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사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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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정치국제부문 차장

사과(謝過)의 계절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사과하고 여야 대선 주자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과한다. 진정한 사과일까 의문이 들 정도로 빈번하다. 그래서 5년 전 논문을 꺼내 들었다. 서울대 이귀혜 박사의 ‘한국 대통령의 정치적 위기 상황에 대한 방어메시지의 수사전략 연구’다. 노태우 대통령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의 사과를 분석한 거다.

 몇 가지 사과 전략이 추출되긴 했다. 우선 ‘굴욕 감수’다. 사과·사죄·송구란 단어를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사과한다고 거듭 강조하거나 유사한, 그러면서도 절절한 문구를 동원했다. “국민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다. 대통령인 제 책임이다. 제 불찰이다”(YS)라고 말하는 게 그 예다. 급기야 “번번이 하는 사과, 말로 끝나는 사과, 그 뒤에는 달라지지 않는 정치로 국민 여러분이 사과 받기에 지치고 짜증이 날지도 모르겠다”(노무현)며 사과하는 데 대해 사과하는 경지까지 나아갔다. 반면 “감정이 있다는 뜻이냐”고 되치기 당할 우려가 있는 ‘유감’은 자제했다.

 선의(善意)를 주장하거나 시정(是正) 약속을 하는 것도 요령이었다. “무한히 참고 고통을 겪으며 국민적 합의를 구해왔다”(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챙겨서 해결하겠다”(DJ)는 식이다. 때론 “더한 위기가 있다”고 이슈를 초월하기도 했다. 이런 전략, 지금도 통용된다. 이 대통령의 최근 사과문만 봐도 알 수 있다. 두 차례 ‘사과한다’고 했다. “이제 와 누구를 탓하겠는가. 모두가 제 불찰이다. 어떤 질책도 달게 받겠다”는 ‘변주’도 넣었다. 전 재산을 기부하는 등 깨끗한 정치를 위해 노력했다는 선의도, 경제위기란 점도 부각했다.

 대선 주자들도 사과의 수사학에선 이미 대통령급이라 할 수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유신에 대해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깊이 사과 드린다. 자유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도록 제가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했다. 굴욕 감수와 시정 약속 전략인 거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도 노무현 대통령의 가족 비리에 대해 “무한 책임이 있다”며 5년 내내 부패와의 전쟁을 치르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기술이다.

 사과 테크닉에선 안철수 서울대 교수도 장내 주자 반열이다. 2003년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구속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위해 탄원서를 낸 사실이 알려지자 4시간여 만에 사실상 사과문을 냈다. ‘인정(人情)’이란 단어로 선의도 강조했다. 이런 사과가 통했을까. 역대 대통령의 경우엔 효험이 있긴 했다. 이귀혜 박사는 “사과 발표 이후 해당 위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다른 이슈로 전환하는 게 가능했던 게 우리 문화”라고 분석했다. 이 대통령이 현재 누리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진정성이 있었느냐는 그러나 별개의 문제다. 돌아보면 대체로 아니올시다 쪽이다. 사과하는 걸 사과한 대통령은 그 후로도 무수히 사과했다.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던 대통령은 지금 그 아들에게 의원 배지를 달아주려고 애면글면한다. 아들 비리에 고개를 들 수 없다던 대통령은 자서전에 “아들의 억울함을 나중에 알았다. 검찰이 지는 권력을 향해 비수를 겨눴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대선 주자들은? 애매하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박근혜 후보는 그보다 ‘작은’ 당내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의심받고 있다. 참여정부의 공과를 계승하겠다면서도 “5년 전 참여정부가 무능하다는 프레임에 빠져 참담하게 패배한 것”이란 문재인 후보의 인식 괴리는 또 어떤가. 안 교수는 경제사범에 대해 “한 번 잡히면 반을 죽여놓아야 한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최태원 회장에 대한 인정을 보면 그간 교유(交遊)한 재벌 2, 3세는 예외로 여기는 건지 걱정을 사고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묻고 또 묻는 거다. 국민이 진정 주시하고 바로잡길 바라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사과했으니 된 거 아니냐고 아량을 베풀 일이 아니란 얘기다. 특히 대선 주자에겐 말이다. 대통령 후보 시절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하나하나가 나중 불씨가 될 수 있어서다. 지금이 그나마 국민 얘기를 귀 기울이는 시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