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중국의 뒤통수 때리기에 이골이 난 북한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중국의 뒤통수 때리기에 이골이 난 북한

    국군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고 많은 병력이 병영 밖으로 나간 상태에서 기습을 가한 북한군은 손쉽게 서울을 점령했다. 중앙포토 천리마(북한)가 용(중국)의 뒤통수를 때린 적이 있을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할 얘기다. 하지만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천리마가 하늘을 나는 용의 뒤통수를 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 세 가지를 들어보겠다.     첫 번째, 김일성은 한국전쟁 당시 마오쩌둥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렸다. 사연은 이렇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외국 신문이 전한 뉴스를 통해서 알았다. 믿기지 않을지 몰라도 사실이다. 마오쩌둥은 당시 김일성을 ‘괘씸한 놈’이라고 욕하며 화가 나 의자를 집어 던진 것으로 알려진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언제 전쟁을 시작할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나 군사 정보를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 왜?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을 승인 받았다. 스탈린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선 미국의 개입 여부를 검토해 보고 중국 지도부의 찬성을 얻는 게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승인을 들고 1950년 5월 13일 베이징을 방문했다.      ━  김일성 남침 사실 신문 보고 안 마오    김일성은 스탈린이 승인한 이상 마오쩌둥은 따라줄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대외정책에서 중국의 독자성은 거의 배제돼 있었다. 이를 ‘대소일변도(對蘇一邊倒)’로 표현한다. ‘일변도’는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공산주의에 무조건 복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김일성은 형식적으로 마오쩌둥에게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전쟁을 개시한다는 정도만 알렸다.   마오쩌둥도 김일성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중국주재 소련대사 로신에게 스탈린의 설명을 듣고 싶다고 요청했다. 스탈린의 대답은 중국과 북한이 공동으로 최종 결정을 하라는 것이었다.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5월 15일 다시 만났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스탈린과 합의한 3단계 작전을 설명하고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마오쩌둥의 행동에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장면이다. 큰형님(스탈린)이 결정했으니 작은형님(마오쩌둥)은 따라주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전쟁 날짜를 미리 알려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김정일이 후진타오의 뒤통수를 쳤다.  북한이 제1차 핵실험을 감행한 2006년 10월 9일이다. 그 유명한 ‘20분 전 통고’가 발생한 날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기 전 중국에 알려준 것은 고작 20분 전이었다. 사전 통보는 적어도 24시간 전에는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날 중국의 체면은 형편없이 구겨졌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고 알려졌다. 평양은 최진수 주중 북한대사에게 핵실험을 실시하기 2시간 전에 알렸다. 그리고 중국에 “30분 전에 알려주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지령을 받은 최 대사가 이유는 모르지만 10분 더 늦춰 중국에 통고했다고 한다.    ━  핵 실험 불과 20분 전 중국에 통보   중국 지도부는 북한에서 통보를 받을 당시 정신이 없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0월 8일 방중해 중일 정상회담을 마치고 10월 9일 한국으로 떠나는 때였다. 그리고 10월 13일엔 노무현 대통령의 방중도 앞두고 있었다. 연이은 정상회담 준비로 한창 바쁠 때였다. ‘20분 전 통고’에 리자오싱 외교부장, 다이빙궈 외교부 부부장, 우다웨이 외교부 부부장 등 외교부 실무진들은 다급하게 긴급회의를 열고 어떻게 보고할지 논의했다. 그러나 정작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등 중국 지도부에 실제로 보고한 것은 핵실험이 실시된 직후였다고 한다.   ‘20분 전 통고’에 중국은 외교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북한에 노발대발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제멋대로(悍然)’라는 강한 어투를 사용한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이 북한 문제를 언급한 공식성명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한 건 처음이었다. ‘제멋대로(悍然)’는 냉전 시대 중국이 적국인 ‘미 제국주의’를 비난할 때 전형적으로 사용한 격한 표현이다. 분노가 정점에 달했다는 방증이다.   외교부장으로 1992년 김일성에게 한중 수교를 통보하러 방북했던 첸치천은 당시 일을 ‘여경재후(如骾在喉)’라고 표현했다. 목구멍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 같다는 뜻이다. 대놓고 북한에 욕을 할 수 없지만, 중국이 몹시 괴로운 상황에 부닥쳤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세 번째는 김정은이다.  시진핑이 2013년 3월 중국 국가주석으로 취임할 예정인 가운데 이를 얼마 앞둔 2월 12일 북한은 제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게다가 그날은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절 연휴 기간이었다. 중국의 잔칫날에 재를 뿌린 셈이다. 시진핑은 이에 앞서 북한에 자제를 부탁한 바 있었다. 그는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에서 총서기로 선출됐다. 곧바로 자신의 심복인 리젠궈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11월 30일 특사로 평양에 보냈다. 리젠궈는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추가 핵실험의 자제를 요청했다.      ━  김정은, “핵과 미사일은 중국과 관계없다”   하지만 김정은은 이는 “자주적으로 결정할 일이며 중국과는 관계없다”고 일축했다. 리젠궈가 북한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12일 북‧중 국경에서 가까운 동창리 발사대에서 장거리 탄도미사일 은하 3호를 발사했다. 시진핑이 제5대 ‘황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다. 미사일 발사로 김정은-시진핑 관계가 몹시 불편해졌는데 북한은 핵실험까지 감행했다.   핵실험 당일 오후 양제츠 외교부장은 지재룡 주중 북한대사를 외교부로 불러 “이번 만행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시진핑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핵실험 3개월 뒤인 2013년 5월 22일 중국을 방문한 김정은의 특사 최룡해 총정치국장을 대하는 데서 잘 나타났다. 군인 신분이었던 최룡해에게 군복을 벗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최룡해는 남색 인민복을 빌려 입고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을 만나야 했다.   그리고 냉담하게 회의를 진행했다. 시진핑은 최룡해가 건네는 김정은의 친서를 열어보지 않고 양제츠에게 맡겨버렸다. 최룡해는 시진핑에게 세 가지를 요청했다. ①원유‧식량‧화학비료 원조 재개 ②김정은의 조속한 중국 방문 ③장성택이 회수하지 못한 3억 달러 예금 인출 등이다. 하지만 시진핑은 최룡해의 요청에 조목조목 거절했다. ①북한의 태도 변화가 우선 ②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다 ③유엔 안보리 제재 상황이라며 냉담하게 잘랐다. 그리고 그동안 의례적으로 했던 환송 만찬도 없이 최룡해를 평양으로 돌려보냈다.   시진핑 분노의 하이라이트는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된 이후 평양보다 서울을 먼저 방문한 것이다. 2014년 7월이다. 중국 지도자가 평양보다 서울을 먼저 방문한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김정은이 뒤통수를 매섭게 때린 것에 대한 시진핑의 ‘복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북한은 북‧중 관계가 불편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제4차 핵실험(2016년 1월 6일), 제5차 핵실험(2016년 9월 9일), 제6차 핵실험(2017년 9월 3일)을 감행했다. 유엔 안보리 이사국인 중국의 처지에서 곤혹스러운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북한의 추가 핵실험에 따른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이 추가되더라도 시진핑은 여전히 대북 교역을 지속했다는 점이다. 얼굴은 붉혀도 아예 등을 돌릴 수 없는 북·중 관계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2022.12.13 06:00

  • [한우덕의 중국경제 이야기] 중국 공산당은 어떻게 민영기업을 장악하나

    [한우덕의 중국경제 이야기] 중국 공산당은 어떻게 민영기업을 장악하나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시진핑 3기, 중국 경제정책은 어떤 모습일까? 중국이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부문에서도 국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당(黨)의 개입을 늘려가면서 제기되는 문제다.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집권 기간 '시진핑 경제'는 이미 그 속살을 충분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시진핑 3기 중국 경제정책은 1, 2기 집권기의 정책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그 노선을 해외에 '수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가 시진핑 시기의 과거 정책 흐름을 다시 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시 국제 경제의 큰 흐름과 연계해서 봐야 뚜렷이 보인다.  ━  시간은 누구의 편이었나?   2000년 5월, 미국 의회는 중국에 대한 '항구적 정상교역관계(PNTR)' 지위 부여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중국이 PNTR 지위를 얻는다면 매년 거쳐야 하는 의회의 '최혜국대우(MFN)'심사를 피할 수 있게 된다. 정상적인 교역대상국이 되는 것이다.     중국이 바라고 또 바라던 일이다. 그러나 법안은 당시 미 의회 야당이었던 공화당의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민주·공화 양당은 한 치의 양보 없는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바로 그 시기, 공화당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시애틀에 있는 보잉 공장을 방문한다. 그는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PNTR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서 이렇게 말한다. 중국과 자유롭게 교역하라. 시간은 우리 편이다(Trade freely with China and time is on our side). 그의 논리는 분명했다. 중국 경제가 미국 덕에 성장한다면 반드시 자유시장 경제 체제로 편입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미국 경제가 중국을 압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중국이 셔츠 1억 장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해 봐야 그들에게 보잉기 한 대 팔면 그뿐'이라는 시각이다.   덕택에 '중국 PNTR' 법안은 통과됐다. 공화당 지도부로서도 대통령 후보가 찬성한다니 더 이상 밀어붙이기가 어려웠다. 더 나아가 중국은 그다음 해인 2001년 11월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에 성공했다. 미국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워싱턴 컨센서스 vs. 중국모델(中國模式)   [사진 셔터스톡] 그로부터 20여 년, 시간은 정말 미국 편이었을까? 부시 전 대통령의 말 대로 중국은 자유시장 경제 국가가 되었을까?   아니다. 미국의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무럭무럭 성장한 중국 경제는 미국을 치받고 있다. 중국이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했던 2001년만 하더라도 중국의 GDP(국내총생산)는 약 1조4000억 달러로 미국(약 10조5000억 달러)의 약 13.3%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2008년 20%를 넘어서더니 지금은 80%에 육박하고 있다. 시간은 중국의 편이었던 셈이다.   1990년대, 그리고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소련은 무너졌고, 미국 중심의 단극 질서가 형성됐다. 미국의 '자유 자본주의' 모델이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쳤다. 이를 대변하는 말이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다. 무역 및 자본 이동의 자유화, 정부의 개입 축소, 민영화 등을 골자로 한다.   다른 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도 결국 '워싱턴 컨센서스'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미국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나라 중국은 달랐다. 겉으로 보기에 시장경제 논리가 작동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국가가 산업 핵심을 장악했다. 국가가 경제 주체로 시장에 뛰어드는 '국자 자본주의(State Capitalism)'적 성향이다.   이를 보여주는 말이 당시 유행한 '중국모델(中國模式)'이다. 정부주도로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경제개혁을 추진한다는 게 골자다. '워싱턴 컨센서스와 대비되는 말로 쓰였다. 그렇다면 중국의 '국가 주도형 시장경제'는 어떤 모습으로 진행됐을까.    ━  당서기를 뽑습니다.   국유기업이야 국가가 소유한 기업이니 국가 주도로 움직인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민영기업에도 국가(당)의 힘이 강하게 미친다. 그 통로가 바로 공산당 조직이다.   시진핑은 2017년 말 집권 2기를 시작했다. 당시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게 '당 건설'이다. 민영기업은 핵심 대상 중 하나였다. '모든 민영기업은 빠짐없이 규모에 맞게 당 조직을 건설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공산당 당장(黨章)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당원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당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3명 이상의 당원이 모이면 당지부(黨支部)'를 만들 수 있고, 50명이면 당총지부(黨總支), 100명 이상이면 당위원회(黨委)를 설립할 수 있다.'   잘 나가던 IT분야 민영업체들이 조여 드는 당의 압박에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당에 잘 보여야 했다. 일부 거대 민영회사는 외부에서 당위원회를 이끌 당서기를 영입했다. 유명 포털인 바이두(百度)의 경우 연봉 약 1억원을 걸고 모집공고를 내기도 했다. 당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이끌어갈 '로비스트'가 필요했던 때문이다.  ━  한 기업 내 두 개 명령 시스템   민영기업은 오늘 중국의 중국경제를 만든 주역이다. GDP의 60%, 일자리의 80%를 이들이 창출한다. 인터넷 혁명의 주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부처님(당)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다. 기업 내 당조직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기업 내 당조직은 무슨 일을 할까? 당장에 나와 있는 기업 내 당 위원회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 1. 당 노선과 방침의 관철 」 「 2. 기업이 법을 지키도록 지도(引導)와 감독 」 「 3. 직원 단결 」 「 4. 기업과 직공의 합법적 권익 수호 」 「 5. 기업의 건강한 발전 」   기업으로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항목들이다. 당은 회사 안으로 파고들어 해당 기업이 당노선을 잘 따르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있다. CEO에게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 주요 경영 활동은 당조직을 통해 상세히 위로 보고된다. 회사 조직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권력 체계가 존재하는 셈이다.   CEO 지시도 따라야 하고, 당 위원회 눈치도 봐야 하고… 그게 국가 자본주의 체제하의 민영기업 모습이다.   시진핑 3기를 시작하면서 중국이 내건 게 '중국식 현대화'다. 세상에는 미국식 자유 자본주의만 있는 게 아니라고 중국은 말한다. '국가 주도의 시장경제'를 의미하는 중국식 현대화 발전 모델도 있다. 그러니 경쟁을 통해 누가 더 효율적인 지를 따져보자고 시진핑은 도전장을 던진다. 그 '시진핑 경제 체제'를 구동시킨 역학 중 하나가 바로 '한 기업 내 두 명령 체계'였다.   국가 주도형 시장경제 시스템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다른 나라도 참조할 만큼 보편화된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이 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다. 중국 경제가 이전처럼 고속 성장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중국모델'은 중국에서나 통하는 구닥다리 논리일 뿐이다.   중국식 성장모델의 핵심인 '한 기업 내 두 명령 체계'가 과연 앞으로 제대로 작동할지, 다음 칼럼에서 더 알아보자.  

    2022.12.12 06:00

  • [중국읽기] 달라진 중국의 한반도 3원칙

    [중국읽기] 달라진 중국의 한반도 3원칙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북한이 미사일을 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저럴 돈으로 쌀이나 사지.”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의 올해 식량 부족분은 121만톤. 이를 쌀과 옥수수로 나눠 사는 데 약 5500억원이 든다. 북한이 올해 쏴댄 각종 미사일은 63발. 그 비용이 무려 1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 돈을 허공에 날리고 있는 셈이다. 이어지는 생각은 누가 뒷배를 봐주기라도 하나인데 틀리지 않았다. 중국은 2020년 80만톤 등 매년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 북한의 유난히 잦은 미사일 도발 배후에도 중국의 달라진 한반도 정책이 있다. 중국은 1992년 한국과 수교한 이래 한반도 3원칙을 고수해 왔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비핵화, 대화와 협상을 통한 자주적 해결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한반도 3원칙에 변화가 생긴 게 최근 알려졌다. 얼마 전 한국유라시아학회가 주최한 ‘우크라이나 전쟁과 세계: 국가, 지역, 국제질서’ 국제학술회의를 통해서다.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스인훙(時殷弘) 중국 인민대 교수가 그 내용의 일부를 밝혔다. 미·중 관계 전문가인 스 교수는 중국 국무원 참사로 외교부에 자문하는 등 중국 외교 정책에 밝다. 그런 스 교수의 발표와 토론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지난해 3월 미 앵커리지에 열린 중·미 고위급 회담 이후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크게 변했다.” 당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양제츠 중국 정치국원이 얼굴을 붉히며 싸웠다.   스 교수는 “중국은 미국이 중국을 겨냥한 팀을 만들고 있으니 중국도 이에 대항할 팀을 만들기로 했다. 이에 북한과 러시아, 이란에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으며 이후 중국 고위층의 의제에서 비핵화 부분이 사라졌다. 중국으로선 비핵화보다 북한과의 우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한국이 아직도 중국의 한반도 정책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놀랍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달 발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 관련해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주문한 게 중국 발표문엔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점이 떠오른다. 당시 시 주석은 오히려 “한국이 남북관계를 개선하라”며 한국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과 같은 발언을 했다. 미·중 갈등 속 진영 구축에 나선 중국이 북한 편들기에 나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 비핵화 관련 무슨 역할을 해달라고 하는 건 쇠귀에 경 읽기다. 중국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환상을 가져선 안 된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달라졌다면 우리의 대중 정책도 변해야 한다. 우리 안보를 지키기 위한 조치에서 중국 입장에 대한 고려는 달라진 중국 정책만큼이나 조정되는 게 맞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2022.12.12 00:39

  • [하남석의 중국탐구] 中 백지시위 어떻게 될까..."천안문때완 다를 시진핑 갈라치기"

    [하남석의 중국탐구] 中 백지시위 어떻게 될까..."천안문때완 다를 시진핑 갈라치기"

    지난달 27일 베이징에서 벌어진 백지 시위. 로이터=연합뉴스  ━  지난 10년의 사회 관리     중국 공산당은 개혁개방 이후 경제발전이란 성과를 창출하는 것으로 그 체제의 정당성(performance legitimacy)을 확보해왔다. 그러나 성장과정에서 기존의 사회관계들이 해체되고 빈부격차가 확대되면서 사회적 갈등이 심화해 사회 안정성이 흔들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지속적인 체제 안정성 확보를 위해 2000년대 들어 ‘사회건설’과 ‘사회관리’를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게 됐다.    후진타오 시기와 시진핑 시기의 사회 관리 방식을 비교하면, 사회의 안정유지(維穩)를 목표로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그 목표를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선 차이가 난다. 후진타오 시기엔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라는 슬로건 속에 19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 시장화와 상품화로 타격을 입은 사회를 치유하기 위한 보호적 조치들을 취했다. 여러 탄원이나 군체성 사건 등이 발생하면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며 사회적 갈등을 협상과 제도 개선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시진핑 시기 들어선 사회적 갈등을 사회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통해 해결하려 하고, 이와 관련해 치안과 관련한 공안 기구들의 힘을 늘리는 한편 이들 기구에 대한 당의 통제 역시 강화하려 했다. 부연하자면 비교적 거버넌스(治理)와 협치를 강조했던 후진타오 시기와 달리 시진핑 시기 들어선 당조직으로의 집중을 강조하고 기존 사회 영역의 활력을 축소시키기 시작했으며, 사회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려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온-오프라인에서의 통제와 검열, 감시가 대폭 늘어났으며, 제로 코로나 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그 기술의 남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견, 중국 사회는 이러한 감시와 통제 강화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크게 보면 중국사회의 저항은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로 전국 규모의 거대한 시위는 없었다. 이후 노동자나 농민들의 저항이 산발적으로 있었으나 그 양상은 대부분 “탐관오리에는 반대하나 황제에게는 반대하지 않는다(只反貪官, 不反皇帝)”에 그쳤다. 즉 중국 공산당을 대체할 대안 세력이 없고 다당제나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없는 정치적 상황에서 임금체불이나 부정부패, 혹은 직접적인 행정적 통제로 자신에게 직접 피해를 끼치는 지방 관료나 자본가에 대한 저항은 있었지만, 당 중앙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들을 처벌해달라는 청원을 하는 대중저항의 양상이 이어져왔다.     이는 강력한 중앙이 있어야 기층 지역이나 세력가들에 대한 견제가 가능하다는 중국 인민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진핑 1인으로의 권력 집중이 한층 더 강화되고 제로 코로나 정책은 물론 사회에 대한 검열 통제가 심화되며 부동산 시장 침체 등 경기 둔화까지 이어지자 점차 체제에 대한 불만이 증가하는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1989 모멘트의 재림     2022년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 개막 사흘 전인 10월 13일, 베이징 도심의 고가도로 중 하나인 쓰퉁차오((四通橋)에서 현수막 시위가 벌어졌다. 그 현수막에는 다음과 같은 구호가 적혀있었다.      “PCR 검사가 아닌, 밥을 원한다/ 봉쇄와 통제가 아닌, 자유를 원한다/ 거짓말이 아닌 존엄을 원한다/ 문화대혁명이 아닌 개혁을 원한다/ 영수가 아닌 선거를 원한다/ 노예가 아니라, 공민이 되자/ 수업 거부! 파업! 독재자 매국노 시진핑 파면!” 지난 2018년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의 3연임 제한 조치가 철폐되자 주로 해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Not My President” 캠페인이 벌어졌었다. 한데 이번엔 그 구호가 “시진핑 독재자 파면, 제로 코로나 정책 반대” 등으로 훨씬 더 강력해졌다. 그리고 해외 대학들뿐만 아니라 감시가 삼엄한 중국 국내에서도 비록 소수이지만 여러 지역에서 낙서 시위가 벌어졌고, 상하이에서는 몇몇 청년들이 20차 당대회 폐막일 밤에 일종의 백지 현수막을 들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기도 했다.     이 같은 흐름 속에 아이폰을 만드는 허난성 정저우의 폭스콘 공장에서 코로나 재유행으로 인한 폐쇄적 운영에 대해 수많은 농민공들이 불만을 표출했으며, 심지어 대규모의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11월 24일 벌어진 우루무치 아파트 화재 참사는 중국 인민들의 커다란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우루무치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났는데 봉쇄 방역조치로 인해 제대로 화재진압과 탈출이 이뤄지지 않아 10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고 9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알려졌다.     란저우에서는 분노한 시민들이 PCR검사소를 무너뜨리고 광저우에서도 격렬한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상하이의 우루무치로(路)에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사 추모 시위가 벌어졌고, 이곳에서는 심지어 공산당 통치와 시진핑에 대한 하야 구호까지 등장했다. 베이징의 량마허에서도 백지를 든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졌고, 다음날 량마허 거리가 원천봉쇄로 막히자 시위대는 인근 고가도로인 눙잔차오(農展橋) 위에서 기습 백지 시위를 벌였다. 이에 지나가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호응하기도 했다. 대학에서도 학생들의 집단 시위가 벌어지고 봉쇄 정책 폐지와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게시물들이 나붙었다.     이렇게 중국의 주요 대도시들과 대학에서 같은 구호가 등장한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것은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처음이었다. 지난 30여년간 노동자 시위, 농민 시위, 지식인들의 저항, 일부 생태 운동, 변경에서의 소수민족 운동 등이 계속 벌어졌지만 대부분 지역에서의 이슈로 끝나거나 당사자 문제로 국한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 운동들이 화학적 결합을 일으키기는 힘들었다. 전반적으로 중국의 사회적 저항은 분절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국면은 제로 코로나 방역 정책에 대한 반대라는 하나의 구호로 요구 사항이 모였고, 여기에 경기 둔화, 청년 실업, 언론 자유의 부재, 강압적 정책에 대한 불만 등이 더해진 상황이다. 무엇보다 우루무치 아파트 화재 참사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는 다른 나라의 여러 참사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역할을 묻는 티핑 포인트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간 중국 당국은 제로 코로나 정책은 다른 나라에 비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잘 지켜온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선전해왔다. 한데 오히려 봉쇄정책으로 인해 화재진압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역설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간 쌓였던 불만이 터져 나오는 계기가 돼버렸다.      ━  향후 백지 시위는 어떻게 될까?     1989년의 재림은 잔혹한 무력진압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당시와 같은 전면적인 무력 진압의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그렇게 높지 않다.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에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과 항쟁 지도부를 직접적인 타격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지만 현재 시위는 21세기 들어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났던 양상과 비슷하게 어떤 조직이나 세력을 구심으로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중국 인민들의 전반적인 방역정책 완화 요구를 인민 내부의 적이나 외부세력의 영향으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중국 당국의 대응 방향은 저강도 탄압으로 시위 확산을 막고 방역 정책 조절로 시위대의 요구를 갈라치기하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의 방역완화 요구는 일정하게 수용하되 언론자유 요구나 체제비판의 목소리는 그와 분리시켜 “외부세력”으로 몰아 탄압할 것이다. 실제로 중국 당국은 그동안 신장위구르 지역이나 홍콩 시위 당시 활용했던 여러 디지털 감시 기술을 사용해 시위 주동자들을 솎아내 검거하고 탄압하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제로 코로나 방역정책의 대폭 완화로 시위가 소강국면으로 접어든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중국 인민들은 시진핑 시기 들어 처음으로 자신들의 불만 표출과 요구가 정책에 반영되는 경험을 했다. 게다가 비록 소수에 불과할 지라도 엄격한 통제와 검열을 뚫고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의 저항가수인 리즈(李志)는 자신의 노래에서 “인민에겐 자유가 필요 없어. 지금이야말로 가장 살기 좋은 시대거든(人民不需要自由, 這是最好的年代)”이라고 반어법으로 시진핑 시기를 풍자했지만, 이제 중국 인민들은 자유가 필요하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향후 중국 당국의 방역 및 경제사회 대책이 어떻게 펼쳐지느냐에 따라 중국의 민심은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글 하남석 서울시립대 중국어문화학과 교수      

    2022.12.09 06:00

  • [조평규의 중국 컨설팅] 중국 진출한 한국 기업, 철수가 답인가?

    [조평규의 중국 컨설팅] 중국 진출한 한국 기업, 철수가 답인가?

    [사진 셔터스톡] 중국 공산당 20차 당 대회가 끝나자마자 시진핑 정부는 발 빠르게 향후 5년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시진핑 주석 1인에게 집중되며 강력해진 권력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이견(異見)을 용납하지 않는 마오(毛) 시대의 독재적 이념화된 국가로 회귀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중국은 탈동조화(Decoupling) 및 블록화가 진행되는 글로벌 경제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국가적 자원과 역량을 투입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20차 당 대회가 끝나면 대도시의 봉쇄가 완화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완화의 수준은 일부분에 그치고 더디다.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이 본격화한 지난 3월부터 10월까지 8개월간, 인천과 베이징을 오가는 항공편은 같은 기간 대비 10분의 1로 줄어들었고, 여객 감소는 99%에 달해 인적교류의 단절 현상이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다. 또한 중국 대도시의 전면적인 봉쇄 조치와 해외 입국자들에 대한 장기간 강제 격리 조치로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은 거의 방치된 수준이거나 철수를 심각하게 검토하는 기업들이 많다.   대기업은 상대적으로 좀 나은 편이지만, 현지에 몇몇 직원만 파견해 공장을 운영 중인 중소기업의 애로사항은 한둘이 아니다. 중국에 투자한 우리 기업들의 절반 이상이 사업을 축소하거나 철수, 또는 통폐합을 고민하고 있다. 중국에 진출한 자영업자들은 이미 대부분 철수했고 현지에서 버티던 사람 중 상당수도 철수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의 고민은 중국이 우리의 최대 수출국으로, 시장이 넓고 커 포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중국에 치우친 시장을 다변화한다고 유럽이나 동남아 시장을 모색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들 지역에 중국을 대체할 만한 거대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교역액의 25% 이상을 중국에 의존하면서 중국을 배제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미·중 경제 전쟁의 격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해 서방세계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중국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건 매력적인 거대 소비 시장과 함께 중국의 국내 정치가 상대적으로 안정돼 미래를 낙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중(反中) 감정에 치우쳐 가까이 있는 중국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우리는 중국과 수천 년간 교류한 경험을 가진 중국을 잘 아는 나라다. 국가 간의 일은 이해(利害)관계가 전부다. 중국을 잘못 이해(理解)해서 손해를 보거나 치욕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현재 반중 정서가 넘쳐난다. 여과 없이 쏟아내는 감정의 표출은 국익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물론 한국인들이 반중 감정을 가지게 된 데에는 중국의 책임이 가장 크다. 우리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는 동북공정,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내정간섭과 경제 보복 행위,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한 중국의 지원 등으로 한국인들의 반중 정서가 80%를 넘어섰다. 한중 관계가 새로운 전환기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은 중국 사회가 코로나로 인해 경직되고 이념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이때를, 중국을 배우고 연구하는 기회로 삼는 전향적이고 진취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중국에서의 철수는 간단한 판단으로 가능하지만, 오히려 중국에서 끝까지 버티면서 생존을 위한 다양한 활동과 대비책을 연구하는 게 미래에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국가 간에는 상호 존중과 공동이익이 선행돼야 건전한 발전을 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중국이 기업인들의 수월한 한·중 간 이동권 보장 협정인 ‘패스트 트랙(Fast Track)’ 제도를 신속하게 재개하도록 적극적으로 협상을 요구해야 한다. 이 제도가 대기업에만 혜택이 가는 제도인 만큼,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을 위한 대책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최근 중국 입국자의 격리 기간을 10일에서 8일로 단축하고, 유전자 증폭(PCR) 검사 횟수를 줄이는 등 완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에 앉아서 중국 상황을 판단하기보다, 장기간 격리를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중국 현장을 자주 방문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중국과 세계의 변화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대중국 무역적자는 해를 거듭할수록 불어날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치명적인 위험이다. 중국에 진출해서 지난 20~30년간 온갖 경험과 학습을 한 우리 기업들은 철수나 중국 사업 포기 같은 극단적인 의사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기업에서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는 경영자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20차 당 대회에서 중국이 경제발전의 기본 목표와 방향을 ‘고품질발전(高質量發展)’으로 정하고 산업의 첨단화를 제시하며 정치국 위원으로는 의료, 핵, 우주, 환경, IT 등 전문가를 등용해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 것에 비하여 우리는 국가적 비전조차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중국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존재하는 지역이다. 중국의 양안 관계가 경색돼 대만 침공 가능성이 높아가고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도발이 상시화되고 있어 군사적인 충돌이 발생하면 한미동맹을 맺고 있는 우리는 원하지 않더라도 미·중 무력 충돌의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외부로부터 위협이나 불안정을 강요당하는 열악한 환경은 우리를 항상 깨워 있도록 자극하는 요인이 된다.   사람들은 위에는 하늘, 아래에는 땅이 있어야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역(周易)은 "땅은 위에 있고, 하늘은 아래에 있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다. 하늘과 땅이 거꾸로 돼 있으면, 서로의 위치가 불안정해 쉽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현대 철학자 런지위(任繼愈)는 ‘중국철학사’에서 ‘역경(易經)’을 인용해 “사물은 변화 발전해야 미래가 있어 길(吉) 하고, 정체되거나 변화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어 흉(凶)하다”라고 설명했다.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정체된 상황보다, 위태하지만 변화하는 것이 길(吉) 하다.   한중간의 변화와 갈등과 치열한 경쟁 환경은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경쟁력을 기를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면 좋은 약이 될 수 있다. 중국에서 철수가 아니라 오히려 중국 전문가를 초빙하고 연구하며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전략을 세워야 할 때이다.   글 조평규 동원개발 고문 더차이나 칼럼  

    2022.12.07 06:00

  •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한은 중국의 번견(番犬)인가?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한은 중국의 번견(番犬)인가?

    북중관계 [사진 셔터스톡]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관계를 꼽으라면 북‧중 관계도 그 중 하나일 게다. 북‧중은 필요하면 서로를 선혈로 맺어진 ‘혈맹(鮮血凝成)’ 관계라고 추켜세운다. 주로 미국에 공동 대응할 때 사용한다. 그러다가도 우리가 언제 그랬냐며 서로 으르렁거릴 때도 많다. 1400Km의 결코 짧지 않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복잡한 사연 또한 얼마나 많겠나.   북한과 중국은 진정 어떤 관계일까? 겉으로 표방하는 ‘혈맹’, ‘순망치한(脣亡齒寒)’,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일까? 아니면 국제정치학자들이 분석하는 서로에게 필요한 ‘전략적 자산’일까? 북‧중 관계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더라도 이것만은 꼭 기억하면 좋겠다. ‘얼굴을 붉힐 수는 있어도 아예 등을 돌릴 수는 없는 관계’라는 점을 말이다.    ━  중국 믿지 말라는 북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중국을 믿지 말라”고 당부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당부가 뜻하는 건 앞으로 중국을 상대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중국과의 관계란 것을 끊을 수 없으니 그럴 바에는 ‘마음을 주지 말고 중국을 잘 활용하라’는 의미다.   이 얘기는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지만 1972년의 닉슨 방중과 1992년의 한‧중 수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역사적 사건들은 북한에 한마디로 ‘쇼크’ 그 자체였다. 북한은 이 같은 일을 겪으며 중국이라는 나라는 언제든지 자신의 이익에 따라 북한을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필자는 북한의 고위 관리들로부터 중국에 대한 불만을 들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맨 정신으로 말하기는 불편했는지 술이 여러 잔 들어간 이후 그때서야 털어놓기 일쑤였다. “중국은 북조선에 죽지 않을 정도만 지원합니다” “남조선은 좋겠어요. 든든한 큰집(미국)이 있잖아요. 우리 큰집(중국)은 영~ 아닙니다.”    ━  북한을 번견 취급하는 중국   북한 관리들은 미국과 중국을 큰집으로 부르는데 스스럼이 없었는데 미국이 지원한 남한과 중국이 지원한 북한을 비교하면 속이 터진다는 이야기였다. ‘남 탓하기’에 이골이 난 북한 관리들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중국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은 또 중국 관리들끼리 모여 북한을 ‘번견(番犬)’이라고 비웃는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번견은 집을 지키거나 망을 보는 개를 말한다. 북한을 개 취급하는 것인 데 기분이 좋을 리 없을 것이다. 중국은 왜 북한을 번견이라 부르나.   중국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는 미국이다. 중국 외교의 90%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미‧중 갈등이 고조돼 군사적으로도 위험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미국과 직접 대결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이럴 때 북한이 중국을 대신해 번견처럼 미국에 짖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개에게 먹이를 주듯 중국이 북한에 지원한다는 이야기다.   이와 관련 최근 상황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북한은 지난 9월 25일 미사일 도발을 시작으로 두 달 넘게 무력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례적이다. 그것도 한미연합훈련을 하는 도중에 도발을 감행했다. 과거엔 한미연합훈련 이전이나 이후에 일회성 정도로 그쳤는데 말이다.   더 놀라운 건 미사일을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속초 앞바다에까지 낙하시킨 점이다. 북한 미사일이 NLL 이남에 떨어진 것은 정전 이후 처음이다. 북한 국방성은 핵추진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CVN-76)를 포함한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대응이라는 설명까지 내놓았는데 예전과 비교하면 너무 위험하고 무모한 도발이었다.    ━  미사일 쏘자 쌀 전달   한데 그 배경과 관련해 바로 중국이 북한을 번견으로 이용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물론 북한이 언제나 중국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건 아니다. 북한은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전략적 환경이 악화하더라도 남의 말을 듣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번엔 공교롭게도 미국에 대한 중국의 불만과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북한의 불만이 겹친 듯하다.   결과적으로 그와 같은 번견 노릇에 대한 대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이후 중국 단둥에서 북한 신의주로 들어가는 열차 안에는 식량이 가득 실려 있었다고 한다. 북한은 올해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 한 톨의 쌀이라도 아쉬운 상황이다. 지금은 중국의 지원이 북한에 너무나 절실한 때인 것이다.   그럼 중국은 북한을 어떻게 생각할까? 중국도 북한에 대한 불만이 만만치 않다. 리란칭(李嵐清) 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은 “조선의 위장에는 걸신이 들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걸신(乞神)은 빌어먹는 귀신을 말한다.   리란칭은 1997~2002년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를 정도로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애장(愛將)으로 불리던 사람이다. 리란칭의 말은 그가 국무원 대외경제무역부장(현 상무부장, 1990~1998) 시절에 한 것으로 당시 대외경제무역부가 대북 원조를 담당한 부처였다. 리란칭은 북한에 경제 원조를 아무리 많이 해도 북한은 늘 만족하지 않고 계속 요구한다며 한탄조로 말한 것이다.    ━  미중과 북중 관계 함수   북한은 중국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지원해준다며 불만이 있고, 중국은 아무리 북한의 뱃속에 밀어 넣어도 바닥이 드러난다며 한숨을 쉬는 상황이다. 중국은 지난 70여 년간 제공한 대북 원조액을 모두 합치면 북한을 하나 더 만들 수 있다는 말도 한다. 표현이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중국은 그만큼 자신의 대북 원조가 막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생각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북한은 중국이 죽지 않을 정도를 지원해주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북한을 잘 다루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중국에 기대고 싶지 않은 마음은 꿀떡 같다. 그래서 다른 탈출구를 찾으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미국이다.   미국과 수교하면 더는 중국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될 리 없다.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한국전쟁을 벌인 미국의 동북아 전략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쳐다본다. 결국 북한은 미‧중 관계가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북‧미 관계에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북한은 2018년 싱가포르,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 많은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미국과 대화하면서 북‧미 수교는 천천히 하더라도 일부 경제 제재만이라도 먼저 해제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북한의 예상보다 높았다.   북한은 일부 경제 제재만 해제되면 중국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기술은 없어도 당장 허기를 면할 기술과 노동력 정도는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바람이 물거품이 되고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 내부의 친중파들에게 ‘빌미’만 제공하게 됐다. 다시 중국으로 유턴해야 한다는 압력 말이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2022.12.06 06:00

  • [한우덕의 중국경제 이야기] 중국과 미국, 늑대인가 댄스 파트너인가

    [한우덕의 중국경제 이야기] 중국과 미국, 늑대인가 댄스 파트너인가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시진핑 집권 3기,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다. 많은 전문가가 중국 정치를 말하고, 경제를 전망한다. 이 논의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글로벌 트렌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글로벌 정치경제 역학이 중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중국은 그 글로벌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걸 알아야 미래 중국이 보인다.  ━  저물어가는 '세계화 시대'   지난 30년을 특징짓는 글로벌 경제 트렌드는 '세계화(Globalism)'다. 1991년 소련 해체가 시작이었다. 냉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미국식 '자유 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y)'가 글로벌 스탠더드로 대두했다. 세계화의 시작이다.   핵심은 '국경 없는 경제(borderless economy)'다. 투자와 무역은 국경을 구분하지 않았고, 기업은 최적의 환경을 찾아 국경 너머로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깔았다. 공장은 개발도상국으로 몰렸고, 선진국은 금융과 기술로 산업을 고도화했다. 산유국들도 세계화에 동참하면서 에너지 가격도 안정세를 유지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GVC(글로벌 밸류 체인)이 탄탄하게 형성됐다.   그 세계화에 균열 조짐이 뚜렷하다. 미-중 무역 전쟁은 기술 패권전쟁으로 확산 중이다. 2019년 말 시작된 코로나19,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겹치면서 GVC는 큰 타격을 받았다. 애플은 스마트폰 공장을 중국에서 빼야 할 처지이고, 중국은 희토류를 무기화할 태세다. 반도체 공급망도 위태롭기만 하다.   '30년 세계화(30 Years of Globalism)' 시대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경제 국경'은 다시 뚜렷하게 등장하고 있다.  ━  덩샤오핑의 선택, 사회주의 시장경제   세계화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 중국은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1989년 6월에 터진 천안문 사태 여파로 개방의 문을 걸어 잠가야 했다. '서방이 평화를 가장해 중국을 뒤엎으려 한다(和平演變)'는 반(反)서방 정서가 짙었다. 중국은 그렇게 1990년, 1991년을 보내고 있었다.   1992년 들어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해 새벽부터 남쪽 도시에서 덩샤오핑의 음성이 전해졌다. 소위 말하는 남순강화(南巡讲话, 남부를 돌며 한 연설)였다. 그가 전한 메시지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주의 국가는 계획경제를 해야 하고, 자본주의 국가는 시장경제를 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나. 사회주의 국가에도 시장경제 요소가 있고, 자본주의 나라에도 계획경제 요소가 있다. 계획경제, 시장경제는 수단일 뿐이다. 사회주의의 나라 중국도 이제는 시장경제를 채택해야 한다.”   중국은 그해 가을 열린 당 대회(14차)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을 선택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소련의 몰락으로 야기된 미국 주도의 글로벌 표준을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다. 중국은 개혁의 기치를 다시 올렸고, 서방을 향해 개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  '늑대와 함께 춤을'   유일한 규칙 제정자였던 미국이 세계화의 우산을 넓게 펴면서 '자유 시장경제'는 맹렬하게 퍼졌다. 1995년 기존의 우루과이라운드(UR)를 대신한 세계무역기구(WTO)가 발족한다. 관세는 낮아졌고, 투자 장벽은 허물어졌다.   중국에 또 다른 선택의 시간이 왔다. WTO에 가입할 것이냐, 마느냐가 그것이다. 여론은 갈라졌다. 보수 성향의 전문가들과 관료들은 '서방에 아직 허약한 중국 경제를 내주는 꼴'이라며 반대했다. 미국이 늑대처럼 달려들어 중국을 뜯어먹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주룽지 총리가 총대를 멘다. '늑대와 함께 춤을(與狼共舞)!' 주 총리는 당시 상영되던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영화를 빗대 중국이 이제 서방 경제와 함께 춤을 춰야 할 시기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서방은 공포의 대상에서 '댄스 파트너'로 변했다.   결국 중국은 2001년 말 WTO에 가입했고, 세계화의 흐름을 탔다. 약 5억 명의 노동력이 서방경제시스템에 뛰어든 것이다. 중국 경제는 서방 경제 체제와의 접괘(接軌)에 성공했다.   그 결과가 글로벌 넘버투다. 중국은 WTO가입과 함께 '세계공장'으로 부상했고, 제조업 대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을 차례로 제치더니 2010년 결국 일본을 밀어내고 세계 제2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덩샤오핑의 선택은 옳았다!'라는 얘기가 중국 국내외에서 제기됐다. [사진 셔터스톡]  ━  2008년의 희극과 비극   2008년 8월 8일, 베이징에서는 거대한 글로벌 축제가 벌어졌다. 2008년 하계 올림픽이었다. '중국이 일어섰다!' 영화감독 장이머우가 올림픽 개막식을 통해 세계에 전한 메시지다. 화려한 군무가 거침없는 중국의 성장을 여실히 보여줬다.   바로 그 시간 '자본주의의 심장'이라는 월가는 흔들리고 있었다. 세계 금융위기가 터진 것이다.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표면화된 금융위기는 세계 전체로 퍼졌고, 서방은 때아닌 혹독한 겨울을 맞아야 했다.   중국에도 전염됐다. 그러나 대응은 달랐다. 국진민퇴(國進民退), 중국은 국가가 나서 경제 부양에 나섰다. 당시 GDP의 약 15%에 해당하는 4조 위안을 풀어 내부부양에 나섰다. 전국 곳곳에 철도를 깔고, 서부 벽지에 공항을 건설했다.   월스트리트 발 금융위기로 서방 경제가 침체 나락에 빠졌음에도 중국 경제는 독야청청 성장세를 유지했다. 2009, 2010년 전 세계 경제 성장의 절반을 중국이 담당했다.   只中國社會主義救西方資本主義. 중국 사회주의만이 위기에 처한 서방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다!   중국 국내에서는 '위대한 중국', '중화 민족의 부상이 멀지 않았다'라는 여론이 일었다. '중국도 이제는 NO라고 말할 수 있다(中国可以說不)'라는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편승해 몸집을 부풀린 중국이 미국에 대해 노(no)라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12년 가을 시진핑 1기가 출범했다.  ━  중국의 선택 시자쥔(習家軍)   세계화에 균열이 본격 시작된 것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이다(2017년).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걸었다. 글로벌리즘보다는 자국 이익을 강조했다. 아시아태평양에서 진행되던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서도 탈퇴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타깃을 중국에 맞췄다. 중국이 미국의 기술을 훔쳐서, 일자리를 앗아갔다고 거세게 공격했다. 중국 수입품에 보복 관세를 부과하고, IT기업을 특별 감시했다.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미국의 공세는 계속됐다. 오히려 치밀해졌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을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유일한 경쟁자이자 도전자(국가안보전략. NSS)'로 규정했다. EU 역시 중국을 '전면적 경쟁자'로 규정하는 보고서를 채택했다.   2022년 중국은 또 다른 선택을 한다. 시진핑 1인 체제, '시자쥔'의 전면적인 등장이다.   이 역시 세계화의 퇴조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국경을 넘나들던 GVC는 지금 삐걱거리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공세는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중국은 이에 대응할 강력한 리더십을 선택했다. '시진핑 1인 체제'가 그들의 답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시진핑은 구체적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다음 칼럼에서 계속하자.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woodyhan@joongang.co.kr      

    2022.12.06 06:00

  • [중국읽기] ‘3다 선생’ 장쩌민

    [중국읽기] ‘3다 선생’ 장쩌민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은 과거 집권 시기 베이징 외교가에서 ‘3다(三多) 선생’으로 불렸다. ‘말과 노래, 영어’ 세 가지를 많이 한다는 뜻이었다. 다변에 노래도 자주 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방중 시 환영 만찬 자리에서 먼저 한 곡 뽑은 뒤 노래에 자신이 없던 김 대통령에 기어이 노래를 시켰을 정도다. DJ는 귀국 보고에서 “다른 건 다 잘했는데 노래는 장 주석을 당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장 주석은 자신이 노래하면 황제가 아니라 보통 사람처럼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또 외빈 중 미·일 두 나라 손님은 꼭 자신이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미국인은 자신이 영어를 잘하니 만나야 하고, 일본 사람은 과거 침략의 역사를 잘 모르니 가르쳐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1996년 7월 한국 언론과의 첫 인터뷰인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의 회견에선 공학도답게 반도체 회로 간극을 언급하는 전문성을 보였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의 추도식이 6일 열린다. 사진은 그가 1997년 홍콩에 도착해 손을 흔드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1998년 중국에 100년 만의 홍수가 닥치자 그는 강(江)과 택(澤) 등 자신의 이름에 물(水)이 너무 많아 생긴 수재가 아니냐며 탄식했다. 굵은 뿔테 안경과 큰 입으로 인해 ‘두꺼비’란 별명도 얻었다. 서민형 리더였던 그의 최대 공헌은 ‘삼개대표(三個代表) 중요사상’ 수립에 있다. 이는 중국 공산당이 생산력, 문화, 광대 인민의 근본 이익 등 세 가지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광대 인민’에 있다. 인민은 노동자와 농민을 뜻한다. 앞에 수식어 ‘광대’가 들어간 건 ‘자본가’까지 포함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중국 공산당은 예전 타도 대상인 자본가도 끌어안으며 전체 인민의 당인 전민당(全民黨)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에 힘입은 기업가는 창의성을 발휘해 바이두와 알리바바, 텐센트 등 굴지의 민영기업을 일궜다. 중국이 G2 국가로 부상한 원동력이다. 그러나 20년이 흐른 지금의 시진핑 시대는 완전히 다르다. 민영기업은 국유기업에 흡수될 처지에 놓였고, 장쩌민 시대의 자유로웠던 공기는 숨 막히는 단속의 시대로 변했다.   그의 추도식이 6일 열린다. 76년 저우언라이 추모대회가 1차 천안문 사태를 낳았고, 1989년 후야오방 사망은 2차 천안문 사태를 촉발했다. 2022년 장의 추도식이 과연 3차 천안문 사태를 낳을 수 있나? 중국 당국의 철통 통제로 불가능하다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최근 중국인이 보이는 거리 시위와 ‘공산당 타도’ 구호는 얼마 전까진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이다. 중국 인민의 정치적 각성이 과연 중국 변화의 새로운 원동력이 될 수 있을지 베이징을 주목할 때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2022.12.05 00:25

  • [유상철의 중국읽기] 두려움 떨치고 거리로 나선 중국 인민

    [유상철의 중국읽기] 두려움 떨치고 거리로 나선 중국 인민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최근 월드컵이 열리는 카타르만큼이나 세계의 주목을 받는 나라가 있다. 중국이다. 지난 10월 말 시진핑의 중국 공산당 총서기 3연임을 확정한 20차 당 대회 이후 연말까지는 중국에 큰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그로부터 한 달 만에 중국 대륙이 거대 시위로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다. 독일의 한 언론은 11월이 중국엔 ‘분노의 달’로 기억될 것이라고 보도할 정도다.   이번 사태를 촉발한 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11월 24일 신장 우루무치 톈산(天山)구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다. 10명이 숨지고 9명이 상처를 입었다. 많은 중국인은 이번 참사의 원인이 제로 코로나 정책에 있다고 본다. 아파트 단지를 폐쇄하고 현관문을 쇠사슬로 잠그는 등의 무리한 봉쇄 정책 탓에 제때 화재 진압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엇비슷한 봉쇄 조치를 당하고 있는 대다수 중국인은 이를 남의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 나에게도 언제고 닥칠 수 있는 불행이라고 본다. 거리로 뛰쳐나온 배경이다. 한데 경찰이 시위대에게 말한다. 집에 가서 월드컵이나 보라고. 이는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월드컵 중계 TV 화면에 잡힌 카타르의 모습은 마스크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세계 각국 응원단의 생얼 축제 현장이다. “이들이 과연 중국인과 같은 행성에 사는 게 맞느냐”는 중국인의 탄식이 쏟아졌다.   중국 상하이에서 지난 27일 공안들이 시위 참가자를 체포하고 있다. 주요 대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진 뒤에도 중국 당국은 여전히 ‘제로 코로나’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AP]   중국의 11월 마지막 주 휴일은 시위로 얼룩졌다. 베이징과 상하이, 광저우, 시안, 우한 등 중국 곳곳에서 그리고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등 중국 전역의 103개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놀라운 건 19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 때도 명확하게 외치지 못했던 ‘공산당 타도’ 목소리가 터졌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상하이에선 ‘시진핑 물러가라’는 구호도 등장했다.   이번 시위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 번째는 국지성 시위가 아닌 전국성 시위라는 점이다. 천안문 사태 이후 3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봄 상하이 봉쇄 당시만 해도 상하이를 제외한 나머지 중국은 관객 입장에 머물렀다. “안 됐다”는 동정심만 가졌을 뿐 상하이와 같이 행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전국이 들고 일어난 상태다. 노동자에서 학생과 시민까지, 한족에서 소수민족까지, 일선 도시에서 변방의 도시까지 모두 시위에 가담하고 있다.   두 번째는 중앙정부, 공산당, 시진핑 등 권력의 핵심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중국 역사상 거의 처음 있는 일이다. 과거 중국 시위는 지방에 국한된 경우가 전부였다. 2011년 광둥성 우칸(烏坎) 사태가 대표적이다. 촌장이 촌의 토지를 사적으로 팔아먹은 비위에 촌민이 들고일어난 사건 정도다. 중앙정부를 겨냥한 적은 없었다. 한데 이번엔 ‘공산당 타도’와 ‘시진핑 하야’를 외치고 있다.     세 번째는 한껏 움츠려있던 중국 인민이 행동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공산당의 전제에 눌려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는 중국 인민이 공권력을 상대로 직접 행동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충칭(重慶)에서 제로 코로나 방역 정책의 문제점을 큰 소리로 꾸짖다 경찰에 붙들려 가던 남성을 시민들이 나서 직접 구출한 사건이다. 공안 앞에서 말할 자유를 달라며 백지를 들고 시위를 벌이는 모습은 예전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관심은 이번 시위가 과연 중국을 바꿀 수 있느냐 여부에 모인다. 일회성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까? 비관론자들은 시위를 주도하는 ‘조직’의 부재를 지적하며 시위가 계속되긴 어려울 것으로 본다. 특히 중국 당국의 전형적인 시위 진압 방법이 얼마 후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할 것으로 전망한다. 그것은 처음엔 유화적으로 시위대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는 제스처를 취하는 방식이다.   이어 감시 카메라 등을 이용해 시위의 주동자 색출과 체포에 나선다. 마지막 단계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한 집중 분석을 통해 앞으로는 유사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와 단속의 손길을 강화하는 것이다. 또 제로 코로나 정책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 봉쇄와 PCR 검사를 양대 축으로 하는 제로 코로나 정책이 시진핑 치적의 상징처럼 치부되기에 방역 완화 제스처는 있어도 근본적으론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번 시위가 예전에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여러 특징을 보였듯이 그렇게 쉽사리 사그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이유를 중국의 공권력에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 중국 민중의 당당한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전제 정권의 압제와 폭정은 통상 민중의 공포와 복종을 기초로 한다. 한데 이번 시위에 나선 중국인의 모습에선 과거와 같은 두려움을 찾기 어렵다. “공산당 타도”나 “시진핑 하야” 등은 모두의 마음속에 있었지만, 감히 외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공포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두려움을 이겨낸 것으로 보인다. 20차 당 대회가 있기 전인 지난 10월 중순 베이징 하이뎬(海淀)구의 쓰퉁(四通)교에 ‘시진핑 파면’을 적은 플래카드를 붙였던 이를 중국의 많은 이들이 이름 대신 ‘용사(勇士)’라고 부른다. 10월에 하나뿐이던 용사가 불과 한 달 만에 수만, 수십만으로 늘어난 모양새다. 앞으로 중국 인민이 그리 호락호락 공산당의 압제에 휘둘릴 것 같지 않다. 중국 공산당이 집권 73년 만에 큰 위기를 맞았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2022.11.30 10:01

  • [박한진의 지금 중국은] ‘규율+효율’, 변화하는 중국 경제질서에 대처하라

    [박한진의 지금 중국은] ‘규율+효율’, 변화하는 중국 경제질서에 대처하라

    [사진 셔터스톡] 사이토 다카시 일본 메이지대학 교수는 인류 역사를 통찰하는 다섯 가지 코드로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종교를 꼽았다. 또 세계 최대 헤지펀드 설립자인 미국의 레이 달리오는 경제적 관점에서 지금 세계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에 대해 언급한다. 각 국가와 세계는 화폐와 부채, 국가 내부의 갈등, 국가 간 충돌, 자연재해, 전염병에 따라 움직인다는 진단이다.   중국도 이 모든 요소에 노출돼있다. 네 가지가 많은 ‘4다(多)’의 복합위기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악재가 많다. 국가 간 디커플링(탈동조화) 추세와 지정학적 리스크 얘기다. 호재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둘째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많다. 때로는 전염병과 지정학적 사건 등 대비하지 못한 일들이, 때로는 산발적으로, 때로는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셋째 장기 대응 과제가 많다. 미· 중 관계와 공급망 위기, 제4차 산업혁명이 해결되거나 마무리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넷째 복잡한 일들이 많다. 당장 발등에 불이라고 할 수 있는 부채 문제와 인플레이션, 부동산 문제는 얽히고설킨 까다로운 문제다.  ━  4다 복합위기 직면한 중국   이런 상황에서 지난 10월 말 제20차 당 대회가 열렸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 이슈와 맞물려 세계의 관심이 정치무대로 쏠렸다. 예견대로 시 주석의 3연임은 확정됐지만, 당 대회의 경제 메시지는 그 뒤에 가려졌다. 경제 관찰자들도 모호하다거나 새로운 게 없다는 반응이 많다. 그렇다. 명확해 보이지도 않고 달라진 것도 없다. 하지만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미세하게 달라진 워딩(표현)에서 변화하는 중국의 경제 질서를 읽을 수 있다.   중국은 이번 당 대회를 통해 전략적인 대응 방향을 밝혔다. 안정과 발전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것이다. 안정은 체제의 안정과 사회적 안정, 대외적 안정을 포함하며 무엇보다 정치와 이념의 규율성을 강조한다. 발전은 앞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장과 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경제의 효율성을 도모하겠다는 의미다. 여기서 ‘중국식 현대화’가 등장한다. 이 말은 이념과 경제가 오버랩하는 정치 경제학적 용어에 가깝다. 종래 현대화의 의미는 곧 서구화라는 등식과 연결됐는데 그 관계를 끊겠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이 현대화 건설에 매진하는 목적은 서구화된 국가가 되려는데 있지 않고, 서방세계와는 다른 ‘중국식 사회주의’ 강국이자 대국이 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종래 수십 년간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누적된 각종 경제 문제들은 중국 특유의 문제라고 진단하고, 향후 국가 경제사회문화 영역의 건설과제 역시 중국 고유의 문제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  규율과 효율 동시 추구   이념으로 표현되는 ‘규율’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소득 분배, 기술 발전, 경제 발전 등에서 보이듯 경제적 ‘효율’을 함께 추구해간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측면과 경제 중시의 현실적인 목표를 함께 챙긴다는 것은 일견 불가능해 보이지만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도 이념과 경제를 결합한 대전환적 조치였다. 그 이후 적어도 수십 년간은 ‘전례 없는’ 결합이 잘 작동한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 물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관찰이 필요한 영역이다.   중국이 이미 시작했거나 앞으로 추진할 예정인 경제산업 정책의 4대 초점은 산업 공급망 안정화와 에너지 다원화, 지역·계층 간 균형 발전 및 민생서비스 확충이다. 앞으로의 전개 양상과 관련해 몇 가지 시나리오 관점의 가설을 고려해볼 수 있다. 산업 공급망 안정화와 에너지 다원화 측면에서 중국은 해외 도입이 필수적인 핵심 원부자재 확보를 위해 관련 국가와 연결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 할 것이다. 과거 중국은 해외 자원 확보를 위해 직접 진출을 통한 개발 위주로 나섰다가 해당 국가와의 복잡한 구조적 마찰이 발생하면서 큰 혼란을 겪었다. 앞으로는 해외 지역별로 서로 주고받는 경제교류 협력의 관계 속에서 공급망 경제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다자 간 통상외교에 더욱 공을 들일 것으로 보이며,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갈등이 심화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지역 간, 계층 간 균형 발전과 민생서비스 확충은 이제까지 시행해온 도시화 발전 전략을 계속 추진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었으나 동시에 지역 간, 계층 간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했다. 이에 따라 내년 2분기부터 본격화되는 차기 리더십은 취업과 교육, 의료, 공공 서비스를 전국적 범위에서 강조하며 관련 정책을 속속 내놓을 것이다. 또한 많은 지방 정부가 종래 부동산 개발 과정에서 국유지를 건설 개발사에 매각하는 방식으로 재정의 상당 부분을 조달했으나 이제는 지방 특화산업을 육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비록 그 속도는 비교적 완만하게 추진 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 과정에서 기업 차원의 새로운 시장기회가 많이 생겨날 전망이다.  ━  중국 신경제 영역 주목하라   이 같은 상황에서 반도체 등 첨단 기술 영역에서 심화하고 있는 미·중 간 갈등과 경쟁은 미국이 중국의 미래 경쟁력을 압박하는 구조다. 앞으로 전개 양상에 따라 중국으로서는 다른 모든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물러설 수 없는 형국이다. 매우 조심스러운 시나리오적 전망에 불과하지만 반도체를 포함한 중국의 기술 굴기 전략 계획은 일정 부분 혹은 상당 폭으로 수정 내지는 조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만은 없다. 예를 들면 애초 설정한 산업 집중육성 기간을 좀 더 길게 수정한다든지 혹은 도달 목표 수준을 조정한다든지 등의 가능성이다. 어떤 방향으로 가더라도 중국으로서는 미국과의 긴장과 마찰 국면은 지속되겠지만, 최악의 위기 상황으로 가지 않으려는 의도를 계속 내비치고 있다. 미국과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중국의 곤혹스러운 상황은 더욱 어렵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중국의 경제 수치에 관한 직접적인 판단보다는 경제를 관찰하는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첫째 경제 회복 수준에 관한 것이다. 중국은 코로나 19 여파로 연간 성장률 목표(5.5%) 달성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경제 회복 성공 여부에 관한 판단이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급성장한 O2O(온· 오프라인 연결) 비즈니스 같은 신경제 영역은 앞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경제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표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과거엔 제조업 부문의 외국인 직접투자(FDI) 실적과 수출 증가 속도,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액과 부동산 판매량이 중요 지표였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소매판매액과 물가지수, 제조업 투자, 신경제 영역이 핵심 관찰 지표로 떠오르고 있다.  ━  중장기 협력 플랫폼 구상해야   셋째, 경제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완만하긴 하지만 꾸준히 커지고 있고 지역별로 정책 조치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 지방의 소비 촉진 정책 흐름을 주시한다면 내수시장 진출을 위한 세분화 전략에 참고가 될 수 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은 모두 한국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은 이를 잘 이용한다면 중국과 무역을 하는데,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 미국과의 동맹 관계도 유지할 수 있다. 이 같은 판단을 외교와 경제교류의 현장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한국으로서는 미국과 중국, 양국 모두와 서로 다른 차원의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유리하다.   한중 경제 관계를 본다면 우리 기업과 정부는 전략적 판단과 새로운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2018년 3월 개시된 한 중 FTA 2단계(서비스·투자) 협상 전략을 가다듬기를 건의한다. 양국은 조속 타결이라는 지향점에서는 인식의 차이가 없다. 중국이 내수시장 확대를 위해 서비스업 육성과 산업 업그레이드에 나서고 있으니 협상 체결의 당위성도 차고 넘친다. 그렇다면 속도를 높여 되도록 빨리 매듭짓는 것이 좋겠다.   한국 기업이 경쟁력을 갖춘 소수 분야는 ‘네거티브(금지사항 외엔 모두 허용) 방식’으로, 중국이 유리한 분야는 ‘포지티브(허용사항 외엔 모두 금지) 방식’으로 각각 분리해서 협상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지방 정부는 양국 지방 기업 간 특색을 살려서 중장기적으로 상생할 수 있는 실질적인 협력 플랫폼을 구상하기를 건의한다. 이제까지의 인적교류와 단기성 사업은 접을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기업 차원에서는 중국의 정책 조정을 변화의 배경과 지향점 차원에서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 범위를 판단할 수 있고 대응책도 마련할 수 있다.   박한진 중국경제관측연구소 소장 

    2022.11.29 16:50

  • [이종혁의 싱가포르서 보는 중국] 시진핑 천하의 파벌 정치 어떻게 변할까

    [이종혁의 싱가포르서 보는 중국] 시진핑 천하의 파벌 정치 어떻게 변할까

    제20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설하는 시진핑 [사진 CCTV 캡처] 지난 10월 폐막한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결과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공청단 출신인 리커창 총리와 왕양 정협 주석이 실각했을 뿐만 아니라 차기 리더로 큰 관심을 받던 후춘화는 정치국위원 자리마저 유지하지 못했다. 시진핑은 수뇌부를 모두 자신의 사람들로 채웠다. 집단지도체제가 붕괴한 것이다. 시진핑 천하가 도래한 이제 중국의 파벌 정치는 어떤 식으로 변모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으로 인해 파벌 간 투쟁이 사라졌을 때 중국 정치는 어떠한 행태를 보였는가?   덩샤오핑은 파벌 정치를 잘 활용한 지도자였다. 덩은 모든 능력 있는 자들을 모아 하나의 확실한 목표를 심어주었다. 하나의 목표인 경제 발전을 위해 어떠한 정책이 유리할 것인지에 대해 모두가 경쟁하게 했다. 그 결과 개혁파와 온건파가 생겨났으며, 그 후엔 테크노크라트와와 제너럴리스트 간의 파벌 싸움을 부추기기도 했다. 각 파벌은 경제발전이란 한 가지 뚜렷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정책 선택과 관련한 건전한 투쟁을 벌였다. 덩은 산업정책과 금융정책, 재정정책, 나중엔 사회정책까지 그들이 자신들이 가진 전문 지식과 정치 철학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덩은 그저 뒤에서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심판자 역할을 맡았다. 이는 덩이 무소불위의 정당성을 가진 리더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파벌 정치 활용한 덩샤오핑    시진핑 천하가 된 지금, 시진핑 치하에서의 파벌정치는 그럼 어떻게 될 것인가? 가장 큰 문제점은 시진핑은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시진핑의 정당성은 그동안 중공이 역사적으로 증명했던 성과에 기댄 정당성일 뿐 그 개인의 정당성을 강화시켜줄 그 어떤 뚜렷한 업적이 없다. 물론 지난해 제3차 역사결의에서 시진핑은 자신의 업적과 공헌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빈곤 제거와 부패 척결, 그리고 빈부 격차 해소, 이어 현대적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서 중국몽을 실현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누가 이를 믿고 시진핑에게 정당성을 부여할까? 시진핑은 쉬지 않고 자신을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마오가 나라를 세웠고 덩이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시진핑은 중국을 강하게 만들 것이란 구호는 중국인과 중공 엘리트들이 보기엔 너무나도 부족한 나레이션인 것이다.   이처럼 부족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시진핑이 내세운 게 ‘이데올로기’ 투쟁이다. 시진핑 사상과 중국몽,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 등은 그 기조부터가 어딘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한데 그런 것들을 중국 공산당뿐만이 아니라 전 중국사회에 퍼뜨리려 한다. 공무원 시험에서 시진핑 사상을 테스트 한다던가 하는 이데올로기 교육 강화가 바로 그런 것이다. 경제 발전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기엔 그것을 실현할 역량이 부족해 보인다. 뚜렷한 목표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때 더 많은 반발을 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이데올로기 투쟁 하에선 그 밑의 파벌 싸움이 건전한 정책 경쟁이 되는 게 아니라 과도한 충성경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진핑의 부친인 시중쉰의 묘역을 성역화 한다던가 또는 중국 전통의 가치를 추구하려 공자 사당을 세우는 등 다소 애매한 방식으로 시진핑의 개인적 취향을 맞추려는 노력이 벌어질 것이다. 특히 시진핑이 풍수 사상에 많은 관심을 가진 만큼 많은 지방 관료들이 풍수가 좋다는 곳에 앞다퉈 이데올로기 학습관이나 시진핑의 이름을 딴 지역 명소를 만드는 등 덩샤오핑이 금지했던 ‘리더의 우상화’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짙다.    ━  시진핑 충성 경쟁 벌어질 전망    지방 관리들은 또한 시진핑의 눈밖에 나는 걸 극도로 꺼릴 것이다. 최근의 제로 코로나 정책은 이를 뒷받침한다. 인민의 행복과 방역 정책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맞추는 게 지방 관료로서 최선의 정책이지만, 현재의 방역 정책을 볼 때 중국의 지방 정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더 강하고 더 확실한 검역 정책을 실행할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와 베이징, 저장, 광둥 등 많은 지역에서 정부의 강력한 방역 정책으로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다. 만일 어느 한 지방에서 방역에 실패한다면 이는 바로 시진핑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갈 것이고 이는 곧 그 지방 관리의 정치적 생명이 끝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관리들은 더욱더 보신과 안전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며 그런 상황에서 경제 발전이나 사회 발전이 이뤄질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중국 경제 발전의 큰 역할을 했던 성과주의와 지방 분권주의가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지방 관리들이 지방 경제나 인민의 안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시진핑 측근들이 벌이는 충성 경쟁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목표를 안전하게 추구하는 사람을 선호한다. 정책 실패가 시진핑의 책임으로 전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형적인 권위주의 국가의 특징이다. 20차 당 대회 보고에서 시진핑이 “안전”이라는 단어를 그 무엇보다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학자와 전문가가 동의하는 것처럼 중국 공산당 정부가 민주주의 제도 없이도 어느 정도 민중을 위하고 장기적 목표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 파벌들의 균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각 파벌 간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정치인들은 의미 있는 정책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공산당의 첨병 역할 그리고 공산당의 트레이닝 센터 역할을 해온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은 하나의 제도화된 조직이었다. 그 단원은 어떠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게 훌륭한가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공산당의 관료가 되기 위해 길러진 인재들이었다.    ━  견제 없으면 독재국가로 회귀    그런 토양 속에서 배양된 후진타오의 겸손한 성격과 관료주의적 성향은 덩샤오핑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아무런 정치적 배경이 없는 공청단원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실력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들이 수뇌부가 됐을 때 하고자 하는 정치 개혁은 바로 당내 민주였다. 자신들이 철저한 경쟁제도와 성과제도를 통해 생존한 간부였다면 다른 파벌들 즉 엘리트주의 파벌은 혈연이나 상사와의 관시(關係)를 통해 승진을 반복한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좀 더 민주적이고 공정한 선발체제를 만들기 위해 당내 민주를 제도화시키길 원했지만 결국엔 실패했다.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던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고위 관료가 관시를 통해 이득을 충분히 얻었던 사람들이었다. 제도적인 견제와 균형 없이 파벌 간의 균형만으로 독재국가로부터 책임감을 불러오는 것은 너무나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이는 현시대에 또 다른 교훈을 제공한다. 지도자를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그 정권은 전형적인 독재국가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이종혁 싱가포르 난양공대 교수

    2022.11.29 16:49

  • [이성현의 미국서 보는 중국] 바이든은 왜 시진핑에 먼저 만나자 했나

    [이성현의 미국서 보는 중국] 바이든은 왜 시진핑에 먼저 만나자 했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자유 낙하하던 미·중 갈등이 ‘잠시 멈춤’ (pause) 버튼을 눌렀다. 지난 11월 14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의 첫 대면 정상회담을 통해서다.   제시카 천 웨이스 (Jessica Chen Weiss) 코넬대 교수는 11월 16일 하버드대 세미나에서 “이번 미·중 정상회담의 가장 큰 의의는 정상회담이 열렸다는 그 자체”라고 평가했다. 그는 웃지 않고 이 발언을 했다. 농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웨이스 교수의 진단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그가 최근까지 미 국무부 중국 고문을 1년 동안 담당하다 막 학계로 복귀해 미국 정부 내부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중 갈등의 골이 그렇게 깊게 파인 것이다.   ━  투명인간 된 미·중 대사   왕이(王毅) 중국 정치국위원 겸 외교부장은 11월 15일 있었던 ‘미·중 정상회담 언론 브리핑 및 질의응답’에서 이번 미·중 정상회담은 ‘미국이 제안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미국은 사이가 급속도로 틀어진 중국에 왜 굳이 먼저 대좌를 제안한 것일까?   가장 중요한 미국의 동기는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바이든은 시진핑과 서로의 ‘의도와 우선순위’ (intentions and our priorities)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미국이 특히 중점을 두었던 사항은 아래와 같이 파악된다.   첫째,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유례없이 커진 가운데 미국 정부 내에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한 부처별 판단에 서로 차이가 존재했다. 그 이유는 양국 모두 소통 채널을 거의 다 막아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소통이 막히면 정보도 막힌다. 친강(秦剛) 주미 중국대사를 미국의 정부 인사들이 만나 주지 않으며 ‘투명 인간’ 취급하고 있었고, 중국은 니컬러스 번스 주중 미국 대사를 ‘식물 대사’로 만들었다.   당연히 중국공산당 고위 인사와 접촉도 드물었다. 코로나 방역을 구실로 중국 학자들에게도 미국 대사관과 접촉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다. 코로나 기간 대세가 됐던 Zoom 화상회의도 막혔다. 그러니 미국 외교관들의 중국 현지 정보 수집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미정부와 싱크탱크 내 분석관들이 중국을 방문하지 않고 쓰는 중국 보고서가 늘었다. 지난 코로나 정국 3년 동안 그것이 누적되면서 보고서의 정확도와 신뢰성에 당연히 의문이 제기됐다. 많은 대만 위기 보고서도 언론 보도를 기초로 쓰는 형국이었다. 그러자 워싱턴에서 나오는 중국 관련 보고서는 ‘분석’이 아니라 ‘장거리 상상’ (long-distance imagination)이란 조소가 나올 정도였다.  ━  ‘잠시 멈춤’ 버튼 누른 미·중 갈등   그러한 보고서 중에는 대만을 둘러싼 미·중 무력 충돌 가능성에 관해 쓴 ‘무시무시한 보고서’ (scary report)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지난 8월 2일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의 대만 방문에 화가 난 중국이 미·중 군사 핫라인마저 끊어버리자, 미국 정부 내에서는 대만을 둘러싼 우발적 충돌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소위 ‘이러다 전쟁 난다’라는 우려가 심각한 수준에 이른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 윌리엄 번스 국장이 지난 10월 3일 CBS 방송 인터뷰에서 ‘시진핑이 2027년까지 대만 침공을 지시했다’는 폭탄 발언을 한 후 일부 학자들이 이를 반박하면서 전문가 커뮤니티 내에서도 혼란이 일었다. 결국 중국에서 최고 결정권을 가진 인물로부터 이를 직접 확인하는 기회를 갖는 게 미국 입장에선 매우 중요해졌다. 대만 무력 충돌 가능성에 대한 시진핑의 생각을 당사자로부터 직접 듣는 것보다 더 확실한 정보는 없을 테니 말이다.   시진핑과 회담 후 바이든이 “나는 중국이 대만을 침략하려는 임박한 시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I do not think there’s any imminent attempt on the part of China to invade Taiwan)'라고 했고, 이를 많은 미국 언론이 헤드라인으로 뽑은 것은 이 문제에 관해 미국 조야(朝野)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시사한다.   둘째는 우크라이나에 핵무기를 쓸 수 있다고 위협한 푸틴의 행동을 막기 위해 시진핑의 협조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에서 의외로 간과된 부분이다. 백악관 누리집을 보면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핵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며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합의를 그들이 재확인했고” (reiterated their agreement) 우크라이나에서의 핵무기 사용 또는 사용 위협에 대한 “그들의 반대를 강조했다” (underscored their opposition)라고 적혀 있다. 바이든뿐만이 아니라 시진핑도 동의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their)이라고 구체적으로 두 번이나 명시했다.   ━  대만과 우크라이나 사태가 핵심   관련 대목은 중국 외교부 측이 소개한 미·중 정상회담 내용엔 통째로 누락돼 있다. 단지 양국 원수가 ‘우크라이나 위기’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에둘러 표현돼 있다. 하지만 왕이 부장이 후에 내놓은 부연 설명에서는 “시 주석이 핵무기는 사용할 수 없고, 핵전쟁은 할 수 없다" (核武器用不得、核戰爭打不得)고 말했다며 발언의 주체가 시진핑 주석임을 확실히 밝혔다.   러시아와 “한계 없는 협력”을 다짐하며 밀착관계에 있는 시진핑의 입에서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 반대 발언을 얻어낸 것을 미국 측은 큰 성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북한의 핵 실험 가능성과 최근 연이은 북한 미사일 실험과 관련해서 시진핑으로부터 확고한 반대 의사 표명을 바이든이 받아내지 못한 점은 한국에는 매우 아쉬움이 남는 대목일 수밖에 없다.   큰 틀에서 볼 때 이번 미·중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미·중 관계의 구조적 갈등 체계는 전혀 변한 것이 없다. ‘잠시 멈춤’ (Pause)이란 진행되던 상황이 ‘재개’될 것이란 점을 의미한다. 결국 이번 회담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관리’에 방점을 둔 회담이었다. 서로 싸우던 적장이 잠시 ‘작전 타임’을 갖고 반칙 규정을 다시 한번 재점검한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바이든은 시진핑과 악수하며 활짝 웃었지만, 회담 중 시진핑에게 미국이 “중국과 치열한 경쟁을 계속할 것이다.” (will continue to compete vigorously with the PRC)라고 했다.   글 이성현 조지HW부시 미중관계기금회 선임연구위원      

    2022.11.29 16:49

  • [유상철의 중국읽기] 시진핑 시대 알려면 마오 시대 공부하라

    [유상철의 중국읽기] 시진핑 시대 알려면 마오 시대 공부하라

    중국 베이징 도심 퇀제후(團結湖) 공소사 외벽에 문화대혁명 시절 분위기의 그림과 ‘공소사(供銷社·공급판매사)’ 이름이 걸려있다. 신경진 특파원 시진핑(習近平) 집권 3기의 중국은 어디로 가나. 지난 10월 말 20차 당 대회 폐막 이후 세계가 중국의 행보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그 지긋지긋한 제로 코로나 방역 정책을 과연 언제쯤 집어 던질까, 침체한 부동산 시장을 살리기 위해 어떤 조치를 내놓을까, 과연 대만을 상대로 무력시위에 나설까 등이 주요 관심사다. 한데 정작 중국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건 꽤 낯선 말인 ‘공소사(供銷社)의 부활’이다. 생소한 용어인 공소사가 도대체 뭔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공급판매사’에 해당한다. 50대 이상 중국인에겐 너무나 익숙한 말이라고 하는데, 수교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을 접한 우리에겐 낯설기 그지없다. 무슨 뜻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1994년 출판된 『쉽게 찾는 중국 경제용어』를 들춰보니 ‘공소합작사(供銷合作社)’는 ‘농촌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도시에 내다 파는 집체(集體) 소유 형태의 상업조직’이라고 적혀 있다. 건국한 지얼마 안 된 1950년 7월 국가 차원의 공소합작사가 처음으로 설립됐다. 4년 후엔 정식으로 ‘중화전국공소합작총사(中華全國供銷合作總社)’라는 이름을 갖게 됐으며, 국무원의 주관 아래 전국적인 판매 조직을 갖췄다. 중국 농민은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을공소사에 가서 팔고, 또 필요한 생필품을 공소사에 가서 사며, 돈을 빌리는 등의 신용 문제도 공소사에 가서 해결했다. 농촌의 생산과 유통, 신용을 한데 묶은 삼위일체 역할을 한 곳이 공소사다. 자연히 농민은 공소사와 떨어진 삶을 생각할 수 없게 됐다. 반대로 중국 당국은 공소사를 통해 중국 농촌의 민생을 장악할 수 있었다. 공소사는 중국의 대표적인 계획경제의 산물로 통한다. 이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 추진 이래 공소사는 계획경제의 퇴출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완전히 소실되지는 않은 채 명맥을 유지하다가 시진핑 집권 시대 들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의 몸짓은 이미 시진핑 집권 1기 중반인 2015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중국 당국은 중국의 현대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공소사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기층 농민을 도와 합리적인 가격으로 농산물을 구매하고 또 판로를 확보하며 동시에 광대 농민의 신용대출 수요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 장년층과 노년층이 공소사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은 씁쓸하고 아픈 것이다. 공소사 하면 크게 두 가지를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첫 번째는 물자 결핍이다. 농민의 생필품을 공소사에서 사야 하는데 언제나 부족함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엔 무엇을 사려면 표(票)가 있어야 했다. 곡식을 사려면 양표(糧票)가 있어야 했고, 기름을 사려면 유표(油票), 또 고기를 사려면 육표(肉票)가 필요했다. 문제는 표가 있다고 해서 꼭 필요한 걸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점에 있다. 이는 두 번째 아픈 추억인 부패와 연결된다. 육표를 갖고 고기를 사러 가지만 점원으로부터 없다는 말을 듣기 일쑤다. 정말 고기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있으면서도 팔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흔히 당 간부에게 뇌물을 주기 위해서, 또는 꽌시(關係)로 통하는 지인(知人)에게 팔기 위해서 제대로 팔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런 ‘결핍과 부패’, 그리고 계획경제의 대명사와도 같은 공소사가 시진핑 시대를 맞아 부활하는 것이다. 공소사는 2018년 1만여 개에서 2019년엔 무려 3만 2000개로 급증하며 지금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농촌을 다 커버할 수준이 됐다고 한다. 지난해 매출액은 6조 2600억위안(약 1179조원)으로 전년 대비 18.9%나 증가하는 등 호조세다. 20차 당 대회에선 공소사 총책임자인 량후이링(梁惠玲, 60)이 역대 책임자 중에선 처음으로 중앙위원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량후이링은 시진핑 주석이 이제까지 모두 10차례나 공소사 관련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도 공개해 공소사에 대한 시 주석의 지대한 관심을 세상에 알렸다. 그렇다면 시진핑 주석은 왜 공소사 부활에 열을 올리는 걸까. 개혁개방 노선에서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는 시 주석이 계획경제 시대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포석을 까는 것일까?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계획경제로 돌아가자면 국가계획위원회부터 회복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공소사 부활을 계획경제 복귀로 등치 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보다는 시장경제를 유지하는 전제 하에서 농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란 해석이 보다 설득력을 얻는다. 공소사의 역할과 관련해선 흔히 정부가 농산품의 계획수매와 계획판매를 통해 농민을 통제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농촌 장악 수법이다. 시진핑 주석이 지금 마오의 그런 옛길(老路)을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의 중국이 걷는 길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마오 시대의 일을 다시 알아야 할 필요가 커졌다. 시 주석의 뇌리엔 청년기에 심어진 마오쩌둥 사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 집권기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선 마오쩌둥부터 공부해야 한다. 공소사 카드를 꺼낸 시 주석의 노림수와 관련해선 다음 주 ‘유상철의 중국읽기’를 통해 보다 상세한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 you.sangchul@joongang.co.kr

    2022.11.28 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