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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선풍기, 에어컨, 그 다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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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도톤보리는 일본 오사카의 이름난 맛집 거리다. 이곳은 입만 아니라 눈도 즐겁다. 초밥을 쥔 커다란 손을 달아놓은 회전초밥집, 가게 이름에 나오는 용(龍)을 대형 모형으로 내건 라면집 등 맛집마다 키치 취향을 자랑하는 간판이 큰 볼거리다. 특히 게요리 전문점 ‘가니도라쿠’의 움직이는 게 다리 간판, 과자회사 ‘구리코’의 두 손 번쩍 들고 달리는 육상선수 광고판은 반세기도 전부터 이곳에 등장한 북 치는 피에로 모형과 함께 오사카의 명물로 꼽힌다.

 몇 년 만에 최근 도톤보리를 다시 찾았다. 좀 달라진 게 있다. 우선 ‘가니도라쿠’의 게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옆에 ‘절전 협력 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런 분위기는 인근 고급 쇼핑몰에서도 감지된다. 화장실의 핸드 드라이어를 절전 안내문으로 막아놓았다. 따져보면 생색내기다. 절전이라면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밤을 환히 밝히는 ‘구리코’ 같은 조명 광고판의 불부터 끄는 것이다. 실은 이 광고판도 한동안 불이 꺼졌다고 한다. 지난해 3·11 대지진과 원전사고 직후 전력 부족에 대비해서였다. 이후 한 달쯤 뒤 ‘모두에게 미소를 보내고 싶다’는 문구와 함께 다시 불이 켜졌다. 도톤보리의 얼굴 격인 ‘구리코’마저 컴컴하면 분위기가 위축된다는 우려를 반영한 셈이다.

 일본의 절전 열기는 오히려 이렇다 할 안내문이 없는 곳에서 실감했다. 음식점·찻집·은행·백화점·지하철 등 어디를 들어가도 도무지 ‘시원하다’는 탄성이 나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요즘 일본의 권장 실내온도는 28도다. 서울에서 그랬듯, 냉방이 강하면 입으려고 얇은 긴팔을 들고 다녔지만 무용지물이다. 대신 반가운 걸 만났다. 전자제품 매장에서 나눠주는 홍보용 부채다. 냉큼 받아들고 보니 놀랍다. 부채바람이 이렇게 시원했나 싶다.

 예전에 우리네 어른들은 선풍기를 두고도 부채에 먼저 손이 갔다. 덥다고 대뜸 선풍기부터 켜는 건 경망스러운 사치였다. 에어컨이 널리 쓰이면서 사치의 기준은 달라졌다. 식당이나 백화점에 들어서면 순식간에 땀이 식을 정도는 돼야 제대로 대접받는 기분이 났다. 그런 사치가 일상이 되는 게 경제발전인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발전소 하나 더 짓는데 원자력이든 수력이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드는 시대다.

 문득 옛사람들이 부럽다. 에어컨 없이도 그늘에서 탁족하며 여름을 나는 여유는 현대인에게는 그야말로 누리기 쉽지 않은 사치요, 호사다. 게다가 기후는 갈수록 가혹해진다. 긴긴 열대야를 부채 한 장으로 버틸 도리가 없다. 말이 난 김에 더한 사치를 생각해 본다.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면서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건물과 시설로 도시를 재단장하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발전소 하나 짓는 것보다 더 돈이 들 터다. 인류의 미래, 아니 일본의 지금을 보면 이런 사치를 진지하게 생각할 날이 아주 멀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