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볼펜 선 속에 붓질이 숨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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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볼펜을 휘갈기다 보면 손놀림 하나하나가 가는 선이 돼 바람결에 흔들리듯 경쾌한 맛을 전해준다.” 볼펜으로 그림 그리기 30년, 자신의 볼펜화 앞에 선 이일(60)씨의 말이다. [사진 갤러리현대]

가로·세로 3m 내외의 대형 캔버스를 가득 채운 선과 면이 단지 볼펜으로 그린 것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일상의 하잘것없는 물건이 만들어내는 경이다.

 우리로 치면 ‘모나미153펜’쯤 될 미국의 페이퍼메이트(paper Mate) 볼펜이 만든 선이 미술관의, 갤러리의 작품이 됐다. 볼펜화가 이일(60)씨가 16년 만에 여는 국내 개인전이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다음 달 15일까지 소개된다.

 이씨는 37년간 미국에서 살았다.

 신발·옷·가발·조명가게 점원으로, 이삿짐센터 포터로, 집수리 인부로 일하며 틈틈이 그렸다. 그의 동반자는 볼펜. 뉴욕 작업실에 수만 개의 볼펜더미가 쌓이도록 그리고 그려 2010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다. 한국실에서 그의 볼펜화가 분청사기와 어우러졌다.

 미국 미술전문지 ‘아트 인 아메리카’의 에드워드 레핑웰 에디터는 “이일의 작품 속에는 서예, 풍경화, 섬유와 도예의 전통이 함축적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고 평했다. 메트로폴리탄은 올 3월 이일의 에칭(동판화) 네 점을 소장했다.

 볼펜화의 근본은 판화였다. 이일은 1976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당시 한국 화단에서는 단색화가 유행이었다.

 판화를 배우고 싶어 뉴욕 프랫 그래픽센터로 갔고, 거기서 대학원을 나왔다. 81년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한국 미술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볼펜화를 선보였다. “물감 묻은 붓 대신 볼펜입니다. 붓도 되고 물감도 되는 거죠.”

 그는 두툼한 천으로 짱짱하게 묶은 대형 캔버스에 긋고 또 긋는다. 빠른 손놀림이 만들어내는 제스처, 선이 겹치면서 나오는 깊은 맛이 그의 볼펜 추상화의 핵심이다. 한 점 완성에 얼마나 걸리느냐는 질문에 “이 상태에 오기까지 30년 걸린 셈”이라고 말했다.

 붓질 한 두 번이면 끝날 것을 가는 볼펜 선을 겹치고 겹쳐서 그리는 이유는 뭘까. 그의 답변은 이렇다.

 “사람들이 왜 미술관·갤러리에 올까요. 매일의 일상에선 겪지 못한 경이, 눈씻음을 경험하기 위해서겠죠. 심오한 말장난보다 오는 이들이 경쾌한 느낌에 몸도 한 번 흔들고 가면 좋겠어요.” 02-228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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