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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대에 일본 따라잡을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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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영욱
논설위원

“일본이 너무 앞서 있었다. 우리 세대에는 절대로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절망감이 들었다.”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 2년 전 한 얘기다. 2년 전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건 아니다. 30년 전인 1969년의 충격을 회상하면서 한 말이다. 입사 4년 차였던 그는 삼성전자가 설립된 그해에 일본 산요전기와 마쓰시타전기(파나소닉)에 가 연수를 받았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때부터 그의 관심은 “어떻게 해야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였다.

 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일본 배우기’에 총력을 기울이던 시절이었다. 후계자 이건희 회장도 처음엔 그랬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도 1993년 6월 일본에서 시작됐다. 말이 ‘배우기’지 실제론 ‘베끼기’였다. 이병철 회장의 철학부터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였다. 개발 초기 태부족한 돈과 기술이야 그렇다 쳐도 경영방식과 교육·훈련 프로그램마저 일본에서 그대로 들여왔다. 심지어 국제정치 등 각종 정보도 일본이 도입 창구였다. 이 회장은 새해만 되면 일본에 머물렀고, 그때 얻은 지식과 정보를 다듬은 ‘도쿄 구상’이 삼성의 그해 경영지침이었다.

 가전과 반도체 진출도 일본 때문이었다. 산요전기 회장의 권유로 1969년 삼성전자가 설립됐다. 1983년 반도체 진출도 일본의 반도체 전문가로부터 얻은 정보와 지식의 산물이었다. 돈과 기술도 일본에서 들여왔다. 가전은 산요전기 및 NEC와 합작했고, 반도체는 샤프 도움을 받았다. 당시 최고는 마쓰시타와 소니였지만 그들은 삼성을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삼성이 택한 게 산요와 NEC였을 정도로 소니와 마쓰시타는 대단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그랬다. 그때는 삼성전자가 세계 톱 5에 들어가는 TV 메이커로 성장했지만 소니는 여전히 난공불락의 세계 일등이었다. 삼성은 다윗, 소니는 골리앗에 비유됐다. 덩치도 컸지만 소니는 혁신과 창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당시의 소니는 지금의 애플과 같은 위상이었다. 1979년 출시한 워크맨은 전 세계 미디어기기의 소비습관을 일거에 바꿔놓은 최고의 히트작이었다.

 그런 일본 전자업계가 최근 몇 년 새 삼성에 완전히 눌렸다. 2006년 소니를 눌러 처음으로 TV 세계 1위가 된 삼성전자는 7년 연속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과의 격차는 더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2009년 매출 100조원, 영업이익 10조원으로 세계 최대의 전자업체로 도약했다. 하지만 그해 마쓰시타·소니·도시바 등 일본의 거대 전자업체 9개의 이익을 다 합쳐도 삼성만 못했다. 삼성의 스승이었던 산요전기는 파산했고, 샤프는 대만 업체에 사실상 인수됐다. 소니와 파나소닉도 몰락했다. 지난해 적자 규모가 각각 8조원과 11조원으로 대규모 감원 계획까지 발표했을 정도다. 반면 삼성은 지난해 매출 165조원, 영업이익 16조원으로 사상 최대의 호실적이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아닐 수 없다.

 이유는 여럿 들 수 있다. 일본 배우기를 넘어 ‘일본 극복하기’에 나선 삼성의 전략과 이건희 회장의 결단이다. 고화질(HD) TV마저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한 소니를 모방하면 영원히 일등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곧바로 디지털 방식 표준을 채택하면서 디지털TV로 전환한 게 주효했다. 세계 반도체 1위 도시바는 웨이퍼 밑으로 파고들어가는 트렌치 방식을 썼지만 삼성은 “파는 것보다 쌓는 게 더 쉽다”는 생각으로 스택 방식을 채택하면서 일등이 됐다. 삼성은 강력한 오너 리더십으로 과감한 투자를 거듭했지만 일본엔 그런 기업가가 없었다. 소니가 세계 최강이라는 자만심에 빠진 것도 큰 이유다.

 그 어느 것이든 결론은 하나다. 초심을 잃지 않고 부단히 혁신하는 기업 앞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 골리앗 소니의 몰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지금 일등인 삼성전자라고 예외일 리 없다. 긴장의 끈을 늦추고 혁신을 중단하는 순간 삼성도 소니처럼 된다. ‘영원한 일등’은 없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다. 이번 총선 당선자들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은 당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