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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 까막눈 밝혀주는 서울서 온 57세 한글선생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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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홍천군 내촌면 화상대1리 경로당에 개설된 배병덕 한글교실. 이곳에서 13명의 할머니들이 한글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서 있는 사람이 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배병덕씨다.

20일 오후 홍천군 내촌면 화상대1리 경로당. 식탁으로 사용하는 책상에 빙 둘러앉은 할머니 10여 명이 책을 폈다. 초등학교 1학년 ‘읽기’ 책이다. 이들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학생처럼 선생님이 칠판 글자를 가리킬 때마다 ‘나’ ‘너’ ‘우리’를 소리 내 읽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수없이 반복했다. 이들은 이제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이 동네 할머니들. 나이 70대 전후의 할머니들이 ‘까막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열공 중이다.

 배병덕 한글교실. 경노당 입구에 붙어있는 안내판대로 마을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배병덕(57)씨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던 그는 예전 자신의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보다 더 꼼꼼하고 자세히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배씨가 서울 생활을 접고 화상대1리에 정착한 것은 2006년.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안전한 먹거리로 건강한 삶을 살고 싶었던 그는 취미생활로 사진촬영을 다니면서 봐두었던 이 마을에 집을 짓고 밭농사도 했다. 마을 주민과 어울리면서 2010년에는 4반 반장을 맡았다. 반장을 하면서 그는 주민과 접촉하는 빈도가 더 잦아졌다. 그런 가운데 각종 사안에 대해 주민의 서명을 받는 과정에서 할머니 상당수가 자신의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리는 등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배씨는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마을 이장 등과 상의, 경로당에 한글교실을 개설했다.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인 ‘읽기’와 ‘쓰기’, 『교과서 따라 쓰기』, 『한글 따라 쓰기』 등 필요한 교재는 서울지역 초등학교 교장 등 자신의 친구를 통해 마련하는 것과 함께 마을기금 30만원을 지원받아 구입해 할머니들에게 나눠줬다.

 이런 준비과정을 거쳐 한글 수업은 지난달 20일 시작했다. 수업은 토·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후 1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된다. 소리 내 읽기와 쓰기의 수업이 진행되는 전후, 할머니들은 예습과 복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쓰기 숙제도 대부분 꼬박꼬박 한다.

 한글교실이 운영되면서 할머니들의 표정이 밝아졌단다. 박복순(79)씨는 “글을 모른다고 창피해서 어디 가 얘기도 못한다”며 “이제 내 이름도 알아보고 쓸 수 있어 너무 좋다”고 말했다. 한글교실의 최고령인 원순신(85)씨는 “치매에 좋다고 애들이 (한글교실에) 열심히 다니라고 한다”고 말했다. 숙제 때문에 집에서도 할 일이 있어 좋다는 천귀덕(78)씨는 “글을 배워 편지와 고지서를 줄줄 읽을 수 있게 되면 남에게 속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글교실은 일단 3월 말까지 운영된다. 본격적인 농사철이 되면 할머니들도 농사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올해 이 마을 새마을지도자로 선출된 배씨는 “한글교실이 너무 늦게 개설돼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11월 정도에 한글교실을 다시 여는 등 할머니들이 한글을 충분히 익힐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운영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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