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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김정은은 왜 시진핑이 보낸 중국 대표단에 실망했나

중앙일보

입력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승절(6·25전쟁 정전협정 기념일)’ 70주년인 지난 27일 밤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왼쪽), 리훙중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 등과 함께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승절(6·25전쟁 정전협정 기념일)’ 70주년인 지난 27일 밤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왼쪽), 리훙중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 등과 함께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 27일 평양에서 열린 정전협정일(북한은 전승절) 기념행사에 중국의 대표단장으로 리훙중 정치국 위원을 보낸 것은 실수였을까? 우연일까?

이번 정전협정일이 70주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한 명이 참석할 만도 했다. 그런데 정치국 위원에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한국의 국회 부의장 격)이라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시진핑의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조금 서운했을 만도 하다.

김정은은 지금 북한 주민들 앞에서 체면을 살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숨 막힐 정도로 어려운 경제 사정을 해결하지 못해서인지 열병식장에서 눈물까지 보였다. 그런 그에게 절박한 것은 뭉개진 체면을 세워줄 사람이다. 시진핑이 그것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까?

리훙중은 그런 측면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리훙중은 중국 정치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고 시진핑의 충신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종교가 ‘시진핑 사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시진핑과 같은 태자당 출신으로 선전시 서기, 톈진시 서기 등을 거친 시진핑 이후 거론되는 잠룡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경력이 중국에서 통할지 모르지만, 북한 주민들에게는 아니다. 많은 설명이 필요한 사람은 김정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북한 주민에게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리훙중의 방북을 공개한 것은 중국 외교부가 아니라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다. 당 대 당 외교를 중시하는 북‧중 관계의 특수성이 드러난 대목이다. 대외연락부가 방북하는 중국 대표단장을 추천하고 시진핑이 결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이유인지 김정은은 지난 7월 28일 리훙중을 포함한 중국 대표단(8명)과 접견하는 자리에 통역만 데리고 혼자 그들을 만났다. 북한에서 중국을 상대하는 최선희 외무상이나 김성남 조선노동당 국제부장도 배석시키지 않았다. 이날 접견을 보도한 중국 신화통신사의 기사를 읽어보면 김정은-리훙중 대화는 지난 70년 동안 했던 얘기를 반복하는 수준이었다.

김정은이 실무자를 배석시키지 않은 것에 숨은 의도가 있다. 한마디로 의례적인 방북으로 판단한 것이다. 북‧중 정상회담 등 굵직한 현안을 다룰 대표단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리훙중과 함께 참석한 궈예저우 대외연락부 부부장, 쑨웨이둥 외교부 부부장, 진궈웨이 랴오닝성 부성장 등 면면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김정은-리훙중 단독회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김정은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는 단독회담을 하기도 했다. 시진핑이 류젠차오 대외연락부장을 함께 보냈으면 김정은의 태도가 달랐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정은은 혼자 그들을 상대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정은은 이번 정전협정일 행사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는 지난 7월 25일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참배했다. 이를 두고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김정은 동지가 참배한 것은 조선노동당과 정부, 인민이 중국 인민지원군의 위대한 업적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닝의 의례적인 설명에 무게를 둘 필요는 없지만, 중국은 김정은의 행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마오닝의 논평을 뒤로 하고 김정은의 참배에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대동한 사람들이다. 조용원 정치국 상무위원‧강순남 국방상‧최선희 외무상‧김성남 당 국제부장‧김여정 당 부부장 등 딱 5명이다. 북한의 군사‧안보‧외교‧통일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다.

조용원은 노동당 조직비서‧조직지도부장을 겸직할 정도로 북한의 모든 인사를 담당하고 있다. 김정은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다. 강순남과 최선희는 맡은 직책에서 그들의 역할을 알 수 있다. 김성남은 김일성‧김정일의 중국 통역을 오랫동안 맡은 중국통이다. 김여정은 남북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김정은이 이들을 데리고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능원에 간 것은 중국에 대한 각별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은이 그들에게 말하려고 한 것은 지금 북한이 쳐다볼 곳은 중국이라는 것이다. 

싫든 좋든 어쩔 수 없다는 뜻도 담겨 있다. 비록 중국에 섭섭한 점이 한둘이 아닐지라도 그러지 말라는 시그널이다.

북한은 이에 앞서 북‧중 우호의 상징인 ‘조중우의탑’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지난 6월 28일 대대적인 기념행사도 했다. 그 자리는 최용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도 북한의 주요 인사들이 많이 참석했다. 최 위원장 외에 주창일 당 선전선동부장, 전승국 내각 부총리, 임경재 도시경영상 등이 함께 했다. 북한이 중국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다. 중국은 왕야쥔 대사가 참석하는 정도였다.

이처럼 김정은은 이번 정전협정일 70주년을 맞아 다양한 방법으로 중국에 러브콜을 보냈다. 그래서 중국이 자신의 체면을 살려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가 보다.

중국은 지금 미국을 쳐다보고 있다. 북한이 아니다. 최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등의 방중으로 미‧중 관계가 겨우 숨통을 틔우고 있다. 그리고 오는 9월 인도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11월 미국에서 열리는 APEC 총회 등 대규모 국제행사를 앞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중 정상회담도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국은 북‧중 관계보다 미‧중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따라서 시진핑은 김정은의 체면에 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음이 조급하기는 김정은과 시진핑이 마찬가지다. 김정은은 중국에, 시진핑은 미국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그런 와중에 러시아가 북한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과거 김일성이 중‧소 사이에서 줄타기한 것이 재연되는 것이다. 오는 18일 미국에서 열리는 한미일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9월부터 큰 국제행사 속에서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질 전망이다. 이런 큰 흐름이 한반도에 새로운 변화가 오려나.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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