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빚 거의 없는 중견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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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제약은 연간 매출액이 7백억원 정도지만 회사가 언제든지 빼내 쓸 수 있는 은행예금 잔고가 4백50억원이나 된다. 에이즈 치료제 원료를 생산하는 이 회사는 최근 3년 동안 해마다 1백억~2백억원씩의 이익을 냈다.

올 1월부턴 협력업체에 납품대금 전액을 현금으로 주고, 회사에 와서 받는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협력업체가 지정한 은행계좌로 돈을 넣어준다. 어음을 발행하지 않기 때문에 부도 걱정이 거의 없다.

삼천리그룹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초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을 대부분 정리했다. 건설과 기계업체를 합병했고, 레포츠용품 사업은 청산했다. 그 뒤 에너지와 제약사업에만 주력해 3개 계열사 모두 삼천리제약처럼 빚없는 경영을 하고 있다.

이찬의 삼천리제약 부사장은 "빚을 내 빚을 갚는 방식으로 회사를 경영하던 시대는 지났다" 며 "경영진이 돈을 꾸러 다니는 데 쫓기면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고 말했다.

또 협력업체에 현금을 주니까 제때 좋은 원료를 납품해 완제품 생산성과 품질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그는 강조했다.

삼천리제약도 무역금융 등 일부 정책자금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는 자금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시중금리보다 이자가 싸고, 은행과의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 예금잔고의 30%를 넘지 않는 범위로 제한하고 있다.

최근 현대 등 일부 대기업이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갚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돈을 빌려 쓰거나, 중견기업들도 자금을 융통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것과는 달리 어음을 발행하지 않고 빚 없이 '속 편한' 경영을 하는 기업들도 있다.

이들 기업은 한눈 팔지 않고 자신있는 몇몇 사업만을 전문화해 수출과 내수 분야에서 제품 경쟁력을 갖춘 채 무리한 사업확장을 하지 않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난해 말 코스닥 시장에 등록한 경기도 안산의 파세코는 올들어 지난 9월까지 6백5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58억원의 세후(稅後)이익을 남겼다.

이 회사는 사양산업으로 분류되는 석유난로 사업을 25년째 하면서 미국 난로시장의 80%를 장악했다. 해마다 수출도 늘어나 올해는 지난해보다 30% 증가한 4천5백만달러를 목표로 삼았다.

예금 금리보다 싼 이자로 30억원의 은행 돈을 쓰고 있지만, 예금액이 80억원으로 사실상 무차입 경영을 하는 셈이다.

이 회사는 1백여개의 협력업체에 현금으로 결제하고 일부 협력업체에는 경영안정자금도 빌려주고 있다.

유병진 사장은 "빚이 없다고 반드시 좋은 기업은 아니지만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만큼만 투자한다는 자세로 회사를 꾸리고 있다" 고 밝혔다.

'기업은 절대로 망해선 안된다. 그러나 기업은 절대로 망한다' 가 그의 경영관이다.

특수화학용기 메이커인 크로바프라스틱의 강선중 사장은 서울에 있는 아파트 한채 외엔 개인동산이 없다. 76년 창업한 이래 지금까지 이익 배당을 받지 않았다.

세계 특수화학 용기 시장의 30%를 차지해 회사가 해마다 10억원 이상씩 순익을 올리지만 이의 일부를 투자하고 나머지는 모두 유보금으로 쌓아둔다.

姜사장은 "매출액은 일본.대만 업체와의 생산규모 경쟁 때문에 공개할 수 없지만 유보금은 1백억원에 가깝다" 며 "주변에서 증시 상장을 권하지만 서두를 생각이 없다" 고 말했다.

그는 상장보다 최소한 1백년 이상 살아남도록 회사를 먼저 살찌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회사는 2년 전부터 어음을 발행하지 않고 있으며, 거래 은행에서 대출을 해가라고 졸라 수억원 정도를 우대금리로 쓰고 있다.

한국도자기는 6년 전에 착공한 서울 신설동 사옥을 지난 9월에야 완공했다. 창립 53년 만에 내집을 마련하는 것이지만 외환위기가 닥치자 여유자금을 더 비축하기 위해 사옥 건설을 중단했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30년 전 사채(私債)를 썼다가 혼이 났던 경험이 있다. 그 뒤 사채는 물론 은행 돈 등 남의 돈으로 사업을 벌이지 않는 것이 김동수 회장의 철칙이다.

납품업체에 현금을 주고 대기업에서 받은 어음은 만기일까지 갖고 있다가 현금화한다. 어음이 현금화할 때까진 회사운영 자금계획에서 받은 어음은 빼놓고 계산한다.

염료업체인 삼원산업은 생산제품 대부분을 수출해 은행 결제가 떨어지자마자 납품업체에 현금을 준다.

이종만 사장은 "보험에 드는 것처럼 은행 돈 일부를 쓰지만 예금액의 10%도 안된다" 고 말했다. 이 회사는 세계 60여개국에 수출 거래선을 두고 있다.

중소기업연구원 송장준 연구조정실장은 "중소기업도 생존하려면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차입금 비중을 낮춰야 한다" 며 "이자가 싼 정책자금이라고 무리하게 많이 썼다가 쓰러지는 중소기업을 보면 안타깝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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