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 사랑의 길 '어느 프랑스 대위의 연인'

중앙일보

입력

1981년
감독: 카렐 라이츠
출연: 제레미 아이언스, 메릴 스트립

극히 자의식적인 내러티브 구조로 인해 존 파울즈의 소설 〈어느 프랑스 대위의 연인(The French Lieutenant's Woman)〉은 그 구조 자체가 ‘느슨하고 헐렁한 괴물’, 또는 일종의 ‘미로’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이 말은 이 소설을 스크린 위에 한 번 풀어 내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프랑스 대위의 연인〉을 영화화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다가왔던 것처럼 보인다.

프레드 진네만, 리차드 레스터, 마이크 니콜스, 시드니 폴락, 린제이 앤더슨 등 적지 않은 재능있는 영화 감독들이 파울즈의 정교한 소설에 매혹되었지만 그들 중 아무도 〈어느 프랑스 대위의 연인〉의 복잡 미묘함을 실제로 정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 소설의 영화적 ‘번역’은 영국 프리 시네마 운동의 대표 주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카렐 라이츠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이 작업에는 각색 작업을 해낸 이의 공이 매우 컸는데, 그 일을 수행한 것은 영국의 저명한 극작가 해롤드 핀터였다. 유능한 각색자 핀터는 먼저 파울즈의 소설에서 풍부한 힘을 차지하던 화자(話者)를 제거해 버렸다. 대신에 실제로 보이는 인물을 그 자리에 들여놓았다. 어떤 허구적인 이야기 옆에 그 픽션 속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이야기를 덧붙여 놓은 것이다. 그래서 화면 밖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배우들이, 그들의 존재가 픽션 속의 인물들에 대해 논평을 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영화 〈어느 프랑스 대위의 연인〉은 두 개의 이야기를 병렬해 놓는 식의 영화가 되었다.

먼저 우리는 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접하게 된다. 점잖은 아마추어 과학자인 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부유한 사업가의 딸인 어네스티나(린지 백스터)와 약혼한 사이이다. 찰스는 날마다 바다를 바라보는 한 여인을 알게 되는데, 그 여인 사라(메릴 스트립)는 자신을 떠나버린 한 프랑스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마을에서 “프랑스 대위의 창녀”라 불리던 사라에게 과학자 특유의 호기심을 보이는 찰스. 그 호기심은 곧 열정으로 바뀌고, 그로 인해 찰스는 파멸의 궁지에 몰리게 된다.

영화를 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만 이 이야기는 ‘영화 속의 영화’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 픽션의 세계로부터 한 발짝 빠져나오면 찰스와 사라라는 영화 속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 마이크(아이언스)와 안나(스트립)가 있다. 현재 세계에 속한 이들 두 배우도 자신들이 영화 속에서 연기하는 캐릭터들처럼 서로 불륜 관계로 얽혀 있는 상태다.

〈어느 프랑스 대위의 연인〉은 이처럼 ‘영화 속 영화’의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를 꼬아 놓은 이중의 스토리 구조를 취하기 때문에 꽤 복잡한 영화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따져보면 난해하다고 할 만한 영화는 절대 아니다. 여기에 담긴 두 가지 이야기는 기본적으로는 상이한 배경에 놓인 동일한(보편적인) 러브스토리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이 이 영화에서 먼저 고려할 문제는 아마 두 이야기가 서로 얼마나 다르고 또 유사한지 비교하는 것일 게다.

두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거의 동일한 경로를 밟아간다. 열정이 있고, 배신이 있으며, 그리고 상실이 찾아온다. 그 결과만이 완전히 상이하게 보일 뿐이다. 현재의 마이크는 결국 안나로부터 버림을 받지만, 19세기의 찰스는 그를 버린 줄만 알았던 사라로부터 미심쩍게도(!) 사랑의 보상을 받는다.

이러한 결말에 이르면 의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과연 사라는 진정으로 찰스를 받아들인 것일까? 두 이야기가 보여주는 이처럼 다른 결말은 두 시대에 대한 코멘트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의 소치일 뿐일까? 이런 질문이 결코 우문(愚問)이 아닌 것은, 영화에서는 시종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이야기를 ‘봉합’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지만, 관객에게 뭔가 속 깊은 질문을 던지는 데 있어서는 그 둘을 ‘결합’하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영화가 지탱하는 이중의 스토리 구조는 맵시있고 품격있어 보이는 반면, 그것의 확실치 않은 존재 이유때문에 공허함을 남긴다.

카렐 라이츠 감독(Karel Reisz, 1926 - )

〈어느 프랑스 대위의 연인〉을 연출한 카렐 라이츠는 린제이 앤더슨, 토니 리차드슨과 함께 1950년대 영국 프리 시네마(Free Cinema) 운동의 창시자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체코에서 태어난 라이츠는 12살 때 나치의 박해를 피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그의 가족은 몰살당했는데, 라이츠는 자기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50년대에 라이츠가 처음 영화와 관련되었을 때 그가 한 일은 주로 영화 평론을 쓰는 것이었다.

〈사이트 앤 사운드〉와 〈시퀀스〉 같은 잡지가 그가 활동하던 주요 무대들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53년에《영화 편집의 기법》(개빈 밀러와 공저)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나온 이 책은 편집의 역사와 이론, 실제를 다룬 역저(力著)로 평가받고 있다.

50년대 중반부터 단편 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오던 라이츠는 60년에 첫 장편 영화를 내놓는다. 영국 노동자 계급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은 영국 영화의 얼굴을 바꾸어놓았다는 평을 받았다. 이 영화는 라이츠의 데뷔작이면서 또한 대표작이기도 하다.

이후 영국에서 몇 편의 영화를 만든 후 할리우드에서 경력을 이어나가기도 했지만, 그의 이후 필모그래피는 듬성듬성한 편이고 또 화려한 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라이츠의 또 다른 대표작들로는 〈모건!〉(Morgan!, 1966), 〈이사도라〉(Isadora, 1968), 〈도박사〉(The Gambler, 1974) 등이 있다. 국내에 비디오로 출시된 그의 영화로는 닉 놀테가 주연한 〈누가 이 비를 멈추랴〉(Who'll Stop the Rain, 1978) 정도가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