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재벌 규제 논의, 도 넘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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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김종갑
한국지멘스 대표이사 회장

지금은 최고 수준의 투명·윤리경영을 실천하고 있는 지멘스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 2006년의 뇌물공여 사건으로 회사는 벌금 등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은 물론 대외 이미지 실추로 160년 역사상 최대의 경영위기를 겪었다. 이후 지멘스는 “단기적 이익을 위해 미래를 팔지 않는다”는 창업이념을 되새기면서 준법경영을 대폭 강화했다. 단순히 사업상의 법규준수에 그치지 않고, 회사 및 회사 구성원이 사업을 영위하는 국가의 ‘모든’ 법규 및 윤리경영 정책을 준수하기 위한 ‘내부통제제도’를 확고히 구축하게 된 것이다. 준법경영이 고객의 신뢰를 높여 사업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성과로 입증되고 있다. “깨끗한 사업만이 지멘스 사업이다.” 회사의 임직원들이 매일처럼 반복하는 다짐이다.

 최근 준법경영은 우리나라에서도 최대 관심사가 됐다. 정부가 무리하게 준법지원인제를 도입하고 있어 재계의 반발을 사는 가운데 정치권은 재벌의 ‘탐욕’을 규제하겠다고 나섰다. 대기업들은 정치권의 압박과 곱지 않은 여론에 밀려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업과 베이커리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그동안 정부와 재계가 준법경영에 미온적으로 대응한 나머지 문제를 키운 것이다. 하지만 규제 강화나 여론몰이로 해결할 일은 아니다. 선거용이나 임시방편이 아닌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다.

 먼저 정부는 대기업 규제를 실효성 있게 운영해야 한다. 준수하기 어렵고, 따라서 처벌도 어려운 과도한 규제가 있는가 하면, 당연히 제재 대상인 것을 관대하게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규제를 잘 다듬어 일관성과 예측가능성 있게 집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기업 및 대주주에 대해 부당 내부거래, 하도급 위반 및 사익 추구에 해당하는 법규를 제대로 집행하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문제는 해소될 것이다.

 현재 정치권의 재벌 규제 논의는 도를 넘고 있다. 특정 사업을 기업 내에서 영위할지 출자를 통해 별도 법인으로 운영할지는 경영효율 관점에서 기업이 판단할 문제다. 대주주 경영자가 지분 비중 이상의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분 없는 전문경영인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더 책임감 있는 결정을 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기업지배구조나 내부통제제도가 불비한 우리나라에서 전문경영인이 더 윤리적일 것으로 보기 어렵고, 오히려 경영권 연장을 위한 단기이익 추구로 무리수를 둘 가능성이 우려되기도 한다.

 기업들은 준법경영 실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최우선 과제는 경영투명성 확보다. 지멘스의 경우 ‘네 개 눈의 원칙(Four Eyes Principle)’에 따라 모든 의사결정은 반드시 2명(네 개의 눈) 이상이 검토한다. 최고경영자도 경비지출 등 주요 활동과 관련해 회사 내에 독립된 결재권자의 ‘승인’을 받아 시행하고, 자세한 기록을 남겨 열람 및 검증이 가능하도록 한다. 법무실·준법지원실·비용관리자(컨트롤러) 등 준법 관련 부서들은 직제상의 권한에 따라 경영진을 포함한 모든 임직원의 활동을 동일 기준으로 규율한다. 필자도 취임 초기 사소한 문제로 수차례 관련 담당자의 지적을 받았을 정도로 ‘법대로 원칙대로’의 정수를 보여 준다.

 준법경영의 범위에 법규준수는 기본이고, 기업윤리와 회사가치를 지키기 위한 내부규율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대기업의 베이커리 사업을 예로 들면 사업장 내 입점이 친인척에게 특혜를 주어 주주이익을 침해한다면 이는 불법의 문제이므로 허용될 여지가 전혀 없다. 불법이 아닌 경우에도 주주·종업원·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stakeholders)’의 이익을 ‘지속가능경영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고려·판단해야 한다. 사업장 내 입점이 고객 편의를 제공해 회사의 가치를 높이거나 종업원 복지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영세상인에게 주는 피해가 커서 기업윤리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준법경영의 틀 내에서 사전 검토를 거쳐 결정했어야 할 사안이지만 아쉽게도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주주 경영자의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이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잘못이 있으면 그 부분을 철저히 응징할 일이지 대주주 경영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경쟁력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기업 때리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권과 정부는 규제강화가 아니라 실효성 있는 규범운영에 주력하고, 재계는 준법경영체제를 정착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특히 대기업 경영진은 ‘수만 개의 눈(모든 이해관계인)’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결단으로 국민의 신뢰를 높이도록 해야 할 때다.

김종갑 한국지멘스 대표이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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