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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는 판사일까, 사람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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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꼭 5년 전 이 칼럼에 일본의 야마구치 요시타다(山口良忠) 판사를 소개한 적이 있다. “뼛속까지 친미”라는 일부 판사의 SNS 글을 보면서 그를 다시 떠올렸다. 패전 직후 맥아더 사령부는 성인의 하루 배급량을 300g으로 제한했다(북한의 고난의 행군 때와 똑같은 수준이다). 암시장에서 쌀을 사고팔다 걸린 사람만 매년 120만 명을 넘었다. 엄혹한 식량통제법 아래 도쿄고교의 가메오 에이시로(龜尾英四郞) 교사가 “학생들에게 바르게 살라 하면서 나 스스로 불법을 저지를 수 없다”며 굶어 죽었다. 가메오는 1945년10월 마지막 사흘을 양파 2개로 버티다 숨졌다.

 꼭 2년 뒤인 47년 10월 도쿄지법 야마구치 판사가 죽음을 선택했다. 그는 식량통제법 위반 사건을 전담하던 평판사였다. 자신의 손으로 수많은 범법자를 교도소로 보내는 것을 괴로워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식량통제법은 국민을 굶겨 죽이는 악법이다. 그래도 법률인데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판사인 내가 암시장 쌀에 입을 댄다면 어떻게 범법자를 심판할 수 있겠나. 차라리 식량통제법 아래 행복하게 굶어 죽을 생각이다….”

 야마구치는 쌀 배급이 나오면 2명의 자식에게 주고 부인과 죽으로 끼니를 이었다. 텃밭을 가꾸었지만 영양실조를 피할 길이 없었다. 시골 친척들이 식량을 부치거나 식사에 초대해도 거절했다. 당시 다른 판검사들이 몰래 암시장에서 쌀을 구하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야마구치는 “공평해야 할 법치가 흐려졌다”며 “나 혼자라도 깨끗하게 죽음의 행진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 썼다. 마지막 재판을 마치고 쓰러진 그는 33세를 일기로 숨졌다.

 아사(餓死)한 야마구치와 가메오는 교토대와 도쿄대를 나온 일본 최고의 엘리트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한 생활을 누릴 위치였다. 하지만 자신들의 직분에 충실하기 위해, 원칙대로 사느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감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하기에 너무 참혹하다. 그래서 더 큰 충격과 감동을 던졌는지 모른다. 맥아더 사령부는 전범(戰犯)의 하수인으로 여기던 사법부를 완전 독립시켰고, 일본 교사들도 ‘군국주의 전도사’라는 오명을 벗고 사회적 신뢰와 존경을 회복했다.

 ‘법치국가’를 들먹이는 것은 SNS 판사들도 마찬가지다. ‘가카새끼’라 올린 판사는 사생활과 표현의 자유를 내세웠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똑같은 논리라면 야마구치 판사도 집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일반 시민이었다. 당연히 암시장의 쌀에 손댈 수 있는 ‘사생활’이 있었고, 굶어 죽지 않을 ‘자유’도 있었다. 양쪽의 입장이 엇갈리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야마구치는 “판사는 판사다”라고 했지만, SNS 판사들은 “판사도 사람이다”라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사회에 신뢰와 감동을 줄지는 국민이 선택할 몫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사적 공간이다. 굳이 법관의 정치적 중립이란 낡은 잣대로 재단할 일도 아니다. 아무리 대법원 윤리위원회가 “분별력 있게 해 달라”고 해도 먹혀들 분위기가 아니다. 판사들의 비아냥은 ‘꼼수면’ ‘가카새끼 짬뽕’ 등으로 강도가 세졌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나의 트윗을 적극 심의하라”고 한 판사도 등장했다. 소영웅주의 냄새까지 풍긴다. 이럴 때 죽은 야마구치가 나타나 “판사는 판사다”라고 했다간 사이버에서 몰매 맞을 세상이다.

 야당과 네티즌은 SNS 판사를 “행동하는 양심”이라 환호하고 있다. 하지만 SNS 판사들이 너무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에 요즘은 ‘벤츠 여검사’까지 보태져 피고인이 판사에게 막말하는 세상이 됐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야마구치가 아사할 무렵 일본은 “정직한 사람은 모두 죽거나 교도소에 갔다”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는 부인에게 마지막 다짐을 놓았다. “지금부터 내 식사는 반드시 배급 쌀로만 해주시오. 쓰러질지 몰라요. 죽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법관의 양심을 속이는 것보다 나아요.” 야마구치의 양심과 SNS 판사들의 양심 사이의 거리가 너무 아득하다. “뼛속까지 친일”이라 셀프 빅엿을 먹을지 몰라도, 나는 야마구치 판사가 훨씬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