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순간, 무서워하면 끝장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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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호 36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생전에 묘비명을 준비해두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그런 카잔차키스도 죽기 전 신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는 길모퉁이에 나가 손을 내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려고 했다. “적선하시오! 한 사람이 나에게 15분씩만 나눠주시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5>『그리스인 조르바』와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는 젊은 시절 저자가 실존 인물 조르바를 만나 크레타에서 여섯 달 동안 함께 생활한 체험담이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내 영혼에 가장 깊은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면 호메로스와 붓다, 니체, 베르그송, 조르바를 꼽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들 가운데 삶의 길잡이(구루)를 선택해야 한다면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에게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 인물, 조르바는 누구인가?

작품 속 화자인 ‘나’는 항구도시 피라에우스에서 키가 크고 몸이 가는 60대 광부 조르바를 처음 만난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가슴과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우선 거침없는 조르바의 입담을 들어보자. 크레타로 가는 배 안에서 난 조르바의 왼손 집게손가락이 반 이상 잘려나간 걸 발견하고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다. “아무것도 아니오. 항아리를 만드는 데 자꾸 걸리적거리길래 손도끼로 잘라버렸지요.”

결혼은 했느냐고 묻자 미친 듯이 머리를 긁는다. “딴 놈들처럼 나도 일생일대의 실수를 하고 말았지요. 결혼했던 거지요. 몇 번 했느냐고요? 정직하게 말하면 한 번, 반쯤 정직하게 말하면 두 번, 비양심적으로 치자면 삼천 번쯤 될 거요. 몇 번 했는지 그걸 다 어떻게 셉니까? 수탉이 장부를 갖고 다니며 한답니까?”
조르바의 인생 철학은 살아서 펄펄 뛴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도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자네 뭐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은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조르바에게는 먹는 일 역시 숭고한 의식이다.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으로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디다.”알렉시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차라리 가슴 뭉클하다. 할아버지는 백 살 되던 해에도 문 앞에 앉아 물 길러 가는 처녀아이들에게 추파를 던지곤 했다. 눈이 잘 안 보이는 할아버지는 처녀아이를 불러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럴라치면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는데, 하루는 왜 우냐고 물어봤다. “얘야, 저렇게 많은 계집아이들을 남겨놓고 죽어가는데 울지 않게 생겼니?”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제는 자유를 향한 갈망이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처럼 집착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을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조르바는 말한다.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다. 머리란 좀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화자인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가 축복이다. 인생이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우리는 매일같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 나간다. 카잔차키스의 집 대문 위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무엇이든 과도하게'. 자유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무서워하면 끝장이다. 북극의 에스키모가 끝없이 펼쳐진 눈 덮인 동토를 달려갈 수 있는 것은 무서움을 극복하기 위해 고도의 술수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상상력을 통제하고 아예 두려움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징벌의 신조차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한순간이다. 때로는 눈이 멀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면 나는 속으로 묻는다. “조르바라면 뭐라고 할까?”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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