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중국인의 소울푸드, 교자의 기원에 대한 가설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중국인의 소울푸드, 교자의 기원에 대한 가설

    교자.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에는 다양한 만두가 있다. 요리법에 따라 찐만두, 군만두, 물만두, 재료별로는 고기만두, 채소만두 혹은 밀만두, 메밀만두, 어만두 등으로 세분화된다. 하지만 어쨌든 이름은 만두로 통일된다.   중국 역시 만두 종류가 많다. 하지만 우리와 달리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이다. 중국에서는 만터우라고 부르는 소 없는 찐빵 만두부터 교자, 포자, 훈툰과 완탕, 물만두인 수교(水餃), 샤오마이(稍麥) 등등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다.   이중 중국 만두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교자(餃子)다. 가장 많이 먹기도 하지만 심정적으로도 각별하다. 일단 대부분 명절에 교자가 빠지지 않는다. 한국 명절에 떡을 빼놓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특히 가장 중요한 명절인 춘절이나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고대의 새해였던 동짓날에는 반드시 교자를 먹는다. 중국 속담에 동짓날 교자를 먹지 않으면 겨울에 귀가 얼어 떨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마음 속 소울푸드인 만큼 교자와 관련돼 전해지는 이야기도 많다. 교자 기원설도 그중 하나다.   중국인들 만두는 제갈공명이 발명했지만 교자는 장중경이 만들었다고 말한다. 우리한테는 낯선 인물인 장중경은 2세기 한나라 말의 유명한 의사였으면서 고위 관리였다. 지금의 하남성 남양태수를 지냈던 그가 한겨울 임기를 마친 후 귀향길에 올랐다. 때마침 전염병이 돌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은 귀가 얼고 짓물러 죽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이 모습을 본 장중경이 밀반죽에 고기를 넣고 귀 모양의 교자를 빚어 가마솥에 끓인 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짓날부터 춘절까지 계속해 교자 만두국을 끓여주니 몸이 따뜻해지고 양쪽 귀에 열이 오르면서 얼은 귀가 치료됐다. 사람들이 이 교자 만두국을 거한교이탕(祛寒嬌耳湯)이라고 불렀는데 추위를 물리치는 아름다운 귀(嬌耳) 모양의 국이라는 뜻이다. 제갈공명의 만두 못지않게 인간적이다.   또 다른 스토리도 있다. 1644년 이자성이 농민봉기를 일으켜 명나라를 무너트린 후 순(順)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됐다.   하지만 곧 만주족의 청나라에 패해 쫓겨났는데 전해지는 말로는 만두, 즉 교자를 함부로 먹었기 때문이다. 옛날 중국 농민들에게 교자는 설날인 춘절에나 한번 먹는 음식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된 이자성이 주제를 잊고 시도 때도 없이 42차례나 먹었다. 하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옥황상제가 화가 났다. 원래 이자성은 42년간 황제를 할 운명이었는데 겨우 42일 만에 쫓겨난 이유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어쨌든 중국인의 교자 만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 말고도 중국의 여러 만두 중 교자는 그 이름에 담긴 의미와 해석이 특별하다. 먼저 많이 알려진 것처럼 만두는 남만 오랑캐 머리(蠻頭)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이렇게 험악한 유래설이 생긴 배경으로 만두가 서역에서 전해진 음식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사실 튀르키예부터 위구르까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만두를 만트(manti) 혹은 만투(mantu)라고 부른다. 이 음식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만터우(曼頭)로 음역됐다가 후에 한족이 양자강 이남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남인(南人)을 멸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이 과정에서 남만 오랑캐 머리라는 제갈공명의 만두발명설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또 다른 만두 종류로 혼란스럽다는 혼돈(混沌)에서 비롯됐다는 훈툰(餛飩) 역시 서역 이름의 한자 음역인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교자(餃子)에는 온갖 좋은 의미가 다 담겨 있다. 춘절을 맞아 해가 바뀌는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인 자시(子時)에 먹는 상서로운 음식인 만큼 이름 속에 송구영신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또 자식을 낳는다(交子)는 다복, 춘절에는 돈처럼 둥글게 빚는다는 재복의 의미가 있다는데 여러 만두 중에서 왜 교자에만 이렇게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교자 이름의 변천을 통해 이유를 짐작해볼 수도 있다. 중국에 처음 전해진 만두 종류는 크게 만두, 훈툰, 뇌환(牢丸) 세 종류였다.   만두와 훈툰은 지금까지 비슷한 이름으로 이어졌지만 뇌환, 중국어로 라오완은 이름이 완전히 중국식으로 바뀐다. 당나라 때는 분각(粉角)이라고 했는데 애써 풀이하면 밀가루를 각지게 빚었다는 의미다. 이어 송나라에서는 각자(角子), 각아(角兒)로 불린다.   당송 시대는 중국에서 밀가루 음식이 퍼지고 자리 잡는 시기였으니 처음 뇌환이라고 했던 음식이 이때 중국화하면서 이름도 중국식으로 정착됐다. 이후 명 청 시대에 지금의 이름인 교자(餃子)가 됐다. 참고로 송나라 각자(角子)와 명 청시대 교자는 중국어는 모두 쟈오즈다.   그러니 교자의 원뜻은 각지게 빚은 만두로 뇌환이라는 음식이 중국화되는 과정에서, 또 밀가루 음식이 대중화되면서 중국식 한자 이름을 얻으며 중국인의 소울푸드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부분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2024.04.25 06: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병입골수(病入骨髓)와 편작(扁鵲)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병입골수(病入骨髓)와 편작(扁鵲)

    편작이 치료를 시작하고 20일이 되자 태자는 건강을 되찾았다. 사기에는 ‘능생사인(能生死人)’으로 적혀 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의사가 돈을 탐내어, 아프지도 않은 사람을 병이 있다며 치료하려 드네.” 피부에 가려운 증세가 있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환자들이 많다. 어떤 환자는 의사가 심각한 병의 초기 증세라고 말해줘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일단 의심부터 한다. 진실을 회피하고 싶은 심리 때문이다. 병이 조금 악화되어도 그 반응은 달라지지 않는다. “난 병이 없다니까요!”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심각해질 것이라는 두 번째 경고에는 이렇게 퉁명스럽게 반응한다. 요행을 바라는 심리 때문이다.   이번 사자성어는 병입골수(病入骨髓)다. 앞의 두 글자 ‘병입’은 ‘~에 병이 들다’라는 뜻이다. ‘골수’를 순우리말로 바꾸면 ‘뼛속’이다. 이 둘이 합쳐져 ‘뼛속까지 병들다’라는 의미가 만들어진다. 이 ‘병입골수’는 사마천 사기(史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편의 한 일화에서 유래했다. ‘병입골수’와 ‘병입고황(病入膏肓)’은 같은 뜻이다. ‘고황’은 심장과 횡경막 사이다. 몸의 제일 ‘깊은 곳’을 비유한다.   편작은 기원전 401년 출생했다. 본명은 진월인(秦越人)이다. 전(田)씨 제나라의 환후(桓侯)는 ‘서둘러 치료해야 한다’는 편작의 경고를 세 번 연속 무시하다가 결국 사망한다. 두 번째 경고에만 치료를 시작했더라도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병이었다. 당대의 명의 편작도 ‘뼛속까지 스며든 병’은 치료할 방법이 없었기에 서둘러 도주한다.   ‘편작’을 글자 위주로 풀이하면 ‘널리 돌아다니는 까치’라는 뜻이다. 중국인들도 까치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새로 여긴다. 그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위중한 환자들을 치료해 붙여진 이름이다.   편작은 주요 진료 과목도 현지의 수요에 맞춰 변경했다. 부녀자를 귀히 여기는 한단(邯鄲)에서는 산부인과 위주로 진료를 했다. 노인을 존중하는 낙양(洛陽)에서는 안과와 관절염 치료 통증 클리닉을 열었다. 어린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함양(咸陽)에 머물 때는 소아과 진료에 전념했다.   편작이 괵(虢)나라 태자를 살려낸 에피소드는 매우 드라마틱하다. 그가 괵나라 궁문 앞에 이르렀을 때 태자는 그날 새벽 이미 사망한 것으로 결론이 난 상태였다. 그가 사망한 태자를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편작은 먼저 태자에게 ‘어떤 증상’이 있었는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만을 듣는다. 이어 “제 의술은 맥을 짚거나 안색을 살피거나 청진(聽診)을 하거나 그러지 않아도 병의 증상만 들으면 확진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라며 태자를 살려낼 수 있다고 설득했다. 과연 편작의 진단대로 태자의 병은 시궐(尸蹷)이었다. ‘시궐’은 졸도하여 ‘죽은 사람처럼’ 되는 병증이다. 편작이 치료를 시작하고 20일이 되자 태자는 건강을 되찾았다. 사기에는 ‘능생사인(能生死人)’으로 적혀 있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편작의 최후는 꽤 덧없다. 질투에 눈이 먼 동종 업계 종사자가 보낸 자객 손에 희생됐다. 동서고금 인간 세상에 좋은 일만 계속될 수는 없다. 평생 좋은 일을 해도 최후 순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수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사례는 의외로 세상에 흔하다.   편작의 인품은 무던한 편이었다. “뭐, 제게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재주가 있는 게 아니에요. 원래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제가 ‘일어서게’ 한 것일 뿐이죠.” 괵나라 태자를 되살리는 공로를 두고도 그는 이처럼 ‘쿨(cool)’하게 말했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이 발견된 이후 현대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지금은 ‘병이 걸려 죽으려고 해도 그게 쉽지 않다’는 유머까지 있다.   하지만 유독 심리 분야에선 약물치료의 길이 여전히 미답이거나 미완성이다. 우리 현대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마음의 병을 많이 앓고 있다. 불편함과 신음 소리와 두려움은 있지만, 편작이 선보인 비책(秘策)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수시로 엄습하는 불안으로 ‘사회적 은퇴’를 강요당하는 이들도 있다.   의술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성과 중시’ 문화에서 원인을 찾는 진단도 있다. 궁금하다. 여전히 우리의 전부를 지배하는 이 ‘마음이란 것’은 대체 우리 몸 어디쯤 있는 것일까.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홍장호. 더차이나칼럼

    2024.04.23 06:00

  • [중국읽기] 리창 아닌 시진핑?

    [중국읽기] 리창 아닌 시진핑?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한·중·일 3국 정상회의가 5월 하순 개최로 가닥을 잡은 모양새다. 지난해부터 “열린다, 열린다” 소문만 무성하더니 1년이 지나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 일본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 중국에선 리창 총리가 참석한다. 한국과 일본은 국정 수행의 1인자인데 반해 중국은 2인자다. 최근엔 그 2인자의 위상 또한 현저하게 약해진 터라 이걸 솔직히 한·중·일 3국 정상회의라 부르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   한·중·일 3국 정상회의가 시작된 건 1999년이다. 97년 아세안의 초청으로 아세안+3 정상회의가 발족한 게 계기가 됐다. 99년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과 주룽지 중국 총리,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조찬 회동을 하면서 한·중·일 3국 정상회의가 만들어졌다. 2008년부터는 아세안과 관계없이 한·중·일이 돌아가며 3국 정상회의를 여는 오늘의 모습이 됐다.   한·중·일 3국 정상 회의엔 중국에서 시진핑 주석이 참석해야 맞을 듯싶다. [로이터=연합뉴스] 이 회의에 중국 총리가 참석하는 것에 대해 이제까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97년 첫 아세안+3 정상회의의 주요 안건이 아시아금융위기 해결 등 국경을 초월한 경제 문제였고, 중국에선 총리가 ‘경제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한데 이젠 상황이 변했다. 중국 총리의 파워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집권 이후 급격하게 약해진 것이다.   지난달 말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발전포럼은 좋은 예다. 2000년 설립돼 양회(兩會) 이후 열리는 이 포럼에는 세계 유수 기업의 CEO와 학계 인사 등 100여 명이 참석해 중국 총리와 좌담회 형식으로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중국 경제의 향방을 가늠할 소중한 기회라 미국의 저명한 기업인들이 많이 온다. 한데 올해의 경우 리창 총리는 과거 부총리가 하던 개막식 연설을 하는 데 그쳤다.   정작 중요한 좌담회는 시진핑 주석이 참석자 중 일부만을 골라 별도로 진행했다. 만기친람(萬機親覽)의 시진핑 주석이 총서기에 이젠 총리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도 리창 총리가 아닌 시진핑 주석이 참석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3국 정상회의라는 명칭에도 부합하고 한·중·일 3국의 1인자 간 회의라 그 중요성 또한 더욱 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서울서 열릴 예정인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 시진핑 주석을 정중하게 초청하는 건 어떨까 싶다. 3국 만남의 형식이 변하면 3국 관계의 내용도 변하지 않겠나.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2024.04.22 00:16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삼국지 만두 발명설 행간의 의미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삼국지 만두 발명설 행간의 의미

    중국 베이징 왕푸징(王府井)거리에 소재한 한 만둣집,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만두가 가게 앞 매대에 진열되어 관광객들의 식욕을 자극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만두의 원뜻은 속된 말로 '오랑캐 대가리'다. 만두 맛 떨어지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렇다. 어쨌든 이런 소리 들으면 만두 먹을 때마다 끔찍한 기분이 들 수도 있기에 원래 남만 오랑캐 만(蠻), 머리 두(頭)자를 쓰는 대신 만두 만(饅), 머리 두(頭)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가 졸지에 음식으로 둔갑해 황당해했을 남만 머리, 만두(蠻頭)의 주인공, 남만인은 누구였을까? 지금의 귀주성 서부, 사천성 남서부, 운남성과 광서성 등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한족 일부와 중국 소수민족이다.   만두를 놓고 “남만 오랑캐 운운”하는 말,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퍼트린 헛소리 같지만 나름 문헌적 근거도 있다. 명나라 때인 16세기 『칠수유고』라는 책에 나온다. 저자인 낭영(郎瑛)은 당시 수많은 책을 읽은 지식인으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만두 유래설, 들어는 봤지만 먹는 음식 가지고 엽기적인 소리 한다며 불쾌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국, 중국, 일본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이 말을 믿고 있다.   이유는 한·중·일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고전소설 삼국지 때문이다. 이 책에 제갈공명이 남만 포로 대신 밀가루로 머리 모양의 만두를 빚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이 만두의 시작이라고 나온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그렇기에 스토리를 그대로 믿는 것도 우습지만, 삼국지의 역사 이야기는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다. 때문에 내용을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는데 이 과정에서 뜻밖의 숨겨진 진실과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만두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제갈공명이 만두를 만들었다는 삼국지 속 이야기는 엉터리다. 남만 포로의 머리 대신 만두를 빚었다는 말은 더더욱 터무니없다. 다만 역사적 사실에 근접한 부분은 하나 있다. 만두가 중국에서는 제갈공명이 살았던 삼국시대를 전후해서 생겼다는 점이다.   일단 만두라는 음식 이름이 이 무렵 문헌에 처음 보인다. 삼국시대가 끝난 후인 3세기 후반의 진(晉)나라 때, 『병부(餠賦)』에 음과 양이 교차하는 계절인 정월에 만두를 빚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다만 여기서는 끌 만(曼) 머리 두(頭)자를 써서 만두라고 표기했으니 오랑캐 머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중국 샹양(襄阳)시 제갈량 광장(諸葛亮廣場)에 설치된 제갈공명 동상. 바이두(百度) 그렇다면 제갈공명이 남만 포로의 머리를 베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대신 사람 머리 모양으로 만두를 빚었다는 이야기는 누가 처음 했을까?   소설 삼국지, 정식 이름 『삼국지통속연의』의 저자인 나관중이 제갈공명의 인간미를 강조하기 위해, 하지만 남만 사람들이 들으면 무지 기분 나빴을, 기발하면서 발칙한 스토리를 창작했을 것 같지만, 그것도 아니다. 송나라 때 문헌 『사물기원』에 나오는 이야기를 슬쩍 가져다 소설 속에 풀어냈을 뿐이다.   사물기원의 만두(曼頭) 기원에 대한 설명에서는 패관소설에 따르면 제갈무후가 맹획을 정벌할 때 사람들이 사람의 머리를 베어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했지만, 제갈무후가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양, 돼지고기를 밀가루로 싸서 사람 머리처럼 만들어 제사를 지낸 후 출병을 했다고 나온다.   참고로 출처로 인용한 패관소설이란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를 수집해 엮은 책이다. 다시 말해 당시 송나라 사회에 이런 이야기가 떠돌았다는 의미다.   여기서 핵심은 나관중이 사물기원의 스토리를 슬쩍 표절했다는 고발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송나라 사람들이 만두를 먹으며 "원래는 남만 오랑캐의 머리 대신 만든 음식이었대..."라며 낄낄거렸을 당시 사회 풍경이다.   송나라는 밀 문화권인 북방의 만두가 쌀 문화권인 양자강 이남의 강남에 퍼지며 대중화됐던 시대다. 이 과정에서 중원의 한족이 알게 모르게 남만인들에 대한 비하하는 분위기가 제갈공명의 만두 발명 이야기에 은연중 담겨 있다. 이때의 남만인들은 왜 비아냥의 대상이 됐을까? 중국 역사, 특히 송나라 전후의 시대 상황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송나라는 진(晉)과 5호16국 시대 이래로 중원의 한족이 북방민인 거란의 요, 여진의 금나라에 밀려 양자강 유역과 그 이남으로 쫓겨 내려왔다. 뒤집어 말하면 쫓겨온 한족이 세력이 더 약했던 현지의 남만인, 현재의 한족 일부와 소수민족을 밀어내고 영토를 개척했다. 이 과정에서 남만에 대한 멸시가 생겼다.   원나라까지 이어진 이른바 남인(南人)에 대한 하대는 명나라 때도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원말명초 때의 인물인 나관중은 남만 오랑캐 머리 대신 만두를 빚었다는 제갈공명의 발명설을 재조명했고 심지어 명나라 후기 인물인 낭영은 칠수유고에서 만두의 원래 이름은 오랑캐 머리, 만두(蠻頭)였다며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만두 유래에 담긴 행간의 의미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2024.04.19 06:00

  •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자오러지 각별히 챙긴 김정은, 왜?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자오러지 각별히 챙긴 김정은, 왜?

    자오러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리창 중국 총리가 방북할 것으로 전망됐지만, 정작 평양을 찾은 사람은 자오러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이었다. 자오러지는 북·중 수교 75주년 기념 ‘조중친선의 해’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4월 11일~13일 평양을 방문했다.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한국에 비교하면 국회의장이다. 그래서 자오러지의 북한 파트너는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되는 셈이다.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를 한국과 비교하면 국회에 해당한다. 국회(한국)=전인대(중국)=최고인민회의(북한).   자오러지는 시진핑-리창에 이어 권력 서열 3위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3일 이에 걸맞게 만나자마자 그를 3차례나 포옹하고 오찬 후 차량에 탑승해 떠나는 자오러지를 직접 배웅하는 등 각별한 배려를 했다. 지난해 7월 방북한 리훙중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과 지난해 9월 평양을 찾은 류궈중 국무원 부총리와는 사뭇 달랐다. 리훙중과 류궈중은 의례적인 만남에 불과했지만, 자오러지는 정성을 다하는 듯 보였다. 사람들은 자오러지가 과연 어떤 ‘선물’을 가지고 갔을까에 관심이 쏠렸다.  중국중앙(CC)TV가 공개한 말 8마리가 질주하는 조각상과 중국의 국주로 불리는 마오타이 30년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오러지는 김정은이 학수고대하는 경제 지원 보따리를 가지고 갔을까?   자오러지는 김정은을 만나 “계속해서 상호 강력한 지원을 통해 쌍방의 공동 이익을 보호하자"라고 말했다. 의례적인지 아니면 구체적인 지원이 담긴 말인지 알 수 없지만, 김정은의 각별한 배려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대북 지원을 담당하는 상무부에서 리페이 부부장이 동행한 것을 보면 경제 지원에 관한 얘기가 오고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오러지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간 북한 사람들 가운데 류은해 북한 대외경제성 부상도 있었다. 리페이의 파트너다. 따라서 자오러지가 평양에 머무르는 동안 리페이-류은해의 면담이 있었을 것이다. 북-러 밀착은 중국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그렇다고 유엔 대북 제재와 미·중 관계 개선이 국익에 우선하는 환경에서 중국이 대놓고 북한을 지원할 수 없다.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방북한 사례는 많지 않다. 우방궈가 2003년 10월, 리잔수가 2018년 9월 평양을 방문했을 정도다. 우방궈는 제1차 6자 회담(2003년 8월 27~29일) 이후 북한이 더는 관심이 없자 설득하기 위해 평양을 찾았다. 제1차 6자 회담에서 미국은 북한의 선(先) 핵 폐기를 주장했고, 북한은 핵 폐기와 대북 지원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맞서면서 공동 발표문도 채택하지 못하고 끝났다.   중국은 토라진 북한을 제2차 6자 회담에 참석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후진타오 국가 주석은 우방궈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평양에 보냈다. 당시는 전인대 상무위원장이 지금과 달리 권력 서열 2위였다. 후진타오는 그 중요한 임무를 우방궈에게 맡긴 것이다. 왕이 중국 6자 회담 대표도 함께 방북해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을 만나 차기 회담 개최를 위한 협의를 했다.   우방궈는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 대안친선유리공장 건설에 대한 차관(5000만 달러)을 약속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유리산업에 눈을 뜨면서 북한은 유리공장이 간절했다. 우방궈의 방북 이후 북한은 2004년 2월 제2차 6자 회담에 다시 나왔다.   리잔수는 201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일(1948년 9월 9일) 7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방북했다. 이때는 의례적인 방북이었다.   이번 자오러지의 방북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류젠차오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다. ‘정부 대 정부 관계’보다 ‘당 대 당 관계’를 중시하는 북-중 관계에서 류젠차오가 중국공산당의 대북 창구를 맡고 있다. 북한의 파트너는 김성남 조선노동당 국제부장이다. 이들은 지난 3월 21일 베이징에서 이미 만났다. 대외연락부장(중국)-국제부장(북한)의 만남은 북·중 정상회담이 무르익었다는 신호다. 이번에 자오러지와 함께 류젠차오가 평양을 방문한 것은 북·중 정상회담의 일정을 조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외교부에서 미국을 담당하는 마자오쉬 부부장이 동행한 것도 놓칠 수 없는 대목이다.  올해 전 세계 최대 이슈는 미국 대선으로 북·중 모두에게 최대의 관심사다. 마자오쉬는 김정은에게 미국 대선과 북·중 정상회담의 상관관계를 설명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자오쉬는 지난 3월 27일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부장관과 미·중 관계와 국제 정세 등을 전화로 논의했다.   김정은의 각별한 대접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자오러지의 방북은 북·중 정상회담 개최와 북·중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북-러 밀착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중국의 판단이다. 김정은도 자오러지에게 “북·중 수교 75년이자 ‘조중 친선의 해’인 올해 중국과의 각 분야 협력과 국정운영 경험 교류 강화, 전통적 우의를 돈독히 해 북·중 관계의 새 장을 만들자"라고 말했다.   북-중-러의 밀착은 점점 강화되고 있다. 반면 한-미-일은 국내 문제로 외교에 집중하기 곤란해졌다. 한국은 4‧10 총선에 국민의힘이 참패하면서 국내 정치에 우선 집중해야 할 상황이다. 일본은 자민당의 ‘비자금 스캔들’과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 하락으로 정국이 어수선하다.   미국은 11월 대선을 앞두고 바이든-트럼프가 재대결을 벌이고 있다. 만약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미-일 동맹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 한-미-일은 국내 문제에 코가 석 자다. 북-중-러도 국내 문제가 만만치 않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은 경제 문제, 북한도 경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북-중-러는 지도자의 교체가 당분간 없어 외교적 결속을 다질 수 있다.   이것은 한국이 원하는 외교 상황은 아니다. 북-중-러 밀착은 한국에 반쪽짜리 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한국이 외교 환경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나 외교 환경은 언제든지 바뀐다. 그때를 대비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인적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것이 최선이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칼럼    

    2024.04.18 06: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금상첨화(錦上添花)와 왕안석(王安石)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금상첨화(錦上添花)와 왕안석(王安石)

    한유, 구양수, 소동파 등과 함께 당송팔대가로 꼽히는 중국 북송의 정치가이자 사상가 왕안석(王安石). 바이두백과(百度百科) 신기하게 일란성 쌍둥이라도 헤어스타일에 따라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류의 헤어스타일이 더 다양해지는 이유다. 문득 오늘의 주인공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헤어스타일이 궁금해진다. 뭔가 흠을 잡으려는 동료 관료들로부터 ‘외관에 신경을 덜 쓴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이번 사자성어는 금상첨화(錦上添花)다. 앞의 두 글자 ‘금상’은 ‘비단 위에’라는 뜻이다. ‘첨화’는 ‘꽃을 추가하다’라는 뜻이다. 이 둘이 결합해 ‘좋은 일이 겹친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반대말이지만 ‘설상가상(雪上加霜)’과 그 문법이 같다. ‘고운 노래는 비단 위에 꽃을 더하는구나(麗唱仍添錦上花)’. 북송 시대 왕안석의 시 ‘즉사(卽事)’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역사책에 주로 ‘신법(新法)’을 추진한 사상가이자 재상으로 소개되는 왕안석은 학문이 깊고 글재주까지 뛰어났다. 한유, 구양수, 소동파 등과 함께 당송팔대가로 꼽히는 왕안석은 21세에 우수한 성적으로 진사 시험에 합격한다. 하지만 그는 관료 생활의 출발부터 평범한 길을 거부했다. 모두가 기피하던 지방 관료를 자청했다. 과거에 합격한 관료 사이에 중앙 정부 발령과 승진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대였다. 그의 이런 예외적 처신을 두고 중앙 관료들 사이에 ‘행실이 예사롭지 않다’는 평판이 돌았다.   일명 ‘만언서(萬言書)’라고도 불리는 빼어난 상소문이 있다. 약 만 자 분량의 긴 글이다. 이 ‘만언서’의 저자가 바로 왕안석이다. 그의 나이 38세 때의 일이었다.   ‘만언서’를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그 내용과 형식이 긴 분량의 특별기고 칼럼에 가깝다. 마차 소리와 출세 경쟁으로부터 한 발 떨어진 지방 정부에 머무르며 그가 원대한 ‘국가 개조’ 플랜을 구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송나라는 누가 봐도 개혁이 불가피한 시기였다. 무엇보다 북쪽 국경 방어에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이즈음 송나라 인구는 거의 1억 명에 도달했지만, 엄청난 국방비 지출과 만성적 재정 적자로 신음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만언서’는 만인의 주목을 받았다.   인종에 이어, 19세에 즉위한 신종(神宗)은 ‘만언서’를 잊지 않았다. 왕안석을 기용해 국정을 혁신하기로 결심한다. 재상이 되어 그가 펼친 ‘신법’은 파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봄에 소농(小農)에게 저금리 대출을 해준 ‘청묘법(靑苗法)’이 유명하다. 이 외에도 ‘신법’의 대부분은 소농과 소상인을 적극 보호하는 경제 분야 개혁들이었다. 리처드 폰 글란의 ‘중국 경제사(The Economic History of China)’에서 ‘왕안석의 신법’ 부분을 읽으면, 뜨거운 여름철의 나른한 공기를 찢으며 쩌렁쩌렁 소리 내는 매미 한 마리가 떠오른다.   기득권 계층의 이익에 반하는 여러 획기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실패했지만, 왕안석의 최후는 비참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사후 인물평들도 박하지 않았다. 신종 사후 1년 후 그도 세상을 하직했다. 사마광이 이끄는 ‘구법당’의 앙갚음이 아니었다. 은거하던 노정객 시인의 자연사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유럽 왕조들이 놀라 허둥대던 시기에 집권했던 조선 정조대왕도 왕안석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했다. “너는 왕안석이다.” 정조는 실학자이자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朴齊家)에게 이런 평을 한 적도 있었다.   왕안석과 박제가는 시상(詩想)에 익숙했다. 관료인 동시에 시인(詩人)이었다. 시인은 외롭지 않다. 시인의 산책로엔 동행해주는 선배 시인들의 묵향(墨香)과 발자취가 있다. 두보(杜甫)의 시가 있어 왕안석은 외로움을 몰랐다. “밀턴, 그대야말로 이 시대에 살아있어야 하겠다. 영국은 그대를 간절히 원한다.” 이 ‘런던, 1802년’을 쓴 영국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Wordsworth)에게는 인생 대선배 존 밀턴이 있었다. 평생 독신이었으나 워즈워스도 ‘외롭다’는 어휘를 몰랐다.   경제적 번영 위에 문화적 다양성까지 꽃을 피우는 사회를 우리는 늘 꿈꾼다. 이게 바로 ‘금상첨화’다. 왕안석은 자신의 시 안에 이 네 글자를 우연히 적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했다. 참으로 오묘하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홍장호 필진. 차이나랩

    2024.04.16 06:00

  • [중국읽기] 마윈의 ‘데이터’

    [중국읽기] 마윈의 ‘데이터’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지난해 11월 11일, 중국에서는 여지없이 솽스이(雙十一) 쇼핑 축제가 열렸다. 당일 하루 중국에서 발생한 배송 건수는 약 6억3900만 건. 물량 대부분이 24시간 안에 배송됐다. 북부 헤이룽장(黑龍江)성 고객이 남쪽 광둥(廣東)성에서 만든 나이키 신발을 오전에 주문해 오후에 받는 식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는 IT(정보기술)시대를 지나 DT(데이터 기술)시대로 향하고 있다.’ 알리바바 설립자 마윈(馬云)이 2014년 던진 화두다. 남들이 빠른 정보처리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는 고객 데이터 확보에 주력했다. 알리의 빅데이터는 상품 수요를 정확히 예측했고, 해당 지역 물류센터에 상품을 미리 가져다 놓을 수 있었다. 헤이룽장과 광둥의 3000㎞ 거리가 사라진 이유다.   최근 중국 푸저우(福州)에서 열린 크로스보더 전자상거래 전시회. 30여 개의 글로벌 플랫폼이 참여했다. [신화통신] 마윈이 ‘신유통’을 말한 건 2016년이다. ‘온·오프라인의 통합, 빠른 배송, 100% 페이 결제’가 핵심이다. 당시 설립된 신선식품 매장 허마센셩(盒馬鮮生)은 ‘반경 3㎞ 이내, 30분 배달’을 기치로 내걸고 배송 전쟁을 벌였다. ‘하루 묵힌 채소는 없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MD(상품기획자)를 농촌으로 내몰았다. 페이 결제로 금융정보가 더해지면서 마윈의 데이터는 더욱 충실해졌다.   마윈이 ‘신유통’을 얘기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아예 유통을 없애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다. 핀둬둬(拼多多) 설립자 황정(黃崢)이다. 2015년 설립된 핀둬둬는 고객과 공장을 직접 연결하는 방식(C2M)으로 가격을 낮췄고, 여기에 공동구매 기법을 더해 값을 더 내렸다. 그의 비즈니스 모델에는 물류 창고도, MD도 필요 없었다. 그래서 가격을 또 낮출 수 있었다. 구글 출신 황정은 일찌감치 빅데이터 분류에 AI(인공지능)를 활용했다. 데이터는 더 정밀해졌다.   요즘 중국 전자상거래의 대세는 ‘추천 쇼핑’이다. 소비자가 쇼핑 플랫폼에 들어와 상품을 검색해 구매하는 건 옛 방식이다. 지금은 플랫폼이 알아서 고객이 살 만한 상품을 핸드폰에 쏴준다. 뉴스를 검색할 때도 뜨고, 쇼트 동영상을 볼 때도 올라오고, 게임을 할 때도 나타난다. 물건 하나 사면 연관 상품이 주르륵 떠오른다. 데이터는 이제 고객의 소비 심리를 조종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마윈의 데이터’는 그렇게 진화했다. 국내 업계 최대 이슈인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는 그 후예다. 데이터 DNA로 무장한 그들은 시장 확대에 거침이 없다. 마윈이 10년 전 선언한 ‘DT시대’가 지금 우리 눈앞에서 현실화하고 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4.04.15 00:22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지역별 라조기에 담긴 중국음식 천태만상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지역별 라조기에 담긴 중국음식 천태만상

    중국 쓰촨식 닭고기 요리 라쯔지(辣子鷄). 튀긴 닭고기를 고추, 두반장, 화자오, 마늘, 생강 등과 함께 기름에 볶아 만든 요리다. 바이두(百度) 라조기(辣子鷄)는 우리한테 익숙하기는 하지만 친숙한 중국요리는 아니다. 한국의 중국음식점 메뉴에서 흔히 볼 수 있기에 눈과 귀에는 낯설지 않지만, 탕수육처럼 자주 먹어 입이 그 맛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반면 중국말로 라쯔지라고 하는 라조기는 중국에서는 비교적 흔한 음식이다. 참고로 라조기는 산둥 사투리와 한국식 중국어가 합쳐진 이름이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 "중국에서 라쯔지라는 음식 별로 보지 못했다"는 사람도 적지 않을 듯싶은데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흔하기는 하지만 막상 라쯔지라는 이름의 음식은 생각만큼 자주 눈에 띄지는 않는다.   이유는 음식은 비슷하지만 이름은 다른, 변형된 요리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토막 친 닭고기를 빨간 고추와 함께 볶은 꿍바오지딩(宮保鷄丁)이 그런 예다. 라쯔지는 매운 고추(辣子)와 닭(鷄)을 함께 볶았기에 랄자계(辣子鷄), 즉 라쯔지와 요리의 기본 개념이 거의 비슷하다.   다양한 요리가 라쯔지에서 변형된 까닭은 이 음식이 만들기가 비교적 간단할 뿐 아니라 역사도 오래됐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익숙하기에 요리법을 바꿔야 질리지 않았고 특히 음식점에서는 변형을 통해 고급화를 시도해야 했기에 라쯔지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는 꿍바오지딩 같은 요리가 생겨났을 것이다.    요점은 라쯔지가 그만큼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음식이었다는 것이다.   라쯔지가 대중적이면서 서민 친화적이라는 흔적이 또 있다. 중국에는 쓰촨, 산둥, 구이양(貴陽)처럼 지역 이름이 붙은 라쯔지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곰탕이나 순대와 비슷하다.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기에 나주, 현풍, 해주 등 지역 특산 곰탕이 생겼고 신의주, 병점, 용인 순대 등등 동네별 순대가 등장한 것과 닮은꼴이다.   한국 곰탕이나 중국 라쯔지 모두 지역에 따라 요리 방법이나 맛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중국의 경우 흥미로운 부분이 또 있다. 라쯔지의 유래설에 따라 지역별 음식의 특성을 알 수 있다.   먼저 라쯔지는 쓰촨성에서 생겨나 중국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간 음식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쓰촨 라쯔지는 18세기 중반의 청나라 때 쓰촨성에서 일어난 반란진압 전쟁인 금천(金川)전투 와중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쓰촨은 지역이 험난한 관계로 반란을 진압하는데, 수개월이 걸렸고 전투에 참여한 청나라 병사들이 피로에 지치고 무기력증에 빠졌다. 특히 쓰촨 지방 특유의 날씨, 더울 때는 후텁지근하며 습하고 기온이 떨어지면 오슬오슬 뼛속을 파고드는 냉기에 못 견뎌 했다.   이를 본 장군이 매운 고추가 습한 기운을 제거하고 열을 낸다는 사실에 착안해 진중 요리사를 시켜 매운 고추와 닭을 볶아 병사들에게 먹이게 했다. 먹고 기운을 차린 병사들이 마침내 반란을 진압했고 이후 민간에 퍼져 라쯔지 요리가 됐다는 것이다. 유래설은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분명한 것은 쓰촨요리가 고추와 화쟈오(花椒)를 많이 쓰는 이유, 덧붙여 라쯔지가 상류층이 아닌 병사들이 먹었던 지극히 서민적인 음식에서 비롯됐음도 여기서 알 수 있다. 닭고기와 고추를 매콤하게 볶아낸 산둥식 라쯔지. 겉으로는 안동찜닭과 비슷한 비주얼이다. 소후(搜狐) 쓰촨과 함께 라쯔지로 유명한 곳이 산둥성이다. 여기에도 관련 스토리가 있는데 청나라 황실의 요리사가 은퇴 후 고향인 산둥으로 돌아와 음식점을 열었다. 황실 주방인 어선방(御膳房)에서 다년간 경험하고 연구한 요리법을 살려 라쯔지를 만들었는데 수탉을 이용하고 고추로 맛과 향, 색감을 살려 황실 요리답게 고급화했다. 그러면서 고추의 매운맛으로 땀을 흘리고 양기가 충만한 수탉이 더해진 보양 음식으로 소문나면서 음식점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역시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이 기원설에는 산둥요리가 북경요리, 즉 황실 요리와 통한다는 사실이 강조돼 있다. 한국 라조기가 중국음식점 차림표 중 가격이 상위권인 이유도 이런 까닭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산둥 라쯔지 역시 기본은 대중적인 음식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요리재료인 수탉은 닭고기 중에서 가장 저렴한 재료였으니 아무리 황실 요리사가 발전시켰다고 미화해도 서민 음식일 수밖에 없다.   쓰촨, 산둥 라쯔지와 함께 중국에서는 구이저우성의 구이양(貴陽) 라쯔지도 유명하다고 한다. 고추 대신 두반장과 마늘, 생강, 후추, 파 등을 써서 맵고 찰지면서 맛있는 냄새와 함께 색감이 좋다는 것이 타지역 라쯔지와의 차이라고 하는데 실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에 만들어지고 알려진 음식이라고 한다. 그것도 한 음식점에서 중국 공산혁명 유적지 방문객들에게 국공내전 때 누가누가 먹었다고 선전하며 유명해졌다고 한다. 돈을 보고(向錢看) 전진하라는 개혁개방 시기의 속설처럼 공산혁명까지 상업화에 응용한 셈이다. 더차이나칼럼

    2024.04.11 06: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노반지교(魯般之巧)와 공수반(公輸般)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노반지교(魯般之巧)와 공수반(公輸般)

    노반(魯般)처럼 기계(機械) 따위를 교묘(巧妙)하게 잘 만드는 재주를 노반지교(魯般之巧)라고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코리아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이렇게 유명 배우가 광고의 한 장면에서 말하면 사람들은 생각한다. 가구가 아니라면 대체 뭐지. 침대가 ‘과학’이라고까지 어필하고 싶은 광고주의 마음을 첫 광고에선 바로 추측하지 못한다. 현대인은 불면증에 많이 시달린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잠의 신비에 대해선 계속 연구가 진행 중이다. 실제로 침대는 수면의 질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확연하게 알지 못하는 영역이 꽤 남아있다.   이번 사자성어는 노반지교(魯般之巧)다. 앞의 두 글자 ‘노반’은 ‘노(魯)나라의 유명한 목수 공수반(公輸般)’의 별칭이다. ‘지교’는 ‘~의 재주’라는 뜻이다. 이 둘이 결합되어 ‘마치 노반처럼, 무엇이든 잘 만드는 재주’라는 의미가 된다. 공수반과 묵자(墨子)를 동시대의 경쟁적 동업자 관계로 사람들은 추정한다. 현존하는 53편의 ‘묵자’ 일부 페이지들에 이들 사이의 흥미로운 대결 일화가 ‘장편(掌篇) 소설’ 분위기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공통적으로 당시의 첨단 기술 분야에 일가견이 있었다.   노반은 훗날 중국에서 공인(工人)들이 제사를 지내며 떠받드는 신(神)으로까지 자리잡았다. 그에 대한 기록들에 지나친 과장법이 적지 않은 이유다. 때론 마치 전설 속 인물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겸애설(兼愛說)로 유명한 묵자가 이 노반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둘 정도로 무기 과학에 밝았다는 것도 다소 의외다.   노반이나 묵자와 직접 관련성은 없으나, 일찍이 숫자 계산의 편의를 위해 주판(abacus)을 발명한 것은 중국이다. 화약과 나침반 원리의 발견도 중국이 서양에 앞섰다. ‘동양이 숫자와 과학에 뒤졌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다.   서양이 석탄과 증기기관을 결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동력원을 실용화하기 이전까진 중국의 경제 수준이 서양을 살짝 앞섰다. 케네스 포메란츠의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논증을 위해 그는 다양한 통계 수치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영국에서 석탄과 인접한 지역에서 증기 기관이 발명된 것도 우연이었지 필연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잠자는 중국을 깨우지 말라’는 조롱이 19세기에 서양에서 유행했다. 이쯤에서 우린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표현까지 오가는 지경까지 동양은 그 시절 왜 그토록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것일까.   그 무엇보다 공업 기술 인력이 사회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중앙 부처에서 국가 예산을 다루는 관료들은 항상 농업과 목축에 우선순위를 뒀다. 과학 이론과 제조업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관료들이 농업과 공업 사이에서 최소한의 균형만이라도 견지하며 예산 분배를 설계했다면 분명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한편, 서양의 과학은 의학계에선 페니실린부터 백신까지, 통신과 컴퓨터 분야에선 전기와 모르스 부호부터 이동 전화와 인공 지능까지, 끊임없이 신세계를 개척해가고 있다. 대부분이 원천 기술이다. 누군가 이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며 또 이상한 논리를 펼친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된다.   “우리 중국은 부족한 게 없어요. 교역 확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메카트니를 단장으로 한 영국 사절단을 접견한 후, 영국왕 조지3세의 서신에 건륭제(乾隆帝)는 이런 투로 답신을 보냈다. 1793년의 일이었다. 그는 청나라의 가장 융성한 시기를 이끈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이어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전개된 세계사는 군함과 대포 등으로 무장한 서양인의 ‘물음표’가 동양인의 ‘따옴표’에게 다가와 거침없이 제압하여 허물어뜨리는 과정이었다.   주역(周易)의 원리가 아니더라도 세상은 돌고 돈다. 사자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의식도 몸도 침대에서 멀어졌다. 숙면을 취하고 기력을 회복한 동방의 사자들이 서양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반도체 기술 영역에까지 진출해 포효하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서양은 중국과 동아시아의 위협적인 기술 추격을 실감하는 것일까. 허둥지둥 성벽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 지금 21세기에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또 한 차례의 공성전(攻城戰)인가.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홍장호. 더차이나칼럼

    2024.04.09 06:00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미국 민물가재가 중국 마라룽샤(麻辣龍蝦)로 둔갑한 사연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미국 민물가재가 중국 마라룽샤(麻辣龍蝦)로 둔갑한 사연

    중국의 국민 여름 야식 마라룽샤(麻辣龍蝦). 즈후(知乎) 마라룽샤(麻辣龍蝦)는 마라탕, 마라샹궈 등과 함께 한때 한국에서도 꽤 유행했던 중국 음식이다. 다소 뜬금없는 궁금증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왜 마라룽샤 즐겨 먹었을까?   당연히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겠다. 일단 우리도 좋아하는 얼얼하고 매운 사천식 마라 양념으로 요리했으니 우리 입맛에 맞는 부분이 있다. 민물 가재이기는 하지만 작은 랍스터라는 뜻인 샤오룽샤 요리의 주재료이니 바닷가재인 랍스터 먹는 느낌도 없지는 않다. 혹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져버린,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 가재에 대한 향수가 무의식중에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북경과 상해를 비롯해 중국에 뜨겁게 불었던 마라룽샤 열풍이 한국에 그대로 옮겨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면 중국에서는 마라룽샤가 왜 그토록 유행했을까?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중국인들은 언제부터 앞다퉈 마라룽샤 먹기 시작했을까?   마라룽샤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북경의 경우 2001년 전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북경의 도심인 건국문 주변 음식점 거리에 새롭게 유행하는 요리가 생겼다며 찾아갔던 곳이 바로 마라룽샤 전문점이었다. 음식점은 커다란 접시에 가득 쌓인 마라룽샤 놓고 맥주잔을 기울이며 웃고 떠들던 20~30대 젊은 층과 직장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아무리 유행이라지만 당시 중국 젊은이들, 민물 가재 요리에 그렇게 빠져든 이유가 무엇일까? 충격적이게도 샤오룽샤는 사실 미국산 민물 가재였다. 게티이미지뱅크  마라룽샤는 꽤나 독특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평범한 음식이지만 요리가 생겨나서 유행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음식이다.   먼저 요리의 주재료인 민물 가재, 샤오룽샤 식용역사부터가 눈길을 끈다. 중국은 샤오룽샤 최대 생산국이며 소비국인 동시에 수출국이다. 그러니 얼핏 샤오룽샤가 중국 토종의 민물 가재 종류일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미국 동남부에서 주로 잡히는 북미 토종 가재다.   그런데 왜 중국이 최대 양식 국가가 됐고 중국 음식인 마라룽샤의 재료가 됐을까 싶은데 사연이 다소 복잡하다.   샤오룽샤라는 북미산 민물 가재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약 100년 전인 1920~30년대다. 당시 대륙을 침략했던 일본군과 함께 진출했던 일본 양식업자가 미국에서 수입해 퍼트렸는데 처음부터 식용으로 들여온 것이 아니었다.   일본 양식업자들은 이 무렵 후난 성 일대에서 황소개구리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식용 개구리를 키웠다. 그런데 번식 속도가 빠른 데다 먹성까지 좋은 황소개구리의 왕성한 식욕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사료감을 찾다 발견한 것이 북미산 가재, 샤오룽샤였다.   동양 가재에 비해 크기도 클 뿐 아니라 미국산 황소개구리 못지않게 번식력도 뛰어났기에 개구리 사료로는 안성맞춤이었으니 개구리 생태계의 역발상 이이제이(以夷制夷)였던 셈이다.   이럭저럭 세월이 흘러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동시에 중일전쟁도 끝났고 전쟁에 패한 일본의 양식업자들도 중국 땅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어진 국공내전의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황소개구리가 됐건 사료용 샤오룽샤가 됐건 양식장 관리가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돌보지 않는 틈을 타 양식장을 뛰쳐나온 황소개구리와 샤오룽샤가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며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때만 해도 아직 농부들은 북미산 민물 가재인 샤오룽샤를 사료로만 생각했을 뿐 요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1980년대만 해도 중국에서는 아직 일부 외래종 생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개별적으로야 일부 농가에서 잡아다 구워도 먹고 쪄도 먹었을 것이고 주 무대가 후난성이었으니 당연히 매운 고추 양념을 곁들여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요리로 개발해 대중적으로 퍼트리지는 못했다. 대신 후난성 농부들은 넘치는 샤오룽샤를 잡아다 개구리와 함께 닭과 돼지 사료로 활용했다.   그럼에도 샤오룽샤 번식력이 개구리와 닭, 돼지의 식욕을 뛰어넘었는지 여전히 샤오룽샤가 넘쳐났다. 그러자 1990년 초, 쓰촨성 성도(成都)의 한 음식점에서 전통적인 사천식 마라 양념으로 요리한 민물 가재, 마라룽샤 개발하면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장쑤성에서 랍스터 요리 축제(龍蝦節)에 이 요리를 선보이면서 2001년 무렵, 마침내 북경까지 진출해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흥미로운 것은 2000년을 전후해 마라룽샤가 퍼진 이유를 중국 사회구조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분석하기도 한다. 이때는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만든 등 따습고 배부른 원바오(溫飽)사회에서 벗어나 생활이 편안한 중산층 사회인 샤오캉(小康)사회로 진입할 무렵이다.   여유가 생긴 주머니 사정을 바탕으로 외식을 하고 거리 음식이 발달하는 시기에 맞춰 등장한 소시민의 샤오캉 음식이 마라음식 계열의 마라룽샤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라룽샤에는 중국 현대사의 명암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더차이나칼럼

    2024.04.04 06: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광풍제월(光風霽月)과 주돈이(周敦頤)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광풍제월(光風霽月)과 주돈이(周敦頤)

    비가 오고 갠 뒤의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을 지닌 사자성어 광풍제월(光風霽月). 게티이미지뱅크 ‘타마더(他媽的)’는 욕설이다. 질투와 다툼이 있는 곳이라면 중국 어딜 가도 꼭 듣게 되는 소리다. 대문호 루쉰(魯迅)은 이 말을 중국의 ‘국민욕’이라고 호칭했다. 본래는 한 문장이었으나, 나쁜 어휘가 모두 탈락되고 형식적으론 무색무취한 세 글자로 변했다.    우리말에도 같은 뜻의 세 글자 욕설이 있다. 과거 중국에서 좋은 가문 출신의 일부는 능력도 없으면서 주로 부계(父系) 조상 덕에 거만하게 굴고 잘난 척했다. 이에 서민들이 그들의 ‘혈통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고 부정하며 아주 독하게 흉을 본 것에서 기원했다. 우리 주변에 여전히 심한 욕설을 뇌와 혀에 달고 사는 이들이 있다. 다행히 한평생 언행이 바르고 이웃이나 사회의 귀감이 되는 인물도 아주 없진 않다.   이번 사자성어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이다. 앞 두 글자 ‘광풍’은 ‘비 온 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뜻한다. 다음으로 ‘제월’은 ‘비나 눈이 멈췄을 때의 밝은 달’이다. 이 둘이 결합하여 ‘막힘없이 탁 트이는 흉금과 담백한 마음’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인품의 고매함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북송(北宋)의 시인 황정견(黃廷堅)의 ‘염계시(濂溪詩)’에 이 표현이 나온다. 염계는 주돈이의 호다. 광주호(光州湖)에서 가까운 담양 소쇄원에 광풍각과 제월당이 있다. 이 역시 광풍제월에서 두 글자씩 취한 이름이다. 두 건물의 현판은 모두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다. 그는 ‘큰 글자’ 서예에 능했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의 경렴정(景濂亭)도 주돈이와 관련이 있다.   도가와 불교가 성행하던 북송 시기에 유학자 염계 주돈이는 ‘독특한 그림’으로 시작되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저술했다. 그 ‘개념도(槪念圖)’를 얼핏 보면 무극과 태극, 음양, 오행(五行), 남녀, 그리고 만물을 세로로 나란히 정렬시켜 도교의 한 비망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훗날 주희(朱熹)는 심화 해설서인 태극해의(太極解義)를 저술하여, 불교·도교와 선을 긋는 자신만의 이기론(理氣論)을 펼쳤다.   여담으로, 주돈이는 외모에 있어서 키도 작고 전체적으로 아주 볼품없었다. 그의 지인들은 그런 외모 안에 고매한 인품과 호연지기, 그리고 깊은 학식이 깃든 것에 몹시 놀라워했다. 안타깝게도 57세에 병사했다. 주돈이는 ‘이정(二程)’ 형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주돈이보다 약 100년 후 출생한 주희는 주돈이와 정이(程頤)의 학통을 이었다. 따라서 주돈이를 주희 성리학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푸젠성(福建省) 남안(南安)에서 관리로 근무할 때 주돈이는 이정의 부친 정향(程珦)을 직장 동료로 만났다. 그의 인격과 학식에 반한 정향은 아들 둘을 그에게 보내 배우게 한다. 맹모(孟母)처럼 적극적으로 이사를 감행한 경우는 아니지만, 그는 주변에서 자녀의 훌륭한 스승을 찾아냈다.   주돈이와 이정 형제의 사제지간 인연에서 필자는 다음 두 가지를 떠올렸다. 첫째, 학식 깊은 스승의 중요성이다. 대체로 ‘자기 자식은 직접 가르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서 보통 교육이 실시되기 전엔 좋은 스승을 물색해 자녀 교육을 위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주돈이가 동료 덕에 총명한 제자들을 가졌고 주자(周子)라고까지 칭해지며 천추에 아름다운 이름을 전한 것일까. 아니면 이정 형제가 ‘좋은 질문’을 던져주는 탁월한 스승을 만나 눈을 뜨고 소위 ‘신유학(Neo-Confucianism)의 길을 개척한 것일까.   둘째, 청출어람이다. 공자보다 약 180년 후 태어난 맹자는 아성(亞聖)에까지 이르렀으나 공자를 넘어서진 못했다. 하지만 이정 형제는 학문의 깊이와 넓이에 있어 결국 스승 주돈이를 넘어선다. 문구를 해석하는 훈고학적 사유와 철학적 사색의 차이일 수 있다. 칸트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철학의 한 계보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철학적 사색이 얼마나 견실한 청출어람의 탯줄인가를 보여준다.   평소 주돈이는 모란보다 연꽃을 더 사랑했다. 모란이 부귀한 자의 꽃이라면, 국화는 현자의 꽃이요, 연꽃은 ‘군자의 꽃’이라고 애련설(愛蓮說)에서 노래했다. 창덕궁 후원의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도 주돈이의 연꽃 사랑과 관련이 깊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더차이나칼럼

    2024.04.02 06:00

  • [중국읽기] 성장 엔진 갈아 끼우기

    [중국읽기] 성장 엔진 갈아 끼우기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작년 한 해 중국은 서방의 ‘피크 차이나(Peak China)’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부동산 경기 침체, 청년실업, 인구감소 등이 겹치면서 중국 위기론이 퍼졌다. ‘중진국 함정’,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중국이 답을 내놨다. ‘신질생산력(新質生産力)’이 그것. ‘새로운 품질의 생산력’으로 번역된다.   단어 ‘신질생산력’은 지난 3월 5일 양회의 ‘정부 업무 보고’에 등장한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관영 매체에 등장하고 있다. 지난주 보아오(博鰲)포럼의 핵심 주제이기도 했다. 샤오미(小米)의 전기차 발표를 두고 ‘신질생산력의 승리’라는 말도 나온다.   뭘 어쩌자는 걸까.   전기차 역시 ‘새로운 품질의 생산력’ 중 하나다. 지난달 28일 출시된 샤오미 스마트 전기차SU7. [신화통신] ‘성장 엔진 교체’로 요약된다. 임가공 공장이 아닌 고부가 하이테크 산업에서 경제 성장의 추동력을 끌어내겠다는 뜻이다. 신에너지 자동차, 수소에너지, 신재료, 상업 항공우주, 양자기술, 생명과학, AI…. 정부 업무 보고에서 제시된 ‘새로운 품질의 생산력’ 항목이다. 그들은 시장의 힘이 아닌 국가 정책으로 성장 동력을 만들겠다고 나선다.   목표는 ‘중진국 함정’ 탈출이다. 중국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약 1만2000달러. 함정의 경계선이다.   중국 관변 학자들은 성공을 자신한다. AI·양자기술 등 ‘신질생산력’ 분야에서 중국은 추격자(Fast Follower) 단계를 벗어나 기술 선도자(First Mover)로 도약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들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미국을 추월한 세계 최고 수준의 AI 논문이 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이들 분야는 대부분 초기 성장 단계이기에 정부의 지원이 중요하다. 정부·기업·학계가 똘똘 뭉쳐 움직이는 중국의 신형거국체제가 더 위력적일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서방 학계는 보다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많은 연구는 정치 민주화, 경제 자유화 없이는 선진국 점프가 어렵다는 걸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본·한국·싱가포르·대만 등이 이를 증명한다. 중국이 기술 강국이자, 최대 소비 시장인 미국과 정치·경제적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점도 기존 함정 탈출 경로와 다르다.   중국이 성장 엔진을 갈아 끼워 중진국 함정을 돌파할 수 있을지는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산업 ‘품질’이 고급화되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성공에 가까워질수록 기존 선진국과는 다른 ‘기이한 선진 경제체’가 하나 더 탄생할 가능성은 커진다. 지난 45년 경제 성장이 그랬듯, 중국의 새로운 실험이 다시 시작됐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4.04.01 00:46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예비 처가에서 생긴 일, 개구리 반찬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예비 처가에서 생긴 일, 개구리 반찬

    개구리 겨울잠 자던 동물이 이제 봄인가 싶어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지났다. 동면에 들어갔던 개구리도 예외가 아닌데 중국 일각에서는 때가 왔다며 입맛을 다시는 이들도 없지 않겠다.   모두는 아니지만 중국에는 개구리 요리를 즐기는 사람들도 꽤 있다. 북경만 해도 전통시장 심지어 대형 마트에서 커다란 황소개구리를 식용으로 파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음식점에서 별미 요리로 먹는 정도가 아니라 집에서 가정식으로도 즐겨 먹는다는 소리다.   물론 우리도 개구리를 먹었다. 시골에서 자란 중년층 이상이라면 논두렁에서 잡은 개구리 뒷다리를 간식으로 구워 먹었던 경험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중국의 개구리 식용 문화가 크게 낯설 것도 없다. 다만 식당에서, 그리고 집에서 요리까지 해 먹는다는 게 이질적일 수는 있다.   어쨌든 중국은 다리 넷 달린 것 중에 식탁 빼고 다 요리해 먹는다고 할 만큼 별별 식재료를 다 먹는다는데 왜 그렇게 특이한 음식을 먹는지 개구리를 통해서도 그 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중국에서도 개구리 요리는 양자 강과 그 이남, 옛날식 표현으로는 강남에서 즐겨 먹는다. 지금의 후난 성, 광둥 성, 저장성 등이 되겠고 쓰촨 성도 포함된다. 강과 호수, 그리고 논을 포함한 습지가 많은 자연환경 때문에 생긴 음식문화가 아닌가 싶은데 이해를 하건 오해를 하건 그것은 각자의 몫이겠고 중국을 이해하려면 그 음식문화의 배경은 알아 두는 것이 좋겠다.   예전 중국에 유학 가서 후난성 출신 아가씨와 사귄 한국 청년이 있었다. 결혼을 약속하고 후난 성 시골의 예비 처가를 찾아 장인, 장모께 인사를 드렸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사윗감이 찾아오면 푸짐하게 음식을 장만해 대접하는 것이 풍속이다. 며칠 머무는 동안 점심, 저녁으로 다양한 개구리 요리를 내오며 맛있다고, 몸에 좋다고 권했는데 싫다는 말도 못 하고 먹느라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 언제부터 이렇게 개구리를 즐겨 먹었을까? 일각에서는 서양의 황소개구리가 중국에 전해지며 관련 요리가 발달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중국의 개구리 식용 역사는 훨씬 오래전부터다. 물론 개구리 뒷다리야 닭고기와 비슷해 맛도 좋고 양질의 단백질이니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먼 옛날부터 먹었겠지만 문헌에 기록으로 보이는 것은 4세기 무렵이다.   진(晉) 나라 때 춘추전국시대 이래 이어져 내려온 도교 이론을 집대성했다는『포박자』에 임금은 그릇, 신하를 물건에 비유하며 그릇이 작으면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에 빗대어 월(越) 나라 사람들은 팔진미를 버리고 개구리 요리를 즐겨 먹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북방 한족이 지금의 남방 한족인 남인(南人), 다시 말해 월나라 사람을 멸시하는 내용으로 남방의 음식문화인 개구리 식용 문화까지 싸잡아 얕보면서 음식의 가치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미개인 취급을 한 것이다.   이랬던 진나라가 북방 한족이었지만 5호 16국 시대에 북방의 유목 민족에 쫓겨 중원을 잃고 양자강 일대 강남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개구리를 포함한 남방 음식문화에 동화된다.   일례로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한유가 지금의 광둥 성 조주(潮州)에 자사로 내려가 머물면서 친구인 시인 유종원에게 개구리를 먹다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처음에는 삼킬 수조차 없었는데 점차 조금씩 먹게 됐다는 내용이다. 조주는 예나 지금이나 음식은 광주가 으뜸(食在廣州)이라는 광둥 요리를 대표하는 지역으로 한유가 살았던 9세기 무렵에도 이곳에서는 이미 개구리 요리가 미식으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당송팔대가로 꼽히는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식가로도 이름을 날렸던 한유 같은 인물이 먹으며 퍼트렸기 때문인지 이후 중국에서는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개구리 요리가 보인다.    중경을 비롯한 쓰촨 성에서는 연어 머리와 함께 요리한 개구리 뒷다리 훠궈(美蛙魚頭)가 미식가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저장성 항주에는 황소개구리 숯불구이(炭烤牛蛙)가 있다. 또 후난 성의 개구리볶음(蛙來噠)도 유명하다.   청나라 때는 만주족 황실에서도 개구리 요리를 즐겼던 듯싶다. 이른바 만한전석에 만주 요리로 곰 발바닥, 철갑상어 등과 함께 개구리 요리도 올랐다고 하니 한족 관리들에게 황실 음식으로 주목받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개구리 요리는 중국에서 몸에 좋은 음식(養生菜)으로 대접받았고 명나라 의학서 『본초강목』에도 그 효과에 대해 수십 차례나 언급하고 있다.   후난 성 시골의 예비 처가에 인사 갔던 한국 청년이 난감해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더차이나칼럼

    2024.03.28 06: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중구삭금(衆口鑠金)과 굴원(屈原)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중구삭금(衆口鑠金)과 굴원(屈原)

    다수를 이루는 사람들의 의견이 하나로 모이면 그 힘이 매우 강력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부파라(不怕辣) 쓰촨(四川) 사람들은 요리가 매워도 이렇게 싱겁게 말한다. ‘매워도 난 괜찮아요’라는 의미다. “라부파(辣不怕).” 같은 매운 요리를 앞에 두고 구이저우(貴州) 사람들은 이렇게 퉁명스럽게 말한다. ‘매운 맛 그딴 거, 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다. 그러면 후난(湖南) 사람들은 이 동일한 세 글자를 써서 어떻게 말할까. 꽤 무지막지한 표현으로 상대의 기를 제압한다. “파부라(怕不辣).” ‘우린 말이죠. 혹시라도 요리가 맵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걸 염려하거든요’, 대략 이런 뉘앙스다. 중국인이 즐기는 ‘식탁 유머’ 한 토막이다. 후난의 매운 맛은 정말 ‘고추 맛’ 그 자제다.   이번 사자성어는 중구삭금(衆口鑠金)이다. 앞의 두 글자 ‘중구’는 ‘여러 사람의 입’이란 뜻이다. ‘삭금’은 ‘쇠를 녹이다’라는 뜻이다. 둘을 결합하면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라는 의미가 된다. 전국시대 초(楚)나라 애국 시인(詩人) 굴원(屈原)의 비극적 운명과 관련이 깊은 사자성어다.   굴원은 그의 조국 초나라가 서북의 진(秦)나라에 의해 망국의 길로 들어서는 역사 현장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문관이었지만 외적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한 우국지사로 한 평생 일관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의 그 기세등등한 사마귀를 떠올려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숙적 진나라를 둘러싸고 전투보다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던 시기였다.   굴원은 세로로 뭉치자는 합종(合縱)의 편에 서서 가로로 뭉치자는 연횡(連橫)측과 대항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전국칠웅 가운데 초(楚)·제(齊)·연(燕)·조(趙)·위(魏)·한(韓) 이렇게 6국이 소진(蘇秦)이 설계한 합종책에 응했다. 한편, 상앙(商鞅)의 법가 행정에 의해 초강대국으로 급성장한 진나라는 외교에선 연횡책을 밀어붙였다. 장의(張儀)가 아이디어를 내고 국경을 넘나들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굴원은 장의가 꾸민 이간계에 협력한 초나라 관료들에 의해 모함을 받고 가까이 모시던 회왕(懷王)의 눈 밖에 났다. 어리석은 회왕은 ‘장의와 진나라에 속지 말라’는 굴원의 조언을 외면했다. 회왕은 결국 장의에게 연거푸 농락당한다. 진나라를 방문했다가 객지에서 우둔한 생을 마감했다. 회왕 뒤를 이은 혼군에게 재차 ‘바른 소리’를 하다가 굴원은 장강 이남으로 추방을 당하는 신세가 된다. 그는 지금의 창사(長沙) 인근을 배회하며 시를 지었다.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드는 멱라수(汨羅水)가 있다. 분한 마음과 우국충정을 노래하던 그의 고매한 시작(試作)은 이 안개 자욱한 물가에서 끝이 났다.   굴원은 ‘이소(離騷)’라는 초사(楚辭)를 지었다. 읽어보면 시경(詩經)의 간결한 시 305수(首)와 분위기가 다르다. 조금 길고 정형시 형식이다. 내용도 서사시에 가깝다.   중구삭금에 얽힌 굴원의 삶과 죽음에서 두 가지 힘(power)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간책(離間策)이다. 우리가 굴원의 반대편 진나라 입장이라고 가정해 보자. ‘초나라 사람끼리 서로 싸우게 하자!’ 이 계책 말고 딱히 떠오르는 묘수가 없다. 산과 강과 습지 덕에 장성(長城)도 필요없는 천연의 요새 지역이다. 게다가 ‘초나라 사람 3명만 모여도’ 싸움에선 이기기 힘들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런 거친 지역을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유도하는 방법 아니면 뭘로 제압할 수 있을까. 강한 조직을 이끌고 있다고 나름 자부하는 리더일수록 이 ‘이간책의 파괴력’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굴원이 어느 순간 불현듯 ‘너무 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돌을 품고서 거친 급류 속으로 뛰어든 것은 아니다. 그는 초나라 조정이 바른 판단을 하도록 긴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국력이 회복될 기미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절명시를 남기고 멱라수에 몸을 던진다. 귀한 목숨을 바치고 후세에 큰 울림을 주기 위함이었다. 매천 황현(黃玹)의 깊은 뜻과 다르지 않다.   자신만의 이야기와 핵심 아이콘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민족이나 공동체는 복원력이 있어 생명력도 오래간다. 중국인들은 요즘에도 굴원의 충정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매해 음력 5월의 단오절에 용선(龍船)을 띄우고 쫑즈(粽子)를 강에 던진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홍장호. 더차이나칼럼

    2024.03.26 06:00

  • [중국읽기] 외교관 푸바오, 돌아올까?

    [중국읽기] 외교관 푸바오, 돌아올까?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푸바오는 천생 외교관이다. 그의 태어남 자체가 판다 외교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중국을 상징하는 판다가 처음 한국에 온 건 1994년, 한중 수교 2년 만의 일이다. 수컷 밍밍과 암컷 리리 등 한 쌍을 보냈다는데, 나중에 밍밍이 암컷으로 밝혀져 놀라움을 안겼다. 오래 있지는 못했다. 아시아금융위기가 터지자 비싼 유지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99년 돌려보냈다. 판다 한 쌍의 연간 대여료만 100만 달러다.   1983년 워싱턴 조약이 발효되며 희귀동물을 다른 나라에 팔거나 기증할 수 없게 했다. 중국은 그래서 대여료를 받고 장기 임대하는 방식으로 판다 외교를 진행한다. 각국서 받은 대여료는 중국 내 판다 보호에 쓰인다는 게 중국의 설명이다. 판다의 한국 도입이 다시 거론된 건 2014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때다. 박근혜-시진핑 정부 초기 한중 밀월 관계를 반영한다.   관람객과의 마지막 만남의 날이던 지난 3일 대나무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푸바오. [연합뉴스] 그 결과 2016년 3월 푸바오의 아빠 러바오와 엄마 아이바오가 에버랜드 개장 40주년에 맞춰 한국에 왔다. 한데 공교롭게도 그해 7월 사드(THAAD) 사태가 터졌다. 2020년 초엔 코로나 사태가 덮쳤다. 한중 관계는 얼어붙었다. 이런 가운데 그해 7월 20일 푸바오가 용인에서 태어났다. 한국에서 출생한 첫 판다로 ‘용인 푸씨’라는 애칭이 주어졌다. 운명처럼 힘든 시기 한중 관계를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 됐다.   푸바오는 2021년부터 공개돼 이제까지 3년여 동안 550만 시민을 만났다. 그런 푸바오가 내달 3일 한국을 떠난다. 멸종위기종 보전 협약에 따라 만 4세가 되기 전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규정에 따라서다. 지난 3일까지 진행된 작별 만남의 열기는 뜨거웠다. 오전 10시 개장이건만 새벽 3시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푸바오로선 한중 우호를 잇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셈이다.   한데 그가 중국으로 간다고 임무가 끝날 것 같지는 않다. 한국에선 조만간 푸바오가 잘 있는지를 보러 중국으로 갈 여행단이 조직되지 않을까 싶다. 벌써부터 푸바오의 신랑감 판다가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한국 내 식지 않는 푸바오 열기는 중국에 뜻밖의 부담으로 작용한다. 푸바오가 행여 제대로 중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 그 비난의 화살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해법은 간단하다. 푸바오를 다시 한국으로 파견하는 것이다. 주한 중국대사관에는 한국에 몇 번씩 와 일하는 외교관이 많다. 푸바오에게도 한국에서 다시 근무할 기회를 주면 된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2024.03.25 00:25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부리 빼고 다 먹는 오리 한 마리 연회상 전압석(全鴨席)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부리 빼고 다 먹는 오리 한 마리 연회상 전압석(全鴨席)

    전압석(全鴨席·오리고기 풀코스) 중국인들이 제일 즐겨 먹는 고기, 그래서 어느 부위 한 점조차 버리기 아까워 알뜰살뜰 발라 먹는 고기가 무엇일까?   우리의 경우는 역시 소고기가 아닐까 싶다. 삼겹살로 대표되는 돼지고기, 후라이드 치킨을 중심으로 닭고기도 많이 먹지만 전통적으로 또 심정적으로 아끼는 고기는 아무래도 소고기 같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샅샅이 챙겨 먹기로는 소고기를 따를 바가 없다.   중국은 압도적으로 돼지고기를 꼽을 것 같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다. 양으로야 돼지고기를 넘어설 수 없고 정서적으로도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또 민속적으로는 오리고기가 으뜸이다. 머리부터 물갈퀴까지 어느 부위 하나 빼놓지 않고 샅샅이 챙겨 먹는다.   중국인들의 오리 사랑은 대단하다. 도처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으니 예컨대 중국의 대부분 대도시에서는 갈고리에 구운 통오리(挂炉烤鸭)를 걸어놓은 음식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시장의 생닭집보다 많다. 그만큼 오리고기를 많이 먹는다는 소리다.   북경오리구이(北京烤鸭)에 적용되는 말이지만 모택동의 시를 패러디해 만리장성에 오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고 오리구이를 먹어보지 않으면 평생의 한으로 남는다는 말도 있다.   사실 중국의 오리고기 먹는 방식에는 말문이 다 막힐 정도다. 기계를 분해 조립하는 것처럼 오리 한 마리를 철저히 분해해서 부위별로 하나씩 요리해 그 맛을 즐긴다. 일단 해체한 오리 중에서 가장 맛있는 부위로 꼽는 것은 껍질이다. 특히 북경 오리구이는 바삭한 껍질(脆皮)과 고기(板鴨)를 따로 먹는다. 이 때문에 관광객 중에는 살코기는 어디 가고 껍질만 주냐고 불평하는 경우도 있다.   예전 청나라 때 상류층에서는 껍질만 먹고 살코기는 아랫사람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예법이라고 했다는데 맛있는 요리 중에서도 핵심만 살짝 맛본다는 뜻이라니 음식 호사의 극치다.   중국 오리고기 중에는 우리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 이런 것도 먹나 싶은 뜻밖의 요리도 많다. 먼저 오리 머리(鴨頭)다. 우리는 닭 머리를 먹지 않지만 중국인들은 머리도 따로 먹는다. 심지어 머리만 모아 놓은 다양한 요리가 있다. 마라오리머리(麻辣鴨頭) 오리머리솥찜(干鍋鴨頭) 등이 있는데 한 손에 비닐장갑을 끼고 뜯어먹는 모습이 상당히 낯설다.   오리 목(鴨脖子)도 버리지 않고 요리한다. 오리 목만 따로 모아서 장조림(酱鸭脖子)을 담기도 한다. 소금에 절였다가 육포처럼 건조해 먹는 남경식이 유명하다. 입맛 돋우는 밥반찬과 술안주로 인기가 있다. 이 밖에 목만 따로 모아 고추, 후추, 화초(花椒)등으로 조리한 마라 오리 목(麻辣鸭脖), 오리 목 구이(烧鸭脖) 등도 많이 알려져 있다.   오리 혀만 모은 오리 혀(鴨舌) 요리는 아예 별미로 취급한다. 음식 재료를 알고 보면 거부감이 들지만 먹어보면 맛있다. 오리 혀를 전복장과 생강, 파와 함께 굴 소스 등으로 요리한 장향오리 혀(醬香鴨舌), 말린 오리 혀 볶음(風干鴨舌) 등이 있는데 강장 효과가 있다며 인기가 높다. 심지어 청나라 때 문헌 『수원식단』에서는 오리 혀를 샥스핀, 말린 해삼 등과 맞먹는 요리 재료라며 추켜세웠고 그래서인지 서태후가 오리 혀 요리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오리 머리, 목, 혀까지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먹으니 몸통은 말할 필요도 없다. 껍질과 살코기는 기본이고 우리가 소 막창, 대창, 곱창을 구분해 먹듯 오리의 위와 장, 간과 콩팥 등을 구분해 요리한다. 소 선지 대신 오리 피(鴨血) 선지를 먹고 오리 뼈로는 사골 국물을 내며 닭발과 함께 오리 발도 간식으로 즐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털 뽑은 오리 중에서 딱딱한 부리를 빼고는 다 먹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오리의 각 부위를 요리해 먹기도 하지만 식탁에서 오리구이는 물론 머리부터 혀와 목, 심장과 뇌, 간과 곱창, 날개와 발, 그리고 알까지 오리 한 마리를 완전히 분해해 각각의 부위를 골고루 즐기는 오리 한 상 대잔치도 있다. 전압석(全鴨席)이라는 연회상이다.   오리 한 마리를 이렇듯 부속품까지 가리지 않고 분해해 먹으니 얼핏 엽기라는 느낌도 있지만 소 한 마리를 분해해 먹으며 소가죽에 붙은 살까지 긁어 수구레 국을 끓이는 우리와 비교하면 음식문화의 차이일 뿐 편견을 가질 것은 아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왜 이토록 오리고기를 즐기는 것일까? 신화와 관습까지 다양한 요인을 꼽을 수 있지만 일단 자연환경과 사육조건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은 한국이나 중국 모두 닭고기, 치킨을 많이 먹지만 옛날 닭은 그렇게 쉽게 키울 수 있는 가금류가 아니었다. 대신 꿩이 많았던 우리와 달리 오리는 중국에서 양자강(長江)과 호수의 물고기를 먹이로 번식했다. 게다가 오리고기가 허한 기운을 보충하고 피를 맑게 하며 심장에도 좋아 자양강장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구하기 쉬운 데다 몸에도 좋다니 황제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오리고기에 심취했다. 더차이나칼럼

    2024.03.21 06:00

  •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한을 두드리는 중국 상인들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한을 두드리는 중국 상인들

    게티이미지 1970년대 자력갱생, 1980년대 일본의 외화 송금에 매달리기, 1990년대 중국의 원조, 21세기 한국의 지원 (70年代 自力更生, 80年代 依靠日本, 90年代 中國救人, 21世紀 韓國助陣). 중국 사람들이 북한 경제를 두고 하는 비꼬는 말이다. 한마디로 외국의 지원에 의존하는 경제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남북 관계가 냉각되면서 21세기 한국의 지원(21世紀 韓國助陣)은 맞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유엔 대북 제재로 자력갱생이 더 어울린다.   중국 정부에서 대북 지원을 총괄하는 곳은 국무원 상무부다. 그에 못지않게 북·중 국경을 접하고 있는 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의 지방 정부도 많이 참여한다. 그러면 중국 정부와 달리 중국의 민간기업은 어떤가?   지금은 유엔의 대북 제재로 중국 민간기업의 대북 진출은 소강상태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북한에 진출하는 중국 상인들이 적지 않았다. 첫째, 동북 3성에 사는 조선족이다. 이들은 북한과 같은 민족이고 언어도 통한다. 특히 북한에 친척이 있는 조선족은 친밀감이 각별하다. 조선족은 주로 의류‧식품 등을 소규모로 거래하고 있다. 북한 출입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라 아예 보따리장수로 들어가 장마당에 물건을 공급하기도 한다. 조선족은 한때 한국 기업들이 북한과 사업하는데 중간 매개 역할을 했다.   둘째, 저장성 원저우의 부자를 중심으로 한 투자이다. 원저우 상인들은 ‘중국의 유태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업 수완이 뛰어나다. 지방 정부 차원의 대북 투자 프로젝트의 배후에 실질적인 자본 투자가로 등장한 이들 중에는 원저우 출신이 적지 않다. 이들은 대북 투자에 관한 생각이 남다르다. 단기적인 성과에 의존하면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대북 사업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 기업들이 흔히 하는 질문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 질문은 “북한을 신뢰할 수 있는가?”, “성과가 있는가?”, “북한의 인프라가 엉망인데, 비용이 더 들지 않는가?” 등이다. 그러면 원저우 상인들은 “그런 질문을 하려면 북한을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라고 대답한다.   그 이유는 단기적인 관점에서 사업하려면 북한은 번지수가 틀렸다는 것이다. 북한의 상황에 맞는 사업을 발굴하거나 그럴 능력이 없으면서 북한 탓을 하지 말라는 설명이다. 인프라가 잘 된 국가를 찾아보라는 뜻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재는 유엔 대북 제재로 어렵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고 믿고 있다. 한국 기업에는 이런 생각이 맞지 않는다.   원저우 상인들은 “북한 사람은 중국 사람들과 사업하기를 원해요. 오랜 전통적인 관계로 인해 정서적으로 중국 상인들에게 대한 경계가 거의 없어요”라고 강조했다. 이것이 원저우 상인들이 대북 사업의 가능성을 크게 보는 이유다. 따라서 북한이 비록 한국과 같은 민족이지만 정서적으로 친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의미다. 북한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대북 제재가 완화되면 북한에 공격적으로 들어갈 사람들은 이들이다. 한국 기업이 북핵 문제 해결 이후를 고려한다면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들이다.   셋째, 광저우‧홍콩‧타이완 기업인들이다. 홍콩의 첸하오민 국제산업발전유한공사 이사장은 “정지하고 있는 차와 나쁜 차는 다른 개념이다. 북한은 나쁜 차가 아니라 기름이 없어 잠시 멈춘 차다. 차 안에는 흑연‧마그네슘‧텅스텐 등 세계 최고 수준의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 경제를 기름이 없어 달리지 못하는 자동차에 비유한 것이다. 첸 이사장은 중국 철도부, 북한 철도성과 철도 건설에 협의함으로써 3자가 출자해 지린성 투먼에서 톈진 항까지 철도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들 세 부류의 대북 인식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들어가 성공했다는 기업은 아직 없다. 북핵 문제와 유엔의 대북 제재, 열악한 인프라 등이 여전히 걸림돌로 남아 있다. 이런 걸림돌이 제거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여전히 기다리겠다는 것이 중국 상인들의 만만디(慢慢的)다. 이들의 이구동성은 이렇다. “북한이 언제까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할 것인가? 변화하는 시점은 반드시 온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조급해지면 지금 그만두면 된다.” 한국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생각이다. 중국 정부는 이런 중국 상인들의 관심과 달리 대북 사업의 위험성을 여러 차례 경고했다. 중국 투자자가 북한 사람에게 사기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했다. 중국 정부가 강조한 대북 투자의 위험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계약금이나 보증금을 받고 물건을 보내지만, 나머지 대금을 연체하거나 주지 않는다.   둘째, 정부 명의로 담보인을 내세워 신용을 받아낸 뒤, 처음에는 소액 무역 형태에서 연체 대금 없이 신용을 쌓은 후 마지막에 거액의 계약을 한다. 이때 물건이 북한에 도착하면 갑자기 대금을 연체하거나 주지 않는다.   셋째, 빈번하게 국경 무역 정책을 조정한다. 물물교환할 때 필요한 상품을 먼저 대량 수입하고 물건이 도착한 시점에서 갑자기 정책을 바꿔 중국 측이 요구한 상품의 수출을 금지한다. 모든 것을 정책 탓으로 돌리고는 기업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태도를 바꾼다.   넷째, 중국이 트럭으로 북한에 물건을 실어 나를 때 북한이 석유와 식량, 현금을 요구한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이런저런 어려움을 들어 상품 운송을 방해한다. (『중국의 대북조선 기밀파일』)   중국 기업의 대북 투자가 활발해지려면 북핵 문제가 완화되어야 한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생각이 다르다. 중국 상인들은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해결될 것으로 보고 내버려 두는 것 같다. 손가락 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경고에 조심하면서 손해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장기 투자로 보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북한을 멀리 보는 중국 상인들의 생각에서 배울 점이 없는지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칼럼

    2024.03.20 06: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정이(程頤)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정이(程頤)

    격물치지(格物致知). 소후(搜狐) “지나친 음주는 건강을 해칩니다.” 술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경고다. 일단 상투적 표현인 데다 너무 당연한 내용이라 마음에 걸린다. ‘과음은 안 돼요~’ 이런 메시지를 환기(換起)하는 데 취지가 있는 공익 광고로 이해하면 그만이겠지만 말이다. 그 옛날 공자(孔子) 집안에서 빚어 제사 때 쓰던 술이 이젠 전 세계를 대상으로 팔리고 있다.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서 생산되는 공부가주(孔府家酒)다. 공자 후손들도 일부 참여는 하고 있으나 일반적인 양조 기업이다.   이번 사자성어는 격물치지(格物致知)다. 앞의 두 글자 ‘격물’은 ‘사물의 이치나 원리를 깨우치려 깊이 사색한다’라는 의미다. ‘치지’는 ‘앎에 이른다’라는 의미다. 이 둘을 결합하면 ‘어떤 대상의 이치나 원리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 명징한 지식을 획득한다’라는 뜻이 된다. ‘격물치지’가 상투적 표현은 아니지만, 솔직히 지금 기준으로는 ‘뻔한 이치’를 담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격물치지’를 퀴즈의 ‘정답 추측하기’ 수준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격물치지’에는 ‘지식 탐구’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학문의 길’에서 견지해야 할 일종의 방법론이다. 송나라를 거치며 유학(儒學) 분야에서 빈번하게 쓰이는 한 ‘철학 용어’로 자리 잡았다. ‘대학(大學)’, 그리고 주희(朱熹)의 ‘주자어류(朱子語類)’에 관련 문장이 나온다.   북송 시대에 정이(程頤)라는 인물이 학문으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는 한 살 위의 형 정호(程顥)와 함께 소위 ‘신유학(Neo-Confucianism)’ 학설을 펼쳤는데, 역학(易學) 해석과 ‘격물치지’에 밝았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형과 함께 이정(二程)으로 호칭한다. 훗날 남송 시대에 주희가 이천(伊川)선생 정이의 학통을 잇는다. 이들은 철학적 사유가 부족하던 유학에 형이상학을 성공적으로 도입했다. 우리 조상들도 이정과 주희를 높이 평가하며 유학계의 큰 스승으로 여겼다.   이들은 여러 왕조를 거치며 관료 채용 시험 과목으로 전락한 유학에 잠시나마 생기를 되살렸다. 공자 사후 수백 년 세월을 거치면서 유교는 누더기처럼 퇴보한 상태였다.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해설서들 때문이었다. 동한(東漢)의 장제(章帝) 시대엔 백호통의(白虎通義)라는 ‘회의록 서적’까지 등장했다. 유교를 국가 차원에서라도 조금 일목요연하게 해석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과거제에 기반한 왕조들을 거치고 문치(文治)를 강조하는 송나라 시기가 되자, 청소년들은 본능적으로 ‘복사기’가 되길 꿈꿨다. 창조적으로 사색하길 꺼렸다. ‘기출 문제’ 답안지를 암기하는 선에서 만족했다. 정호와 주희가 철학적 사고가 가능한 쪽으로 유교의 방향을 튼 이유다.   이런 맥락에서, ‘격물치지’ 관련 인물을 뿌리까지 검색해보자. 공자는 대체 왜 유교를 창시했을까. 공자 당시 중국은 기술적으론 보다 예리한 철제 무기가 생산되고 정치적으론 세습 귀족 중심에서 관료 중심으로 차츰 사회 시스템이 바뀌고 있었다. 공자는 영토 확장과 효율만을 중시하던 중국 사회에 ‘브레이크(brake)’ 도입의 필요성을 직감했다. 주지하듯, 청년기에 학문에 뜻을 세웠고 중년기에 일찌감치 깨우치게 된다. 그는 인(仁)과 예(禮)를 핵심 키워드로 삼아 천하를 한번 교화하기로 결심한다.   ‘인의예지신’과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고집하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접하고 제후들은 난처했다. 너무 낯선 주장이었다. 처음에는 일부 제후들이 호기심을 가졌지만, 곧 외면했다. 공자의 ‘첫 브레이크’는 작동되지 않았다. 오히려 차츰 ‘겉과 속’이 다른 독재 군주와 부패 관료의 ‘공자왈 맹자왈’로까지 남용되며 너덜너덜해졌다. 정이와 주자의 ‘격물치지 브레이크’가 등장한 이유다.   이번엔 격물치지와 ‘신발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격화소양(隔靴搔癢)이 서로 충돌한다. 신유학이라는 ‘두 번째 브레이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파를 쳐내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과도한 형이상학이 공동체의 건강을 해친 사례다. 사회가 한 패러다임을 깨뜨리고 개울을 건너뛰어, 일 보(步) 더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독서인 더차이나칼럼

    2024.03.19 06:00

  • [중국읽기] 제2차 차이나 쇼크

    [중국읽기] 제2차 차이나 쇼크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G2(Group of Two)’. 미국과 중국을 일컫는 용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이를 전 세계 미디어로 퍼트린 사람이 바로 당시 블룸버그 칼럼니스트였던 윌리엄 페섹이다. 글로벌 경제에 대한 그의 통찰을 보여준다.   페섹이 최근 투자 전문 매체인 배런스에 칼럼을 썼다. ‘중국 디플레가 빠르게 글로벌 경제로 확산될 것’이라는 제목. 그는 “이번에는 의류·장난감 등 임가공 공장이 아닌 테슬라·애플·소니·삼성 등 첨단 기업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서방 첨단 기업이 ‘차이나 쇼크’에 직면할 거라는 얘기다.   중국이 전기차 약진에 힘입어 작년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에 올랐다. 푸젠성 샤먼항의 전기차 선적 작업. [신화사] 이미 현실화하고 있는 흐름이다. 중국은 지난해 전기차 약진에 힘입어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으로 등장했다. BYD는 기존 강자 테슬라를 2위로 밀어냈다. 태양광도 그렇다. 중국의 저가 공세로 지난해 글로벌 태양광 패널값은 25% 이상 급락했다. 유럽 태양광 업체는 줄 파산했다.   작년 중국 수출의 최고 히트 상품은 전기차·리튬배터리·태양광 등이다. 전체 수출액이 1조 위안(약 1400억 달러)을 돌파했다. 경기 위축으로 이들 제품의 중국 내수시장은 공급과잉 양상이다. ‘덤핑 수출’, ‘디플레 수출’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반도체 분야도 중국의 디플레 수출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반도체 전쟁(Chip War)』을 쓴 크리스 밀러는 파이낸셜 타임스(FT) 기고에서 “싸구려 중국 칩이 글로벌 시장에 쏟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자동차·가전 등 일반 소비 용품에 쓰이는 범용 반도체 제품의 중국 생산량이 5년 후 지금의 두 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매출의 약 25%를 범용 반도체 공정에 의존하고 있는 대만 TSMC도 충격을 피할 수 없다.   ‘쇼크’의 시작은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었다. 중국은 ‘세계 공장’으로 등장했고, 각국의 제조업 일자리를 빨아들였다. 그렇게 시작된 1차 쇼크가 주로 개발도상국의 제조업에 타격을 줬다면, 이번 2차 쇼크는 선진국 고부가 산업을 위협한다. 미국·유럽·일본 등 서방은 ‘첨단 분야만큼은 중국에 당하지 않겠다’고 방어벽 쌓기에 나선다. 첨단 공장 유치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2차 쇼크가 더욱 극렬하게 진행될 것임을 예고한다.   문제는 우리다. BYD의 전기 승용차가 호시탐탐 국내 시장을 노린다. BYD코리아는 상반기 안에 영업 조직을 짜기 위해 인력 확충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가 긴장할 수밖에 없다. ‘제2차 차이나 쇼크’는 이미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4.03.18 00:22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완탕면, 그 심오한(?) 역사와 풍속에 대하여…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완탕면, 그 심오한(?) 역사와 풍속에 대하여…

    완탕면 완탕면은 우리한테 아주 익숙하지는 않지만 크게 낯선 음식도 아니다. 요즘 한국의 딤섬 전문점에서도 심심치 않게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홍콩, 대만에서 퍼진 음식으로 원래는 중국 광둥 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족 같지만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음식을 설명하자면 떡과 만두로 끓인 우리 떡만둣국처럼 완탕면은 국수와 물만두를 함께 먹는 일종의 만두 국수다. 국수 없이 물만두만으로 끓이면 그냥 완탕이라고 한다.   완탕면, 알고 보면 조금 헷갈리는 중국 음식이다. 일단 음식 이름부터 그렇다. 면(麵)은 국수가 확실하지만 완탕은 정체가 불투명하다. 얼핏 뜨끈한 국물(湯)을 나타내는 말 같지만 실은 작은 만두인 물만두를 가리키는 단어다. 한자를 보면 더욱 혼란스럽다. 구름 운(雲), 삼킬 탄(呑) 자를 쓰고 중국 남부 방언으로 완탕으로 발음한다. 그래서 광둥 성에서 유래한 음식이라고 하는 것 같다.   구름을 삼킨다는 뜻의 완탕, 다소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뜬금없는 이름인데 여기에는 예상을 벗어나는 역사가 있다.   흔히 완탕을 광둥 성에서 생겨나 발달한 딤섬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북경을 비롯한 중국 북방에서 전해진 음식이다. 그런 만큼 화북과 화동 지방에서도 많이 먹는데 다만 완탕이라는 이름 대신 주로 훈툰(餛飩)이라고 부른다. 우리말 발음으로는 혼돈이다.    훈툰의 원래 이름은 엉뚱하게도 어지럽다, 혼란스럽다는 뜻의 혼돈(混沌), 중국 말 훈듄이었다고 한다. 만두가 오랑캐 머리라는 뜻에서 만두(蠻頭)라고 했다가 음식 이름으로는 '거시기' 해서 만두(饅頭)로 바뀐 것처럼 훈둔(混沌) 역시 음식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아 훈툰(餛飩)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어 남방으로 전해지면서 현지 발음으로 완탕으로 부르다 아예 글자까지 바뀌어 구름을 삼킨다는 뜻의 완탕이 됐다고 한다.   완탕은 이름뿐만 아니라 음식 자체의 역사도 뜻밖이다. 우리나라에는 홍콩식 딤섬으로 비교적 뒤늦게 알려졌지만 역사가 깊은 음식으로 완탕의 원조가 되는 훈툰은 사실상 중국 만두의 조상쯤으로 여겨진다.   중국에서 만두라는 음식 이름이 역사 문헌에 실제로 보이는 것은 제갈공명이 살았던 3세기 무렵이다. 하늘의 노여움으로 거칠어진 강물의 풍랑을 다스리기 위해 제갈량이 오랑캐 머리 대신 만두를 빚어 제사를 지냈다는 삼국지 속 이야기와 시기와 겹친다.   반면 훈툰은 훨씬 이전의 문헌에 보인다. 1세기 초 한나라 때 쓰였다는 사전인 『방언(方言)』에 나온다. 밀가루 음식(餠)을 훈(餛)이라 부른다고 했는데 후대 학자들은 이 음식이 바로 훈툰이라고 풀이했다. 참고로 1세기 무렵의 훈툰은 지금의 물만두인 훈툰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경단 훈(餛) 경단 돈(飩)의 글자 뜻 그대로 곡식 가루를 뭉친 경단 덩어리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어쨌든 2,000년 전의 옛날 중국에서는 왜 작은 만두를 혼란스럽다는 뜻의 혼돈, 밀가루 덩어리라는 뜻의 훈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을까? 관련해서 전해지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먼저 청나라 말의 세시풍속서인 『연경세시기』에서는 훈툰의 형태가 계란과 닮았는데 천지의 혼란스러운 상태와 비슷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밀을 포함한 곡식 가루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을 둥글게 경단 형태로 정리한 것이 훈툰인 만큼 1세기 무렵 초기 만두의 모습에서 비롯됐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또 다른 풀이도 있다. 1세기는 실크로드가 열리며 서역에서 중원으로 다양한 밀가루 음식이 전해졌던 시기다. 훈툰도 이때 서역에서 들어온 음식으로 훈툰(huntun)이라는 서역의 이름이 중국어로 음역 되면서 혼돈(混沌) 혹은 훈툰(餛飩)이라는 음식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훈툰을 중국에 전해진 최초의 만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우리한테는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만두지만 완탕에서 이어지는 훈툰은 뿌리가 깊은 만큼 소가 없는 만두인 만터우와 교자 만두, 포자만두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에서는 상당히 널리 퍼졌던 음식이다. 문헌 기록으로 보면 당송 시대에는 오히려 다른 만두보다 더 많이 먹었던 듯싶다. 당나라 문헌 『유양잡조』에 다양한 이름의 훈툰이 보이는 것을 비롯해 송나라 『무림 구사』에는 도시 사람들은 동지를 중하게 여기는데 이날이면 모두 훈툰을 먹는다고 했다. 역시 송나라 문헌인 『동경몽화록』 『몽양록』 등에도 새해가 되면 시장에서 훈툰을 판다는 기록이 보인다.   청말의연경세시기에서도 동짓날이면 훈툰 먹는 것이 북경 지방의 풍속이라면서 지난해의 혼돈을 정리하고 새로 시작되는 한 해를 맞으라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뿌리 깊은 음식인 만큼 진작부터 명절 음식으로 자리 잡았던 모양이다.   중국 사람한테 한국은 동짓날 팥죽을 먹는데 중국에서는 무엇을 먹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교자 만두를 먹는다고 대답한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완탕, 즉 훈툰의 역사와 관련 풍속을 알아보니 실은 작은 만두인 훈툰이 동지 음식이었는데 현대에 들어 교자로 대체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단순한 딤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줄 알았던 완탕면 한 그릇에 중국 만두의 역사와 풍속이 녹아 있었다. 더차이나칼럼

    2024.03.14 06: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교토삼굴(狡兎三窟)과 전문(田文)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교토삼굴(狡兎三窟)과 전문(田文)

    교토삼굴. 바이두바이커 순서가 쓰임의 핵심인 말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는 10간(十干)의 순서다. 자연수 1부터 10까지 차례로 배열한 것과 같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는 12지(十二支)의 순서다. 쥐, 소, 범, 토끼 등 익숙한 실재 동물 11종류에 가상의 동물 용(龍) 하나를 추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 12지에서 각 동물의 순서는 누가 정한 것일까. 몇 개의 주장이 있다.   그 중 전래 설화도 포함된다. 먼 옛날에 동물들이 ‘누가 빨리 도착하나’ 경주를 벌였고, 선착순으로 순번이 정해졌다는 그런 내용이다. 이 설화에서 영리한 쥐는 하루 일찍 출발하기로 결심한 소의 등에 올라타 조용히 힘을 비축하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잽싸게 뛰어내려 1위를 차지해버린다. 황당했지만 소는 2위에 만족한다. 그런데 용, 말 등 다른 쟁쟁한 동물들을 제치고 연약한 토끼가 4위를 차지한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다. 참여한 동물 가운데 뛰는 종목이라면 토끼가 호랑이 다음으로 빠르기 때문이었다.   이번 사자성어는 교토삼굴(狡兎三窟)이다. 글자로만 보면, 앞의 ‘교토’는 ‘교활한 토끼’다. 뒤의 ‘삼굴’은 ‘세 개의 굴’이다. 본래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땅굴을 파 놓고 만약의 위기에 대비한다’는 의미의 문장이었다. 훗날 이 네 글자로 압축됐다. 한나라 유향(劉向)의 전국책(戰國策)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맹상군(孟嘗君)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전문(田文)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 제(齊)나라의 유명한 정치가다. 그의 생일은 음력 5월 5일, 단오(端午)날이다. 당시 음력 5월 출생한 사내 아이는 ‘키가 지게문 높이만큼 자라면 아비를 해친다’는 속설이 있었다. 전문의 부(父)는 그를 ‘거두지 말라’고 전문의 모친에게 말했다. 정(正)부인이 아니었던 모친은 그를 몰래 키웠고, 장성한 후에 부친에게 보낸다.   “만약 목숨을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라면 걱정할 일이 없구요. 만약 지게문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면 지게문을 아주 높이면 그만 아닙니까?” 전문은 첫 대면에서 이 간단한 이치로 부친의 우려를 잠재웠다. 부친은 그의 총명함을 즉시 알아챘다. 훗날 전문은 제나라 재상을 오래 지낸 부친이 세상을 뜨자, 영지 설(薛) 땅과 작위의 승계자가 된다.   전문은 시대를 한참 앞선 뛰어난 감각의 정치가였다. 큰 가문을 이끌면서도 그는 수천 명 규모의 식객을 따로 정성껏 대접하며 교류했다. 그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고, 자주 직접 대화하고 ‘밥도 함께 먹으며’ 다방면의 지혜를 구했다. 꽤 ‘통 큰’ 처세였다. 제후들 사이에도 차츰 그의 이름은 인자하고 유능한 제나라의 재상으로 알려졌다.   그의 식객 가운데 풍환(馮驩)이라는 괴짜 인물이 있었다. 현재 ‘교토삼굴’로 압축되어 쓰이는 이 말은 전문의 불투명한 앞날에 대비하기 위해 풍환이 미리 일련의 비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설 땅 주민들의 차용증서를 불태워 일찌감치 민심을 다독여 둔 것도 풍환의 이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였다. 전문이 보필하던 제나라 민왕(湣王)은 호전적 기질에 교만한 보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명망이 높은 전문을 늘 경계했다.   중국 전국시대에 4공자(四公子)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며 활약한 시기가 출현한다. ‘4공자’는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趙勝), 위나라의 신릉군 위무기(魏無忌),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黃歇), 그리고 맹상군 전문이다. 이들은 대적하기 버거울 정도로 강성해진 서쪽 진나라의 위협에 맞서고, 한편으로 각자 국익을 위해 기발하고 대범한 계책을 펼쳐 상당한 유명세를 누렸다. 참고로,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자성어 역시 전문과 그의 기상천외한 재주를 가진 식객들이 함께 등장하는 한 에피소드에서 유래했다.   혹시 직장이나 사회에서, 매너가 거칠거나 의심 많은 보스로 인해 곤욕을 치르는 경우에 처했다면 이 ‘4공자’의 활약상을 주말에 ‘방콕’하며 일독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구체적 아이디어까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형(prototype)에 가까운 이들 사례에서 ‘묘책의 단서’를 몇 개 발견하는 귀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글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홍장호 필진. 차이나랩

    2024.03.12 06:00

  • [중국읽기] 중국 총리, 낮춰야 산다

    [중국읽기] 중국 총리, 낮춰야 산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오늘은 중국의 연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 폐막일이다. 지난 31년간 이날은 중국은 물론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양회 폐막 직후 총리가 중국의 국정 상황을 직접 설명하는 총리 기자회견이 1993년부터 매년 열렸기 때문이다. 정보 얻는 게 하늘의 별 따기인 중국 상황에서 이는 매우 귀중한 자리였다. 한데 올해부터 이게 사라졌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더는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왜?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유일한 존엄’이 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위상에 조금이라도 누가 돼선 안 되기 때문이다. 양회는 원래 총리가 광을 내는 행사다. 개막일 정부업무 보고부터 폐막일 기자회견까지 모두 총리가 한다. 개성 넘치는 언사로 총리의 기개를 드러낸다. 총서기-총리 투톱 시스템일 때는 이게 가능했다. 한데 이제 그런 모습은 불경이다. 시진핑 비서실장 출신인 리창 총리가 이를 모를 리 없다. 총리는 낮추고 시진핑은 돋보이는 행사로 양회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시진핑 시대 2인자 리창 총리는 존재감을 최대한 낮추는 것으로 생존을 꾀한다. [AFP=연합뉴스] 두 번째는 총리가 답해야 할 내용이 궁색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침체의 중국 경제를 어떻게 부양할 것이냐는 질문이 쏟아질 게 뻔하다. 한데 지난해 가을 열었어야 할 시진핑 집권 3기 5년의 경제정책 기조를 정하는 중공 제20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삼중전회·三中全會)를 아직도 개최하지 못하고 있다.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 아예 기자회견 자체를 없앤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세 번째는 시진핑 시대 리창 총리의 생존 전략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시진핑 3기는 상하이방 등 견제 세력이 사라졌다. 이제는 시진핑 파벌, 즉 시쟈쥔(習家軍) 내부의 파벌 싸움이 격렬하게 전개 중이다. 친강 전 외교부장과 리상푸 전 국방부장 등 고위 인사의 갑작스러운 낙마 배경엔 시진핑 사람들 간의 파벌 싸움이 작용하고 있다는 게 중국 사정에 밝은 이의 전언이다. 겉으론 부패 혐의 운운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상대 파벌을 공격하는 고발이 줄을 잇고 있는 게 중국 현실이다.   현재 가장 격렬한 대립은 서열 2위 리창 총리와 5위 차이치 정치국 상무위원 간에 벌어지고 있다. 차이치는 시진핑의 경호를 책임지는 문고리 권력이다. 리창 입장에선 점수를 따는 것도 중요하나 실수를 안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외신도 상대해야 하는 총리 기자회견은 자칫 화를 부를 수 있다. 그럴 바엔 안 하는 게 낫다. 총리 기자회견이 사라지게 된 진정한 원인으로 보인다. 존재감이 사라져야 살아남는다. 시진핑 시대를 사는 리창의 처세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2024.03.11 00:16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천년 역사(?)의 매운 닭고기, 동안쯔지(東安子鷄)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천년 역사(?)의 매운 닭고기, 동안쯔지(東安子鷄)

    닭고기가 매운 고추와는 음식 궁합이 잘 맞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불닭 볶음이나 숯불구이, 닭갈비가 발달한 것처럼 중국에서도 닭고기를 매운 고추로 조리한 음식들의 인기가 높다.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요리로는 한국의 중국 음식점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라조기(辣子鷄)가 있고 중국에서는 매운 빨간 고추를 닭고기와 함께 볶은 궁바오지딩(宮保鷄丁)이 흔하다. 유명하기로는 동안쯔지(東安子鷄)도 빼놓을 수 없다. 동안쯔지(東安子鷄) 중국의 10대 명품요리인 데다 국빈만찬 메뉴에 올랐다는 등 엄청난 수식어가 붙는 것과는 달리 동안쯔지는 비교적 단순한(?) 음식이다. 연한 영계 찜에 생강과 식초, 산초와 고추 등을 넣어 조리하는데 하얀 닭고기와 빨간 고추, 파란 파와 노란 생강 등 적백녹황의 색감과 맛이 조화를 이룬다.   명품요리라고 찬사를 받는 만큼 동안쯔지라는 요리가 만들어진 과정과 배경 또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동안쯔지는 일단 천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닭고기 요리라고 한다. 당나라, 그중에서도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속삭이던 시기인 개원 연간(713~741년)에 만들어졌다니까 대략 1,300년 전이다.   이 무렵 후난 성동안(東安)현의 작은 마을에 여관을 겸해 음식도 파는 주점이 있었다. 어느 날 어두워져 문을 닫을 무렵, 한 무리의 상인들이 투숙하며 아직 저녁 식사를 못했으니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영업시간은 끝났지만 배고픈 표정이 간절해 보였기에 팔고 남은 두 마리의 닭을 잡고 여기에 주방에 남아 있던 빨간 고추와 파, 마늘, 생강, 식초 등으로 양념을 해 뚝딱 음식을 만들어냈다. 시장한 탓인지 음식을 먹어 본 상인들,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요리 이름을 물었고 주인이 얼떨결에 동안현의 닭 요리라는 뜻에서 동안지(東安鷄)라고 대답했다. 이후 입소문이 나면서 이 요리가 후난 성에 널리 퍼졌는데 더욱 맛있는 요리를 위해 어린 닭(子鷄)을 쓰면서 동안현의 영계 요리, 동안쯔지로 이름이 굳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송, 원, 명을 거쳐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청 연회 요리로 승격해 관바오지(官保鷄)라는 이름을 얻었고 오늘날에는 후난 성의 대표 요리, 중국의 10대 명품 요리가 됐다는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또 인터넷을 통해 퍼진 동안쯔지의 유래설인데 재미있자고 만든 이야기를 굳이 다큐로 따져보면 중국 음식문화와 관련된 몇 가지 상식을 알아볼 수 있다.   동안쯔지 맛의 핵심은 닭고기와 빨갛고 매운 고추의 조화다. 그런데 1,300년 전 당나라는 남미가 원산지인 고추가 중국은 물론 유럽에도 전해지기 훨씬 전이다. 고추가 임진왜란을 전후해 한반도에 들어온 것처럼 중국도 비슷한 시기인 명나라 말에 전해졌다.   처음에는 고추 대신 후추나 산초로 요리했다가 훗날 고추로 대체했을 수도 있지 왜 별걸 다 갖고 시비냐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래도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당나라 때 후추는 신선이 되려는 도사들이, 엄청난 부자들이 양생을 위해 먹는 신비의 영약이었고 산초 또한 음식점에서 팔다 남은 닭고기 양념으로 쓸 만큼 값싼 향신료가 아니었다.   흔히 중세 유럽에서는 인도, 동남아가 원산지인 후추 등의 향신료가 금값과 맞먹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같은 아시아인 중국도 마찬가지였고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에 후추가 퍼진 것은 명나라 이후, 고추가 퍼진 것은 청나라 이후이니 중국에서 매운맛을 즐긴 것도 이 무렵부터다.   또 하나, 동안쯔지의 유래설 중 왜 하필 후난 성동안현이 무대로 등장했을까 싶은데 여기에도 배경이 있다. 동안현은후난 성 성도인 장사, 그리고 삼국지의 무대인 형양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상강(湘江)이 지나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곳이 아니지만 당나라 때는 달랐다. 이 무렵 차 무역이 번성하면서 강남의 차를 싣고 수도인 장안으로 떠나는 배와 마차가 이곳에서 줄을 이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무대 배경은 제대로 설정한 셈이다. 동안쯔지 유래설에서 찾아본 잡학 상식이다. 더차이나칼럼

    2024.03.07 07: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소리장도(笑裏藏刀)와 제갈량(諸葛亮)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소리장도(笑裏藏刀)와 제갈량(諸葛亮)

    소리장도. 바이두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녀~”라는 드라마 대사처럼 인류의 웃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가 상대방의 웃음에도 어느 정도는 주의를 기울이며 사는 이유다. 겉웃음, 너스레웃음, 반웃음, 선웃음, 억지웃음, 헛웃음, 여우웃음, 염소웃음, 그리고 특히 간살웃음에 대해서는 한번 깊게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웃음들은 공통적으로 뭔가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까투리웃음, 비웃음, 쓴웃음 등 부정적인 감정 상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웃음이 차라리 더 낫다는 이도 있다.   이번 사자성어는 ‘소리장도(笑裏藏刀)’다. 앞의 두 글자 ‘소리’는 ‘웃음 속’이다. 다음으로 ‘장도’는 ‘칼을 숨기다’라는 뜻이다. 둘을 합하면 ‘겉은 미소를 짓고 있으나, 안으론 칼을 숨기고 있다’라는 의미다. 세 글자로 줄여 ‘소중도(笑中刀)’라고도 쓴다. 중국에서 속담집처럼 대중에게 익숙한 책 ‘삼십육계’의 제2부 ‘적전계(敵戰計)’에도 이 군사적 지략이 나온다. ‘적전계’에는 양측의 군사력이 ‘대등한 상황’일 때의 계책들이 적혀있다.   고대 중국의 빼어난 군사 전략가로 세 인물이 손꼽힌다.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孫武), 초한 전쟁 시대의 장량(張良), 삼국시대의 제갈량(諸葛亮). 이 3명 가운데 한·중·일 대중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를 누리는 이는 누굴까. 단연코 제갈량이다. 물론 유방의 지낭(智囊)으로 활약한 신비한 인물인 장량도 상당한 인기가 있다. 그래도 부동의 ‘인기 1위’는 삼국지에서 촉(蜀)나라의 군사(軍師)이자 ‘넘버2’였던 공명(孔明) 선생 제갈량이다.   공명의 직업을 현재 기준에서 바라보면 어디에 속할까. 거창하게 사상가나 철학자로 분류했다면 분명 오답이다. 정치인 또는 행정가로 분류했다면 아주 틀린 답은 아니지만 말이다. 만약 더 세밀한 분류를 선호한다면 요즘의 국방부 장관 또는 합참의장으로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분류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이 ‘일 중독(workaholic)’ 천재를 너무 좁은 틀에 가두는 한계를 지닌다.   이 시대에 비춰, 가장 근접한 제갈량의 직업은 전문 경영인이 아닐까 싶다. 요즘으로 보면, 그는 갑자기 스카우트를 당한 인공지능 전문가 CEO다. ‘중3 수준’의 의협심과 실패를 무릅쓰는 ‘벤처 기업가’ 마인드를 밑천으로 황건적에 맞서 창업했다가 도산(倒産) 직전까지 몰린 유비는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하는 등 제갈량 영입에 많은 공을 들였다. 유비와 그의 조직은 제갈량을 만난 후에야 처음으로 ‘큰 판’을 제대로 읽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분석과 군량미 대비책 등을 마련한 뒤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첫 약속을 물리지 않고, 평생 제갈량 한 사람에게 힘을 실어준 유비의 리더십도 대단하다. 무직 청년 제갈량에게는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났으나 천하 경영에는 참여한다’는 큰 포부가 없지 않았다. 교류하던 당대의 인재들 사이에 이름도 알려진 상태였다. 하지만 본래 그는 ‘때를 기다린다’는 심정으로 난세를 피해 은둔자의 길을 택했던 젊은 현인이었다.   안타깝게도 제갈량은 50대에 과로사했다. 그가 저술한 병법서도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 그는 약체(弱體) 촉나라의 군사(軍師) 직위를 맡아 거의 매년 쉽지 않은 전쟁을 치렀다. 승상의 지위를 맡아 국정 전반에 기강을 세우는 등 매우 분주한 일정을 가냘픈 몸매로 버텨냈다. 덕분에 그가 살아 활약하던 시기에 촉나라는 남북으로 광활한 영토와 세력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정치에 있어서도 심모원려(深謀遠慮)와 신상필벌을 키워드로 삼아 안정을 유지했다. 고성능 인공지능이라도 달성하기 쉽지 않을 업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승패는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패배의 모든 원인은 적을 깔보는 데서 기인한다.” 제갈량은 이렇게 조운, 강유, 마속 등 휘하의 장수들에게 자주 조언했다. 이 말에는 적으로 하여금 아군을 깔보게 유도하라는 의미도 있겠으나, 적장이 구사하는 ‘소리장도’ 계책에는 더 각별히 주의하라는 의미에 방점이 찍혀있다. 당시나 지금이나, 웃는다고 꼭 복(福)이 오는 것은 아닌 세상살이 이치 때문이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독서인  더차이나칼럼

    2024.03.05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