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에 휘감기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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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호 23면

낡은 오선지 위에 희미하게 그려진 음표들. 그 위에 ‘아리에타(Arietta)’란 이름과 손으로 휘갈겨 쓴 듯한 짧은 문장이 눈에 띈다. 맨 아래에는 현악4중주를 뜻하는 콰르텟(Quartet)이 적혀 있다. 클래식 악보와 와인,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김혁의 레이블로 마시는 와인 <4> 아리에타(Arietta)

이 악보 레이블의 주인공은 아리에타. 클래식을 좀 아는 사람이면 어렵지 않게 들어본 이름이다. 와인에 이 이름을 끌어들인 사람은 나파의 유명 와인 경매사인 프리츠 해튼. 예일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다시 같은 대학에서 MBA를 한 그는 크리스티 와인 경매에 오랫동안 몸담으면서 경험과 실력을 쌓았다. 취미는 클래식 연주인데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는 수준급의 실력을 갖췄다. 이런 재능이 있는 그의 꿈은 자신만의 와인을 만드는 것이었으니, 1998년 나파에 아리에타를 설립함으로써 꿈은 이루어졌다.

해튼의 와인 만들기 프로젝트는 경매 일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컬트 와인메이커 존 콩스가드와 함께 1995년 시작됐다. 하지만 서로 각자의 분야에서 20년 이상 활동한 전문가였기 때문에 둘 다 만족하는 레이블을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1년 이상 결론을 내지 못하던 어느 날, 해튼은 존과의 저녁식사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가게 됐다. 달리는 차 안에서 부인 카렌이 해튼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두 사람 모두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나요? 이 점을 활용해 보면 어때요?”

해튼은 바로 자신이 갖고 있던 악보를 펼쳤고 베토벤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악장(Opus111)의 첫 페이지에 써 있는 ‘아리에타(Arietta)’를 발견했다. 해튼에게는 그동안의 수많은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낸 ‘유레카’의 순간이었다.

존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수많은 안을 비교해 보았지만 ‘아리에타’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레이블 제작은 급물살을 탔다. 해튼은 베를린 도서관에서 구한 베토벤의 원본 악장 카피를 레이블 디자이너 토니 오스톤에게 넘겼다.

이렇게 제작된 레이블은 2008년 빈티지까지 사용됐다. 그 후 몬다비 와인을 10년 이상 디자인한 캐세이 암스트롱에 의해 업그레이드됐다. 현재 미국 최고의 컬트와인 스크리밍 이글의 현직 와인 메이커 앤디 에릭슨이 양조 책임을 맡고 있다.

음악 용어로 아리에타는 ‘작은 아리아’ 또는 ‘예술 노래’를 의미한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18, 19세기에는 자주 사용하던 용어였다. 악보 위에 글은 베토벤이 직접 쓴 것이다. ‘아리에타: 아주 천천히, 간결하게, 그리고 풍부하고 아름답게(Arietta: Adagio molto semplice e cantabile)’라는 의미다.
해튼은 여러 시리즈의 와인을 만들었다. 이 중 콰르텟은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카베르네 프랑, 프티 베르도의 4개 품종을 사용해 보르도 명품 스타일로 만든 와인이다. 풍부한 과일 향과 식감, 그리고 절제된 맛으로 깊이를 더한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곡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곡을 들으며 느꼈던 감정을 아리에타 와인을 마시면서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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