신은 우리 편이다.”   4월 1일 난징에 출장 중이던 성 주석 천청이 황급히 타이베이로 돌아왔다. 장제스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경총(경비 총사령부) 부사령관 펑멍지(彭孟緝·팽맹집)에게 지시했다. “학생들의 행동이 도를 넘어섰다. 공산당의 개입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회 질서에 영향을 끼칠까 두렵다. 엄격히 대처해라.” 기한도 정해 줬다. “주모자 명단 작성해서 4월 5일 일망타진해라.” 당부도 잊지 않았다. “푸대포와 셰둥민(謝東閔·사동민)에게 미리 통보하고 협조를 구해라. 여학생 체포는 신중을 기해라. 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여자다. 잘못했다간 반란 주도자가 훗날 영웅으로 둔갑할 수 있다.” 대포는 큰소리치기로 유명한 대만대학 교장 푸스녠(傅斯年·부사년)의 별명이었다. 푸는 베이징대학 교장을 역임했던 교육계의 원로였다. 학계에 남긴 업적이 전국에 널려 있는 대학 교장들과는 격이 달랐다. 청년 시절도 화려했다. 중국역사에 한 획을 그은 1919년 ‘5·4학생운동’과 ‘신문화운동’의 대장 격이었다. 셰둥민은 대륙에서 교육받은 대만 출신 관료였다.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푸는 비난받고 셰는 추앙받았다.   “총보다 더 무서운 게 여자, 체포 땐 신중”   베이징대학 교장 시절 장제스와 함께한 푸스녠(왼쪽). [사진 김명호] 경총이 파악한 체포대상은 많지 않았다. 대만대학 15명, 사범대학 6명이었다. 4월 5일 밤 무장한 군경이 두 대학에 진입했다. 푸스녠은 공산당이라면 질색이었다. 군경을 기숙사 학생 방까지 안내하며 체포에 협조했다. 사범대학은 학생들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다. 명단에 있던 체포 대상자들은 도망쳤다. 사정 모르는 학생들은 동료 학생 보호에 나섰다. 몽둥이 들고 군경과 대치했다. 난투극도 불사할 기세였다. 경총도 폭력으로 맞섰다. 4월 6일 오전 무장병력 동원해 방어선 치고 학교에 난입했다. 저항하는 학생들을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했다. 찢어진 치맛자락 움켜쥐고 발 동동 구르는 여학생도 봐주지 않았다. 머리통 깨지고 팔다리 부러진, 기숙사에 있던 학생 300명 전원을 끌고 갔다. 소문이 난무했다. “셰둥민은 진정한 교육자다. 끝까지 군경진입을 거부했다. 푸스녠은 학생을 보호하지 않았다. 교장 자격이 없다.”   푸스녠은 세간의 입놀림 따위는 한 귀로 흘렸다. 성 주석 천청 찾아가 네 가지를 요구했다. “하루빨리 명단에 있던 학생들을 재판에 회부해라. 체포한 학생 중 명단에 없던 학생은 즉시 석방해라. 이후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교내에 진입해 학생을 체포하겠다는 청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학교 측의 체포된 학생 면담을 허용해라.” 푸의 요구는 한 건도 성사되지 못했다. 경총은 체포 당일 학생 7명을 총살시키며 ‘백색공포 시대’를 예고했다.   푸스녠은 충격이 컸다. 매사에 의욕을 잃고 시름시름 앓았다. 1950년 겨울, 성탄절 닷새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54세, 당시에도 많지 않은 나이였다. 1999년 봄 노년에 들어선 푸의 제자들이 스승을 회상했다. “그 성질에 백색공포 안 보고 세상 하직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2023.11.04 00:01

  • [술술 읽는 삼국지](84)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는 유비, 조조는 화타마저 믿지 않고 천명을 다하다

    [술술 읽는 삼국지](84)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는 유비, 조조는 화타마저 믿지 않고 천명을 다하다

    손권은 관우의 목을 베었으나 유비를 두려워하여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바쳤습니다. 조조를 안심시키는 한편 자신의 죄를 조조에게 떠넘길 심산이었습니다. 아울러 유비와 조조가 싸우는 사이 손권은 중간에서 편리할 때 손을 쓰려는 계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조가 이러한 술수에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마의가 계책을 내었습니다.   대왕께서는 관우의 수급에 맞게 향나무로 신체를 만들어 군후의 예로 장사를 지내주소서. 유비가 이를 알면 반드시 손권을 죽이려 할 터, 전력을 다해 남정에 나설 것이니 우리는 서로 싸우는 것을 지켜보다가 이득만 얻으면 됩니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 계책을 따라 왕후의 예로 장사를 지내고 형왕(荊王)에 추증했습니다.   한편, 유비는 한중왕이 되자 오일의 손아래 누이를 새로이 왕비로 맞았습니다. 백성들은 평안하고 들녘에는 풍년이 들었습니다. 이즈음 형주에서 사람이 와서 관공이 동오의 청혼을 거절한 사실을 알렸습니다. 제갈량은 즉각 형주가 위태로울 것을 간파하고 관우를 부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형주에서 첩보가 날아왔습니다. 관흥이 조조의 7군을 격파한 것을 자세히 보고했습니다. 다시 파발마가 왔습니다. 장강 연안에 돈대를 설치하는 등 방비를 튼튼히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비는 마음이 놓였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유비는 갑자기 온몸의 살이 떨리는 것을 느끼고 불안하고 초초해서 잠시도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도 이룰 수 없고, 정신도 몽롱해졌습니다. 잠시 잠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싸늘한 바람이 방안을 휘돌더니 등불 밑에 관우가 서성거리다가 몸을 숨겼습니다. 유비가 말했습니다.   현제(賢弟)! 그동안 별고 없었는가? 밤이 깊은데 여기까지 온 것을 보니 분명 큰일이 일어났구먼. 우리는 형제인데 무엇 때문에 피하는가?   형님! 제발 군사를 일으켜 아우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순간 유비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렸습니다. 유비는 크게 걱정이 되었습니다. 곧바로 제갈량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제갈량은 좋은 말로 유비를 다독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상께서 관공을 그리워하시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꾸는 것입니다. 의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갈량이 나오다가 급히 오는 허정을 만났습니다. 그도 형주의 사태를 듣고 제일 먼저 제갈량에게 알리려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나도 밤에 천문을 보다가 장성(將星)이 형주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필시 운장이 화를 당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소. 그러나 주상께서 걱정하실까 봐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소.   유비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사실여부를 물었습니다. 두 사람은 소문이라며 유비를 달랬습니다. 그때 마량과 이적이 도착했습니다. 형주를 잃고 구원을 요청한다고 전할 때, 요화가 들이닥쳤습니다. 요화는 땅에 엎드려 절하고 울면서 유봉과 맹달이 구원병을 보내지 않은 일을 자세히 아뢰었습니다. 유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아우는 끝장났구나!   유봉과 맹달이 그처럼 무례했다면 그 죄를 살려 둘 수 없습니다. 주상께서는 마음을 편히 가지소서. 제가 직접 얼마간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형주의 위기를 구하겠습니다.   운장이 잘못된다면 나는 단연코 혼자 살지는 않을 것이오. 내가 내일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운장을 구원하러 가겠소!   유비는 낭중에 있는 장비에게 사실을 알리고 인마(人馬)를 불러 모으게 했습니다. 그런데 미처 동이 트기도 전에 잇달아 파발이 도착했습니다.   관공께서는 밤을 이용해 임저로 달아나시다가 동오 장수에게 사로잡혔으나 의리와 절개를 굽히지 않으시다 부자가 함께 세상을 뜨셨습니다.   유비는 이 말을 듣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차린 유비는 동오를 총공격하기로 결심합니다. 제갈량과 참모들의 설득에 겨우 음식을 들고 몸소 관우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관우의 죽음소식에 놀라 이를 확인하는 유비. 출처=예슝(葉雄) 화백   한편, 낙양에 있는 조조는 관우의 장사를 치른 뒤부터 밤마다 관우가 나타나 무섭게 했습니다. 행궁을 옮기기로 하고 신목(神木)을 베다가 실패하고는 꿈속에서 시달림을 받다가 드디어 병석에 누웠습니다. 신의 화타를 불러왔습니다. 화타는 날카로운 도끼로 조조의 머리통을 열고 병근(病根)을 꺼내면 금방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조가 펄쩍 뛰며 말했습니다. 당장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가후가 말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화타는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화타는 죽기 전에 친절한 옥졸에게 자신이 지은 의서인 ‘청낭서(靑囊書)’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가 태워버렸습니다. 신묘한 의술을 배운들 감옥 속에 떨어져 죽기밖에 더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화타는 열흘 후 옥에서 죽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한탄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화타의 의술은 장상군에 견줄 수 있으니 華佗仙術比長桑 귀신같은 진료로 속속들이 꿰뚫어 보았네. 神識如窺垣一方 애석하다, 화타 죽고 책도 사라졌으니 惆悵人亡書亦絶 후세 사람 다시는 청낭서를 못 본다네. 後人無復見靑囊   조조는 화타를 죽인 후 병세가 더욱 악화했습니다. 밤마다 곡소리가 들려왔고 꿈속마다 자신이 죽인 혼령들에 시달렸습니다. 여러 신하가 제물을 바치고 도사로 하여금 빌게 하도록 청했습니다. 조조는 허락하지 않고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성인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고 했다. 나의 명이 다했는데 어떻게 구완할 수 있겠느냐?   신의(神醫) 화타. 출처=예슝(葉雄) 화백   조조는 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문무 신료들을 불러 조비를 잘 보좌해줄 것을 유언했습니다. 시첩(侍妾)들에게는 좋은 향을 나눠주고 열심히 살 것을 명했습니다. 또한 비슷한 무덤 72기를 만들어 후세 사람들이 진짜 무덤이 어느 것인지 알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유언을 마치자 긴 한숨을 쉬며 비 오듯 눈물을 흘리고 6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서기 220년 정월이었습니다.   죽기 전 유언하는 조조. 출처=예슝(葉雄) 화백   모종강은 화타의 청낭서가 전해지지 않게 된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화타의 책이 전해지지 않아 후세에는 신의(神醫)가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꼭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의(醫)라는 것은 의(意)라고 했다. 의(意)를 어찌 책으로 전할 수 있겠는가? 알 수 없는 것을 신(神)이라고 하는데, 의(醫)라고 하면서 신(神)이라고 하니 신을 어찌 책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책을 보고 병을 치료하는 사람에게 ‘의술(醫術)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 책을 보고 전략을 세우는 사람에게 ‘병법을 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화타의 책과 맹덕신서(孟德新書)가 모두 탔는데 불에 태운 것은 지극히 잘한 일이다. 태우지 않았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그 책의 겉만 본떴을 터이니 아마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3.11.01 07:00

  • [글로벌 아이] 한중관계의 온도

    [글로벌 아이] 한중관계의 온도

    박성훈 베이징 특파원 베이징 교민사회의 요즘 화젯거리 중 하나가 다음달 10~12일 열리는 K-FESTA(페스타) 문제다. 매년 이맘때 한국 중소기업들과 요식업체들이 베이징 한인타운인 왕징 시내에서 2~3일간 여는 행사인데 이번에 장소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왕징 한복판에 위치한 쇼핑타운 1층에 자리잡고 행사를 해왔다. 우리 제품을 알리고 한국 식품도 판매하는 연례 행사인데, 올해 당국이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행사를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장소는 왕징을 벗어난 곳에 어렵게 잡았다고 한다.   지난달 23일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참석한 한덕수 국무총리가 시진핑 주석을 만났다. [사진 주중한국대사관] 작은 일 같지만 이런 일들이 중국에선 중요한 관심사다. 그도 그럴 것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일상적으로 처리되던 일을 갑자기 못하게 되는 경우가 중국에선 허다하다. 이번에도 행사장 불허에 교민들의 우려와 불만이 터져나왔다. 여러 경로로 확인해본 결과, 3월부터 베이징에서 실외 행사 허가 과정이 강화된 데다 예년 행사 장소에 화재가 난 일이 있어 안전 우려 때문에 허가할 수 없다는 게 당국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 무슨 꿍꿍이인가’ 사람들은 중국의 속내에 불안해한다.   반면 중국의 다른 지역에선 한국 기업들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여러 우리 기업 임직원들의 말을 종합하면 중국 지방 성급에선 예우가 좋아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 기업마다 담당자를 한 명씩 지정해 개별 관리를 하거나 당국이 먼저 접근해 사업 유치를 제안해 온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중국 경제 침체로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미·일 협력 관계가 강화되는 가운데 중국 관료들이 낮은 자세를 보인다는 건 좋은 신호다.   지난 11일 중국은 국영언론 CGTN의 앵커였던 호주 국적의 청레이(成蕾)를 석방했다. 3년 가까이 가택연금 중이던 그녀를 석방시키기 위해 호주는 지속적인 노력을 했다. 이날 석방은 얼어붙었던 양국 관계 해빙의 신호탄으로 해석됐다.   한중관계는 최근 교착 상태다. 사드 사태 때와 같은 보복 조치는 없지만 중국은 북핵 사태에 대한 접근, 탈북민 북송 등 민감한 이슈에 정중동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대미·대일 외교를 강화하면서도 아시안게임 총리 참석 등 중국과의 적절한 거리 유지를 위해 공을 들인다. 사드 사태 이후 7년, 한중 관계는 새로운 관계 설정의 갈림길로 접어들었다. 중국의 위기가 우리에겐 기회다. 북한 문제와 중국 시장 개방에 중국의 성의 있는 조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올해 말 한·중·일 정상회의가 개최된다면 관계 정상화의 또 다른 변곡점이 될 수 있다. 박성훈 베이징 특파원

    2023.10.31 00:21

  • [술술 읽는 삼국지](83) 관우를 목 베어 죽인 손권, 여몽을 피토하며 죽게 한 관우의 혼

    [술술 읽는 삼국지](83) 관우를 목 베어 죽인 손권, 여몽을 피토하며 죽게 한 관우의 혼

    관우는 맥성에서 오지 않는 구원병을 기다리며 군사를 점검했습니다. 기병과 보병을 다 합쳐도 3백여 명뿐이었습니다. 군량은 떨어지고 성 밖에서는 성안의 군사를 부르는 소리가 애절하게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성벽을 넘어 달아나는 군사들이 속출했습니다. 관우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아! 내 지난날 왕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될 뿐이다. 오늘의 위급한 사태를 어찌해야 하는가.   상용에서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은 바로 유봉과 맹달이 군사를 눌러둔 채 출동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외딴 성을 버리지 않습니까? 서천으로 들어가 다시 군사를 정비해 실지(失地)를 회복하십시오.   관우는 성으로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북문 쪽에는 적군이 많지 않았습니다. 북쪽으로 나가면 후미진 산골길을 통해 서천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관우는 그 길을 택해서 가기로 했습니다. 왕보가 다시 간했습니다.   소로에는 매복이 있을 터이니 대로로 가셔야 안전합니다.   매복이 있다 한들 내가 무엇을 겁내겠느냐?   미염공 관우. 출처=예슝(葉雄) 화백   관우는 왕보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서도 다시 왕보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자신의 무력(武力)만 믿고 있으니 진정 깊게 반성한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동오의 여몽은 맥성의 관우가 성 북쪽으로 빠져나가 소로를 통해 서천으로 갈 것을 알고 미리 군사를 매복시켜 놓았으니 더더욱 왕보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아무리 무예가 출중한 관우라 하더라도 사방에서 계속해서 협공하는 적군을 무찌르고 길을 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관우와 관평은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손권 앞으로 관우 부자가 끌려왔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장군의 큰 덕을 흠모해 왔소. 진진지호(秦晉之好)를 맺고 싶었는데 어째서 거절하셨소? 공은 평소 천하무적이라고 자부하더니 오늘은 어째서 나에게 사로잡혔소이까? 장군! 오늘도 여전히 손권에게 항복하지 않으시겠소?   파란 눈의 붉은 수염 그린 쥐새끼야! 나는 유황숙과 도원결의할 때부터 한나라를 다시 세우기로 맹세했다. 내 어찌 한나라의 반역자인 네놈과 편이 되겠느냐? 내가 지금 간사한 계략에 걸려들었으니 오직 죽을 뿐, 무슨 여러 말이 필요하겠느냐?   손권은 망설였습니다. 예를 다해 대접하면서 좀 더 귀순을 권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주부(主簿) 좌함이 반대했습니다.   아니 됩니다. 지난날 조조가 이 사람을 얻었을 때 후(侯)에 봉하고 벼슬을 준 다음, 사흘에 한 번씩 작은 잔치를 열어 주고 닷새에 한 번씩 큰 잔치를 열어주면서 말을 타면 금을 주고 말에서 내리면 은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은전을 베풀고 예의를 다했지만 결국 잡아 두지 못했고, 그가 관을 지키는 장수들을 죽이고 가도록 놓아두었기 때문에 오늘날 도리어 그의 핍박을 받아 도읍까지 옮기며 그의 예봉을 피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이제 주공께서 잡아 놓고 만일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면 후환을 남기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손권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런 후에 말했습니다.    그대의 말이 옳소!   서기 219년 음력 10월, 관우 부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후세의 사람들이 시를 지어 관우를 추모했습니다.   인걸은 오직 해량 땅에 있었으니 人傑惟追古海良 사람들 앞 다퉈 관우를 숭배하네. 士民爭拜漢雲長 어느 날 도원에서 형제로 맺어져 桃園一日兄和弟 황제와 왕이 되어 대대로 제사 받네. 俎豆千秋帝與王 기개는 바람과 우레 같아 적수가 없고 氣挾風雷無匹敵 해와 달을 품은 뜻은 세상을 밝히네 志垂日月有光芒 지금도 사당이 천하에 넘치는데  至今廟貌盈天下 고목의 갈까마귀는 어찌 석양 보고 우는가.古木寒鴉幾夕陽   관우가 죽자 그가 타던 적토마는 관우를 사로잡은 마충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적토마는 그가 주는 여물도 먹지 않고 며칠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주인인 관우를 따라간 것입니다.   한편, 맥성에 있던 왕보는 관우가 피투성이가 된 채 나타난 꿈을 꾸고는 관우 부자가 죽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왕보는 크게 외마디 고함을 지르고 성에서 몸을 날려 죽었습니다. 함께 있던 주창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습니다. 결국 맥성도 손권의 것이 되었습니다.   관우는 죽어서도 영혼이 흩어지지 않고 당양현의 옥천산에 머물렀습니다. 이곳에 보정스님이 도를 닦고 있었는데 삼경이 지난 무렵 갑자기 공중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옥천산의 보정스님을 만나는 관우의 혼령. 출처=예슝(葉雄) 화백   내 머리를 돌려다오!   보정은 천천히 그 영혼을 살펴봤습니다. 적토마를 탄 관우가 옥천산 꼭대기로 떨어지듯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보정은 즉시 먼지떨이로 문을 치며 말했습니다.   운장! 어디 계시오?   지금 나는 이미 화를 당해 목숨을 잃었소. 제발 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시오.   지난날이나 오늘의 옳고 그름을 일체 논하지 마소서. 후과(後果)와 전인(前因)은 서로 맞물려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장군께서 여몽에게 해코지를 당하셨다고 ‘내 머리를 돌려달라’고 외치신다면, 안량·문추와 다섯 관문의 여섯 장수 등 여러 사람의 머리는 또한 누구에게 돌려달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관우는 스님의 말에 문득 깨닫고 머리를 조아리며 부처의 세계로 귀의했습니다. 그 후 관우의 영혼은 이따금 옥천산에 나타나 백성들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손권은 관우를 죽이고 마침내 형주를 모두 차지하자 전군에게 상을 주고 장수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여몽을 상좌(上座)에 앉히고 손수 술잔에 술을 부어 그의 공을 칭찬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해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손권이 준 술을 받아 마시려던 여몽이 갑자기 술잔을 땅바닥에 동댕이치고 한 손으로 손권의 멱살을 틀어쥐었습니다. 그리고는 목청을 높여 큰 소리로 손권을 꾸짖었습니다.   파란 눈의 수염 붉은 쥐새끼야! 아직 나를 알겠느냐?   여몽. 출처=예슝(葉雄) 화백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말릴 틈도 없었습니다. 손권을 밀어 넘어뜨린 여몽은 성큼성큼 손권의 자리로 가서 앉더니 두 눈썹을 곧추세우고 두 눈을 부릅뜬 채 큰소리로 호통쳤습니다.   나는 황건적을 무찌른 이후 30여 년 동안 천하를 주름잡아 오다가 이제 하루아침에 너희들의 간계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나는 살아서 너의 고기를 씹지 못하고 죽었으니 당장 여가 놈의 혼을 잡아가겠다. 나는 바로 한수정후 관운장이다.   손권과 장수들은 황망히 절을 올렸습니다. 여몽은 땅바닥에 거꾸러지더니 피를 쏟으며 죽었습니다. 모두가 두려움에 벌벌 떨었습니다. 장소는 관우를 죽였으니 유비가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서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내서 유비의 칼날이 조조에게 향하게 했습니다. 손권은 즉시 나무상자에 관우의 수급을 담아 밤을 도와 조조에게 가져다 바치라고 했습니다. 관우의 수급을 받은 조조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모종강은 관우의 혼이 보정스님과 만나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운장! 어디 계시오?”라는 한마디 말은 금강경(金剛經)의 오묘한 뜻을 함축해 놓은 것 같다. ‘어디 있느냐(安在)?’는 두 글자로 미루어 보면 운장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오(吳)가 어디 있고, 위(魏)가 어디 있고, 촉(蜀)이 어디 있는가? 삼분(三分)의 업적과 삼국의 인재들이 모두 어디 있는가가 된다. 그러니까 모든 있는 것은 있지 않은 것이고, 오직 있지 않은 것만이 언제나 있는 것이다. ‘어디 있는가’를 안다면 운장은 바로 천고에 살아 있을 것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3.10.30 07:00

  • [중국읽기] ‘자유·국제주의’ 사조의 사망

    [중국읽기] ‘자유·국제주의’ 사조의 사망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중국 국무원(정부) 산하 발전연구중심(DRC)은 대표적인 정부 싱크탱크다. 경제 정책을 기획하고 제시한다. DRC가 세계은행과 함께 ‘차이나 2030’ 보고서를 낸 건 2012년 2월이었다. 중국 경제의 장기 발전 방향을 담았다. 보고서 작성을 기획한 사람이 바로 27일 고인(故人)이 된 당시 국무원 부총리 리커창(李克强)이었다.   핵심 키워드는 두 개, ‘시장’과 ‘글로벌’이었다. 보고서는 모든 경제 정책 결정에서 시장을 중심에 두고, 세계 경제와의 동반 성장 체제를 구축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권력층의 주류 사조였던 자유주의, 국제주의가 반영됐다. 리커창이 꿈꾸던 2030년 중국의 미래 모습이기도 했다.   2016년 10월 한 창업 전시회에서 청년들에게 사인해주는 리커창 전 총리. [사진 중국정부망] 리커창은 보고서 내용을 정책에 반영하려 애썼다. ‘대중창업 시대를 열자, 모든 사람을 혁신에 뛰어들게 하라!’ 그는 총리 2년 차였던 2014년 9월 톈진(天津)에서 열린 하계 다보스포럼에서 이렇게 외쳤다. IT분야 청년들이 환호했다. ‘대중창업, 만중혁신(大衆創業 萬衆創新)’이라는 슬로건은 금방 경제 현장으로 퍼져나갔다.   창업, 혁신 붐이 일었다. 중국은 어느 다른 나라보다 먼저 인터넷 쇼핑을 정착시켰고, ‘인터넷 택시’를 도입했다. ‘베이징에서는 거지도 위챗으로 구걸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그즈음이다. 마윈(馬云)이 당시 세계 최고가로 알리바바를 뉴욕 증시에 상장한 것도 2014년 9월의 일이다. 인터넷 혁명으로 시장은 활력이 돋고, 기업은 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리커창 경제’는 바로 그 시간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도전받고 있었다. 그해 6월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당의 경제 관련 최고 협의기구인 중앙재경영도소조(中央財經領導小組)가 열렸다. 소식을 전한 신화통신 보도에 뭔가 특이사항이 하나 있었다. 관행적으로 총리가 맡아오던 소조 조장에 ‘시진핑(習近平)’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 경제 권력은 빠르게 시진핑 일인(一人)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시진핑 세상’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리커창의 ‘대중 혁신’ 대신 국가가 자원을 집중적으로 동원하는 신형 거국체제가 강조된다. 민영기업보다 국유기업에 돈이 몰리고, 글로벌 협력보다 자력갱생이 중시된다. 당(黨)을 앞세운 시진핑의 10년 통치에 2001년 WTO(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 중국 정계에 자리 잡았던 자유, 국제주의 사조는 명맥이 끊길 처지다. 대신 ‘중화 권위주의’가 그 자리를 채운다. 리커창의 죽음은 그렇게 자유, 국제주의의 사망과 맥을 같이한다. 명복을 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3.10.30 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