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책임총리제의 성립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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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1987년 민주화 이래 대선에 나선 주요 후보들은 자신이 집권하면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문재인 민주당 후보는 그제 후보수락연설에서 “대통령이 되면 오로지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한만을 행사하겠다. 책임총리제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겠다”고 강조했다. 새누리당에선 어제 정치쇄신특위가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기 위해 헌법상 총리의 권한을 보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선을 90여 일 앞둔 시기에 제1, 2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책임총리제를 제시한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책임총리제는 대선을 앞둔 선심성 공약에 불과했다. 집권 전 권력을 나누겠다는 후보들의 약속은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나면 휴지조각처럼 찢겨졌다. 권력은 둘로 쪼개지지 않는다는 권력의 내재적 속성 때문이기도 하고, 집권에 눈 먼 후보들이 책임총리제의 조건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 성급히 제안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후보의 책임총리제는 다분히 안철수 교수를 야권후보 단일화의 프레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치공학적 의도를 담고 있다. 지지율 상승과 민주당 간판의 이점을 가진 문 후보는 안 교수의 통 큰 양보를 기대하고 있는데, 양보의 대가로 실질적 권한과 영향력이 보장된 총리 자리를 안 교수를 위해 준비하겠다는 제안을 한 셈이다. 문 후보와 안 교수의 후보단일화는 박근혜 후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다. 그러기에 박 후보 측은 야권후보 단일화 프레임을 무력화하고, 이를 위해 안 교수를 위한 자리를 끝까지 남겨두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정치공학적 의도를 갖고 접근한 책임총리제는 언제나 실패했다는 점이다.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는 충청권 표를 얻기 위해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내각제·공동정부·책임총리 협약을 맺어 집권에 성공했으나 2년도 안 지나 맹약(盟約)은 깨지고, 정치권과 정부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2004~2006년 노무현 대통령 시대의 이해찬 국무총리를 책임총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총리직 삭탈권이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속해 있은 데다 장관에 대해 제청·해임권을 행사했다기보다 그저 상당한 재량권을 누린 정도여서 책임총리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결국 책임총리제가 성립하려면 대통령의 선한 의도에 기대선 안 되고 총리의 권한과 책임을 보장하는 법·제도적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새누리당이나 민주당의 당헌·당규나 대선공약에 ‘대통령이 속한 정당의 대표가 국무총리를 겸한다’ 같은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다. 실현되기만 하면 한국의 정치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울러 ‘총리의 임면, 권한과 책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수도 있다. 고위 공무원 인사를 검증하는 중앙인사위를 총리 산하로 두는 등 헌법상 총리에게 보장된 고유한 권한을 법률로 구체화하는 것인데 책임총리제의 중대한 진전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