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가스관이 북한 거쳐야 할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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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태유
서울대 교수·경제학

지난해 한국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남·북·러 가스관 건설을 위한 양해각서(MOU)에 관해 ‘기대’와 ‘우려’가 교차해 왔다. 최근 중국 측에서 북한 대신 중국을 경유하는 서해 해저 가스관 건설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연이은 도발로 골치를 썩이는 마당에 중국 경유 가스관은 일단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러시아 가스관이 꼭 북한을 경유해야 할 7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 6자회담이 답보 상태에 있는 근본 원인은 세력 균형 때문이다. 가스관으로 러시아가 직접 이해 당사자가 되면 한반도의 안정 쪽에 더 무게가 실리게 된다. 추가로 가스관을 일본까지 연결해 이해 당사자로 만든다면,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는 보험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둘째, 가스관은 마치 강물과도 같다. 나일 강, 유프라테스 강, 메콩 강, 요르단 강 등 물 분쟁에서도 승자는 상류국 또는 강대국이었다. 강대국 중국을 상류 소비국으로 둔 가스관을 건설하게 되면 러시아 가스 공급이 중국 수요에 못 미칠 경우에는 우리 몫이 보장되지 않는다. 러시아 가스관을 하류의 일본까지 연장해도 좋은 것 또한 같은 이유다.

 셋째, 가스관은 일단 건설되고 나면 안정적인 공급을 보장받을 수 있다. LNG 운반선은 행선지를 바꿀 수 있지만 가스관은 거대한 투자비 때문에 소비처 변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스관의 건설로 한국이 준 산유국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가스관이 중국을 경유하면 상류에 위치한 강대국 중국에 우선권을 빼앗기게 된다.

 넷째, 러시아는 시베리아에 한국이 200년 쓸 수 있는 10조㎥의 가스와 석유, 전력 등 주요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 모든 자원을 수입한다. 다른 한편 러시아의 주 수입 품목은 자동차·ICT 통신기기·합성수지 등이다. 그러나 이 모든 품목에서 한국이 수출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한·러 경제협력은 윈윈이 보장되는 최적의 궁합인 셈이다. 가스관은 경제 전반에 걸친 포괄적인 한·러 경협의 물꼬를 트는 뇌관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북한은 러시아 가스관을 손상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 금강산 자산 동결,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어떤 도발도 중국이나 러시아의 이해와 직결된 것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가스관 분쟁은 주변의 10개 독립국가연합(CIS)과 NATO국들 사이에서 가능했다. 고립무원의 북한으로서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다.

 여섯째, 통일을 대비해 북한 경제를 회생시키려면 우선 에너지를 공급해야 하는데, 1억 달러 이상의 가스관 통과료는 중국에 지급하고 따로 경유를 사다 주는 중복부담을 자초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게다가 기체연료라서 전쟁물자로 전용이 불가능한 가스를 주는 것이 경유보다는 훨씬 안전하다.

 일곱째, 중국은 해묵은 국경분쟁, 일본은 북방 4개 섬(남쿠릴열도) 반환문제 등의 역사적 갈등 때문에 러시아와 천연가스 협상에 어려움이 있다. 비록 한국이 러시아가 선호하는 상대라 해도 현금 확보가 급한 러시아가 언제까지나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북극항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남방항로 대비 아시아와 유럽 간 거리는 40%, 비용은 25%나 절감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제 한반도가 거점항구들을 보유한 세계물류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물류를 움직이는 동력을 한·러 가스관이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눈을 들어 원대한 미래를 내다볼 때다. 러시아 가스관 사업은 일개 공기업이나 부처 실무자가 추진하기에는 버거운, 너무나도 중요한 국가 백년대계다. 통치권 차원에서 중지를 모아 범정부적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

김태유 서울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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