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윤석만 “나는 들러리 … 높은 곳서 정준양 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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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초 포스코 회장 물망에 올랐던 윤석만(64·당시 포스코 사장) 포스코건설 고문(왼쪽)과 정준양(64·당시 포스코건설 사장) 포스코 회장. 윤 고문은 포스코 회장 후보 추천위원회에서 한 시간 동안 “회장 선임 과정에 권력이 개입했다”고 밝혔던 것으로 확인됐다. [중앙포토]

윤석만(64) 포스코건설 고문이 2009년 당시 포스코 신임 회장 후보를 선출하는 자리에서 한 시간에 걸쳐 이명박 정부 실세의 개입 의혹을 직접 제기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윤 고문은 2009년 1월 29일 열린 ‘포스코 최고경영자(CEO) 후보 추천위원회’에 참석해 “회장 선임 과정에 권력이 개입돼 있다”고 밝혔다. 14일 포스코 핵심 관계자와 당시 이사회 상황을 잘 아는 인사들에 따르면, 윤 고문은 “내가 겪고 확인한 것만 말씀드리겠다”며 외압 의혹에 관해 위원회 멤버들에게 설명했다.

 윤 고문은 본지와 최근 이뤄진 인터뷰에서도 이를 확인했다. 그는 “추천위원회 자리에서 박영준 전 차관의 실명을 거론하며 외압 정황을 밝히지 않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때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또 한번 거를 일이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는 이어 “외압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는 지적에 “내가 거짓을 이야기했겠는가. 언젠가 짚고 넘어가야 할 때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도대체 당시 추천위원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추천위원회가 열린 시간은 오후 2시, 장소는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 18층 대회의실이었다. 위원회 멤버는 8명. 박상용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서윤석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 손욱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제프리 존스 김앤장 변호사, 허성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포스코 차기 회장을 추대하는 자리여서 모두 사외이사로만 구성됐다.

 후보 추천위의 첫 번째 안건은 ‘정준양(64) 포스코건설 사장(현 포스코 회장) 내부 감사’건이었다. 정준양 사장이 내부 정보를 친분 있는 기업과 가족에게 알려주거나 이권을 주었다는 의혹에 관한 사안이었다. 정준양 사장이 포스코 차기 회장으로 추천됐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발표를 맡은 포스코 강창균 감사실장(현 포스코엠텍 부사장)은 “감사 결과 문제 없다”고 보고했다. 이 사안은 그해(2009년) 12월 서울중앙지검에서도 수사를 벌여 무혐의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내부 감사 발표에 이어 이구택 당시 포스코 회장이 나섰고, 이 회장은 “정준양 포스코건설 사장을 신임 포스코 회장으로 단독 추천한다”고 제안했다.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오후 4시에 나온 인물은 윤석만 포스코 대표이사 사장. 이 자리에서 윤 사장은 한 시간 동안 의견을 개진한다. 그는 “나는 들러리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을 꺼낸 뒤, 권력의 불법 개입 의혹을 조목조목 설명했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사외이사는 “윤 사장은 ‘높은 곳에서 정준양 사장을 지원하고 있다. 이건 불공평하지 않은가’라고 토로했다”고 전했다. 그는 “차기 회장직을 놓고 워낙 경쟁이 치열해 사외이사들은 경영 공백을 우려하는 분위기였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발언 순서로 오후 5시쯤 정준양 사장이 등장해 입장을 밝혔고, 6시쯤 윤석만-정준양 두 사람을 놓고 투표가 시작됐다. 1차 투표 결과는 4대4. 동점이 나온 것은 윤석만 사장의 주장에 일부 사외이사들이 공감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시 치른 2차 투표에서도 역시 4대4 동점이었다. 위원장을 맡았던 서윤석 교수는 “1차 투표 후 40분, 2차 투표 후 30분간 더 토론이 벌어졌다”고 기억했다. 이어 3차 투표. 이때 뜻밖의 사태가 벌어진다. 사외이사 두 명이 기권한 것이다. 결국 3차까지 간 투표에서 정준양 사장은 4표, 윤석만 사장은 2표를 얻어 정준양 사장이 차기 포스코 회장 후보로 최종 추천됐다. 위원회 멤버 손욱 교수(당시 농심 회장)는 “외부 입김이 작용할 여지가 없었다. 있었다면 1차 투표에서 끝났어야 하지 않나. 3차까지 투표가 진행된 만큼 논의할 게 많았고 검증작업도 이뤄졌다”고 말했다.

 한편 포스코는 최근 회장 인사 개입 의혹과 관련한 보도가 잇따르자 “당시 추천위원회에서 제기됐던 문제들이 모두 해명됐으니 흔들리지 말라”는 내용의 안내문을 14일 임원들에게 보냈다.

문병주·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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