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지록위마(指鹿爲馬)와 이사(李斯)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지록위마(指鹿爲馬)와 이사(李斯)

    지록위마. 바이두 “유능한 사람은 화(禍)를 복(福)으로 바꿀 수 있다는데, 승상은 이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진시황 영정(嬴政)의 환관 조고(趙高)가 범죄 공모를 목적으로 승상 이사(李斯)에게 던진 질문이다. 위협보다는 유혹에 가깝다. 그 내용은 역모 그 자체였다. 순행(巡行) 도중 지금의 허베이(河北) 성에서 사망한 진시황의 유지(遺志)를 조작해, 우둔한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자는 것이었다. 만약 강직한 큰아들 부소(扶蘇)가 황제가 되면, 그와 사이가 소원한 이사의 지위도 위태로울 것이라며 말이다.   이사와 공모해 부소를 제거하고 진시황의 우둔한 아들 호해를 2세 황제로 세운 후, 환관 조고는 다시 교묘한 술책을 부려 걸리적거리는 승상 이사까지 제거한다. 드디어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다. 조고는호해를 심리적으로 조종하고 자신의 판단력까지 불신하게 만들 목적으로 특별한 이벤트를 하나 연출한다. 궁정에서 ‘사슴 한 마리를 호해에게 선물하며 말이라고 우겨본다’라는 컨셉이었다. 이 이벤트 당일 현장에 동원된 고관대작들은 조고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웠다. 호해가 말이 아니고 ‘사슴’이라고 부정했지만,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이라고 외쳤다.   이번 사자성어는 지록위마(指鹿爲馬)다. ‘지록’은 ‘사슴을 가리키다’라는 뜻이다. 뒤의 두 글자 ‘위마’는 ‘말이라 칭하다’라는 뜻이다. 이 둘을 합치면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칭한다’가 된다. 이 네 글자는 쿠데타의 이름이기도 하다. 환관 조고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끝내 천하의 모든 권력을 접수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긴 내전(內戰)으로 날이 밝던 전국(戰國)시대를 어렵게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했던 진 제국이 서둘러 망국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악인 조고를 발탁하고 신변에 가까이 둔 이는 바로 진시황이었다. 조고의 위장술이 워낙 뛰어났을까, 말년에 진시황의 ‘사람 보는 눈’이 조금 어두워져서였을까.   인간사 선악의 기준은 꽤 모호하다. 그러나 조고는 중국사에서 ‘제 자식을 삶아 바치며’ 아부하는 역아(易牙), ‘지옥에서 온 고문관’ 삭원례(索元禮) 등과 함께 ‘악인전’에 자주 실린다. 조고는 환관인지라 권력의 틈새에 사냥개처럼 예민한 후각을 지녔고, 특히 교언영색(巧言令色)과 구밀복검(口蜜腹劍)에 능했다.   한편, 승상 이사는 어떤 인물일까. 대체 그는 왜 악인 조고가 파놓은 함정에 매번 그렇게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까. 비록 조고라는 희대의 악인과 노년에 손을 잡았지만, 그는 유능한 행정가였다.   젊은 시절, 그는 우리에게 ‘성악설(性惡說)의 순자(荀子)’로 잘 알려진 유교 사상가 순경(荀卿)에게서 덕치주의와 법치주의의 융합 가능성 등 고급 학문을 배웠다. 저술가로 그친 비운의 천재 한비자(韓非子)가 그의 동창생이다. 한번은 영정이 한비자의 법가(法家) 저서에 매료되어 중책을 맡기려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사는 영정과 한비자 사이를 이간질한다. 자신을 친구로 믿고 의지하던 한비자를 완벽하게 기만한다. 한비자가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치밀함도 대단했다. 한비자는 진나라 옥중에서 이사가 건넨 독을 마시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의 술책을 몰랐을 정도였다.   이처럼 능수능란한 가해자가 거꾸로 노년기에는 요실금을 앓는 늙은 환관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하고 피해자로 바뀐다. 수개월에 걸친 집요한 강제 자백 심문과 장난질 능욕과 혹독한 고문까지 당한 후에 큰길에서 허리와 코가 잘리는 그런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 반역이라는 큰 누명이었기에 삼족도 멸해졌다.   승상 이사는 중국 역사상 꽤 흥미로운 인물이다. 법가 행정가로 꾸준히 능력을 발휘했다. 천하 통일이라는 성취감도 맛봤다. 진 제국의 ‘넘버 투’라는 지위에도 오래 머물렀다. 그런데도 ‘가진 것에 대한 집착’과 ‘애매한 처신’의 인물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그는 몇 차례 기꺼이 선을 넘고 ‘악의 축(axis of evil)’에 다가가 제 몸을 실컷 비볐다. 그 측은한 끝맺음의 단초는 이미 자신 안에 있었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더차이나칼럼  

    2024.02.27 07:00

  • [중국읽기] 중국의 ‘고품질 발전’ 뭘 말하나

    [중국읽기] 중국의 ‘고품질 발전’ 뭘 말하나

    유상철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내주 중국의 연례 정치행사인 양회(兩會)가 열린다. 핵심 키워드는? ‘고품질발전(高質量發展, high-quality development)’이 그중 하나다. 한데 이게 무슨 뜻인지 세계 투자자가 고민 중이라고 연초 블룸버그 통신은 전했다. 모호하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는 점이다. 2017년 19차 당 대회 때 처음 등장했는데 시 주석은 2022년 65차례, 지난해엔 무려 128차례에 걸쳐 고품질발전을 강조했다.   지난해 말 신년사에서도 두 번 언급한 데 이어 지난달 31일의 정치국 집단학습 주제는 아예 ‘고품질발전을 탄탄하게 추진하자’였다. 고품질발전은 덩샤오핑 시대와의 차별화를 꾀하는 시진핑 시대의 발전 전략이다. 덩 시대 중국의 모순은 생산력이 낙후돼 인민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덩은 “발전은 확고한 도리(發展是硬道理)”라며 성장을 밀어붙였다. 가난 해결에 나선 것이다.   올해 중국 양회의 키워드 중 하나는 시진핑이 강조하는 ‘고품질 발전’이 될 전망이다. [사진 신화망] 시진핑은 중국의 모순을 다르게 본다. 그동안의 성장으로 먹고사는 건 해결됐다. 이제 모순은 인민을 어떻게 하면 보다 아름답게 살게 하느냐 문제다. 그래서 여섯 글자를 더했다. “고품질발전은 신시대의 확고한 도리(高品質發展是新時代硬道理)”라고. 신시대는 시진핑 시대를 가리킨다. 즉 신시대인 시진핑 시대엔 고품질발전으로 인민이 아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한데 시진핑이 집권 초 상황을 보니 중국의 고속성장 시대는 끝났다. 그래서 앞으론 중속으로 발전하는 게 뉴노멀(新常態)이 될 것이라 선언했다. GDP 지상주의는 끝난 셈이다. 지방 정부가 더는 성장률 목표치를 무리해서 잡지 않는 이유다. 시진핑이 원하는 건 전체 인민이 지역에 구분 없이 특히 환경 파괴 없이 두루 잘 사는 거다. 이런 바람을 반영한 게 2015년 나온 신발전이념(新發展理念)이다.   여기엔 혁신, 협조, 녹색, 개방, 공유(共享)의 다섯 개념이 들어간다. 혁신은 기술 혁신, 협조는 도농 및 지역 간 격차 제거, 녹색은 환경, 개방은 국내와 국외 두 개 시장 이용, 공유는 공동부유를 뜻한다. 그리고 시진핑은 이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2017년 고품질발전을 제시했다. 이 다섯 가지 중 시진핑이 가장 강조하는 건 기술 혁신이다. 반도체 등 첨단기술의 자립 없이는 사회주의 현대화나 중국꿈을 실현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즉 미국에서 탈피해 중국의 기술자립을 이루자는 게 시진핑이 주창하는 고품질발전의 의미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2024.02.26 00:16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명청 황제의 장수 요리, 표고버섯볶음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명청 황제의 장수 요리, 표고버섯볶음

    중국에서 건강한 농산물로 인식되고 있는 표고버섯. 게티이미지뱅크 옛사람들은 버섯에 대해 묘한 환상을 품었다. 잘 먹으면 환상적인 맛이지만 잘못 먹으면 환각에 빠지거나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인지 버섯을 특별한 식품으로 여겼다. 이런 판타지는 나라마다 비슷하지만, 대상이 되는 버섯은 달랐다.   우리나라는 송이버섯이 으뜸이었다. 지금도 송이버섯을 좋아하지만, 옛날에도 특별했다. 고려말의 충신 목은 이색은 "바람 소리와 이슬을 먹고 자라는 고고한 송이버섯, 먹으면 온몸에 평온한 기운이 퍼진다"고 노래했다. 고려의 이태백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시인 이규보는 한술 더 떠서 "신선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송이버섯을 먹는 것"이라고 읊었으니 우리 조상님들에게 송이버섯은 신선의 음식에 불과하였다.   고대 로마인들은 황제 버섯과 사랑에 빠졌다. 1세기 때 네로황제의 양아버지였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황제 버섯을 먹다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이 버섯을 아주 좋아했는데 황후이자 네로의 어머니였던 소 아그리피나가 황제 버섯에 독버섯인 광대버섯의 즙을 바른 요리를 먹였다는 것이다.    아들 네로를 황제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황제가 된 네로, 전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버섯을 먹고 신이 됐다며 황제 버섯이야말로 신의 음식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황제의 버섯(Caesar’s mushroom)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네로황제가 신격화했던 이 버섯, 한국에서는 계란 버섯이라고 부르는 그저 그런 버섯 중의 하나다.   한국인 대부분이 좋아하고 즐겨 먹지만 그렇다고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버섯이 표고버섯인데 중국에서는 또 다르다. 대다수 중국인들 송이버섯은 중하게 여기지 않는 반면 표고버섯에 대해서만큼은 각별하다.    특히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표고버섯 볶음(燒香菇)은 진시황이 찾았다는 불로초까지는 아니어도 먹으면 오래 살 수 있다는 장수요리(長壽菜)로 꼽는다. 명나라 때 궁중요리로 발달하면서 얻은 별명이다.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명 태조 주원장이 지금의 남경인 금릉(金陵)에 수도를 정했는데 큰 가뭄이 들어 피해가 극심했다. 주원장이 기우제를 올리며 음주와 가무를 금지하고 식사 횟수를 줄이며 검소한 식사를 하는 등의 감선(減膳)을 하며 정성을 다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몇 개월째 이런 생활이 계속돼 속이 편치 않은 와중에 때마침 개국공신 유백온 장군이 고향인 저장성에서 남경으로 돌아왔다.    이때 고향에서 유명한 용천현(龍泉縣)의 표고버섯을 구해왔는데 황제 주원장이 식사를 못 하는 것을 보고 말린 표고버섯을 오랜 시간 물에 담갔다가 조미한후 표고버섯 볶음을 만들어냈다.   주원장이 젓가락을 들기도 전에 버섯의 향기에 취하고 맛보고는 그 심오한 맛에 감탄하며 연속해서 젓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맛있게 먹은 후 어떤 음식인지를 물으니 유백온이 박해를 피해 산속에 숨어 살던 사람이 이 버섯을 먹고는 100살까지 살았다는 표고버섯의 전설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마침내 비가 내려 기우제를 끝내고 궁으로 돌아온 주원장이 수시로 표고버섯 볶음을 찾으며 궁중요리로 발전하면서 얻은 별명이 장수채(長壽菜)라고 한다. 쫄깃한 식감과 향긋한 표고버섯의 맛이 살아있는 표고버섯볶음. 바이두(百度) 주원장이 먹었다는 표고버섯 볶음이 오직 표고버섯만을 볶은 요리(素燒香菇)인지 혹은 청경채 등의 채소와 함께 볶은 요리(淸炒香菇)인지 내지는 말린 표고버섯 요리(乾炒香菇)인지는 알 수 없거니와 중국에는 워낙 다양한 표고버섯 볶음 요리가 많으니 그중 하나일 것이다.   명나라 건국과 함께 궁중요리로 발달했다는 표고버섯 볶음은 청나라에 이르러 더더욱 발전한다. 표고버섯과 닭고기를 함께 볶은 요리(炒鷄香菇), 오리고기와 함께 볶은 요리(香蕈鴨)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표고버섯 오리 볶음인 향심압은 청나라 전성기를 이뤄낸 건륭제의 잔칫상에 올랐다는 음식이다. 흔히 청 황제의 보양식이었다고 하는 이 요리, 표고버섯과 오리고기 죽순 등이 주재료이니 얼핏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그 재료가 만만치 않다.    일단 향심(香蕈)은 표고버섯의 또 다른 이름으로 장수 식품이면서 중국에서는 버섯의 황후라고 할 만큼 최고의 버섯으로 여기는데 죽순 또한 구하기 어렵다는 겨울 죽순이 재료다.  오리 또한 흔하지만, 청 황실의 고향인 만주인들이 특별하게 여겼던 조류다. 건륭황제가 향심압을 좋아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앞서 언급한 스토리들 대부분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중국인들이 표고버섯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일단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표고버섯인 샹구(香菇)가 곧 버섯(香菇)의 대명사다.   게다가 표고버섯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옛날부터 이 버섯을 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모양이다. 13세기 초, 송나라 때 문헌인 『용천현지(龍泉縣志)』에 벌써 표고버섯 인공재배 기록이 보인다.   이런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있기에 중국 음식에 유난히 표고버섯이 많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2024.02.22 07:00

  •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잡아두려는 시진핑과 달아나려는 김정은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잡아두려는 시진핑과 달아나려는 김정은

    “인간은 항상 높은 곳을 향해 가고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人往高處走 水往低處流)”라는 말이 있다. 이를 국가에 비유하면 약소국은 국익의 관점에서 더욱 유리한 후견자가 발견되면 당연히 그곳을 향한다는 뜻이다. 북한이 여차하면 중국과 거리를 두고 미국이나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고 한다는 얘기가 나돌 때면 종종 등장하는 문장이다. 북한이 중국과 혈맹 관계를 유지하려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중국의 경제원조다. 중국이 1948년 건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북한에 제공한 경제원조는 약 9000억 위안(한화 160조 원)이 넘는다. 하지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생각이 다르듯이 중국의 대북 경제원조는 북한의 급한 불을 끄지 못하는 수준이다. 쉽게 말해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항상 굶어 죽지 않을 정도만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북한은 경제원조를 받고도 입이 쑥 나올 수밖에 없다. 중국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모습을 최근에도 발견할 수 있다. 쑨웨이둥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지난 1월 26일 평양에서 최선희 북한 외무상을 만났다. 쑨웨이둥 부부장의 방북은 지난해 12월 박명호 북한 외무성 부상이 베이징을 방문한 것에 대한 답방 성격이다. 당시 박명호 부상은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났다. 실무 회의는 차관급인 쑨웨이둥-박명호가 진행하고 서로 양쪽 외교수장을 예방한 것으로 보인다.   왕이 박명호 북한은 지금 중국에 경제원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박명호 부상이 방중했을 때 중국에 요청했을 것이고, 쑨웨이둥 부부장이 방북했을 때도 한 번 더 꺼냈을 것이다. 이에 중국은 조건을 달았거나 북한이 원하는 수준의 지원에 난색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조건은 최근 북한의 도발에 대한 자제이거나 북-러 밀착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였을 것이다.   중국은 과거처럼 북한에 경제원조를 하려는 마음도 줄었고 유엔 대북제재로 인해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최우선이기에 미-중 관계를 생각하면 북한에 경제원조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 중국은 미-중 관계의 강화가 대국 부흥에 득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북한의 경제원조 요청에 대한 왕이 부장과 쑨웨이둥 부부장의 답변은 뻔하다.   북‧중은 올해를 수교 75주년을 맞아 ‘조중 우호의 해(朝中友好年)’라고 선포했다. 올해 1월 1일부터 시진핑-김정은의 축전 교환을 시작으로 북한과 국경을 맞댄 랴오닝성 우호문화대표단이 지난 1월 29일 평양을 방문했다. 그리고 평안북도 신의주시와 랴오닝성 단둥시는 지난 2월 5일 신의주시에서 신년 축하 행사를 함께 열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는 하오젠쥔 단둥시장과 김종남 신의주시 인민위원장이 참석했다. 〈YONHAP PHOTO-4764〉 시진핑-김정은, 북중 우의탑 참배 (서울=연합뉴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1일 평양 모란봉 기슭에 있는 북중 우의탑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 2019.6.21 [CCTV 화면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2019-06-21 20:49:46/ 〈저작권자 ⓒ 1980-2019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중국은 현재까지 문화 교류로 ‘조중 우호의 해’를 보내고 있다. 북한이 원하는 경제원조가 이뤄지려면 북‧중 정상회담이나 리창 중국 총리의 방북이 성사돼야 가능할 것 같다. 시진핑은 북-러 밀착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거의 ‘왕따’가 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손을 잡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김정은이 딴마음을 먹지 않도록 일단 축전을 교환하고 쑨웨이둥을 보내고 문화 교류도 하고 있지만, 경제원조는 여전히 보류하고 있다.   시진핑은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에 관한 생각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1949년 건국 초기부터 수십 년간 북한에 경제원조를 했지만, 북한은 앞에서 혈맹을 외칠 뿐 뒤에서는 필사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느낀 것 같다. 시진핑은 북한이 궁극적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면 중국을 견제하려는 힘을 키울 것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거액의 경제원조를 쏟아부어 중국에 협조하지 않는 북한을 도와주는 것에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은 친미원북(親美遠北)을 할 수 없다. 북한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은 중국에 득이 되지 않는다. 북-중 관계가 악화하면 오히려 득을 보는 쪽은 미국이다. 중국이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는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 것은 중국에도 큰 부담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항상 준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이 주연을 맡고 자신은 뒤에서 협력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시나리오가 성공하면 중국은 수지맞는 장사를 하는 셈이다. 실패하더라도 북-미 관계가 악화하면 북-중 관계는 더 밀착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길 수 있어서 손해를 볼 일이 아니다.   북한은 그런 중국이 야속하기만 하다. 어쩔 수 없이 사정하지만, 중국의 속마음을 알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됐다. 북한은 중국을 ‘황혼의 부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더는 과거처럼 지내기는 싫지만, 오랜 세월 같이 지냈기 때문에 헤어질 수 없는 존재처럼 돼 버렸다. 반면 미국은 다르다. 미국이 무섭고, 미국을 증오하지만 미국과의 관계만 개선하면 국제사회 전체와의 관계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면 지금 북한을 둘러싼 긴장된 국제환경도 조금은 변화할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은 북한에 설렘의 대상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를 위해 겉으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지만, 미국에 어느 정도 협조와 양보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미국이 이런 북한의 속마음을 알아주고 명분을 만들어 주길 바라고 있다.   시진핑은 이런저런 북한의 계산을 모를 리가 없다. 따라서 그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과 올해 카자흐스탄에서 열리는 상하이협력기구(SCO)의 결과를 지켜보고 북‧중 정상회담의 개최 여부를 고민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미-중 관계와 중-러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고차원의 방정식이 시진핑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북-중 관계는 종속 변수일 수밖에 없다. 잡아두려는 시진핑과 달아나려는 김정은. 그 힘겨루기 결과가 궁금해지는 갑진년이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2024.02.21 06: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맹모삼천(孟母三遷)과 맹자(孟子)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맹모삼천(孟母三遷)과 맹자(孟子)

    맹모삼천지교. 바이두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 탄 님 따라서 시집 가던 길~” 이미자씨의 대중가요 ‘아씨’ 첫 구절이다. 프랑스에는 사실주의 대표작가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une vie)’이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최근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잡은 위화(余華)의 ‘형제(兄弟)’에도 주인공 모친의 애잔한 일대기가 잘 그려져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여성으로서의 삶은 무척 고된 것이었다.   이번 사자성어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이다.  우선, ‘맹모’는 맹자의 모친이다. ‘삼천’은 ‘세 번 이사하다’이다. 둘을 결합하면 ‘맹자의 모친이 세 번 이사했다’라는 뜻이 된다. 그녀가 세 번씩이나 이사한 이유는 뭘까. 이유는 오직 하나, 맹자의 교육이었다. 한나라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 기록이 나온다.   쇠는 담금질로 강해진다. 인간도 역경을 겪고 나면 더 강해진다. 공자의 어린 시절도 유복하지 못했지만, 유교에서 ‘공자 다음’이라는 의미의 아성(亞聖)으로 칭해지는 맹자의 어린 시절도 매우 불우했다. 맹자는 아동기에 부친을 잃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편견, 궁핍 등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지혜와 결단력을 갖춘 맹자 모친은 눈 앞의 생존 문제 이상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그것은 바로 맹자의 교육과 미래였다.   중국 고대 사회는 여성에게 길쌈이라는 노동을 권장했다. 각 가정에서도 적극 호응했다. 베틀이라는 아주 간단한 생산 수단만 갖추면 비단 등 완성품 직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특히 비단은 환금성이 좋았다. 맹자 모친도 중노동이지만 잠을 줄여 시간을 투입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열녀전’에 소개된 일화를 보면 그녀가 처음 거주했던 곳은 성 밖의 공동 묘지 부근이었다. 철부지 맹자는 나팔을 불어대는 장례 행렬의 소란스러움을 따라다녔다. 맹자의 모친은 자식을 키우며 ‘살 곳’이 아니라고 느꼈다. 두 번째 거주한 곳은 성 안이었지만 시장 근처였고 그것도 돼지를 도축하는 가게들 부근이었다. 가난했기에 선택지가 많진 않았으리라. 돼지 도축을 거들며 노는 맹자를 보고 그녀는 또 다시 이주를 결심한다.   ‘삼세번’이란 말이 있다. 이번에는 학교 옆으로 이사를 해 본다. 일관되게 총명한 아동 맹자는 학습중인 형들의 낭랑한 책 읽는 소리를 학교 담장 밖에서 따라하기 시작했다. 교육 환경으론 최고였다. 심지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가 가르치는 학교 부근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흉내내기에 집중력을 발휘하는 놀라운 ‘싹’이었던 맹자는 그녀와 스승 자사의 배려 속에서 학문의 큰 줄기를 제대로 깨쳤고, 살아 생전에 이미 중국 대륙의 동쪽 하늘을 가리는 우람한 한 그루 ‘나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참고로, ‘단기지교(斷機之敎)’라는 사자성어의 유래도 맹모 일화다. “네가 학업을 중단하고 귀가한 것과 이 절단된 천은 대체 뭐가 다르냐?”라는 교훈이 담겨있다.   맹모의 사례를 분석적인 눈으로 살펴보자. 다음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첫째, ‘첫 숟가락’에 만족하지 않았다. 만약 세 번째 거주지에서도 맹자가 일탈 행동을 했다면, 몇 번이고 더 나은 거주지로의 이사를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시행착오를 딱히 두려워하지 않았다. 즉, 향상심(向上心)이 있는 한, 눈 앞에 벌어진 이사 오류를 군대의 ‘병가지상사’처럼 여겼다. 다만 우리는 그녀가 ‘돼지 도축장 부근’ 다음으로 어시장이나 채소 판매상 인근 등 비슷비슷한 범위에서 이사하진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멈추는 법’을 알았다. 맹모의 이 ‘환경 바꾸기’ 일화에서 과욕을 부린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녀에겐 과단성과 과욕을 식별하는 눈이 있었다.   최근 몇 나라의 ‘합계출산율(total fertility rate)’이 매우 낮아졌다. 우리도 너무 늦기 전에 ‘밑 빠진 독’이 된 공교육과 사교육을 함께 수술대에 놓고 치유 방안을 찾아내야만 한다. 멀게는 프랑스와 독일의 공교육 학비 무료부터 가깝게는 ‘현대판’ 맹모의 교육 최우선 각자도생의 폐해까지, 모든 이슈를 수술대 위에 ‘딱’ 올려놔야 한다. 그저 ‘면피’나 ‘주마간산’이 아닌, ‘용맹정진’식으로 말이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더차이나칼럼. 차이나랩

    2024.02.20 06:00

  • [중국읽기] ‘AI 앵커’가 하고 싶은 말

    [중국읽기] ‘AI 앵커’가 하고 싶은 말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샤오위(小雨)’와 또 다른 ‘샤오위(小宇)’. 지난 설 명절 때 중국 항저우(杭州)방송에 등장한 AI(인공지능) 앵커 이름이다. 표정은 자연스러웠고, 말씨는 매끄러웠다. 그들 덕택에 실제 앵커 위천(雨辰)과 치위(麒宇)는 귀성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중국 언론은 자국의 AI 기술 수준을 과시했다며 환호했다.   ‘중국의 AI 굴기는 성공할 것이다.’ 새해 아침 ‘샤오위 앵커’가 중국인에게 전하려 했던 메시지였다. 과연 그럴까.   항저우 방송에 등장한 AI 앵커 ‘샤오위’와 또다른 ‘샤오위’. 몸짓과 말씨가 실제 인물과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합뉴스] 2017년 5월 바둑기사 커제(柯潔)와 알파고의 대국이 벌어졌다. 3:0. 중국 바둑 천재는 처참히 깨졌다. 중국은 이를 일과성 행사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두 달 후 국무원(중앙정부)은 ‘차세대 AI 발전 계획’을 발표한다. “2030년까지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톱 AI 국가가 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굴기의 시작이다.   거리거리 설치된 CCTV는 14억 인구 전체의 얼굴을 찍을 기세였고, 그렇게 쌓인 데이터는 AI 안면 인식 기술로 발전했다. 정부는 ‘마음대로 찍어도 된다’며 기업에 날개를 달아줬다. 사회 감시 수요가 AI 기술을 앞당긴 셈이다. 중국 AI는 음성인식, 자율주행, 공장 로봇 등으로 확산하며 실력을 쌓았다. ‘샤오위 앵커’는 그 파생 품이다.   순조롭던 중국 AI 굴기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2020년 11월이었다. 당시 등장한 챗GPT는 전쟁터를 대화형 AI 챗봇으로 바꿨다. 죽으라고 정상을 향해 달려왔는데 ‘엇, 여기가 아니네~’라는 꼴이다. 바이두(百度)가 어니봇(文心一言)을, 알리바바가 통이첸원(通義千問) 챗봇을 잇달아 내놨지만, 격차를 줄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그들에게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물으면 답을 못 낸다. 체제의 한계다.   반도체는 더 큰 문제다. 미국은 고사양이든, 저사양이든 중국으로의 AI 반도체 유입을 꽉 틀어막았다. 엔비디아의 GPU(그래픽 처리 장치)가 없는데 어찌 똑똑한 AI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미·중 기술 격차는 엄연한 현실이 됐다.   중국은 반격을 노린다. 정부는 주요 IT 빅 테크 기업, 대학, 연구기관 등과 스크럼을 짜고 AI 반도체 개발에 총력을 기울인다. 기초 과학 역량은 충분하다. 중국은 AI 관련 논문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미국을 압도한다. 중국이 자력갱생의 기치를 높이면서 미-중 AI 패권 전쟁은 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우리 아직 죽지 않았어.” 그게 항저우방송국 ‘샤오위 앵커’가 세상에 전하려는 메시지였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4.02.19 00:29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한·중·일 고구마 맛탕 빠스, 닮은 듯 다른 역사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한·중·일 고구마 맛탕 빠스, 닮은 듯 다른 역사

    중국의 맛탕 '빠스(拔絲)'. 빠스를 식힌 후 뒤집으면 겉에 묻은 설탕이 실처럼 늘어진다. 인민망(人民網) 고구마 빠스는 우리한테도 너무나 익숙한 간식이다. 우리말로는 고구마 맛탕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맛탕을 약과나 강정처럼 우리 고유 간식으로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맛탕 대신 빠스라는 이름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맛탕은 사실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도 있다. 다만 부르는 이름이 다르고 만드는 법도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본에서는 맛탕을 엉뚱하게 대학 고구마, 즉 다이가쿠 이모(だいがく いも)라고 한다. 중국은 빠스(拔絲)다. 실을 뽑는다는 뜻이다.   일단 우리 맛탕이나 일본 다이가쿠 이모는 그 뿌리를 중국 빠스에서 찾는다. 중국의 고구마 설탕 조림이 한국과 일본으로 퍼져 발전했다. 그런데 이름과 나라별 유행 과정과 시기에는 서로 다른 경제적 배경과 음식문화가 반영되어 있으니, 맛탕을 통해 세 나라의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한국에서 맛탕이 퍼진 시기는 대략 1950~60년쯤으로 본다. 이 무렵 다수의 일간 신문에 간단한 중국요리, 빠스띠과 만드는 법이라며 맛탕 요리법이 소개돼 있다. 유행 시기가 일본에 비해서는 대략 50년 이상, 중국보다는 훨씬 더 늦었는데 이유가 있다.   사탕수수 재배로 설탕을 자체 조달했던 중국과 일본보다 한국은 설탕이 원천적으로 귀했고 중국, 일본과는 달리 조선 후기 고구마는 구황작물로 폭넓게 퍼지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귀한 수입 설탕을 구황작물인 고구마에 쓸 수는 없었기에 설탕이 어느 정도 대중화될 때까지 맛탕의 등장이 늦어졌다. 그렇기에 맛탕은 요리가 아닌 아이들 군것질로 발달했다. '대학 고구마'라는 의미를 지닌 일본의 맛탕 '다이가쿠 이모( だいがく いも )'. Foodie(フーディー) 일본 맛탕, 다이가쿠 이모의 유행은 또 다르다. 일본에서 맛탕의 등장은 1910~20년대 무렵으로 추정한다. 당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했던 대학생들의 간식, 내지는 요깃거리로 많이 팔렸다고 한다. 이 무렵 동경대 혹은 와세다대 학생이 아르바이트로 군고구마를 팔다 설탕 조림이라는 부가가치를 더해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전환한 것인데 대학 고구마(大學 いも)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됐다.   일본 맛탕이 생겨난 데는 또 다른 경제 사회적 배경도 있다. 고구마는 일본에서도 18세기 흉년으로 인한 대기근 때 백성을 굶주림에서 살려낸 구황작물이었다. 고구마가 보급되면서 먹을 게 떨어지면 입을 줄이기 위해 어린이부터 굶기는 마비키(まびき)라는 악습이 사라졌다.   일본에서 고구마는 이렇게 단순한 군것질거리가 아닌 비상시의 양식이었다. 그러다 19~20세기 오키나와와 식민지 타이완에서 재배한 사탕수수로 설탕 공급이 늘었고 대학생의 아이디어가 더해지면서 일본 맛탕 다이가쿠 이모가 나오게 됐다. 구황작물에서 대학생 나름의 고부가가치 간식으로의 전환인데 여기에는 제국주의 일본 경제도 한몫한 셈이다.   그러면 맛탕의 원조인 중국 빠스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한국 및 일본과 달리 빠스는 원래 주전부리 간식이라기보다는 정식 요리의 성격이 강했다. 디저트에 가까운 후식 개념이다. 그래서인지 중국에서는 빠스를 산둥요리(魯菜)의 계보로 분류한다.   빠스가 산둥성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지만, 역사적 배경이 있다. 18세기 중후반 화북지방의 대기근 때 특히 피해가 심했던 산둥성을 굶주림에서 구한 것이 고구마였기에 산둥에 고구마가 널리 퍼졌다. 반면 설탕 조림은 청나라 후반까지도 고급 음식에 속했기에 자금성이 있는 북경 등지에서 주로 발달했다. 일정 부분 산둥요리와 계보를 같이하는 지역이다.   어쨌든 실을 뽑았다는 뜻의 빠스(拔絲)가 문헌에 처음 보이는 것은 청나라 말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 시절의 문헌인 『소식설략(素食說略)』에 껍질 벗긴 마를 기름에 튀긴 후 설탕물로 졸이면 기다란 실이 뽑힌다는 설명이 나온다. 빠스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는데 이때 쓰인 재료는 고구마가 아닌 산약(山藥), 우리 이름으로는 마였다. 그러니 고구마 맛탕인 빠스띠과(拔絲地瓜)는 산약인 마를 싸고 흔한 고구마로 대체하면서 발달했다. 참고로 땅에서 나는 열매라는 뜻의 띠과(地瓜)는 고구마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구마 맛탕 빠스띠과는 청나라 말에 뒤늦게 생겼지만 빠스산약처럼 마나 토란 등의 각종 재료를 튀겨 설탕에 졸인 요리는 역사가 오래됐다. 일단 이런 요리법은 청나라 초 산둥성 출신의 작가가 쓴 『요재지이(聊斋志異)』라는 문헌에 보인다. 맛탕의 뿌리로 볼 수 있는 음식이다. 재료가 고구마가 아니었을 뿐 빠스는 청나라 초에도 있었던 고급요리였던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수당시대에도 빠스산약이 있었다. 예를 들어 수나라 때 반군을 이끈 이밀이라는 장수가 빠스산약을 먹다 입을 데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런데 왜 하필 수당시대일까?   당나라는 중국에 사탕수수가 전해지면서 여기서 원당을 뽑는 제당 산업이 발달했던 시기다. 그렇기에 원당을 이용한 요리가 만들어졌는데 과일에 엿물을 입힌 탕후루, 마를 설탕으로 졸인 빠스산약도 여기에서 비롯된 음식으로 본다. 중국 빠스는 이렇게 굶주림을 구한 구황작물과 고급 요리가 결합하며 생겨났다. 한국 맛탕, 일본 대학 고구마, 중국 빠스의 같은 듯 다른 역사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2024.02.15 07: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양두구육(羊頭狗肉)과 안영(晏嬰)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양두구육(羊頭狗肉)과 안영(晏嬰)

    양두구육. 바이두 잠수함이 수면 위에서 이동하는 순간을 ‘수상항주(水上航走)’라고 한다. 이 경우 주변의 상선이나 어선이 잠수함을 ‘작은 배’로 착각할 수 있다. 파도가 높은 날과 야간에는 더 오인한다. 선체의 3분의 2가 수면 밑에 있는 ‘큰 배’라는 것을 주변 선박에 알리기 위해 잠수함에는 ‘레이더 반사기’ 등 특수한 장비들이 실려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키가 특별히 작다고 해서 그를 깔본다든가 ‘엄지와 검지를 벌려’ 조롱하면 안 된다.   오늘의 사자성어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이다. 이 ‘양두구육’은 원래 ‘현양두, 매구육’ 이렇게 여섯 자였다. ‘매달다’라는 동사 현(縣)과 ‘팔다’라는 동사 매(賣), 이 두 글자가 생략되어 차츰 사자성어로 굳어졌다. 직역하면, 그냥 정육점 등에서 ‘양 머리를 걸어놓고, 실제로는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다. 속임수다.   ‘양두구육’은 안자춘추(晏子春秋)에 나오는 안영(晏嬰)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안영은 관중(管仲)과 함께 제나라의 명 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며, 안자춘추는 안영의 어록과 행실을 위주로 사후에 빈객(賓客)들이 대화 형식으로 기록한 그리 ‘딱딱하지 않은’ 책이다.   안영은 관중보다 100여 년 후에 등장한 명 재상이다. 관중은 환공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보필하며 제나라를 강국으로 이끄는 행운을 누렸으나, 안영에게는 ‘보스(boss) 운’이 없었다. 당시 제나라는 혼군(昏君)이 계속 집권하고 사회 지도층에도 ‘망둥이나 짱뚱어’들이 날뛰어 하루하루 망국으로 치달았다. 이런 나라에서 안영은 50년 넘게 거의 홀로, 직언도 하고 비유도 하고 때론 으름장도 놓는 등 동분서주하며 해결사 노릇을 해냈다. 훗날 ‘양두구육’으로 굳어진 이 네 글자도 그가 보필하던 혼군 경공(景公)을 깨우치는 직언 도중에 나온다.   안영과 동시대를 살았던 공자 역시 그를 높이 평가했다. 사마천도 사기 열전(列傳)에서 관중과 묶어 안영을 소개하고는 “만약 지금 안자가 생존한다면, 그를 위해 마부가 되고 싶을 정도로 흠모한다”는 극찬 문구로 마무리했다.   여담으로, 춘추전국 시대에 진(秦)나라 등 일부에선 호구 조사를 할 때 사내아이의 나이는 적지 않았다. 나이 대신 키를 기록했다. 워낙 나이에 대한 신뢰도도 낮았지만, 대략 163cm를 기준으로 군역(軍役)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난세에 안영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키가 작았다. 150cm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작은 거인’이었다. 왜소한 체구의 명 재상안영과 ‘큰 키에 우쭐하길 즐기던’ 그의 마부와 또 그 마부의 ‘할 말은 꼭 하는’ 아내 일화는 언제 접해도 입가에 잔잔한 웃음기를 남긴다. 사마천도 안자춘추를 읽다가 이 일화를 발견하고 사기에서 반 페이지가량을 할애했다.   마부의 아내가 말한다. “안자께서는 키가 6척(尺)에 못 미치지만 신분은 제나라의 재상이고 그 명성은 여러 제후 사이에도 자자합니다. 오늘 그분이 외출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뜻과 생각은 깊고 자신을 낮추시는 분이었어요. 당신은 키가 8척인데도 남의 마부 신세에 불과해요. 그런데도 당신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헤어지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정문일침(頂門一鍼)’ 경고를 귀담아들은 뒤 마부는 자신 안의 허세와 헤어진다. 자제하며 겸손한 사람이 된다. 안영도 마부가 ‘새 사람’이 된 연유를 듣고 그를 천거하여 실무 관료인 대부(大夫)로 지위를 높여주었다.   ‘양두구육’에서 양(羊)과 구(狗)를 분별할 지혜만 있다면, 이 네 글자의 부정적 의미가 우리에겐 ‘긍정의 힘’이 될 수도 있다. 사마천이 ‘안영의 마부가 되고 싶다’고 기록했지만, 그는 사기 집필을 시작하기도 전에 궁형(宮刑)을 받고 불구가 된 상태였다. 궁형은 오형(五刑) 중 하나로 ‘거세하는 형벌’이다. 이 극한의 시련에도 사마천은 사기라는 불멸의 역사서를 저술한다. 또다시 사마천의 ‘흔들림 없던 붓’과 그 마부 아내의 ‘투시 가능한 눈썰미’가 절실해진 시대다. 그들은 한결같이 ‘드러난 몸’이나 ‘내걸린 것’이 전부는 아님을 간파했다. 수면 위의 잠수함처럼 말이다.   글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더차이나칼럼

    2024.02.13 07:00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타이완 파인애플 과자 펑리수(鳳梨酥) 스토리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타이완 파인애플 과자 펑리수(鳳梨酥) 스토리

    파인애플 잼이 들어간 대만의 대표 과자 펑리수. 바이두(百度) 타이완을 여행할 때 많이 사는 인기 상품 중 하나가 펑리수(鳳梨酥)라는 과자(빵)다. 원칙적으로는 파인애플 잼으로 만드는데 타이완은 파인애플 원산지도 아니고 최대 생산국도 아니며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타이완의 대표 관광 상품이 됐다.   펑리수라는 과자, 알고 보면 꽤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파인애플을 통해 타이완과 중국의 역사, 풍속 그리고 옛날 파인애플을 바라봤던 동서양의 시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펑리수의 이름풀이다. 펑리(鳳梨)는 파인애플, 수(酥)는 연유가 들어간 빵 혹은 얇은 껍질을 켜켜이 쌓아 구운 서양의 페이스트리 비슷한 중국 전통 과자(빵)다.   한자로 봉황 봉(鳳), 배 리(梨)자를 쓰는 펑리는 봉황의 배, 즉 전설에 나오는 봉황새가 먹는 배라는 뜻이니 옛날 사람들이 파인애플을 얼마나 대단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타이완에서는 펑리를 왕리(王梨)라고도 한다. 배 중에서도 으뜸이 되는 배라는 의미가 되겠는데 현지 발음으로는 융성할 왕(旺), 올 래(來)자를 쓰는 왕래와 발음이 같다고 한다. 그렇기에 파인애플 또는 펑리수를 먹으면 하는 일이 융성하게 번창할 수 있다고 풀이한다. 중국식 말장난(諧音)이고 마케팅이겠지만 어쨌든 파인애플에 어마어마한 의미를 부여했다.   타이완에는 파인애플과 관련해 재미있는 풍속이 또 있다. 결혼식 피로연이나 축제 등의 파티 테이블 가운데에 파인애플을 올려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 표면적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인애플에 길상의 의미가 있고, 또 옛날에는 워낙 귀한 과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닌 듯싶다. 또 다른 역사적 배경이 있다. 한 해 타이완에서 생산되는 파인애플은 약 42만 톤이다. 바이두(百度) 파인애플은 중남미 카리브해가 원산지다. 한때 하와이가 재배지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최대 생산국이 카리브해의 코스타리카, 인도네시아, 필리핀 순이다. 타이완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파인애플을 본격 재배한 곳이다. 파인애플 과자 펑리수가 타이완의 인기 관광상품이 된 것에는 이런 연결고리가 있다.   어쨌든 파인애플이 신대륙에서 구대륙 유럽에 처음 전해진 것은 콜럼버스가 두번째 아메리카 대륙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1483년 11월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처음보는 신비한 과일이었던데다 대서양을 건너는 긴 항해 동안 농익을 대로 농익었다. 그렇기에 파인애플을 처음 맛본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이 그 향기와 달콤함에 감탄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유럽 상류사회에서는 이렇게 파인애플에 열광하면서 수요가 폭발했지만 파나마 운하가 뚫리기 전, 남미 대륙 남단을 돌아오는 항해 길은 너무 멀어 운송이 어려웠고 열대 과일이었기에 유럽에서는 재배할 수도 없었다. 당연히 부르는 게 값이 됐다.   그래서 거의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럽인에게 파인애플은 그림의 떡이었지만 17세기 초, 스페인에 이어 해상무역을 장악해 부를 축적한 네덜란드에서 드디어 파인애플 온실재배에 성공했다. 하지만 400년 전이었던 만큼 열대과일의 온실재배에는 비용이 엄청나게 들었고 파인애플은 여전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한 개 값이 현재 가격으로 보통 수백 만원을 넘었고 심지어 비싼 것은 1만 달러, 대략 1,400만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그런 만큼 파인애플 내지 파인애플 묘목은 최고의 고부가가치 상품이었고 파인애플 무역 역시 해양 강국이었던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이런 네덜란드가 온실재배를 대신할 최적의 재배지를 찾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타이완이었다.   17세기 타이완을 방문한 유럽인들이 남긴 기록을 모은 책(初探福爾摩沙:荷蘭筆記)에는 1648년 타이완 중부의 대두왕국(大肚王國)에 파인애플이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당시 타이완은 중국이 진출하기 전으로 상당한 지역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지배 아래 있었으니 타이완에 처음 파인애플을 전한 나라 역시 네덜란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결혼식과 파티를 파인애플로 장식한다는 타이완의 풍속도 유럽의 전통과 관련 있다. 옛날 유럽에서 파인애플은 비싼 가격과 희소성으로 인해 권력과 재력의 상징, 환대의 아이콘으로 쓰였다.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 동남아 휴양지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파티 테이블 중앙에 조각한 파인애플이 놓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테이블 장식용인 동시에 파티가 끝날 무렵이면 조각한 파인애플을 가져다 디저트로 내놓기도 하는데 손님을 환영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유래는 16~17세기 유럽 귀족의 디너파티에 장식용으로 파인애플을 놓았던 것에서 비롯된 전통이다.   파인애플과 타이완의 대표 과자 펑리수, 그리고 타이완 풍속에는 이런 역사적 연결고리가 있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2024.02.08 07: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관포지교(管鮑之交)와 포숙아(鮑叔牙)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관포지교(管鮑之交)와 포숙아(鮑叔牙)

    관포지교. 바이두 ‘꽃, 물, 해, 땅, 달, 쇠, 돌, 뫼, 벌, 새, 그리고 벗’이 있다. 이렇게 단 한 글자로만으로도 크고 온전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우리 순우리말 명사들을 떠올려본다. ‘우정의 무대’이기도 한 이 지구촌의 주인공, ‘벗’도 여기에 포함된다. 일단 안심이 된다. 이 심플한 한 음절의 몇몇 어휘들이 어쩌면 우리 문화의 원형(原型)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탐색 여정의 튼실한 사다리나 든든한 열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자성어는 ‘관포지교(管鮑之交)’다. 검색창에서 ‘우정’ 또는 ‘벗’과 관련해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사자성어 가운데 하나인 이 ‘관포지교’를 구성하는 네 글자는 의미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앞의 두 글자를 살펴보자. ‘관’은 훗날 중국에서 관자(管子)로까지 추앙되는 관중(管仲) 관이오(管夷吾)의 성씨고, ‘포’는 포숙아(鮑叔牙)의 성씨다. 다음으로, ‘지교’는 ‘~의 사귐’이다. 따라서 이 둘의 결합인 ‘관포지교’는 ‘관이오와 포숙아의 사귐’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열전(列傳)’의 ‘관안열전(管晏列傳)’에 관중의 우정 고백 부분이 나온다. 각종 사료와 목민(牧民), 경중(輕重) 등 관중의 저술들을 검토한 후 사마천은 이 한 편 우정의 드라마를 기록했다. 이로써 포숙아와의 수십 년 사귐에 있어 관중 자신이 얼마나 부족했고, 또 포숙아가 얼마나 관중 자신과의 우정에 사려 깊고 관대했는가가 비교적 낱낱이 후세에 알려졌다.     핵심 얼개는 이러하다. 오늘날 중국 최초의 경제학자로까지 평가받는 관중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노년기에 당시로선 상당히 예외적인 우정에 관한 고백을 하나 한다. 관중의 이 고백은 진솔하기가 짝이 없다. 읽는 순간 그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추고 싶어하는 자신의 약점과 ‘흑역사’가 있는 법이다. 그것을 그저 담담히 고백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관중이 얼마나 도량이 큰 인물인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님이지만(生我者父母),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아님이다(知我者鮑子也).” 관중 고백의 엔딩 부분이다. 관중은 이 엄숙한 마무리 심경 고백으로 당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했던 포숙아와의 긴 사귐의 개인사를 요약했다. 이어 사마천은 포숙아의 사람을 알아보는 대단한 안목에 대해서도 높이 평한다. 세상은 이 우정에 ‘관포지교’라는 미명(美名)을 붙여 후세에 전했다.   이 우정 이야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울림을 주는 이유는 뭘까. 넷을 꼽아볼 수 있다. 첫째, 성공한 최고 권력층 사례지만 때가 덜 묻었기 때문이다. 흔히 권력층 내부의 우정 후일담은 과장이나 미화의 유혹에 약하다. 둘째, 진솔한 우정의 ‘비하인드 스토리’ 고백이다. 대개 ‘회고록’은 기억 뒤틀기나 자기 변명이 끼어들기 쉬운 영역인데 여기서는 오히려 거꾸로다. 셋째, 빈부와 귀천을 초월한 우정이다. 젊은 관이오는 아주 가난했고 포숙아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과거 신분 사회에서 이런 사랑이나 우정은 당연히 금기시되었고 요즘에도 주목받는다. 넷째, 생사가 걸린 가혹한 시험을 통과한 우정이다. 누가 봐도 죽을 ‘운명의 덫’에 빠진 관중을 포숙아는 제나라 환공(桓公)에게 적극 추천해 오히려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돕는다. 환공은 재상 관중의 탁월함에 기대어 춘추시대 첫 패자(覇者)의 지위에 올랐다.   우리 지구촌에 우정에 대한 명언(名言)들은 참 많다. “사업하다 생긴 우정이 우정으로 하는 사업보다 낫다.” 미국의 사업가 록펠러는 이렇게 우정의 빈틈과 위태로움을 간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동질의 우정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칸트조차도 뭔가 답을 찾아보려 ‘사랑’과 ‘존경’의 분석을 시도하기도 했고, ‘도덕적 우애(moralische Freundschaft)’라는 말까지 고안했다. 대략 그는 우애를 서로에게 거리를 두면서 존경하려는 감정으로 이해하며 특히 ‘수단’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했다. 우리는 소망한다. 지구촌 곳곳이 선거철인 요즘 ‘뺄셈의 정치’에 ‘뺄셈의 우정’까지 가미된 최악의 사례들이 많이 출현하지 않길 말이다.   글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더차이나칼럼. 차이나랩    

    2024.02.07 06:00

  • [이종혁의 싱가포르서 보는 중국] 뮌헨 협정과 대만: 역사적 유사점과 미·중 관계에 대한 세 가지 교훈

    [이종혁의 싱가포르서 보는 중국] 뮌헨 협정과 대만: 역사적 유사점과 미·중 관계에 대한 세 가지 교훈

    왼쪽에서부터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가 협정을 조인하기 전 만난 모습 1938년 9월에 체결된 뮌헨 협정은 단순히 히틀러의 야망을 유화책으로 넘겨버리려는 시도에서 역사상 가장 실패한 협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협정은 초기에 동맹국의 외교적 성공으로 간주하였으며,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역인 주데텐란트를 병합하면 더 이상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큰 유럽 분쟁을 막기 위한 것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이후 히틀러가 재차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러한 유화책의 본질적인 결함이 드러났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중 관계를 분석하는 많은 사람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유화책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뮌헨 협정 당시의 영국과 독일 간의 상황과 현재의 미국과 중국 사이의 유사성을 탐색함으로써 현재의 미·중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뮌헨 협정을 양측 관계에 적용하여 세 가지 교훈을 도출해 보았다.   ━  양안 관계와 뮌헨 협정의 유사성   당시의 영국과 현대의 미국은 모두 국내적인 문제로 인해 전략적 라이벌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의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적, 군사적으로 제약을 받은 상태였으며 유럽의 안정이 최우선이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방어해야 하는 공식적인 책임이 없는 영국은 수동적으로 데탕트 정책을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미국은 경기 둔화가 예측되며, 현재 중국과 상당한 무역 관계를 맺고 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가자 전쟁으로 인한 군수물자 부족으로 미국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에는 어렵게 보인다. 또한 공식적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하는 미국은 더욱이 대만에 대해 적극적인 방어태세를 취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신흥 강국인 당대의 독일과 현재의 중국은 모두 과거의 한계를 극복하고 글로벌 영향력을 증진하려는 전체주의 국가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약화한 독일은 1936년 라인란트에서 적극적으로 군사 재무장을 추구하며 더욱 공격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해 나갔다. 마찬가지로 '세기의 굴욕'에 시달리는 현대 중국은 군사적 활동에 투자하며, 양안과 남중국해에서 더욱 공격적인 '전랑 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특히 대만 통일을 국가 부흥의 중대 과제로 설정하고 중국이 정당한 세계적 영향을 행사하는 것을 권력의 목표로 삼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대만은 당시 신흥 강국인 독일과 중국과 각각 지정학적으로 근접한 지역에 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 사이에는 원래 험준한 산맥으로 인해 자연적인 장벽이 존재하여 독일의 침략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주덴텐란트의 양보로 독일군이 다른 동유럽 지역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마찬가지로 대만 역시 중국의 태평양 진출의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다. 중국의 대만 통일은 중국이 지리적 제약을 벗어나며 태평양과 남중국해 지역에서의 존재감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  첫 번째 교훈: 전략적 자산의 중요성    1938년,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독일의 팽창주의 야망을 억제하기 위해 유화책을 추구했지만, 확장적인 권위주의 정권에 맞선 단순한 유화책은 해결책이 아님을 증명하였다. 특히 체임벌린은 독일의 공격적인 행태인 라인란트 재무장과 같은 사안을 간과하면서 주덴텐란트의 영토와 그 전략적 가치를 과소평가했다. 뮌헨 협정에서 결정된 주덴텐란트의 할양은 독일이 산악지대의 자연적 국경을 넘어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군수 산업의 문을 열어줌으로써 나치의 전쟁 인센티브를 크게 강화했다. 결과적으로 유화책은 의도치 않게 독일의 추가 정복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대만은 태평양과 남중국해 사이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데 있어 전략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더욱 공격적인 입장을 취함에 따라 대만을 흡수하면 강력한 해군 기지를 제공할 수 있으며, 중국이 이 지역에서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으며, 주변 국가와의 갈등도 고조될 것이다. 특히 세계 반도체 시장의 65%를 지배하고 있는 TSMC와 같은 중요 산업에서 대만이 중요한 항로와 자원을 통제하는 것은 기술 의존적인 세계에서 중국에 전례 없는 지렛대를 제공할 것이다. 대만의 영토 보존은 안정과 세계적인 균형 유지, 미·중 간의 '투키디데스 함정'의 위험 회피를 위해 필수적이며, 이는 양국 간의 글로벌 강대국 간의 갈등 위험을 크게 높일 수 있는 티핑포인트로 작용하고 있다.  ━  두 번째 교훈: 전략적 모호성의 함정    1936년 독일의 라인란트 재군비화에 대해 영국은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독일은 뮌헨 협정 이후에 영국의 수동성에 대한 입장을 더욱 견고히 했으며, 이는 히틀러가 확장을 더욱 대담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대만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모호성은 중국에 미국의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을 것이며, 양쪽 간의 긴장을 강화할 것이다. 중국과의 노골적인 대립을 피하기 위해 1970년대에 도입된 미국의 대만에 대한 '전략적 모호성' 정책은 미국이 현실적으로 양안 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에 미국의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게 한다.   특히 전략적 모호성과 더불어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가자 분쟁에서 나타난 서방의 비일관적인 대응은 미국의 대만에 대한 방어 의지에 의구심을 더욱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대만에 보내야 하는 미국의 무기 재고가 이미 190억 달러를 초과하는 등을 고려할 때 중국은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 한편으로 중국은 남중국해와 양안 등지에서 해군을 증강하고 있으며 이미 중국의 군사 예산과 기술 투자는 괄목할 만큼 성장하였다. 이를 고려했을 때, 이제는 '전략적 모호성'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할 때이다.  ━  세 번째 교훈: 포괄적 봉쇄의 필요성   20세기 중반 베르사유 조약은 가혹한 배상과 영토 조정으로 독일을 심각하게 약화해 광범위한 불만과 초인플레이션을 조장했다. 히틀러는 민족주의적 정서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하고 침략을 부추기는 이 불만을 교묘하게 무기화했다. 마찬가지로 시진핑은 역시 청년실업, 주거위기 등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국가에 대한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봉쇄는 중국의 민족주의 정서와 침략에 대한 정당성을 더욱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독일 나치의 부상에서 볼 수 있듯이 한 국가에 대한 고립은 의도치 않게 그 국가의 공격성을 부추길 수 있다. 보다 효과적인 접근법은 억제력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의 세계 경제로의 통합을 심화시키는 장기적인 전략을 포함해야 한다. 무역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상호 의존성을 촉진해 전략적으로 중국의 공격적인 행태를 억제한다. 이 방식은 세계 경제의 안정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권위주의 국가가 그 민족주의 정서를 조장하기 힘들게 한다. 더차이나칼럼

    2024.02.06 07:00

  • [중국읽기] ‘10년 징크스’

    [중국읽기] ‘10년 징크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중국 비즈니스에 ‘10년 징크스’라는 게 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제품이나 기술이 10년을 버티기 힘들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사례는 많다.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에어컨·냉장고 등 백색가전을 생산, 판매에 들어간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돈 많이 벌었다. 그러나 그 시장에 하이얼(海爾) 등 중국 업체가 뛰어들었고, 대략 10년이 지난 2000년대 중반 우리 브랜드는 밀려나야 했다. 건설장비인 굴착기도 그랬고, 주방 밀폐 용기 브랜드인 락앤락도 마찬가지였다.   백색가전, 기계, 철강, 조선, 자동차…. 중국의 산업 발전은 그 자체가 한국을 따라잡는 과정이었다. 그 ‘10년의 벽’을 넘어 여전히 버티고 있는 분야가 하나 있으니, 바로 디스플레이 기술이다.   OLED 디스플레이 분야 중국의 거센 기술 공세로 국내 업계에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사진 LG디스플레이] 시작은 TV·PC 등에 쓰이는 CRT(브라운관) 모니터였다. 1990년대 중반 우리 브랜드 제품은 한때 중국 시장점유율 70%를 넘기기도 했다. 중국 기업이 보고만 있을 리 없다. 그들은 10여년 거세게 추격했고, 2000년대 중반 한국을 따라 잡았다. 바로 그 위기의 순간 우리 기업은 LCD 디스플레이로 갈아탔고, 그 시장을 10년 더 주도할 수 있었다. 중국은 또 추격했다. 현대전자의 LCD 부분을 인수해 만든 BOE가 대표 회사다. 추격 10년, 중국은 또다시 한국 LCD를 잡았고, 우리 기업은 2010년대 중반 시장 주도권을 그들에게 넘겨야 했다.   여기가 끝인가? 아니다. 우리는 또 다른 병기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기술로 치고 나갔다. LCD로 CRT 모니터의 한계를 돌파했듯, OLED로 ‘10년의 징크스’를 깰 수 있었다. 가만히 있을 중국이 아니다. BOE 등 중국 회사들은 지난 10여 년 OLED 추격전을 펼치고 있다.   불길한 소식이 들린다. 지난해 삼성·LG의 세계 스마트폰용 OLED 디스플레이 시장 점유율은 51.8%로 전년 대비 14.4%포인트나 줄었다. 모두 중국이 쓸어갔다. 중국 업체의 시장 점유율은 48.2%. 한국의 OLED 아성을 흔들 기세다. ‘10년 징크스’를 떠올리는 이유다.   핵심은 혁신이다. CRT에서 LCD로, LCD에서 다시 OLED로 이어지는 혁신의 역사를 만들 수 있었기에 우리는 시장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게 없다면? 중국에서 나와야 하고, 산업은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게다가 중국은 정부와 기업이 똘똘 뭉쳐 거칠게 기술 공세를 펼치고 있다. “우리는 과연 ‘10년 징크스’를 돌파할 혁신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정부와 기업이 답해야 할 문제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4.02.05 00:22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샹차이(香菜), 서역 오랑캐 채소의 탈바꿈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샹차이(香菜), 서역 오랑캐 채소의 탈바꿈

    한국의 깻잎처럼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채소가 우리말로는 고수라고 부르는 샹차이(香菜)다. 한국의 깻잎처럼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채소가 우리말로는 고수라고 부르는 샹차이다. 향기가 강하다는 점에서 깻잎과 비교하지만 중국에서 샹차이는 깻잎 이상이다. 한국 음식에 들어가는 고추처럼 국수를 비롯해 갖가지 음식에 골고루 들어간다. 그만큼 중국에서 폭넓게 사랑받는다.   반면 한국인한테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샹차이 들어간 중국 음식은 아예 먹지 못한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래서 중국 여행할 때 “샹차이 빼주세요(不要香菜)”라는 말을 배우기도 한다. 이런 샹차이를 중국인들은 왜 그토록 좋아하는 것일까? 샹차이는 어떤 채소이고 중국에서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다른 나라 음식문화를 놓고 뜬금없이 별걸 다 궁금해한다 싶지만 샹차이가 중국인의 식탁에 어떻게 오르게 됐는지를 알면 재미있는 역사와 함께 중국을 이해하는 데 나름 도움도 된다.   먼저 샹차이는 중국 토종 채소는 아니다. 외국에서 전해졌는데 흔히 기원전 1~2세기 한나라 무제 때 서역에 사신으로 갔던 장건이10년 만에 귀국할 때 종자를 가져와 퍼트렸다고 한다. 물론 확실치는 않다. 문헌에 실린 기록으로 보면 3세기 무렵인 한나라 말에 전해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어쨌든 전래시기가 최소 1,700년 이상이니 재배역사는 꽤 오래됐다. 참고로 샹차이 관련 기록이 실린 3세기 문헌에는 향기로운 채소라는 뜻의 샹차이(香菜) 대신 오랑캐 호(胡)자를 써서 후차이(胡菜)라고 나온다. 그런데 서역 오랑캐 채소라는 뜻의 후차이가 지금은 왜 향기로운 채소, 맛있는 채소라는 샹차이로 이름이 바뀌었을까? 사연이 있다. 4세기 남북조 시대, 후조(後趙)를 건국한 황제 석륵은 흉노 출신이다. 그 때문에 자신의 조상을 가리키는 서역 오랑캐라는 뜻의 호(胡)라는 한자를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글자가 들어가는 단어를 일절 쓰지 못하게 했기에 서역과 관련된 수많은 낱말이 이름을 바꿔야 했고후차이도 이때부터 샹차이가 됐다는 것이다.   후조 황제 석륵이 실제 자신의 조상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인지 혹은 일부 한족의 비뚤어진 우월감 아니면 열등의식으로 만들어진 스토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송나라 때의 사전인 『광운(廣韻)』을 비롯한 중국 역사 문헌에는 그렇게 나온다.   하지만 석륵이 설령 흉노의 후손임을 부정하고 싶었다고 해도 입맛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서역 오랑캐 호(胡)자 대신 향기롭다, 맛있다는 뜻의 향(香)자를 쓴 것을 보면 샹차이를 꽤 좋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샹차이는 사실 중앙아시아와 중동 등의 고대 서역과 고대 서양에서는 향기로운 채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채소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향신료이자 약초로 꼽을 정도다.   원산지는 지중해, 그중에서도 고대 그리스 문명이 발달했던 에게해연안 지역으로 추정한다. 영어 이름인코린더(coriander)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어원이 고대 그리스어 코리스에서 비롯됐다.   코리스는 흔히 빈대(bed bug)로 번역해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은 냄새나는 벌레라는 뜻으로 샹차이, 즉 고수 풀의 향기가 이 벌레 냄새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독특한 향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이미 향신료로 널리 쓰였고 뿐만 아니라 감기몸살로 앓을 때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약으로도 사용했다. 중동 지역의 설화를 모은 아라비안나이트에서도샹차이는 춘약(春藥), 그러니까 일종의 성적 자극제로 그려져 있다.   이렇듯 고대 서양에서 약초로, 향신료로 널리 쓰였던 샹차이였지만 실크로드를 따라 중원에 전해졌을 때 처음부터 환영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3세기 무렵 들어와 13세기 원나라 때 중국 전역에 퍼졌으니 약 1,000년의 세월이 걸렸던 셈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독특한 향기와 맛으로 인해 남북조 시대 서역과 북방민족의 영향이 컸던 북조에서는 인기가 있었지만 한족이 중심인 남조에서는 특유의 냄새를 몹시 싫어했다.   특히 이 시대에 전해진 불교와 전통 도교에서는 수행자를 중심으로 샹차이 식용을 막았을 정도다. 샹차이를 먹으면 마음이 흩어져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지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도 했다.   불교에서 금하는 오신채 중의 하나로 보았던 것인데 뒤집어 보면 몸과 마음, 입맛을 유혹할 만큼 자극성 강한 향신성 채소로 속세에 사는 중생에게는 그 맛과 향에 익숙해지면 더없이 맛있는 향신료가 된다. 그래서인지 원나라 학자 왕세정이 쓴 『농서』에는 잎과 씨를 모두 먹을 수 있는데 생으로도 먹고 익혀서도 먹으니 세상에 이롭다고 했다.   중국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향신 채소 샹차이에는 이렇듯 역사적으로 중국이 두려워하고 지우려 했던 고대 흉노를 비롯한 서역의 흔적이 배어 있다. 더차이나칼럼

    2024.02.02 07: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괄목상대(刮目相對)와 여몽(呂蒙)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괄목상대(刮目相對)와 여몽(呂蒙)

    괄목상대. 게티이미지뱅크 ‘몸이 천 냥이면 눈은 팔백 냥이다’, 이런 속담이 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안구(眼球)는 얼추 탁구공 크기다. 신체 가운데 그리 크지 않은 기관이다. 포유류뿐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눈이 몸에서 차지하는 부피의 비율은 이처럼 미미하다. 하지만 이 속담에서 보듯 귀하게 대접받고 있고, 눈에 대한 비유적 표현들이 지구촌에 꽤 많다. 눈에 대한 비유라면 더 주목받게 되고, 피부에도 와 닿아 기억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사자성어는 괄목상대(刮目相對)다. ‘괄목’은 ‘눈을 비비다’라는 뜻이다. ‘상대’에는 ‘상대방을 대하다’라는 뜻도 있다. 이 둘이 합쳐져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대하다’라는 의미가 쉽게 완성된다. 요즘에도 자주 쓰이는 이 ‘괄목상대’의 유래는 서진(西晉)의 역사가 진수(陳壽)의 정사 ‘삼국지’에 등장하는 오(吳)나라 장수 여몽(呂蒙)의 일화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저마다 특출한 장점 몇 개는 지녔다. ‘강동의 호랑이’ 손견(孫堅)의 차남으로 태어나 오나라를 거의 50년 가까이 다스린 손권(孫權)은 풍채도 당당하고 다방면으로 역량이 걸출한 보스였다. 그는 라이벌 조조나 유비에 비해 수군(水軍) 전술에 밝았고 수성(守城)에 강했다. 이 손권이 매우 아낀 인물 가운데 ‘괄목상대’의 주인공 여몽 장군도 포함된다.   여몽은 빈궁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군문(軍門)도 병졸부터 출발했다. 하지만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차례로 진급했고 마침내 그 실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오나라의 촉망받는 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에게는 소위 학식이라는 것이 매우 부족했다. “박사가 되라는 게 아닐세. 학문을 닦아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 되라는 말이야.” 손권은 어느 날 여몽에게 보스이자 멘토로서 이런 조언을 한다. 즉, 약점을 보완하라며 그 수단으론 독서를 권한 것이다. 손권은 ‘손자병법(孫子兵法)’, ‘육도(六韜)’, ‘좌전(左傳)’, ‘국어(國語)’, ‘사기(史記)’, 그리고 ‘한서(漢書)’를 여몽에게 추천한다. 비록 어투는 따뜻한 톤이었으나, 그 내용은 새 임지로 떠나는 여몽을 향한 손권의 인생 내공이 실린 차가운 맞춤형 훈시였다.   여몽은 책을 읽기 시작한다. 손에서 책을 거의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평소 자신의 약점을 괄시하던 학식 깊은 노숙(魯肅)과 단 둘이 긴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갖는다. 노숙은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周瑜)가 급사하자 뒤를 이어 오나라 군대의 대도독을 맡은 인물이다. 그날 두 사람의 긴 대화가 끝날 무렵 여몽의 학식이 깊어진 것에 놀란 노숙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노숙의 칭찬을 받아, 마주 앉은 여몽이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한 마디를 보태는데 바로 여기에 ‘괄목상대’ 네 글자가 선명히 등장한다. “모름지기 선비란 3일 만에 재회해도 서로 눈을 비비고 상대의 변화를 파악하려 노력해야 맞겠죠.” 여몽의 의미심장한 이 마무리 발화에 나온 ‘괄목상대’는 차츰 한·중·일 3국 모두가 선호하는 사자성어로까지 성장했다.   훗날 여몽은 백전노장 관우를 굴복시켜 최후를 맞게 한다. ‘괄목상대’의 중요성은 당시 여몽이 관우를 사로잡기 위해 수립한 탁월하고 치밀한 전술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늘은 한 개인에게 전부를 주진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여몽은 병치레가 잦았다. 그를 아끼던 손권의 극진한 최후 병간호에도 불구하고 여몽은 42세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병사했다.   참고로, 현대 중국에서 ‘괄목상대’는 괄목상간(刮目相看)으로 쓰인다. 맨 끝 한자가 바뀌어 ‘보다’라는 세부 동작이 더 강조되고 있다.   개인의 삶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동반한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각 당의 후보자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여러 검증과 절차가 이어질 것이다. 또한 신중한 유권자라면 투표 당일까지도 후보들에 대한 최종 평가에 어떤 여지를 남겨두고 싶어할 것이다. 여기에는 ‘괄목상대’를 소망하는 마음이 당연히 포함된다. 설령 이번 총선을 사흘 정도 앞둔 시점이라도 후보나 유권자가 잠시 자신의 ‘눈을 비벼볼’ 시간은 충분하고도 넉넉하다.   글 홍장호 ㈜ 황씨홍씨 대표 홍장호 필진. 차이나랩

    2024.01.30 06:00

  • [중국읽기] 전화위복의 중국외교?

    [중국읽기] 전화위복의 중국외교?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중국에 새 외교부장이 등장할 모양새다. 지난해 친강(秦剛)의 낙마 이후 왕이(王毅)가 대신하던 외교부장 자리에 류젠차오(劉建超) 발탁설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사실이라면 중국으로선 전화위복(轉禍爲福)이 아닐까 싶다. 싸움닭 대신 복스러운 이미지의 정통 외교관이 컴백하기 때문이다. 2월에 만 60세가 되는 류젠차오는 중국의 연례 정치행사인 오는 3월 양회(兩會, 全人大와 政協 회의) 때 정식으로 외교부장에 임명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지린성 출신으로 베이징외국어학원에서 영어를 전공한 뒤 외교부에 들어간 류에겐 최연소 타이틀이 많이 붙었다. 37세이던 2001년 중국 외교부 사상 최연소 대변인이 됐고, 2013년엔 49세로 최연소 부장조리(차관보)가 됐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인데 자질과 자격 측면에서 외교부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변인으로 9년간 ‘중국의 입’ 역할을 한 데 이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대사로 활동했다.   류젠차오 중국 대외연락부장이 오는 3월 새로운 외교부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랴오닝성과 저장성 등 두 곳에서 지방 관리로 근무했고 국가부패예방국의 부국장으로 중앙 부처의 경험 또한 쌓았다. 특히 중국 외교의 3대 부서 모두에서 일한 강점이 있다. 친정인 외교부에선 부장조리까지 했고, 당 중앙외사판공실에선 부주임, 대외연락부에선 현재 부장(장관)의 신분이다. 문무를 겸비한 셈이다. 얼마 전 미국과의 상견례에 해당하는 방미 때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류젠차오와 특별히 정식 회담을 가진 이유다.   친강이 주미 대사로 1년 반 있으면서 한 번도 블링컨을 만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미국이 류젠차오 대접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알 수 있다. 왜? 류는 지난 몇 년 동안 중국의 이미지를 먹칠한 전랑(戰狼) 외교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저우언라이 외교의 맥을 잇는 인물이다. 베이징 주재 서방 외교관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류젠차오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대변인 시절 한국특파원단과 자주 어울렸고, 당시 결석을 앓던 필자의 건강까지 챙기는 섬세함을 보였다. 그는 또 외교부 부장조리 때는 한반도 사무를 직접 담당해 남북한 문제에 정통하다. 그의 발탁이 투쟁을 강조해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공격적인 외교 노선에 대한 조정으로 해석해도 되는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우리 조태열 외교부 장관과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캠퍼스 시절을 떠올리며 말을 풀어나가면 냉랭한 한·중 관계에도 봄이 깃들지 않을까 기대된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2024.01.29 00:10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갑진년 용의 해와 바닷가재 롱샤(龍蝦)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갑진년 용의 해와 바닷가재 롱샤(龍蝦)

    롱샤(龍蝦)로 만든 다양한 요리들이 원형 테이블에 올려져 있다. 섣달 그믐날 저녁에는 가족이 둘러앉아 소원을 빌며 새해맞이 음식을 먹는 것이 중국의 오랜 전통이다. 단원반(團圓飯) 혹은 제야 음식(年夜飯)이라고 한다. 원래 음력인 춘절 풍속이지만 요즘은 양력 새해맞이 음식으로도 먹는다. 최근 중국 뉴스를 보니 올해 새해맞이 음식으로 홍콩과 중국 등지의 고급 음식점에서는 바닷가재 요리가 인기였다고 나온다.   음식 이름에 용(龍)자가 들어가는 요리를 먹으며 올 한 해 운수대통하기를 빌었는데 적지 않은 중국요리가 그렇듯이 새해맞이 음식이라며 먹었다는 요리들도 이름을 보면 거창하기 그지없다.   이를테면 청룡이 물속에서 노닌다는 뜻의 청룡희수(靑龍戱水), 바닷가재 살로 만든 사천식 완자 요리로 두 마리 용이 만나는 기이한 인연이라는 의미의 쌍룡기연(雙龍奇緣), 용을 포함해 12간지 동물을 주제로 꾸민 디저트, 딤섬으로 한 무리의 용이 장수를 축원한다는 군룡축수(群龍祝壽) 등등이 그것이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초식처럼 이름이 현란할뿐더러 그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용(龍)자가 들어가는 새해맞이 음식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이 바닷가재를 주재료로 한 요리라는 점이다. 용을 닮은 새우라는 뜻을 가진 롱샤(龍蝦). 바닷가재와 용, 그리고 새해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지만, 중국에서는 나름 그럴듯한 상관관계가 있다. 2024년은 갑진년 용띠 해, 그것도 청룡의 해다. 옛날 중국 풍속에서는 이럴 때 용과 관련된 음식을 먹고 용의 기운을 받아야 한 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며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용은 상상 속 동물이니 실제 그 고기를 먹을 수는 없고 그래서 대신 먹은 것이 바닷가재 요리다.   용과 바닷가재도 얼핏 별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모든 일이란 게 풀이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 바닷가재는 중국어로 롱샤(龍蝦)다. 용을 닮은 새우라는 의미다. 그러니 꿩 대신 닭이라고 용띠 해의 새해맞이 음식으로 용의 기운을 받아 소원을 이루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용띠 해이건 아니건 중국에서 바닷가재 먹으며 행운을 빈다는 말, 별로 들어보지도 못했고 그래서 뜬금없기 짝이 없는데 그러면 중국인들, 언제부터 용띠 해에 바닷가재를 먹으며 새해 소원을 빌었을까?   일단 중국에서 바닷가재를 먹은 역사부터가 뚜렷하지 않다. 중국 문헌에 바닷가재가 나오는 것은 16세기 후반, 명나라 때다. 지금의 광동성 동부에 위치한 고을인 징해(澄海)현의 지방관청 기록인 현지(縣志)에 나온다. 바다새우(海蝦)라고 했는데 길이가 2~3척이고 수염은 수척에 이른다고 했다. 그러니 대략 60cm~1m 크기의 초대형 바닷가재다. 원주민들이 그 껍질로 등불을 밝히는데 바라보면 마치 용의 모습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용 새우(龍蝦)라고 부른다고 했으니 롱샤의 어원이 여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기록은 명나라 때 보이지만 그렇다고 이때부터 바닷가재를 요리해 먹었던 것 같지는 않다. 상어지느러미, 바다제비집 요리와는 달리 명청시대 황제가 살았던 북경을 비롯한 중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중국에서 바닷가재 요리가 인기를 끈 것은 1990년 후반 이후 경제가 발전하면서, 서양 랍스터 요리의 영향을 받으면서부터다. 그러니 롱샤라는 이름에 용(龍)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갑진년 용띠 해의 새해 음식으로 바닷가재 요리가 등장한 것이 다소 뜬금없고 우스꽝스럽지만, 꼭 그렇게 볼 것만도 아니다.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새해맞이 음식은 아니어도 연초에 용과 관련해 음식을 먹는 풍속이 있었다. 청나라 후반 지금의 북경 지역 풍속을 기록한 『연경세시기(燕京歲時記)』에 그 내용이 보인다. 이 책에 음력 2월 2일을 용이 머리를 드는 날(龍擡頭)이라고 했는데 이를 기념해 용과 관련된 음식을 먹는 것이 풍속이라고 적혀 있다.   뭔 소리인가 싶지만, 계절에 따라 움직이는 별자리가 이날에는 마치 용이 머리를 드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해서 생긴 말이다. 예전 중국에서는 이날을 중화절이라고 해서 농사가 시작되는 날로 삼았다. 참고로 우리는 하루 앞인 음력 2월 1일이 중화절이다. 용이 머리를 드는 날, 바꿔말해 용이 기운을 뻗어 일어나는 날이니 이날 용의 정기를 받으면 한 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용 고기를 직접 먹을 수는 없으니 먹는 음식마다 의미를 부여해 용과 관련을 지었다.   이를테면 이날 먹는 호떡 같은 음식은 용의 비늘(龍鱗), 국수는 용의 수염인 용수면(龍鬚麵)이라고 했다. 부녀자들은 이날만큼은 바느질을 하지 않았는데 자칫 용의 눈을 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먹는 음식마다 용과 관련지으며 용의 기원을 받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그리고 풍년이 들어 풍요로운 한 해가 되기를 빌었다.   갑진년 용의 해에 중국인들이 새해 음식으로 롱샤(龍蝦), 바닷가재를 먹으며 소망을 빌었다는 뉴스에는 이런 민속적 배경이 있다. 더차이나칼럼

    2024.01.26 07: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문일지십(聞一知十)과 안회(顔回)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문일지십(聞一知十)과 안회(顔回)

    자공. 바이두백과 공부하기 쉽지 않다. 만약 이 결론에까지 이르렀다면 그는 공부를 시작해도 된다. 멀리 갈 채비는 갖추었기 때문이다. 내일이라도 생경한 외국어 공부를 하나 시작해 보라. 이거 간단치 않다. 당장 하루 소홀히 하면 이틀 공부가 실종된다.   당장 일본어 한자 읽기와 독일어 명사 성별, 그리고 중국어 네 성조, 이런 각 언어의 낯선 요소들은 우리 유구한 배달민족의 혀와 뇌에 고약하게 쓰거나 매운 맛을 선사한다. 하물며 더 고차원의 논리적 사고가 요구되는 학문 분야라면 ‘8부 능선’까지 오르기가 마음처럼 그리 수월치 않다.   이번 사자성어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이다. 공부하기와 무관하지 않은 이 네 글자는 우선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를 듣다’가 ‘문일’이고, ‘열을 안다’가 ‘지십’이다. 하나를 듣고 능히 열을 아는 인물이 있을까. 안회(顔回)가 이런 인물이었다. 공자가 하루는 제자 자공(子貢)을 따로 부르더니 질문 하나를 툭 건넨다. “너는 너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냐?” ‘뭐, 뭐요?’, 자공은 이런 표정으로 반응한다. 질문이 벌써 우문(愚問)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늘 안회를 공개적으로 칭찬해왔다. 제자라면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이 평판을 스승이 새삼 묻고 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자공은 표정까지 진지하게 바꾸어 현답(賢答)으로 위기를 수습한다.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능히 열을 알지만, 저는 겨우 둘을 압니다.”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에 기록된 이 우문현답 일화가 바로 ‘문일지십’의 유래다.   우리는 이 ‘문일지십’ 문구 자체의 현대적 이해에 있어 핵심을 두 가지 각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경청하는 능력의 중요성이다. 둘째, 스스로 추리하는 능력의 중요성이다. 안회가 이 두 장점을 갖춘 인물이기에 스승도 다른 제자들도 젊은 그를 가볍게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안회는 말수도 적고 내성적인 인물이었다. 공자조차도 초기엔 어쩌면 그가 우매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고 의심했을 정도다. 하지만 안회와 긴 대화를 나눠본 이후 스승 공자는 의심을 거두고 그를 각별히 아꼈다. 그는 공자의 유교적 가르침을 따르는 삶에 장애물이라고 판단해 공자의 적극적 권유에도 관직 진출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매진했다. 재물에도 무심했다. 경제적으로 그리 여유롭지 않았음에도 행실이나 처신이 이러했다.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생애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단명했다. 근대 이전 동양 사회의 인물평인 품인록(品人錄) 문화에서 동량지재(棟梁之材)의 으뜸으로 언급되곤 한다.   그런데 필자는 앞의 ‘문일지십’ 일화에서 자공의 비유적 현답에도 마음이 간다. 특히 거기에 등장하는 숫자들에 주목할 필요는 느낀다. 근대화를 거친 이후 중국에서도 자공에 대해서는 평가가 나쁘지 않다. 자공은 상인으로서의 자질이 출중했다. 누구보다 숫자에 밝았다. 이 짧은 즉흥적 답변에서 그는 숫자 1, 10, 그리고 2를 언급한다. 그가 언급한 이 숫자들은 당시에도 여러 함축적 의미가 있었다.   숫자 1은 현대 수학의 초심자라면 여전히 주기적으로 곱씹고 고민하는 숫자다. ‘대체 1이란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두뇌에 이 숫자 1이 정의되고 안착해야 비로소 정수론 체계가 잡혀 가깝게는 가감승제에서 멀게는 선형대수까지 수학 세계의 엔진에 시동이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공이 자신의 수준으로 겸허히 언급한 이 숫자 2는 요즘 AI 시대의 핵심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언급한 숫자 10도 동서고금 막론하고 그 의미가 크다. 숫자 10은 10진법 체계의 요체일 뿐만 아니라 ‘완전하다’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불교에서 상하까지 아우르는 모든 방향, 즉 공간을 뜻하는 시방(十方)이란 말도 쓰인다.   최근 교육 정책과 관련하여 말들의 성찬이 오가며 다투고 있다. 그 와중에 ‘과잉 경쟁’과 ‘적정 경쟁’이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적정’인가는 다시 우리에게 표준화와 계량화라는 숙제를 남긴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다. 교육 정책에 더 명징한 통찰과 더 투명한 숫자 제시의 병행이 요구되는 이유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홍장호. 더차이나칼럼

    2024.01.23 06:00

  • [중국읽기] 현대차 충칭 공장의 쓰라린 이야기

    [중국읽기] 현대차 충칭 공장의 쓰라린 이야기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결국 헐값에 넘겨야 했다. 약 1조6000억원 들여 지은 공장을 3000억원에 팔았으니 겨우 5분의 1 건지는 데 만족해야 했다. 현대자동차 충칭(重慶)공장 얘기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공장 준공은 2017년 7월이었다. 그런데, 준공식에 당연히 왔어야 할 한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쑨정차이(孫政才) 충칭시 당서기가 그였다. 오래된 인연이다. 쑨정차이는 2002년 현대차가 중국에 진출할 때 첫 둥지를 튼 베이징 쑨이취(順義區)의 수장이었다. 그는 줄곧 승진 가도를 달려 충칭시 당서기에 올랐고, 미래 총리로 거론될 만큼 잘 나갔다. 쑨 당서기와의 ‘관시(關係)’를 활용해 중국 내륙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게 현대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준공식이 열리던 바로 그 시간, 쑨정차이는 부패 혐의로 조사 받고 있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주도한 반부패 투쟁에 걸려든 것이다. 결국 쑨 당서기는 낙마했고, 현대 충칭 공장은 시작부터 삐걱댔다.   ‘중국에서는 이제 전기차 아니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2023년 상하이 모터쇼의 BYD부스. [사진 셔터스톡] 쑨정차이가 건재했다면 순항했을까? 아니다. 현대는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시스템)’ 사태의 직격탄을 맞았다.   충칭 공장이 조업을 시작한 2017년, 중국의 한국 브랜드 공격은 집요했다. 현대차는 좋은 표적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애국주의에 흥분한 청년들이 현대차를 부수는 영상이 나돌았다. 품질도, 브랜드 가치도 애국소비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사드 직전 8%에 육박했던 시장점유율은 1%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도 현대는 거의 동시에 충칭과 허베이(河北)성 창저우(滄州)에 공장을 건설했다. 팔리지 않는데 생산은 오히려 더 늘어나니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창저우 공장 역시 매물로 내놓은 상황이다.   ‘사드’가 아니었다면 순항했을까? 아니다. 현대는 시장의 흐름을 놓쳤다. 중국 자동차 시장의 대세는 전기차다. 승용차 시장의 전기차 침투율은 약 40%(작년 12월 기준)에 달한다. 신차 10대 중 4대가 전기차인 셈이다. 그 흐름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게 바로 충칭 공장이 준공된 2017년 전후다.   공장 짓기에 바쁜 현대차는 그 흐름에 합류하지 못했다. 기아차 EV5로 중국 전기차 시장을 공략한다지만 한참 늦었다. 중국 토종 업체의 물량 공세를 당해내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관시의 함정, ‘사드’라는 지정학 위기, 시장 대응 실패… 이 모든 게 합쳐진 결과가 헐값 매각이다. 지금도 적지 않은 우리 기업이 공장 매각, 탈(脫)중국을 모색하고 있다. 회사와 업종은 다르지만, 그 원인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2024.01.22 00:19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쏭런위미(鬆仁玉米)와 옥수수(玉米) 천로역정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쏭런위미(鬆仁玉米)와 옥수수(玉米) 천로역정

    쏭런위미는 옥수수와 잣, 그리고 피망 등의 채소를 볶은 요리다. 쏭런위미(鬆仁玉米)는 옥수수(玉米)와 잣(鬆仁), 그리고 피망 등의 채소를 볶은 요리로 주재료는 옥수수다. 이 음식, 흔히 동북요리로 알려져 있다. 옥수수와 잣의 주산지가 옛날 만주, 지금의 동북 3성인 까닭이다. 바꿔 말해 다른 중국요리에 비해 뿌리도 깊지 않고 계보 찾기도 어렵다.   이런저런 이유로 쏭런위미는 대중 음식점에서 주로 먹는 요리이고 그중에서도 값이 저렴한 편이다. 다시 말해 맛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서민 음식이다.   쏭런위미, 대중적 음식이지만 재료 명칭을 조합해 지은 요리 이름은 그럴듯하다. 잣나무 씨앗인 쏭런(鬆仁)은 특별할 게 없지만 옥수수인 위미, 즉 옥미(玉米)는 곡식 이름치고는 최고의 찬사다. 쌀(米)은 쌀인데 옥(玉)처럼 보석 같은 쌀이라는 의미다.   중국인들, 옥수수 낱알에 왜 이런 거창한 작명을 했을까? 물론 생김이 옥을 닮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옥수수의 중국어 어원을 알아보면 뜻밖의 전파경로와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우리말 옥수수와 강냉이의 어원을 곁들이면 흥미가 한층 더해진다.   옥수수의 원산지는 아메리카다. 그러니 15세기 말인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을 거쳐 아시아로 퍼졌다. 중국에는 대략 16세기 중반에 전해진 것으로 본다. 명나라 때인 1560년에 발행된 지방 관청의 일지인 『평량부지(平凉府志)』에 옥수수 관련 기록이 보인다. 평량은 간쑤 성 성도인 란주 동쪽에 위치한 곳이니 실크로드의 연장선에 있었던 지역이다. 여기에 번맥(番麥) 혹은 서천맥(西天麥)이라고 나온다. 번맥은 외국에서 들여온 밀, 서천맥은 서역에서 전해진 밀이라는 뜻이다. 당시에도 서역은 낯선 곳이고 신비한 땅이었으니 그만큼 특별한 작물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일설에는 실크로드를 따라 메카에 성지순례를 다녀온 회교도가 씨앗을 가져와 심었다는 설도 있다.   그만큼 보기 드물었던 식물이었기 때문인지 옥수수는 중국 내륙으로 전해지면서 그 이름이 점입가경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별칭이 연미인(燕美人)이었다. 간쑤성에서 그다음으로 퍼진 지역이 산시성 일대였고 이 지역을 옛날 연(燕)이라고 했으니 그곳의 미인처럼 예쁜 작물이라는 뜻일 것이다.   옥수수를 미인에 비유했던 이유는 또 있다. 중국에서 옥수수는 처음 식용이 아닌 관상용 화초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서역에서 전해진 희귀식물이었으니 일반 가정집에서 키우는 여느 화초와 달리 황실 정원의 관상식물이었다. 그래서 옥수수를 옥처럼 생긴 쌀이라는 뜻의 위미와 발음이 같은 위미(御米)라고도 했는데 말하자면 황제의 쌀이라는 뜻이다.   옥수수 하나 갖다 놓고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을까 싶지만 이유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명나라 후반 의학서 『본초강목』에는 “종자가 드물다(種者也罕)”고 나온다. 옥미(玉米)라는 이름 역시 명나라 말 문헌인 『농정 전서』에 처음 보인다. 옥수수 열매가 구슬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흔치 않았기에 미화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명나라 말까지 옥수수는 중국에서 아직 널리 퍼지지 못했다.   옥수수가 중국 전체로, 그리고 황실 정원 화초에서 농민 서민의 식량이 된 것은 청나라 이후다. 먼저 재배지역이 간쑤와 산시, 허베이 성 등 서북에서 양자강 넘어 중국 강남인 호남과 강서 일대까지 넓어졌다. 그러면서 강남 현지에서는 부르는 이름부터 달라졌던 모양이다. 조선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옥수수를 옥촉서(玉蜀黍)라고 부른다고 했다. 서(黍)는 기장이라는 뜻의 한자이니 촉서(蜀黍)는 사천을 중심으로 하는 촉나라 기장이라는 의미다. 서민의 양식이 되면서 옥미가 촉나라 기장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촉서를 중국어로 발음하면 수수(shushu)다. 그렇기에 우리말 수수의 어원을 촉서, 옥수수의 어원을 옥촉서에서 찾기도 한다. 또 조선 순조 무렵 문헌인 『낙하생집』에는 중국 영남(嶺南)인 광둥 광서 일대에서는 옥수수를 ‘강남의 수수(江南薥黍)’로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이 말이 줄어 우리말 강냉이가 됐다는 어원설도 있다.   옥수수는 우리나라에 조선 정조 무렵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는데 앞서 어원설이 맞는다면 중국 북방이 아닌 양자강 일대 화동지역을 통해 전해졌을 것이다. 중국에서 옥수수가 이미 농민의 작물, 서민의 식량이 됐을 무렵이다.   그래서인지 다산 정약용은 옥수수를 곡식 중 제일 형편없는 작물로 꼽았고 추사 김정희는 일흔살 노인이 옥수수를 먹으며 연명한다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해 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의 대중 음식 쏭런위미를 말하려다 이야기가 한참 옆길로 샜지만 조선과 중국의 옥수수 전파 과정을 보니 맛있는 쏭런위미가 왜 값싼 서민 음식이 됐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더차이나칼럼

    2024.01.19 07:00

  •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중 관계와 미 대선

    [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북‧중 관계와 미 대선

    올해 북?중 관계에서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는 북?중 정상회담이다. 올해 북‧중 관계에서 가장 큰 이벤트는 북‧중 정상회담과 미국 대선이다. 북‧중 정상회담은 2019년 6월 이후 열리지 않고 있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이번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할 차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9년 6월 평양을 방문했으니 김정은이 움직일 순서다. 김정은도 그렇게 하고 싶을 텐데 중국이 언제 초청할지가 관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궁금증이 유발되지만 확인하기 어려운 일이 지난해 말에 있었다. 박명호 북한 외무성 부상이 지난해 12월 18일 베이징을 방문해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만난 것이다. 오랜만에 북한 고위층 인사가 공개적으로 중국을 방문해 눈길을 끌었다.   왕이는 “중국은 항상 전략적 고도와 장기적 관점에서 북‧중 관계를 바라본다”고 말했다. 이에 박명호는 “북한은 계속해서 중국과 다자간 협력을 강화하고 공동의 이익을 수호하며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십 년 동안 의례적으로 주고받은 외교적 수사였다.   외교적인 수사만 늘어놓던 두 사람이 빼놓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올해 북‧중 수교 75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잘 개최해 북‧중 우호 협력 관계를 다지자고 입을 모았다. 그동안 북‧중은 수교(1949년 10월 6일)를 맞아 특별한 행사가 없었다. 당 창건일, 정부 수립일 등 더 굵직한 행사들이 많아서다.   북‧중 수교 60주년을 맞아 2009년 원자바오 총리가 방북한 것이 그나마 큰 행사였다. 그때 원자바오는 북‧중 수교보다 딴 곳에 마음이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그의 건강 상태와 북한의 핵실험 이후 북‧중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까에 관심이 더 컸다. 북한은 그동안 북‧중 수교보다 나흘 뒤에 열리는 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에 훨씬 큰 비중을 두었다.   이번에 박명호는 왕이를 만나기 사흘 전 쑨웨이둥 중국 외교부 부부장을 만났다. 쑨웨이둥은 박명호의 중국 파트너다. 두 사람은 올해 북‧중 수교 75주년을 계기로 양국 우호 협력 관계를 심화하고 전략적 소통과 조정을 강화하자고 합의했다.   박명호는 쑨웨이둥과 실무적인 업무를 끝낸 뒤 왕이를 만났는데, 그것이 의례적인 만남인지 특별한 내용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북‧중 정상회담은 그동안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와 북한 노동당 국제부가 조율해 왔다. 아직 두 기관의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왕이-박명호 만남은 의례적인 일일까.   왕이-박명호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공개된 내용을 보더라도 평양에서 왕야쥔 주북한 중국대사와 협의해도 되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박명호가 굳이 지난해 12월 베이징을 방문해 협의할 정도인가 싶다. 그래서 북‧중 수교 75주년에 ‘큰 행사’를 준비하거나 아니면 중요하게 협의할 다른 내용이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다.   김정은은 북‧중 수교 즈음이 아니더라도 올해 베이징을 방문할 가능성이 크다. 오랜 대북 제재와 코로나-19 영향으로 나빠진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중국의 지원이 절실하다. 북-러 밀착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더 많은 경제 지원을 위해서는 베이징을 방문할 필요가 있다.   시진핑이 김정은을 초청하는 것은 중국의 일정에 달렸다. 우선 대만 총통 선거(1월 13일)의 결과에 따른 양안 문제가 중요하다. 그것이 어느 정도 정리된 다음에 김정은의 초청을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북‧중 수교 날은 미국 대선(11월 5일)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있어 양국이 피하고 싶을 것이다. 특히 김정은이 트럼프의 재선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어 북‧중 정상회담과 같은 ‘큰 행사’를 준비할 여력이 없을 수 있다.   그렇다면 3월~9월인데, 시진핑의 결정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미국 대선은 올해 북‧중의 최대 관심사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북‧중에게 부담스럽다. 하지만 조금 북‧중을 이해하고 갈등보다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대통령을 선호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트럼프다. 그는 동맹보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한·미‧일 동맹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한‧미‧일 동맹 강화는 그동안 북‧중에게 큰 부담이었다.   미‧중 관계는 누가 되더라도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미세한 변화가 있을지언정 대중 압박에서 전환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북‧미 관계는 다르다. 트럼프가 지금도 김정은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있듯이 만약 그가 당선되면 ‘Again 2018’이 될 수 있다.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의 실패를 교훈 삼아 그 연장선에서 북‧미 관계가 요동칠 수 있다.   그러면 중국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중국은 2018년 갑작스러운 북‧미 정상회담 발표에 어리둥절했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설마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리라고는 꿈엔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급기야 북한의 연속적인 핵실험으로 미뤄왔던 북‧중 정상회담을 서둘렀다.   만약 트럼프가 재선되면 시진핑은 북‧미 관계에 다시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딴마음을 먹지 않도록 달래거나 단속하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진핑은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지지율을 보고 북‧중 정상회담을 만지작거릴 것이다. 만약 북‧미 정상회담이 다시 진행한다면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만 또 뒤통수를 맞는 일을 피할 수 있다.   그래서 북한의 공식 통보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북한을 비롯해 한국‧미국‧일본 등에서 정보를 얻으려고 준비를 할 것으로 예상한다.   최근 김정은은 지진 피해로 힘들어하는 기시다 일본 총리에게 ‘각하’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위로 전문을 보냈다. 한국을 향해 포탄 세례를 한 것과 달리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북‧일 정상회담을 여러 차례 제의했던 기시다가 어떤 대응을 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중국도 이번 김정은의 위로 전문을 예민하게 지켜볼 것이다.   2024년 벽두부터 동북아시아가 술렁대고 있다. 대만 총통 선거를 시작으로 한국은 총선(4월), 일본은 자민당 총재 선거(9월), 미국은 대선(11월) 등 정치 이벤트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북‧중 관계는 이들 정치 이벤트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다. 그것은 고스란히 한국에도 영향을 준다. 2023년과는 외교 지형이 분명히 바뀔 것이다. 조그만 변화도 놓쳐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아전인수로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북‧중에게 부담스럽다. 하지만 조금 북‧중을 이해하고 갈등보다 협력할 가능성이 있는 대통령을 선호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트럼프다. 그는 동맹보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한‧미‧일 동맹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한‧미‧일 동맹 강화는 그동안 북‧중에게 큰 부담이었다.   미‧중 관계는 누가 되더라도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미세한 변화가 있을지언정 대중 압박에서 전환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북‧미 관계는 다르다. 트럼프가 지금도 김정은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있듯이 만약 그가 당선되면 ‘Again 2018’이 될 수 있다.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의 실패를 교훈 삼아 그 연장선에서 북‧미 관계가 요동칠 수 있다.   그러면 중국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중국은 2018년 갑작스러운 북‧미 정상회담 발표에 어리둥절했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설마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리라고는 꿈엔들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급기야 북한의 연속적인 핵실험으로 미뤄왔던 북‧중 정상회담을 서둘렀다.   만약 트럼프가 재선되면 시진핑은 북‧미 관계에 다시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딴마음을 먹지 않도록 달래거나 단속하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진핑은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의 지지율을 보고 북‧중 정상회담을 만지작거릴 것이다. 만약 북‧미 정상회담이 다시 진행한다면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만 또 뒤통수를 맞는 일을 피할 수 있다.   그래서 북한의 공식 통보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북한을 비롯해 한국‧미국‧일본 등에서 정보를 얻으려고 준비를 할 것으로 예상한다.   최근 김정은은 지진 피해로 힘들어하는 기시다 일본 총리에게 ‘각하’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위로 전문을 보냈다. 한국을 향해 포탄 세례를 한 것과 달리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북‧일 정상회담을 여러 차례 제의했던 기시다가 어떤 대응을 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중국도 이번 김정은의 위로 전문을 예민하게 지켜볼 것이다.   2024년 벽두부터 동북아시아가 술렁대고 있다. 대만 총통 선거를 시작으로 한국은 총선(4월), 일본은 자민당 총재 선거(9월), 미국은 대선(11월) 등 정치 이벤트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북‧중 관계는 이들 정치 이벤트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다. 그것은 고스란히 한국에도 영향을 준다. 2023년과는 외교 지형이 분명히 바뀔 것이다. 조그만 변화도 놓쳐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아전인수로 판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칼럼

    2024.01.17 07: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건곤일척(乾坤一擲)과 한유(韓愈)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건곤일척(乾坤一擲)과 한유(韓愈)

    한유. 바이두백과  “독일 사람들 합리적이야.” 독일에 10년 이상 머물다가 귀국한 지인의 답변이었다. 어느 가을 오후로 약속을 하고 테헤란로에서 반갑게 그를 만났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몇 분 후에 필자가 그에게 불쑥 건넨 질문이 하나 있었다. “네가 직접 경험한 독일 사람들을 딱 한 마디로 요약해 줄 수 있겠니?”   ‘합리적이다’라는 이 말도 때론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다행히 그의 온화한 표정과 함께 전달받은 이 말의 뉘앙스는 긍정적인 쪽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어 1990년 독일 통일까지 일사천리로 가능케 했던 마법의 키워드 하나를 엿들은 기분이었다. 이 들뜬 기분 덕분에 그와 주고받은 독일 이야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그래, 통일을 주도한 것은 드러난 소수 정치인의 ‘건곤일척(乾坤一擲)’이 아니었다. 동서독 국민의 몸에 밴 합리적 기질이었다. 이 저력이 마침 유리하게 전개되던 천시(天時)와 결합해 지극히 당연한 열매인 통일을 거의 빛의 속도로 이뤘구나, 이런 지점까지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이번 사자성어는 ‘건곤일척’이다. 우선 글자부터 살펴보자. 건(乾)은 태극기의 좌상에 위치한 모양으로 주역(周易) 8괘의 하나다. 음양으론 양(陽), 사상(四象)으론 태양(太陽)에 속한다. 대략 하늘을 뜻한다. 한편, 곤(坤)은 태극기의 우하에 위치한 모양으로 역시 주역 8괘의 하나다. 음양으론 음(陰), 사상으론 태음(太陰)에 속한다. 대략 땅을 뜻한다.   ‘주사위를 한 번 던지다’, 이 동작이 일척(一擲)이다. 따라서 ‘마치 하늘과 땅처럼 큰 뭔가를 남김없이 걸고, 오직 한 번으로 최후 승부를 겨루다’, 이게 ‘건곤일척’의 의미다. 중국에서는 ‘고주일척(孤注一擲)’이 훨씬 자주 쓰인다. 비록 앞 두 글자가 바뀌었지만, 뜻은 별반 차이가 없다. 승패 예측이 어려운 일에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고 마지막 주사위를 던지는 상황이다. 심장이 멎을 듯한 비장미가 두 사자성어 해석의 핵심이다. 결사전의 ‘용기’에 방점이 찍힌 ‘파부침주(破釜沉舟)’와는 쓰임에서 결이 조금 다르다.   ‘건곤일척’은 당송팔대가에 속하는 한유(韓愈)가 지은 과홍구(過鴻溝)라는 제목의 시에서 유래한다. 그는 유방과 항우의 최후 대결이 펼쳐졌던 홍구 지역을 지나다가 문득 웅장한 시상에 사로잡힌다. 호방했던 유방의 한나라 진영과 천하장사 항우의 초나라 진영의 최후 결전, 당시 중국 영토 거의 전부가 걸린 이 운명의 한 판에서 유방이 우여곡절 끝에 승리한다. 이 ‘건곤일척’으로 중국사의 긴 난세에 종지부가 찍혔다. 끝내 겹겹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항우는 생을 마감했다.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바로 이 포위망에서 유래한 사자성어다.   전설적인 홍콩 누아르 영화 주인공들은 픽션이니 일단 여기서 빼자. 이런저런 연유로 스포츠 선수들도 빼자. 그러고 나면 이 ‘건곤일척’과 함께 누가 떠오르는가. 필자에게 이번 숙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근자엔 눈을 씻어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력이 약해진 탓일까. 시력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20세기 후반의 정계로만 우리 시야를 좁혀보면 어떠한가. 자연스럽게 당대 지구촌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두 인물이 떠오른다.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꼽히는 콜 수상과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로 꼽히는 덩샤오핑, 이 두 인물은 한유가 최초로 꺼내 든 ‘건곤일척’ 이 네 글자의 비장미를 직접 느껴보는 그런 순간들을 겪어보지 않았을까 필자는 막연히 추측해본다. 그 긴장된 순간 그들의 손에 숨겨진 마법의 패들이 이제 AI까지 포함한 우리 눈에도 보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당시 독일과 중국 각각 그들 공동체 대다수의 몸에 밴 ‘합리성’과 ‘경제하려는 의지(the will to economize)’였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홍장호. 더차이나칼럼

    2024.01.16 06:00

  • [중국읽기] 0.49위안과 50위안

    [중국읽기] 0.49위안과 50위안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푸른 용의 해라는 갑진년(甲辰年). 희망과 기대로 시작해야 하는 새해이건만, 중국에서 최근 전해진 한 이야기는 인생이란 게 원래 슬픈 운명인가 하는 비감(悲感)을 떨칠 수 없게 한다. 중국 지린성 출신의 32세 청년 리웨카이(李越凱)가 산둥성에서 목숨을 잃은 건 지난달 5일 밤 10시를 막 넘어서였다. 외식 배달일을 나갔다가 54세 아파트 경비원 자오리(趙力)와 실랑이가 벌어졌고, 자오가 휘두른 칼에 그만 젊디젊은 생을 마감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리웨카이는 고교 졸업 후 호주 유학을 떠났다. 호텔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보모로 일하는 어머니의 한 달 수입을 합쳐 7000위안 정도. 그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컸고 유학비로 100만 위안을 썼지만, 그는 6년 전 귀국 후 별다른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유학비용 중 절반은 빌린 돈으로 아직도 갚지 못한 상태. 그는 친척의 부름을 받아 산둥성에 가 배달일을 시작했다.   리웨카이와 자오리 간의 사건을 발표한 중국 산둥성 칭다오시 공안국 발표문. [바이두 캡처] “연애와 결혼은 생각 없고 돈을 좀 벌어 부모님의 어려움을 덜어드리겠다”는 소박한 포부였다. 부지런히 뛰어, 남이 수십 건 주문을 받을 때 그는 100건까지도 챙겼다. 배달이 늦어지면 고객의 혹평이 따르고 이는 벌점으로 이어진다. 회사는 이에 따라 배달원을 1급에서 6급까지 나누고 등급에 따라 건당 0위안에서 최대 0.49위안(약 90원)의 격려금을 준다. 중국에서 뛰어다니는 배달원을 자주 보게 되는 이유다.   그는 사건 당일 칭다오시의 한 아파트로 배달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이 아파트는 오토바이 출입 금지 규정을 만들고, 경비원이 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2200위안의 월급에서 50위안(약 9140원)을 벌금으로 물렸다. 신속 배달을 통해 0.49위안의 격려금을 받으러 오토바이를 타고 단지 안으로 들어가려는 리웨카이와 50위안의 벌금을 물지 않으려고 이를 제지하는 자오리와의 싸움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리가 배달일을 시작한 지 불과 6일 만의 일이었다. 사건은 자연히 중국 청년의 취업난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6월 청년 실업률이 21.3%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자 7월부터는 아예 발표를 중단한 상태다. 사건을 접한 중국인들은 한결같이 마음이 아리다고 한다. 우리도 별반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이런 일이 한국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일어났다 해도 전혀 놀라울 것 같지 않아서다. 새해 우리 화두는 총선이 아니라 민생이 돼야 한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2024.01.15 00:08

  •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꽈배기 유탸오(油條)와 송나라 간신 진회

    [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꽈배기 유탸오(油條)와 송나라 간신 진회

    중국인들이 즐겨 찾는 아침식사 유탸오(油條). 바이두(百度) 중국식 콩국 떠우장(豆漿)과 여기에 찍어 먹는 부드러운 튀긴 꽈배기 유탸오(油條)는 중국인들이 즐겨 찾는 아침 식사다.   중국이나 타이완 홍콩 모두에서 아침 출근 시간 무렵이면 노점 식당이나 간이음식점에서 떠우장과 유탸오 먹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퍼진 음식이다.   하지만 이 유탸오라는 중국 꽈배기, 맛있으면서 먹기 편한 것과는 별도로 그 유래가 살벌하기 그지없다. 유탸오는 생김새가 다양한데 많은 경우 부드럽게 반죽한 밀가루를 살짝 비틀어 기름에 튀겨 만든다. 그런데 이 모습이 약 900년 전의 송나라 간신 진회(秦檜)가 너무 미워서 백성들이 간신의 목을 비틀어 기름에 튀겨 죽이듯 튀겨낸 것이 유탸오가 만들어진 유래라는 것이다.   중국 음식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겐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래도 부연해 말하자면 스토리는 송나라 역사서인 『송사』에 나오는 충신 악비(岳飛) 열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시 송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대립하면서 핍박을 당했다. 충신 악비 장군이 군사를 통솔해 금나라에 대항했는데 고종 11년(1138년) 금나라와 내통한 진회가 악비 부자를 모함해 살해했다. 여기까지는 역사적 사실이고 다음부터는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다.   악비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된 백성들, 분통이 터졌지만, 권세가 대단했던 간신 진회를 어쩔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신 밀가루를 사람 모습으로 반죽해 목을 비틀 듯 비틀어 기름통에 넣어 튀겨 먹었다. 그러면서 이름을 못된 귀신(鬼)을 기름(油)에 튀겨(炸) 죽인다는 뜻으로 유작귀(油炸鬼)라고 불렀는데 실은 간신 진회를 기름에 튀긴다는 유작회(油炸檜)를 연상하며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중국어로 귀신 귀(鬼)와 진회의 회(檜)는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미운 인물을 상상해 음식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분풀이함으로써 카타르시스 효과를 거두려는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역사적 사실로 믿을 만한 구석은 하나도 없는 유래설이다. 그런데 언제 생겨난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뜬금없이 여기에 왜 900년 전 인물인 송나라 간신 진회가 등장하는 것일까?   민간에 떠도는 속설 대부분은 얼핏 터무니없는 흥밋거리 이야기에 불과한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속설이 생겨난 데는 나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유탸오 유래설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에서 밀가루 반죽을 기름에 튀기는 튀김 요리는 11~13세기 송나라 무렵 발달했다고 한다. 그러니 유탸오 유래설은 튀김 요리가 생겨난 시기를 시사하는 것이고 간신 진화는 시대가 송나라였음을 암시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왜 하필 송나라일까?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국 음식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가 송나라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이 됐건 근거 없는 속설이건 중국 음식 이야기가 대부분이 기승전 송나라로 끝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 요리의 상당수는 기름에 지지고 볶고 튀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 음식에서 식용유가 광범위하게 쓰이기 시작한 것도 송 무렵으로 본다.   북방 민족에 쫓겨 남쪽으로 밀려 내려왔지만, 덕분에 이 시기에 농업과 기술의 발전, 시장의 활성화로 식용유 산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일단 송나라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기름은 소나 양, 돼지기름을 사용했다. 식물성 기름은 서역에서 수입해 북방에서 재배했던 호마((胡麻)에서 짠 기름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참기름, 들기름이다. 생산량도 적은 데다 귀했기에 볶거나 튀김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양자강(長江) 이남의 개척으로 콩 생산이 크게 늘었고 동시에 기름을 짜는 착유기술이 발전하면서 콩기름(豆油)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콩기름 이외에도 기름을 짤 수 있는 다양한 채소의 재배가 늘었으니 송나라 문헌 『송회요(宋會要)』에는 착유기로 참기름 들기름과 함께 채소에서 기름을 짰다고 나온다.   원나라 문헌인 『농서』와 『음식수지』 등에 기름을 짜는 채소인 유채(油菜)가 자주 보인다. 송나라 이후 다양한 식용유 생산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식용유 생산 소비의 증가와 함께 시장을 통한 식용유 유통도 활발했다. 남송 시대 문헌 『몽양록』에는 관청에서 유방(油坊)을 설치해 황실과 관청 등에 공급할 식용유를 수매했고 민간에서도 다수의 민영 유방이 출현했다고 나온다. 유방은 일종의 식용유 도매상 같은 기름 유통업체였으니 관청과 민간 주도의 시장에서 식용유의 거래가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덕분에 송나라에서는 다양한 튀김 요리가 만들어졌다. 북송의 수도 개봉과 남송 수도 항주의 풍경을 묘사한 『동경몽화록』과 『몽양록』에는 시장에서 파는 기름에 튀긴 떡인 유작병(油炸餠) 화화유병(花花油餠)을 비롯해 10여 종의 튀김 음식이 보인다.    튀긴 꽈배기 유탸오가 언제 생겼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유래설에서 중국 음식 문화사와 농업사, 경제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윤덕노 음식문화 저술가  더차이나칼럼  

    2024.01.12 07:00

  •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환골탈태(換骨奪胎)와 황정견

    [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환골탈태(換骨奪胎)와 황정견

    오는 4월10일 실시하는 제22대 국회의원선거가 100일 앞으로 다가온 1일 오전 부산 연제구 부산시선관위 직원들이 설치한 선거일 현황판이 현관 앞에 세워져 있다. 송봉근 기자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지구촌 많은 나라에서 한 치 앞을 예상하기 힘든 선거가 치러지는 한 해다.   여담으로, 필자는 이 연재의 첫 사자성어에 대해 한참 고민했다. 첫 사자성어는 독자분들에게 이 연재의 틀과 맛을 소개하는 그런 배역까지 떠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환골탈태(換骨奪胎)’ 이 네 글자를 선택했다.   ‘환골탈태’의 유래는 북송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송 시대라면 당송 팔대가로 잘 알려진 소동파(蘇東坡)가 먼저 떠오른다. 이 ‘환골탈태’는 그와 함께 당대를 풍미한 황정견(黃庭堅)이 시 창작 세계에 처음으로 썼다. 그는 정형시의 창작 기법을 더 세분해 묘사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본래 도가(道家)의 전문 용어인 이 말들을 빌려 간결하게 핵심을 설명했다. 남송 시대의 시 평론서 ‘냉재야화(冷齋夜話)’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환골탈태’는 환골과 탈태, 의미상 이렇게 둘로 나뉜다. ‘뼈를 바꾸다’와 ‘태를 탈취하다’, 직역하면 각각 이런 뜻이다.    ‘환골탈태’는 이처럼 시인 황정견의 심오한 인문학적 사색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이런 유래와 최초 의미는 망각된 지 오래다. 글자수와 운을 중시하던 정형시는 거의 절멸됐고, ‘환골탈태’의 본래 뜻도 우리 일상에선 이미 사어(死語)가 됐다.   최근에는 어떤 의미로 쓰일까. AI 시대라는 판도라 상자가 예상보다 일찍 열렸다. 사전적 의미를 들춰보는 것도 좋겠지만, 대표적 최근 용례들을 통해 현재 쓰임을 유추해 보는 접근법이 더 빠르고 유용하다. 대략 ‘개인이나 조직의 혁신적 변화’, 이렇게 긍정적인 어감을 뼈대로 삼으면 그 의미가 잡힌다. 참고로, 현재 중국에서는 ‘탈태환골(脫胎換骨)’ 이렇게 쓴다. 누군가의 ‘입장이나 가치관의 철저한 개선’을 의미한다. 즉, 유래와 뜻은 같으나 글자와 순서가 조금 다르다.   화제를 조금 바꿔보자. 이 ‘환골탈태’와 썩 잘 어울리는 인물로는 누가 있을까. 물론 정답은 없다. 실존했던 역사 속 인물 가운데 중국 근대 정치가이자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를 떠올려본다. ‘구유심영록(歐遊心影錄)’은 그가 서구를 방문해 현장에서 쓴 흥미진진한 책이다. 그의 책을 읽으며 필자는 한중 근대사의 아픔과 함께 이 ‘환골탈태’를 반복해서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당시 그가 목격한 성숙한 영국 의회와 태동하자마자 시들어가는 중국 의회를 비교 통찰하는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최근 회자되는 인물 중에는 혹시 누가 연상되는가. 개인이라면 잘 떠올리지 못하겠다. 만약 조직이라면 4월 총선에서 유권자의 투표로 냉정하게 평가받게 될 우리나라 거대 정당들의 현주소가 바로 머리에 스쳐간다. 각 정당은 아마도 습관처럼 이 ‘환골탈태’를 다시 소환해 어떻게든 신선하게 재활용할 방법을 나름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권자의 눈이 매우 차갑고 매서워졌다. 그들은 이 온도 차이를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획기적이고 새로운 대안은 제시할 능력조차 안 되는 자신들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하는 겸손이 우선해야 한다. ‘환골탈태’라는 가볍지 않은 이 네 글자는 그러고 나서 비로소 궁리를 시작하고 언급도 해야 순서에 맞다. 그래야 유권자가 조금이라도 그들의 진정성을 믿어보게 될 것이다. ‘환골탈태’를 일회용품으로 소모하고 싶은 유혹을 이번에는 잘 극복하길 기대한다.   홍장호 ㈜황씨홍씨 대표, 독서인 더차이나칼럼

    2024.01.09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