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멀어지는 한은…"통화정책 상실" 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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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오전 서울 소공동 한은 별관에서 열린 창립 62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12일 “2류이면서 1류 조직을 바라지 말라”며 “국제 사회에 더 가까워지고 국내 사회와 유리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고와 행동을 혁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 소공동 한은 별관에서 연 62주년 창립 기념식에서다.

 김 총재가 직원들의 분골쇄신을 독려한 건 하루 이틀의 얘기가 아니다. 일벌레로 알려진 그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로 있으면서도 숱한 어록을 남겼다. “술 먹다 죽은 사람은 봤어도 일하다 죽은 사람은 못 봤다” “사흘 꼬박 새워보지 않은 사람하고 얘기하지 말라” 등이다. 한은에서도 마찬가지다.

야근과 주말 근무를 당연시했다. “불 꺼지지 않는 한은을 만들자” “고위 간부도 직접 글을 쓰라”고 독려했다. 이번 ‘2류’ 발언도 “역량을 키워 세계 1류가 되자”는 격려의 차원이라는 것이 한은의 설명이다.

 그러나 한은 안팎에선 이를 두고 냉소적인 반응이 많았다. “김중수 총재의 통화 정책과 리더십에 대해 시장이 의문을 표하고 있는 상황에서 직원들을 ‘2류’로 지칭한 것은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다. 안 그래도 12개월째 금리를 동결한 그를 두고 시장에선 “역시 동결중수”라거나 “통화 정책이 아예 상실됐다”는 비판이 제기되던 참이다.

 김 총재의 리더십에 대한 시장의 불신은 시장 지표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한은의 기준금리가 시장 금리와 따로 노는 현상이 대표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한은은 지난해 1월과 3월, 6월에 각각 기준금리를 0.25%포인트씩 올렸다. 하지만 보통 기준금리를 따라가는 장기 금리는 이와 반대로 하락 추세를 그렸다.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지난해 2월 4.8%대에서 세 번째 인상이 있었던 6월 중순 4.2%대로 꾸준히 떨어졌다. 11일 기준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3.66%. 1년 동안 기준금리가 동결됐지만 이와 관계없이 장기 금리는 꾸준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시장 금리가 기준금리와 엇갈리는 것은 시장이 중앙은행의 의사 결정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며 “한국은행이 시장에 제대로 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8일 금융통화위원회의 기준금리 동결(3.25%) 역시 ‘2류 통화 정책’이 낳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물가 압력 때문에 금리를 인상해야 할 때도 ‘동결 행진’을 계속하는 바람에 통화 정책을 쓸 여력을 한은이 스스로 없앴다는 것이다. 김 총재의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계속 움직이며 잽을 날려야 할 권투 선수가 퍼질러 앉아있다가 펀치를 날려야 할 타이밍을 못 잡는 것”이라고 현 상황을 표현했다. 그는 “금리를 올려야 할 때도 낮은 금리를 유지하다 보니 물가와 가계 빚 등의 부작용이 축적됐다”며 “통화 정책 외에 경제 정책을 쓸 수 없는 정권 말이어서 한은의 역할 축소가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최근 임기를 마친 한 금융통화위원은 장기간의 금리 동결 조처가 한은에 대한 신뢰 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위원은 “너무 소극적으로 통화 정책을 펴다 보니 외부에서 한은이 독자적인 정책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거시경제 전망은 물론 대처에서 한은이 완전히 소외돼 있다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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