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지식] 위험·소비·88만원에서 피로까지 … 키워드로 사회 읽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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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오늘도 열심히 뛴 당신, 그런데도 삶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으신가. 아니 우울해지는 경우는 없는가. 한국 출신의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에 따르면 이런 현상은 현대사회의 ‘피로’ 때문이다. 책 제목 『피로사회』①는 책의 색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내용 전반을 전달하는 제목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꿰뚫는 키워드로 다가온다. 학자들의 아카데미즘에 매몰된 현학적 제목이 아니기에 울림과 공감이 명료하면서도 강렬하다.

 한병철은 우리가 스스로 끊임없이 “넌 할 수 있어!”라고 긍정성을 과잉 강조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무한 성공을 독려하는 ‘성과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피로사회로 표현했다. 성과사회와 피로사회는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피로사회는 한병철이 채택한 시대비평의 고갱이인 것이다.

 제목 자체로 현대사회를 꿰뚫는 책으로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②가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었지만 그에 비례해 사회생활의 위험도 역시 높아졌다는 진단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하나의 단어로 절묘하게 잡아낸 선례다. 현대사회의 위험 징후를 제시한 책들은 이 책 말고도 많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넌 위험한 사회에 살고 있어!”라는 경각심을 이 책의 제목처럼 인상 깊게 전파하는 사회분석서는 별로 없었다.

 그런 점에서 피로사회와 위험사회는 많이 닮았다. 위험사회에 사는 현대인은 피로할 수밖에 없다. 한병철은 피로사회가 초래한 ‘시대의 질병’으로 우울증의 만연을 지목한다. 죽을 때까지 일하다가 쓰러지면서도 스스로 착취한다는 인식을 못하고 오히려 성과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는 현상이 바로 우울증이라고 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③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시작하는 이 책도 남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소비 자체에 몰두하는 현대사회의 특징을 ‘소비’라는 제목으로 뽑아냈다.

 이 같은 경향은 학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와 소통하려는 자세로 이해된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학자들의 책이지만 대학 상아탑에 안주하지 않고 일반 대중에 호소하는 징후가 강하다”며 “위험사회·소비사회·피로사회 등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지만 옛날 방식과 다른 진화된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제목의 파급력을 논하자면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④도 그 어느 책에 뒤지지 않는다. ‘열린 사회’라는 표현은 사회분석 키워드 가운데 고전이라 할 만하다. ‘열린 사회’라는 지향점을 제시하면서 비판하는 대상은 ‘닫힌 사회’다. 비판 앞에 개방적 자세를 취하지 못하는 사회현상을 ‘닫힌 사회’로 규정했다.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라는 이분법 키워드를 활용한 수많은 파생 저술들이 이 책 이후 이어져 나왔다.

 『불확실성의 사회』(갤브레이스), 『88만원 세대』⑤(우석훈·박권일), 『승자독식사회』(로버트 프랭크) 등도 온갖 이해가 얽혀있는 복잡한 현대사회를 하나의 키워드로 관통하려는 시도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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