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선의 깃발을 보았습니다, 얼굴까지 붉어집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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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늘 남녘 바다에서 오는 만선의 깃발을 보았습니다. 남도의 황토 빛깔과 갯내음이 왁자하게 밀려옵니다. 이 흥성스러움 앞에 어쩔 줄 몰라 얼굴까지 붉어집니다. 구석에 옹크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공책 가득 마음을 풀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렇게 풀어 놓은 마음을 눈물 훔치며 다시 읽어 보고 내심 뿌듯해하던 철없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세월의 나이테가 촘촘해 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혼자라는 의식의 휑한 공간에 시의 햇살이 있어 마음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었습니다. 가로수 맨살들 부딪치며 즐겁게 튕겨나는 은빛 소리들…. 맑은 공기와 하늘과 소슬 바람들…. 오늘은 구석진 곳에서 쏟았던 시린 아픔을 살풋 보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슴푸레한 길에 환한 불을 밝혀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문학의 길을 처음 틔워 주신 문병란 선생님과 최한선 교수님, 낯선 서울에서 시와 시조의 울타리로 새롭게 이끌어 주신 이지엽 교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항상 시작하는 마음 잊지 않고 노력하겠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저를 도와준 모든 분과 이 기쁨 함께 나누겠습니다. 현준아, 유진아 사랑한다!

◆약력=1960년 여수 출생. 2011년 8월 중앙일보 시조 백일장 장원. 현 열린시학회 부회장

역에서 비발디를 만나다

이번 역은 여름역 초록그늘 여름역입니다
온도가 조금 올라도 모세혈관 불붙는 사람
심장을 던져버리고
내리시면 됩니다

눈빛마다 불이 붙는 가을역 곧 도착 합니다
南도 北도 한때는 저리 붉어 아팠는데
타는 몸 놓아버리고
바람처럼 내리세요

가슴에도 얼음 얼어 겨울역도 투명 하군요
눈물의 달빛 사다리 환승할 분 내리세요
초승달 허리에 피는
살풋 그리움 안고

다음 역은 꽃잎 날리는 아지랑이 봄 역입니다
노랑제비 애기똥풀 별빛보다 밝은 마음
손끝에 하늘 물 들 때까지
활짝 펴고 날으세요

심사평

소통 꿈꾸는 따뜻한 마음, 신인다운 발상 돋보여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은 매월 신문 지면에서 검증된 이들만 응모할 수 있는 최고의 시조 등용문이다. 1차 관문을 통과한 27명 141편의 작품을 놓고, 다음 세대의 주역이 될 신인의 이름에 부응할 만한 신선함과 대성 가능성에, 기교보다 패기와 투철한 시정신의 사고와 감각에 주목하기로 했다.

 심사위원들은 각자 4~5명의 작품을 선고한 뒤 논의 끝에 때깔만 화려하고 내용이 공허한 작품과 관념 서정, 제재가 진부한 작품을 걸러낸 뒤 최종적으로 ‘은행나무 친견(親見)’ ‘마하’ ‘고래역(驛)’ ‘역에서 비발디를 만나다’ 등을 놓고 다시 난상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유영선의 ‘역에서 비발디를 만나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시조는 다소 미흡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몰개성하고 정석화된 기존의 시풍에 편승하지 않고 나름의 개성을 획득하고 있다. 단절된 세상과 소통을 꿈꾸면서 마음 시린 이들의 삶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희망의 봄으로 안내하는 현실 서정의 참신함과 신인다운 발상이 돋보였다.

 ‘은행나무 친견’과 ‘마하’는 감각과 이미지 처리가 물 흐르듯 유연했으나 관념 서정이, ‘고래역’은 패기가 돋보였으나 시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종장 처리의 안이함이 지적됐다. 최종심에 오른 이들의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오승철·오종문·이종문·강현덕(대표집필 오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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