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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윤의 내 친구, 중국인] 메시와 ‘설산의 토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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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축구의 신, 메시가 중국 전문가라고?!

수억 명의 중국인이 메시를 안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중국 전문가’는 아니다.

중요한 지위로 인해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내가 중국에 인맥이 많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내가 리더로 있을 때 그 일을 해냈다고 해서 ‘내가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많은 중국인이 나를 안다고 해서, ‘내가 중국 전문가’라는 착각도 안 된다.

중국어에 ‘인주차량(人走茶凉, 사람이 가면 차가 식는다)’이라는 말이 있다. 자리에서 물러나면 아무도 안 챙겨준다(혹은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 업그레이드된 농담도 있다. ‘인주차불량(人走茶不凉, 사람은 떠나도 차는 식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떠나도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떠나도 누군가가 ‘얼마 전까지 당신이 앉아 있던 그 자리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는 말이다. 당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그 자리를 맡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자리’다.

많은 사람이 나를 환영하고 인정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환영과 인정의 대상이 ‘나’인지 아니면, ‘내가 앉아 있는 자리’인지를 알아야 한다. ‘나를 인정하는 (혹은 인정하는 듯해 보이는) 중국인들이 많다고 내가 바로 중국 전문가’라는 착각을 하면 안 된다. 수억 명의 중국인들이 최고의 축구선수인 메시를 잘 안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메시가 중국 전문가라고 말 못한다.

물론 메시가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하려면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는, 대단한 중국 전문가도 못해낼 일을 메시라면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런데도 메시는 중국 전문가가 아니다. 중국에서 어느 한 부분을 해낼 수 있다고 해서 중국통이 아니다.

중국을 ‘내가 잘 알아야’ 중국 전문가다. 그래야 다양한 영역에서 바른 판단과 선택을 제시해줄 수 있다. ‘중국인이 잘 아는 유명인’과, ‘중국을 잘 아는 중국 전문가’는 구별되어야 한다.

고층건물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사람이 나보다 작아 보인다! 

루이 알튀세르의 ‘설산의 토끼’라는 유명한 비유가 있다. “히말라야 높은 설산에 사는 토끼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일까?” 눈 덮인 설산의 추위가 위협하는 동상(凍傷)이 아니다. 바로 ‘산 아래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자기가 크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산 위에서 보니 저 산 아래의 커다란 코끼리도 작아 보인다. 코끼리가 작아 보이니, 발가락 하나로도 코끼리를 제어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나의 위치(나의 지위가 만들어 준 환경 및 권력)와 ‘본 실력’을 혼동하면 안 된다.

양국 간의 모든 접점에서 일하는 이들, 그리고 그들에게 전문지식을 설파하거나 혹은 결정을 하는 리더들은 한 번쯤 겸손하게 스스로 돌아봤으면 좋겠다. 나는 자신의 능력만으로도 설산을 지배할 수 있는 ‘설산의 맘모스’일까? 아니면, ‘코끼리가 작다’라고 여기는 ‘설산의 토끼’일까?

신(新)제자백가(諸子百家)의 등장

우스개 하나 소개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라 불리는 사상가들이 활약했다. 사상적으로 중국문화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해주었다. 요즘에 제자백가에 두 가지 새로운 학파가 편입되었다고 한다. 바로 전문가(家)와 정치가(家)이다. 신제자백가라 불리는 이들을 시각장애인(이 사례로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해드릴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불쾌하시면 정중하게 사과를 드립니다)에 비유한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중에 수많은 사람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 맨 앞에는 한 명이 등불을 들고 그들을 인도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등불을 들고 인도하는 사람이 맹인이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어느 학파일까?”

등불은 시각장애인인 자기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나 따라오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 뒤따라오는 대중들은 앞에서 인도하는 이가 ‘등불이 있으니 앞을 잘 내다볼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등불이 비유하는 의미는 아마도, 지위, 학벌, 재력 및 권세 등이 되겠다). 본인은 정작 앞을 못 보는데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등불을 들고 수많은 사람을 인도한다.

질문에 대한 정답이 바로 ‘전문가(家)’와 ‘정치가(家)’다. 수많은 사람을 인도할 정도의 권위가 있고 또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 제자백가에 당당히 편입되었다.

‘전문가(家)’와 ‘정치가(家)’는, 누구에게도 도움을 못 준다?

泥菩萨过江 自身难保(진흙으로 만든 보살이 강을 건넌다. 진흙이 물에 풀어지니 제 몸도 간수 못 한다)

그런데 이 두 부류에도 구분이 있다. 전문가는 ‘본인이 시각장애인임을 모르고 인도’하는 이들이다. 자신도 잘 모르면서도, 확신을 갖고 사람들을 인도한다.

정치가는 ‘본인이 시각장애인인 줄 알면서도(이 사실을 숨긴 채) 남들을 인도’한다. 정치가(우리말로는 정치꾼이겠다)는 자신이 모르거나 틀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사익을 위해 대중을 이용한다.

두 부류 모두 상황을 판단하고 직간접적으로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무리다. 비유 속의 전문가와 정치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문가와 정치가라기보다는) 회사든 정부든, 대기업이든 소규모 기업이든 조직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리더들을 가리킨다.

통렬한 풍자다. 우리에게 지식과 정보를 알려주고 또 의사결정을 하는 이들이 사실은 ‘무지한 이들’이며, 그런데도 우리를 ‘리더의 위치에서 인도’한다는 것이다. 泥菩萨过江(진흙으로 만든 보살이 강을 건넌다) 진흙은 물에 풀어진다. 진흙으로 만든 보살은 물을 건널 수 없다. 남을 구제하기는커녕 제 목숨도 보장 못 한다.

‘사드 피해자 코스프레’도 없지 않다.

사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지는 않는다. 모든 실패의 원인 역시 모두 사드 책임으로 몰면 안 된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뛰어난 중국 전문가가 있겠다. 한편 그야말로 무늬도 아닌데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정치가, 유명인, 그리고 대기업 같은 조직의 고위층에 많아 보인다. 잘 나갈 때는 그 자리를 통해서 유력한 중국인들을 만나며 중국통이라고 자처했다.

그런데 막상 이런저런 문제가 닥쳤을 때 전문가의 역할을 해내는 일을 본 적이 (기억으로는 별로) 없다. 대기업들은 사드와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로 ‘우리 한국 기업이 차별받고 있다’라는 분석(혹은 변명)에만 매달리고 있다. 대기업과 정부가 큰 그림을 그려주고, 또 (쉽지는 않겠지만) 옳은 방향을 찾아줘야 한다. 그래야 중견· 중소기업이 그 길을 따라서 안전하게 갈 수 있다. 자영업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드로 인한 피해는 엄청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단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사드가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이겠지만, “모든 실패는, 100%…. 전적으로… 완전히..…무조건…. 사드 때문이다”라는 해석은 제대로 고약하다.

(물론, 사드로 인해 영향을 받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드 이후로 일부 산업에 있어서 “유럽이나 일본 등의 제품은 여전히 강세지만 중국 기업들이 우리 한국 기업의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는 현상이 모두 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직 사드 때문이다. 오직 한국만을 겨냥하고 있다”라는 결론은 위험하다. 3등이 순위를 올리겠다고 바로 1등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한다. 우선 2등의 시장을 공략한다. 우리가 2등이라서 우리의 시장을 겨냥하는 것이지 사드로 인해 “무조건 우리나라만 괴롭힌다”는 분석은 부족하다. 우선 우리가 1등과 비교해서 무엇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더 고민하자는 말이다. 자기반성은안 하고 오직 사드로만 탓을 돌리지 말자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도, 현실적으로 당분간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일부 대기업이나 정부의 리더들은 ‘모든 문제와 사업 곤란의 원인을 오직’ 사드에 돌린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조직 내에서 “그렇지! 사드 때문에 어쩔 수 없지!”라며 더는 추궁을 당하지 않나 보다. 큰 조직의 리더들은 그렇게 해도(혹은 그렇게 해야) 지낼 만 한가 보다.

사드 피해가 진행형이 되어 버렸다. 사드가 끼친 본래 피해도 있지만, 또 우리 내부의 ‘왜곡’으로 인한 피해가 있다. “모든 문제는 사드로부터…”라고만 하다 보니 다른 심각한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문제를 모르니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모두 사드 때문이라고 이해’해주니 더는 해결방법을 찾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사드 피해자 코스프레’가 있다. 일부 전문가나 책임자급인 리더들이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이, 모든 책임은 사드로…’라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서로 손뼉 치며 호응한다. ‘사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이들은, 속으로는 사드에 고마워하는지도 모르겠다.

方法总比困难多(문제의 해결방법은 늘 어려움보다 많다). 车到山前必有路(차가 산 아래에 이르면, 길은 분명히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에는 길이 없는 듯해도, 산 앞까지 가서 보면 반드시 길이 있다. 문제를 제대로 찾아내야 한다. 그 첫 단계는, 우선 문제를 숨기거나 가리지 않는 것이다.

코끼리가 늙고 병들어 죽어 넘어진다. 땅에 닿는 순간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바늘에 찔렸다. 이걸 보고 “코끼리가 죽은 이유는 딱 하나, 바늘에 찔렸기 때문이다”라고 하면 곤란하다.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우선 문제를 정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문제 앞으로 나아가자. 문제를 직시하자.

우리나라의 중국연구(또는 기획·마케팅 부서 및 중국 전문가)는 어쩌면 ‘중국(인)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곳’이 아니라, ‘중국(인)을 지적하고 가르치는 곳’이다’?

위기가 닥치면 지혜로운 위기대응이 안 되니 그래서 맨몸으로 맞는다. 기회는 오는데 적절한 활용을 못 하니,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보내 버린다.

어느 최고 권위의 중국 관련 연구소에 있는 후배의 하소연을 전해 들었다. “여기에 나만 빼고는, 모두 미국 박사들이에요…. 빨간불이라고 기다리자고 했더니 다들 괜찮다고 하며 건너가고 있습니다. 신호등을 보고 지키는 나에게 오히려 이상한 눈초리를 줍니다…. 내 말은 어디에도 반영이 안 돼요….” 중국 관련 학사와 석박사를 다하고 오랫동안 중국 관련 교수를 하는 교수가 ‘중국 연구소에서 나만 혼자 중국 신호등을 보고 있다, 알려줘도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 미국 학위자들이 결정한다’는 푸념이다.

어디서 근무(또는 공부)를 오래 했는가, 즉 어디 출신인가 하는 것은 ‘성향과 취향’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이는 판단과 결정에서도 일정한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미국에서 오랜 시간 생활한 이들은 (심지어 중국 관련 공부를 했다 해도) 부분적으로는 미국 전문가다. 미국 전문가의 시각으로만 중국을 재단하면 오류가 생길 여지는 당연히 많겠다.

중국을 분석하는 부서(혹은 연구소)라면, 우선은 중국(인)을 연구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중국(인)을 가르치는 곳이 아닐 것이다. “중국(인)은 앞으로 이렇게 가야 글로벌에 맞다. 중국시장은 우리 제품을 이렇게 좋아해 주는 게 맞다. 그게 글로벌이다. (우리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오직 중국인들의 중국뽕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다.

人走茶不凉(사람은 떠나도, 차는 식히지 말자)

많은 선배와 기업들이 중국을 떠났지만, 씨를 말리지는 말자. 일감도 남기고 후배도 양성하자

나무가 큰바람에 흔들린다. 숲 전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나무들과 그 숲이 멀리 이동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은 없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 흔들리는 반경을 대충이나마 판단할 수 있다. 그 나무의 뿌리가 그것을 결정한다.

중국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지의 예측을 하려면 그들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 문화가 사유체계와 행동 규범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학위와 권위(?) 또는 지위라는 ‘등불’을 들고 다수를 이끄는 ‘신제자백가의 정치가와 전문가’와 같은 리더라면 스스로 본인의 ‘중국 시력(視力)’이 얼마나 되는지 가름해 봤으면 좋겠다.

젊은 중국 전문가가 지속해서 양성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중국말을 하고, 중국 책을 읽는 게 눈치가 보인다니 기가 막힌다. 친중파는 과거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와 당연히 다르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친중파(혹은 지중파) 라고 쓰고, ‘매국(賣國) 친중파’라고 읽는 듯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는 누구라도 중국을 공부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중국과 손을 잡게 될 때, 수교 30여년의 세월이 허망하게 또다시 ‘중국 1년 차 신입생’을 반복하면 안 된다. 최소한 중국을 공부하는 후배를 양성하고 그들이 배우고 활동할 공간도 일감도 남겨야 한다.

중국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배들이 “저 이제 중국 관련 일은 안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나서, “어? 왜?” 했다. “선배님 때가 좋았는데요….” 후배들의 이 말에 “그래 그때는 좋았지!”라며 잠시 활기 넘치던 과거를 떠올린 적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 후배에게 잘 보전해서 전달했어야 할 일터와 꿈을 선배라는 이들이 탈탈 털어먹기만 한 것 같다.

전망이 없어서, 풀이 죽은 채로는 배움의 효율을 높일 수 없다. 경기는 한 두 번 질 수도 있고 나쁜 상황이 계속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그 종목을 영원히 포기하면 안 된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 있는데 그래서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하는데 우리만 각을 세우고 스스로 문을 닫고 퇴출하려는 것 같다. 비통하다.

설령 칠흑의 어둠 속이라도 짜증 내지 말고 최선의 길이 아니라면 차선(아니면 차차선)의 길이라도 찾아야 할 것이다.

과일을 따 먹기만 하고 심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과일나무까지 베지는 말자. 이전 칼럼에서 인용한 말이 있다. 薪尽火传(땔감은 떨어지더라도, 불씨는 전해져야 한다)

류재윤 협상·비즈니스 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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