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의 칼럼] “치매 인줄 알았는데 …” 초점 없는 눈도 뇌전증 증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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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건 서울대 의대 신경과 교수

진료실에 50~60대로 보이는 아버지와 대학생 딸이 찾아왔다. 딸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얼마 전부터 아버지가 식사를 하다가 멍하니 정신을 놓고, 가끔 눈동자 초점이 흐려지곤 하세요. 치매인 줄 알고 병원을 찾았는데 간질일 수 있다고 해서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검사 결과 환자는 뇌전증(간질)이 확실했다.

 간질로 더 잘 알려진 뇌전증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은 낯선 병이다. 일시적으로 뇌세포에 무질서한 전기현상이 생겨 발작이 일어나는 병이다. 예전에는 ‘귀신 들린 병’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주변의 차가운 시선이 따랐다. 사회적 편견을 없애기 위해 2010년 병명이 개정(간질→뇌전증)됐지만 여전히 편견의 벽은 높다. 현대 의학이 발달돼 노인성 치매를 앓는 환자와 보호자도 질환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사정을 드러내지만 뇌전증 환자와 보호자는 여전히 병을 숨기기에 바쁘다.

 뇌전증에 대한 편견은 증상이 부풀려지고 잘못 알려져 생겼다. 흔히 발작이라고 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의식을 잃는 상태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린이가 아닌 성인이라면 눈에 초점이 흐려지고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는 등의 부분 발작이 대부분이다.

 국내 뇌전증 유병률은 1~1.5%다. 하지만 실제 환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편견 때문에 뇌전증을 앓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않은 환자도 많고, 부분 발작을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겨 방치한 탓이다.

 뇌전증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나이가 들면 나타나는 뇌혈관 질환이 주된 원인이다. 발작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므로 주기적인 약물 복용으로 발작을 제어해 일상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발작이 운전 중이나 야외 활동 중에 발생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약물 치료로 발작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10명 중 3명은 기존 약물 복용으로 발작이 제어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다. 한 연구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의 절반 이상이 발작을 제어하기 위해 최소 4종류의 약물을 복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발작만 통제되면 일상생활이 충분히 가능하므로 기존 약물로 발작이 제어되지 않은 환자는 새로운 치료제에 대한 기대가 크다.

 최근 부작용을 줄이고 발작 제어 효과를 높인 약물이 개발됐다. 얼마 전부터 국내에 도입돼 환자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환자가 혜택을 누리기 어렵다.

 뇌전증 환자는 한 집안의 가장이고 딸이고 아들이며, 우리 사회의 이웃이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길 바란다. 뇌전증 환자 또한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치료받아 행복한 일상을 누리도록 사회가 함께 노력했으면 한다.

이상건 서울대 의대 신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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