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무한도전은 예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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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지난 1월 말부터 170일간 이어진 MBC 파업의 상징은 뉴스도, 드라마도 아니었다. 간판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었다. 김태호 PD의 파업 참여로 MBC 예능 중 유일하게 무한도전만 결방돼 재방송이 계속되자 금단 증세를 호소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무한도전이 시작되는 토요일 오후 6시25분이면 가족과 함께 TV 앞에 앉았던 나도 허전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재미를 만끽하게 된 요즘, 무한도전이 위기다. 오는 11월로 예정됐던 ‘슈퍼(Super) 7 콘서트’ 취소 때문이다. 이 콘서트는 파업 기간 중 무한도전 멤버들이 팬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준비했다고 한다. 역풍이 불기 시작한 건 지난주였다. VIP석 가격이 13만2000원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돈독이 올랐느냐”는 비난이 고개를 들었다.

 주최 측은 티켓 가격을 최대 9만9000원으로 낮췄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콘서트가 취소됐고, 공연을 기획한 그룹 ‘리쌍’의 길과 개리는 예능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길은 “대한민국 최고의 블록버스터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수익금을 기부할 계획이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인터넷엔 다시 “무한도전이 봉사단체냐” “공짜 공연을 바라는 건 거지근성”이라며 길과 개리의 복귀를 바라는 글이 빗발치고 있다.

 이번 논란엔 한국 사회의 모습이 응축돼 있다.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가 반대쪽으로 방향을 트는 ‘극단적 쏠림’ 현상이 재현된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은 팬들이 무한도전을 ‘예능 이상의 예능’으로 봤다는 데 있는 듯하다. 그간 무한도전은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 ‘나름 가수다’와 같은 무료 콘서트를 열어 왔다. 음원 판매 수익금은 전액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했다. 프로그램을 통해 제작된 달력의 판매 수익도 기부했다.

 무한도전의 크고 작은 활동은 예능의 사회적 의미를 확장시켜 온 게 사실이다. 역으로 그런 공익적 이미지가 유료 콘서트를 기대에 거스르는 행동으로 비치게 한 것이다. 비슷한 시비가 과거에도 있었다. 2009년 7월 가수 윤종신이 무한도전의 ‘올림픽대로 듀엣가요제’에서 발표했던 ‘영계백숙’의 리믹스 버전 음원을 유료 공개하자 “돈벌레냐”는 댓글이 쇄도했다. 얼마 후 윤종신은 “생각이 짧았다. 수익금을 무한도전 측에 전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무한도전은 사회공헌 프로그램이 아니고, 출연진도 사회사업가들이 아니다. 설사 콘서트나 음원 판매 수익금을 멤버들이, 출연자들이 나눠 갖는다 해도 비난할 일은 아니다. ‘노동엔 대가가 따른다’는 건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룰이다. 물론 콘서트 수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면 칭찬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왜 무료 콘서트를 하지 않느냐고, 왜 수익금을 기부하지 않느냐고 몰아붙이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선행은 자유의지에 맡겨질 때 빛이 나는 법이다.

 예능 프로그램들이 일부 암환자에겐 통증 완화제 기능을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디 그들뿐이랴. 생활고에 쩔쩔매는 가족,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 입시지옥에 빠진 수험생…. 예능의 역할은 도무지 웃을 일 없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잘 만든 예능 하나가 웬만한 시사 프로그램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앵그리 버드(angry bird) 수를 줄여주고 살벌한 세상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만연한 사회는 살기 힘든 사회다. 나의 당위를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는 위험하다. 더구나 올바름의 경계를 넘나들며 숨통을 트여주는 예능과 연예인에게 바로 그 잣대를 대려고 해서도, 사회적 책임을 들이밀어서도 안 된다. 유재석, 박명수, 정준하, 정형돈, 노홍철, 하하, 그리고 길. 이 일곱 남자의 무한도전이 중단돼야 한다면 그 이유는 딱 하나다. 더 이상 웃음을 주지 못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