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안동은 이야기 창고 … 골목길에 콘텐트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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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 소양로 서부시장 골목. 1970년대까지 번화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쇠락했다. 이곳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보다 창의적인 개발이 필요하다. [사진 휴머니스트]

지난 7년간 틈만 나면 전국의 지방도시를 누비고 다녔다. 어디로 갈지 일단 정하고 나면 무작정 그 도시의 이 골목 저 골목을 걸어 다녔다.

  그는 그 기나긴 여정을 이런 말로 압축했다. “그것은 감흥과 감동을 넘어선 호사였다”고. 지방도시 순례기 『오래된 도시의 골목길을 걷다』를 낸 건축학자 한필원 교수(51·한남대 건축학과) 얘기다.

 이 책에는 그가 7년간 답사한 곳 중에서 고른 도시 9곳 이야기가 실렸다. 구체적으로 나주·강경·통영·춘천·밀양·전주·안동·안성·충주다. 그는 철저히 ‘현장 중심’ 원칙을 지켰다. 우리 도시가 들려주는 옛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미래 도시를 위한 제언까지 곁들였다. 근래 나온 건축 관련 서적 가운데 돋보이는 수작이다.

우리 지방도시는 어떻게 키워가야 할까. 건축학자 한필원 교수는 “역사도시는 경쟁력 있는 문화 콘텐트다. 전국에 똑같이 생긴 아파트만 짓지 말고 곳곳의 조건에 맞는 주거 유형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안성식 기자]

 - 오래된 도시의 매력이 뭔가.

 “이런 도시들은 단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오랜 시간 자연의 섭리에 따라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언뜻 보면 비뚤배뚤하고, 휘어져 있는 길들이 많고, 또 어수선해 보이지만 그런 공간에 고유의 질서가 있다.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하고 찾아보면 본래 있었던 강줄기, 등고선 등 지형과 장소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읽힌다. 시간의 켜를 볼 수 있고, 살아있는 생활의 감흥을 느낄 수 있다. 밋밋하게 계획되고 확장된 신시가지에서 볼 수 없는 매력이다.”

 - 9개 도시는 어떻게 선정했나.

 “나름 세 가지 기준이 있었다. 첫째 역사가 길 것, 둘째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작은 도심부를 가지고 있을 것, 셋째 현대도시로서의 매력과 잠재력이 클 것이다.”

 - 옛 도시에 어떤 잠재력이 있나.

 “각 지역의 고유문화가 아직 남아 있다. 대도시는 이제 ‘답’이 아니다. 앞으로는 좀더 다양하고, 작은 규모의 공동체적인 작은 도시가 부상할 것이다.”

 - 골목과 주거지를 주목했다.

 “불규칙해 보이지만 도시를 다양하고 변화무쌍하게 만들어주는 게 골목과 주거지다. 지역의 자연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동네를 촘촘히 짜주는 골목은 도시의 공(公)적인 공간과 주택이라는 사(私)적인 공간을 이어주는 ‘사이공간’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한 교수에 따르면 나주와 안동은 “도시 공간 자체가 역사책이자 이야기 창고”다. 나주에서는 특히 나주천의 매력을 꼽았다. 도시 규모에 비해 넓지도 좁지도 않아 바라보기만 해도 친근감이 느껴진단다. 또 안동은 ‘막다른 골목의 도시’다. 춘천은 명동길, 브라운 5번가 등 획일적이지 않은 가로에 각별한 매력이 있다고 했다.

 도시의 특성을 살리는 방법도 제안했다. 전주는 한옥형 전시관을 더이상 짓지 말고, 밀양은 관아 복원 사업보다 밀양강 등 자연을 다시 도시로 끌어들이는데 힘써야 하며, 강경은 젓갈만 팔지 말고 옛 도심의 고유한 매력에 힘주어 쇼핑객을 도시 체험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통영에 대해서는 ‘오감의 도시’를 자동차가 위협하고 있다며 조금 느린 도시, 조금 불편한 도시를 만드는 게 살 길이라고 덧붙였다.

 - 복고지향적 주장은 아닐지….

 “역사도시를 동결시키자는 얘기가 아니다. 도시에 남은 일상의 흔적을 무시하고 이른바 지배권력의 유산만 복원하는 개발, 무조건 고층만 지으려 하는 미국식 재개발을 경계하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는 유행처럼 번지는 지방도시들의 콘텐트 찾기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지방마다 똑같이 문화의 거리 만들기와 관아 복원에 매달린다. 시멘트 기차역 지붕에 기와를 얹으면 역사도시가 되는 줄 안다. 정작 그 도시가 깔고 있는 보석을 보지 못하고 있다. 도시공간의 세밀한 조직과 그 안에 배어든 역사가 콘텐트다. 콘텐트는 이미 도시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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