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고립된 청와대가 걱정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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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두 달 전쯤 청와대는 비공개로 ‘홈 커밍 데이’를 했다. 청와대 선임행정관 이상 출신들이 모인 자리였다. 여기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강한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서울시장 때도 마지막 날 저녁까지 일하고 나왔다”며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레임덕은 없다”고 자신했다. 측근 비서 출신의 모임인 만큼 대선관리나 정권재창출 같은 은밀한 정치 이야기가 나오리라는 참석자들의 기대는 빗나갔다. MB는 오로지 “일로 승부를 보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요즘 청와대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이상득 전 의원의 구속도 큰 충격이지만 어느 정도 예상해온 터였다. 더 뼈아픈 심리적 타격은 ‘문고리 권력’인 김희중 제1부속실장의 금품수수 의혹인 모양이다. 15년간 MB 곁을 지킨 그는 누구보다 조용하고 신중하게 처신했다. 청와대 바깥 인사들은 거의 만나지도 않았다. 그런 김 실장이 저축은행 돈을 받았다고 하자, 청와대 내부에서 “믿을 사람 없다”며 한숨이 터져 나온다. 문구까지 모두 손질한 MB의 대(對)국민 사과도 자꾸 미뤄지고 있다. 언제 무슨 일이 또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직이 뒤숭숭해지면 조직원부터 흩어지기 마련이다. 정무수석실은 한때 15~16명에 이르다가 벌써 5명이나 빠져나갔다. 빈자리는 충원할 엄두조차 못 낸다. 정무수석실 측은 “손발이 다 잘린 형편”이라며 “지금은 상황 보고만 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공무원 출신의 일반직 청와대 비서들도 마찬가지다. 서둘러 친정 부서에 복귀하거나 앞다투어 해외 파견근무를 희망하고 있다. 다음 정권에 대비해 미리 경력 세탁에 나선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대목은 MB가 집중적으로 경제를 챙긴다는 점이다. 최근 MB가 가장 자주 찾는 사람은 김대기 경제수석이라 한다. 유럽 재정위기에다 중국 경제 하강으로 한국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수출·설비투자·민간 소비가 곤두박질하면서 3% 성장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판이다. 가계부채와 부동산에도 불안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경제위기가 더 이상 예측의 영역이 아니라 대응의 영역에 다가선 것이다. 그 분명한 신호가 지난주 한국은행의 기습적인 기준금리 인하다.

 청와대의 위기의식과 달리 대선을 앞둔 여의도 정치권은 딴판이다. 청와대나 경제부처 장관이 입만 벙긋하면 매질부터 하고 본다. 여야 가리지 않고 MB와의 차별화에 목숨을 건 느낌이다. 하지만 세계 경제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돈을 퍼붓고 금리를 내린 수습책은 결국 당의정(糖衣錠)에 지나지 않았다. 빈털터리인 소비자, 턱없이 많은 부채, 금고가 바닥난 정부가 여전히 세계 경제를 괴롭힌다. 전 세계가 상당 기간 ‘경제 살리기’는커녕 ‘경제 지키기’도 힘겨울 판이다. 하지만 우리 정치권만 유독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놓고 난타전을 벌인다. 때로는 싸움도 사치다.

 한은의 금리 인하에 외신들은 “한국마저 어렵다면 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에 재앙”이라고 법석을 떨었다. 그만큼 우리 경제가 상대적으로 건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삼성전자·현대차의 독주가 만들어낸 신기루일지 모른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조심스럽게 “일단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 할 때”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명사수의 첫째 조건은 표적이 사정권 내에 들어오길 기다리는 일이다. 재정·금융수단을 최대한 아낀 뒤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집중포화를 퍼붓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하지만 자꾸 청와대가 고립되어 가는 게 걱정스럽다. 과거 경제위기도 예외 없이 레임덕 시기에 찾아왔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국민과 정부·기업이 똘똘 뭉쳐야 하는데 보통 일이 아니다. 그나마 좋은 뉴스라면 MB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한 경험을 가졌다는 점이고, 나쁜 뉴스는 MB가 너무 힘이 빠졌다는 사실이다. 정권비리는 가차없이 파헤쳐도, 경제 쪽은 MB에 힘을 모아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여야가 주문하는 대책보다 MB 정부의 처방전이 훨씬 현실적으로 보인다. 지금 전 세계는 경제 전쟁 중이다. 전쟁과 그림은 멀리 떨어져 보라 했다. 그런데 우리는 내전(內戰)으로 치명상을 자초하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