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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윤의 내 친구, 중국인] ‘대기만성(大器晚成)’이란 말은 애초에 없었다?

중앙일보

입력

‘대기만성(大器晚成)’ 과 ‘대기면성(大器免成)’  

사진 바이두

사진 바이두

노자의〈도덕경〉에 ‘대기만성’이란 구절이 있다.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성공한다’는 뜻이다. 먼 장래는 고사하고, 바로 내일이 답답한 청춘들에게도 위로가 된다. 중년을 넘어 의지할 이렇다 할 ‘연줄’이 없어도 ‘성실하게 자신의 힘만’으로 버티고 있는 이들을 잡아주는 ‘줄’이다. 그런데 (찬물을 끼얹을 의도는 없지만) 원래 ‘대기만성’이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다.

노자의〈도덕경〉을 읽다 보면, 현실로부터의 ‘일탈’을 넘어서 ‘초월’을 떠올리게 한다. 아니 초월이 아니라, 애당초 ‘우리를 짓누르는 현실’이라는 문턱은 없었다. 그 문턱과 그런 장애물은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이니 ‘초월’이 아니라 그냥 원래로 돌아가면 된다고 말한다. ‘넘어야 할 것, 견뎌내야 할 것’이 애당초 없었는데, 무엇을 얻겠다고 애쓰나? 왜 이렇게까지 바둥거려야 하나?

치열한 일상의 경쟁 속에서, 노자의 가르침은 언뜻 보면 현실적 도움이 안 된다. 읽기 편한 ‘자기계발서’ 한 권이 훨씬 나아 보인다. 그러나 노자는 단 몇 줄만 읽어도, 그 뜻을 기껏해야 어렴풋이 밖에 이해가 안 되어도 ‘뜻밖의 큰’ 위로를 받게 된다. 국가적 재난이 와도 어디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참담한 현실, 고개를 드는 것조차 무겁게 느껴지는 지금, 노자를 읽으면 그래도 어깨가 펴진다. 나도 모르게 그래도 씨익 미소가 지어진다. 잠깐이나마 머리가 맑아진다.

‘대기만성’, 지금이 다가 아니다. 큰 성공은 아니더라도, 더 좋은 앞날이 있다. 희망이다. 감사하다.    

1972~4년, 중국 후난성 창사(長沙)에선 기원전 약 200년경의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 발굴이 진행됐다. 이때 비단에 쓰인 노자의〈도덕경〉이 발견됐는데,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왕필(226~249)의 그것보다 대략 400년이나 앞섰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오래된 판본에는 ‘대기만성’이 아닌 ‘대기면성(大器免成)’이라는 구절이 적혀있었다. ‘만성(晚成)’이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라면, ‘면성(免成)’은 ‘(이미 있기 때문에 굳이 새롭게) 이룰 필요가 없다’ 혹은 ‘굳이 만들면 안 된다’는 의미가 된다. 즉, ‘대기면성’의 의미는 ‘진정한 큰 그릇은 원래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게 된다.

만성(晚成)이 맞는 걸까? 면성(免成)이 맞는 걸까? 무엇이 진짜 ‘노자의 생각’이냐에 대해선, 우선 더 오래된 진품이 진짜일 확률이 높다. 즉, 원래 노자가 한 말은 ‘대기면성’일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왕필은 원래 도가(道家)와 대척점에 있는 유가(儒家) 배경이다. 유가의 시각으로 도가(道家)를 해석했다는 지적이 있다. 노자로 대표되는 도가는 ‘무위(無爲, 아무것도 안 한다. 인위적인 것이 없다)’를 강조한다. 모든 인위적인 것은 오히려 도(道, 진리)와 멀어진다고 여겼다.

“(사람들이 행위로) 학문을 하는 것은, 매일 보태는 것이다(爲學日益). 도를 행하는 것은, 매일 덜어 내는 것이다(爲道日損)”. 역시 노자(도덕경)의 말씀이다. 여기서 전자는 ‘유위(有爲, 행위)’를 통한 배움을 중시하는 유가를 말한다. 후자와 같이 매일 인위적인 것을 덜어내어 무위(無爲)의 경지로 가야 한다는 태도는 도가다.

‘도’ 즉 진리에 이르는 길은 ‘보탬’이 아니라 ‘덜어냄’에 있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노자는 매일 우리의 모든 인위적인 것을 덜어내야 ‘무위’라는 최고 경지에 이른다고 말했다. ‘대기만성’은 노자의 중심사상인 ‘무위’ 와도 거리가 한 참 멀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의미적으로도, 노자가 한 말은 ‘대기만성’이 아니라 분명 ‘대기면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조차도, ‘대기면성’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의외로 적다. 일상에는 오직 ‘대기만성’만 있고, 또 이것이 ‘노자’의 말이라고 알고 있다.

틀린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최소한 ‘대기만성’은 노자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현실에는 “노자도 대기만성이라고 했어! 실망 말고 더욱 힘내!”라고 말하는 이는 있어도, “노자는 대기면성이라고 했어. 그냥 초월하셔!”라고 위로해주는 사람은 없다.

논리적 ‘설명’보다도 유효한 ‘설득’이 더 중요하다.

‘실용성’이 ‘정통성’을 이길 수도 있다. 무엇이 사실인가는 중요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다’라는 이분법적 사고보다는, 실용성에 방점을 두는 듯하다. 지식은 지식대로 사용하고, 지혜는 지혜대로 활용한다. 현실에 충실하다 보면, 어떤 지식은 지혜에 묻힌다. 실용주의다. 그러다 보니 “맞는 것을 맞다”라고 따지는 게 불편할 수도 있겠다. ‘옳다와 틀리다’의 판정보다는 조화를 중시한다. 실용주의적 발상이다. 협상에서 ‘우리의 객관적이고 타당한 조건’이 종종 수용되지 않는 배경이다. ‘설명’은 되지만 ‘설득’이 안되는 이유다.

“중국인들은 ‘심정적으로 좋은지 나쁜지’에 따라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이미 오래전에 ‘맞는 것은 맞는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의 이분법적 함정에서 빠져나와서 ‘맞아.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라는 수준에 왔다. 반드시 ‘원만’ 한 데에 이르러야, 마음이 놓인다(〈中國式管理〉 曾仕強)”

“두 나라 사람을 비교해보면, 한국인은 쓸데없는 이론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연구할 가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에 애써 매달리며 모든 일을 너무 진지하게 대한다. 사실 이런 성격은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성격이다. 이런 사람은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부족한가〉장홍지에)”

정부 행위에도 실용이 앞설 때가 있다. 중국의 20여개 성(省)중에는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이 있다. 두 개 성 모두 정확한 알파벳 표기는 shan xi(산 시)다. 산(山, 산)과 섬(陝, 산)은 음의 높낮이가 달라서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이들에게는) 발음으로 쉽게 구분이 되지만, 예상할 수 있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모든 영문 표기(예를 들면, 영문 계약서 외에 공항이나 도로 명 등 포함)로는 똑같다(심지어 이 두 개의 성은 이웃해 있다!).

곤란한 문제를 ‘원칙’을 비껴감으로써 간단히 해결해 버렸다. 후자의 섬서성에는 ‘a’를 하나 더해서 shaanxi(사안시)로 표기했다. 중국어의 발음과 표기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실용을 따랐다. 성조(음의 높낮이)를 모르는 외국인이 발음해도 대부분의 중국인은 알아듣는다. 자칫 혼란과 오해를 야기할 수도 있는 ‘원칙의 문제점’을 깔끔하게 해결한다. ‘융통’과 ‘실용’을 중시한 결과일 것이다.

‘이원대립(二元對立, 흑백논리)’ 과 ‘다원병립(多元竝立, 다양성의 공존)’

중국인들은 오래전부터 무협지를 좋아했다. 주인공만큼 사랑받는 조연급들이 있다. 바로 협객(俠客)과 은사(隱士)다. 협객은 통속적으로 말해서 오지랖이다. 의로운 일이라면 세상의 시시콜콜한 시비에도 뛰어든다. 이와 반대로 은사는 세상을 등지고 산다. 뚜렷하게 상반된 인생관을 가졌지만, 모순적 성향의 두 부류 모두 중국인에게는 우상이요 영웅들이다.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모두 의리(또는 우정)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협객은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이들을 시도 때도 없이 사귀지만, 은인은 극히 소수의 친구를 가려 사귄다는 것이다.

‘이원대립’의 사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이원대립에서 양극단은 서로 대척점에 있고 멀어져만 간다. 반면 ‘다원병립’의 구조에서는, 양극단으로 보이는 것들이 결국에는 만난다 (그리고 또 떨어지고, 또 합쳐지는 과정을 반복할 수 있다).

“의협심과 독야청청에는 오히려 유사한 점이 있다. 우정을 그 모든 것보다 중시했다는 점이다. 우정을 지극히 소중하게 여겼기에 협객들은 희생을 아까워하지 않았고, 은사들은 가볍게 사람을 사귀려고 하지 않았다 (〈이중텐, 중국인을 말하다〉이중텐)”

중국인은 융통성이 크다. 때로는 흑의 방향으로 간다고 해서, 반드시 그 끝이 흑이 되진 않는다. 백도 마찬가지다. 또한 흑백의 경계가 훨씬 모호하다. 선한 행위와 나쁜 행위의 판단을 보류해야 하는 영역이 넓어진다. 중국인들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다른 기준틀이 필요할 것이다(사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옳다와 그르다’의 판단에 앞서, ‘다를 가능성’이 있다는 포용적 사고가 필요할 것이다. 바로 흑백의 ‘이원대립’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는 ‘다원병립’의 사고다

강산은 오히려 바꿀 수 있지만, 사람의 본성은 안 바뀐다(江山易改 本性難移)

다른 문화권 사람들의 습관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최소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분명하게 표현하는 소통 방식은 서구식이다. 중국은 늘 드러내지 않고, 간접적으로 비튼다. 문화가 서로 다른 이유에 대해서 ‘당연히 원래부터 그런 것’ 은 없다. 중국 사람과 소통이 어렵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속이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다.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자연환경과 여러 가지 역사적 배경이 있겠다. 지면 관계상 아주 요약하면, 표의문자인 한자, 서양의 펜과 달리 부드러운 붓, 그리고 종이가 보급되기 전에 사용한 죽편 등이다. 이들은 자세하게 구구절절한 표현을 도구적으로 어렵게 한다.

중국 농업의 특징(계절풍 기후와 노동집약적 농업)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평생을 한 고향에서 보낸다. 이 때문에 ‘조화가 중요하다(和爲貴)’는 당연한 철칙이 되었다. 평생 얼굴을 맞대고 사는 이들끼리라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매사를 ‘넘어갈 줄 아는 지혜’가 필수다. 물론, 설화(舌禍, 말을 잘못해서 당하는 화)와 문자옥(文字獄, 글로 인해 당하는 화) 등의 역사적 교훈도 분명 있겠다. 어쨌든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면, 중국인들과의 소통이 쉽지 않다.

반대로 분명해 보이는 표현 안에 뭔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은, 서구식의 ‘직설적 화법’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칼을 매우 여유롭게 쓴다(遊刃有餘)

알고 나면, 칼을 씀이 매우 편하다. 칼날 위에서도 자유롭다! 상대방이 변칙적인 게임을 한다고 해서 ‘그런 상대는 피곤하다’며 시합을 포기할 순 없다. 대부분의 경기에서는 내가 입맛에 맞는 상대방을 선택할 수 없다. 큰물로 공격해오면 흙으로 막고, 군대가 오면 장수가 막는다(兵來將擋 水來土掩). 누가 오든 뭐가 오든 우리가 그것에 맞게 준비하면 된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고 복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한편, 지구에서 역사적으로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 일본 그리고 베트남뿐이다. 이들은 중국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고 있다. 중국을 사랑하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잘하자는 것이다. 정말로 잘 지내도 좋지만, 잘 지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지혜롭게 사이 나쁘게’ 지내야 한다. 손절도 때가 있고, 계획이 있어야 한다. 추락하는 증시에서도 손해를 덜 보거나 심지어는 이익을 내는 경우도 있다.

자신을 아는 현명함(自知之明), ‘너 자신을 알라’는 최고의 경지다. 어렵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내가 몰라도’ 된다. 그렇지만 ‘내가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야 한다. 리더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 확신에 빠진 리더가 이끄는 조직은 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

류재윤 협상·비즈니스 문화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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