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위크]헤어나기 어려운 고정관념의 덫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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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미국 프린스턴大의 흑인 학생 40명과 백인 학생 40명이 약식으로 골프를 치는 실험에 참가하겠다고 지원했을 때 심리학자들은 연구의 진짜 목적을 알려주지 않았다. 제프 스톤 교수와 그의 동료들은 일부 학생들에게는 ‘타고난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한 반면 다른 학생들에게는 ‘전략적 사고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런 후 난생 처음으로 골프를 해보는 학생들은 1명씩 차례대로 골프를 쳤다.

그러자 타고난 능력을 평가할 것이라고 말한 집단에서는 흑인 학생들이 백인 학생들보다 평균적으로 4타 앞섰으나 전략적 사고를 평가할 것이라고 말한 집단에서는 백인 학생들이 4타 앞섰다는 결과가 나왔다. 현재 애리조나大에 재직중인 스톤은 “사람들이 ‘백인 남성들은 점프를 못한다’거나 ‘흑인 남성들은 머리가 안 돌아간다’는 식으로 스스로에 대해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가지면 작업 수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하버드大의 아시아계 미국인 여대생 46명은 자신들이 어려운 수학 문제를 12개 푼다고 생각하고 실험에 참가했다. 이 실험에서 한 집단은 고등 대수 문제를 풀기에 앞서 출신 민족을 강조하는 서면 질문(‘당신 가족은 현재 몇 세대째 미국에서 살고 있는가?’)
에 응답했다. 반면 다른 집단은 교묘하게 성별을 떠올리게 하는 질문(‘남녀 공동 기숙사에서 지내는가, 아니면 여성 전용 기숙사에서 지내는가?’)
을 받았다.

그 결과 아시아계라는 점을 강조한 다음 수학 시험을 보게 한 집단(아시아인들이 수학을 잘한다는 고정관념을 일깨운 집단)
이 54%의 정답률을 보이면서 가장 높은 성적을 냈다. 반면 여학생들은 ‘수학에 약하다’는 고정관념을 교묘하게 떠올리게 한 집단은 43%의 정답률로 가장 낮은 성적을 보였다.

고정관념을 연구해온 학자들은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고정관념의 위력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예를 들어 여성들을 호르몬 변화에 지배되는 멍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성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앉히지 않는다. 또 동성애자를 어린이에 대한 이상 성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동성애자를 보이스카우트의 지도자로 선출하지 않는다.

그런데 5년 전 스탠퍼드大의 심리학자인 클로드 스틸은 색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고정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행동할 때 고정관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는 견해다. ‘주의가 산만한 금발여성’과 ‘건망증 심한 노인’ 하는 식으로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린 고정관념은 그 고정관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향한 사회의 시선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그러다 보니 특정 고정관념을 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지적인 과제 및 기타 과제 수행시에 영향을 받게 된다.

5년간의 추가 연구를 통해 심리학자들은 이제 고정관념이 흑인은 물론 여성과 소수민족 및 고령자들에게까지 미치는 영향을 발견하고 있다. 이 연구는 또 표준시험에서 왜 흑인 아동, 심지어는 좋은 학교에 다니는 중산층 가정의 흑인 아동조차 백인 아동보다 나쁜 점수를 얻는가 같은 오랜 의문점에 대한 해답까지도 제시해주고 있다.

1995년의 독창적인 연구에서 조슈아 아론슨과 클로드 스틸(두 사람 모두 현재 뉴욕大 재직중이다)
은 고정관념이 흑인들에게 어떠한 장애가 되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들은 대학 진학 적성시험(SAT)
같은 지적인 과제를 수행할 때마다 흑인 학생들이 스스로의 지능을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심리학자들은 바로 이러한 장애로 인해 흑인들은 과제 수행에 차질을 빚게 될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이러한 추측을 시험해보기 위해 스틸과 아론슨은 44명의 스탠퍼드大 학생들에게 까다로운 대학원 진학 시험(GRE)
의 구술 문제를 냈다. 시험 직전에 한 집단은 학년·나이·전공 및 기타 정보를 표시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다른 집단에는 동일한 질문에 인종을 묻는 질문 하나를 추가했다. 그러자 두 집단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났다.

스틸은 인종을 적어낸 흑인 학생들이 백인 학생들은 물론 인종을 적지 않은 흑인보다 훨씬 더 낮은 점수를 얻었다면서 “인종을 적어내라는 것 하나만으로 흑인 학생들은 성적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종을 명시하지 않은 흑인 학생들은 백인 학생들과 비슷한 성적을 얻었다.

심리학자들은 또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믿지 않아도 부정적인 고정관념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람들이 골프, 또는 수학 같은 평가 대상이 되는 과목에 대한 자신의 능력에 신경을 쓸 경우, 또 특정 고정관념(일례로 ‘여자애들은 수학을 못한다’)
에 익숙할 경우, 고정관념은 사람들의 능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실제로 골프를 치다가 어려운 상황에 빠지거나 까다로운 삼각법 문제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불쾌하게 고정관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움츠러들면서 작업 수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스탠퍼드大의 심리학자 폴 데이비스는 곧 발표할 연구 논문에서 “백인 남성의 경우에는 어려움에 부닥치면 시험에서 떨어질까봐 걱정하기 시작할 테지만 흑인 남성의 경우에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보여 다른 흑인들을 실망시킬까봐 걱정한다”고 말했다. 이는 “아니, 사람들이 흑인에 대해 갖는 고정관념이 바로 내 얘기였구나” 하는 것과 같은 반응이다.

이런 고정관념은 벗어나기도 힘들다. 예일大의 베카 레비 교수는 60명 이상의 자원자들에게 단어들이 화면에서 빠르게 지나가도록 해서 잠재의식을 자극하는 메시지를 보여준 다음 이들의 기억력을 시험했다. 그 결과 ‘알츠하이머병’·‘노쇠하다’·‘늙다’ 같은 단어를 본 4학년생들은 ‘현명하다’·‘박식하다’ 같은 단어를 본 4학년생들보다 기억력이 더 안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일부 시험에서는 후자가 전자보다 기억력이 64%나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레비는 후속 연구에서도 마찬가지로 잠재의식을 자극하는 방법을 썼다.

이번에는 자원자들에게 생명을 연장하는 의술을 받아들이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긍정적인 고정관념을 지닌 4학년생들은 받아들이겠다고 응답한 반면 노쇠나 약함 같은 단어를 떠올렸던 학생들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레비는 “정말 두려운 것은 적어도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고정관념이 오랜 신념을 압도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고정관념의 위력은 표준시험에서 나타나는 흑인 아동과 백인 아동 간의 지속적인 차이(흑인 아동이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서 자랐더라도 이 차이는 마찬가지다)
를 설명해줄 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차이는 점점 더 커진다.

표준시험을 보면 흑인 아동과 백인 아동의 성적이 저학년에서는 엇비슷한 수준이었는데 6학년이 되면 여러 지역에서 흑인 아동의 수준이 백인 아동에 비해 두 학년이나 처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틸은 “학생들이 끼리끼리 어울릴 때 인종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시기가 바로 6학년 때쯤”이라고 지적한다. 그럼으로써 인종은 개인이 속한 집단을 알려주는 더욱 강력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고정관념의 해로운 영향력이 사라질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일깨우지 않으면 개인의 수행 능력은 저하되지 않는다. 또 만일 긍정적인 고정관념만 생각하게 되면 수행능력이 오히려 향상된다. 스틸은 ‘나는 스탠퍼드 학생이다’ 같은 식으로 자기 최면을 걸어보라고 조언하지만 이를 적용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때로는 속임수도 도움이 된다. 워털루大의 스티븐 스펜서는 어려운 수학 시험 문제에선 성별에 따른 성적 차이가 없다는 말을 들은 여성들은 남성 못지 않은 성적을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반면 그런 말을 듣지 못한 여성들은 훨씬 더 낮은 성적을 낸다. 그러한 조작으로 고정관념의 불합리한 위력은 완화될 수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정관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그런 조작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Sharon Begley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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