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속 그 이야기 <21> 해파랑길 ‘포항 구룡포∼호미곶 구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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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포항의 갯마을은 과메기로 인하여 풍성하다. 2 구룡포 일본인 사옥 거리.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했다. 3 호미곶 상징물인 ‘상생의 손’ 앞에서. 4 장기목장성 탐방로 꼭대기에 올라가면 장기반도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5 전복이 푸짐하게 담긴 구룡포의 전복물회.

2011년 신묘년도 어느새 달력 한 장만 남았다. 시간에는 본래 구분이 없는데, 하여 12월도 인간이 편의로 쪼갠 12개 단위의 맨 마지막에 놓인 하나에 불과한데달랑 남은 달력 한 장은 늘 우리를 심란하게 하는 기운이 있다. 그 기운에 홀려 해마다 12월이 되면 해를 보러 나가는 건지 모르겠다.

올해 ‘그 길 속 그 이야기’ 마지막 회도 그래서 해 맞으러 가는 길을 걷는다. 동해안을 종단하는 해파랑길 중에서 ‘포항 구룡포∼호미곶 구간’이다. 구룡포에서 시작해 해안선을 따라 호미곶까지 이어지는 16.19㎞ 길은 지난해 9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동해안 트레일 해파랑길을 조성할 때부터 우수 시범구간으로 꼽았던 길이다. 구룡포와 호미곶 모두 겨울이면 사람이 몰려드는 이름난 관광지이고, 동해안 따라 갯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껏 정취를 맡을 수 있어 해파랑길 688㎞ 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코스였다.

진즉부터 널리 알려진 이 길을 이제야 걷는 건, week&도 일종의 의례를 치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연말이 돌아오면 전국 방방곡곡이 해넘이·해맞이 인파로 홍역을 치르는 사태를 지켜보며, 길을 걷겠다고 나서는 걸음도 굳이 이 소동을 피할 까닭은 없겠다고 판단했다. 아니, 그 맹목적인 인파에 얹혀 연말 분위기 좀 내고 싶었다고 적는 게 되레 솔직하겠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호미곶에서 해맞이를 하고 돌아오는 길. 저 멀리 보이는 등대 앞바다가 호미곶이다. 마침 내려앉은 겨울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 대한민국 관광 스토리텔링의 원조 호미곶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 동쪽 끄트머리에 비죽 튀어나온 지형이 있다. 장기곶이라 불리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딱히 내세울 게 없어 누천 년 세월을 잠잠히 보낸 동쪽의 변방이었다.

 현재 여기의 이름은 호미곶(虎尾串)이다. 2001년 12월 지금의 이름이 됐다. 사실 ‘호랑이 꼬리’란 말은 조선시대 한 풍수학자의 주장에 불과했다. 한반도가 만주를 향해 포효하고 있는 호랑이의 형상을 띠고 있는데 그 꼬리가 바로 포항 장기곶에 해당한다는 호기로운 발상이었지만, 500년 가까이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행사로 모든 게 바뀌었다. 2000년 첫날 새천년준비위원회가 새천년 한민족해맞이 축전을 개최한 이래 호미곶은 전국 최고의 해맞이 명소가 됐다.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전국에서 몰려든다. 12년째 되풀이되고 있는 현상이다.

 당시 새천년준비위원회 이어령 위원장은 새 천년을 맞아 웅비하는 한민족을 표현하기 위해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호미곶의 상징을 끌어다 썼다. 의미는 각별했지만 호미곶은 여전히 휑했다. 하여 조형물을 세웠다. 뭍과 바다에 나란히 서 있는 거대한 손바닥 두 개, 소위 ‘상생의 손’이라 불리는 호미곶 명물은 그래서 만들어졌다.

 호미곶은 21세기 신흥 명소다. 호방한 민족성을 상징하는 장소라는 지리적 의미와 새 천년 축제가 열렸다는 역사적 의의, ‘상생의 손’에 쏠리는 대중의 관심이 맞아떨어지면서 호미곶은 해맞이 명당이 됐다. 쉽게 말해, 굳이 이 먼 호미곶까지 와서 해맞이 의식을 치러야 하는 정당성을 갖춘 것이다. 추운 계절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 해안선을 따라 걸은 이유도 결국은 호미곶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위해서였다. 구룡포에서 걸음을 시작했다.

# 겨울 동해안의 속살을 만나다

겨울 구룡포는 풍성했다. 막 대게 철이 시작돼 구룡포에 늘어선 식당마다 붉은 대게를 잔뜩 벌여 놓고 객을 부르고 있었다. 수족관에서 꿈틀대는 이 붉은 놈들은 선명한 때깔 때문에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물량만 놓고 보면 구룡포는 영덕·울진을 훨씬 앞지르는 대게 고장이다. 구룡포에서 출발한 큰 배가 먼바다까지 나가 대게를 쓸어오기 때문이다. 하나 겨울 초입 대게는 잠깐 참아야 한다. 지금은 삭막하기만 한 보리밭이 푸르게 일렁거릴 때가 와야 속 튼실한 대게가 올라온다.

 대신 구룡포에는 과메기가 있었다. 구룡포에서 해안선을 따라 오르는 길목엔 방조제 앞 따위에 과메기를 널어놓고 말리는 모습이 흔했다. 올해는 겨울이 늦어 과메기도 늦었다고 과메기를 말리는 할머니는 말했다. 철이 넘어가는 오징어와 철이 다가오는 과메기가 나란히 널린 풍경은, 겨울 포항 갯마을에 들어가야만 마주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구룡포 시내 식당에서 2만원이면 과메기 한 상이 나왔다.

 구룡포는 예부터 고래 배가 나가던 항구다. 지금도 그 전통이 남아있어 구룡포 곳곳에 고래고기 집이 있다. 고래고기는 수육이 제일 나은데 보통 3만원이면 한 접시가 나온다. 고래고기 특유의 고린내가 싫으면 포항 물회를 추천한다. 동해안에서도 포항·영덕·울진 지역은 예부터 물회를 자주 먹었다. 내다 팔지 못하던 잡어를 어부들이 물 붓고 양념에 비벼먹던 것이, 지금은 별미로 통하며 값이 훌쩍 뛰었다. 구룡포 어촌계 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가고파 전복(054-276-2288)’은 전복 물회(3만원)를 팔고 있었다. 이른바 명품 물회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웠지만 걷는 내내 든든한 기분이었다. 먹을 게 푸짐한 지역은 이야기도 넉넉한 법이다. 호미곶 아침 해를 찾아가며 만나는 풍경도 덩달아 너그러워 보였다.

●길 정보 해파랑길 ‘포항 구룡포∼호미곶 구간’은 아직 조성 중이다. 이정표가 없다. 하여 어쩌면 자유로운 걸음이 될 수도 있다. 구룡포부터 해안선 따라 어떻게든 호미곶까지 가면 되니까 말이다. 다만 아쉬운 게 있었다. 구룡포에 있는 일본인 가옥 거리가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했다. 2014년까지 86억원을 들여 단장을 마칠 계획이란다. 대신 길 하나를 찾아냈다. 구룡포해수욕장이 끝나는 구룡포2리 염창골에서 말봉재까지 올라가는 길로 이른바 ‘장기목장성 탐방로’다. 장기목장성은 조선시대 말을 키우던 장기 지역 목장의 돌 울타리라는 뜻으로, 아직도 군데군데 돌담 흔적이 남아있다. 염창골에서 산길 5.6㎞를 오르면 팔각정에 다다르는데 여기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압권이다. 바다에 둘러싸인 장기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포항시(www.ipohang.org) 관광진흥과 054-270-2883.

이번 달 ‘그 길 속 그 이야기’에서 소개한 해파랑길 ‘포항 구룡포∼호미곶 구간’ 영상을 중앙일보 홈페이지(www.joongang.co.kr)와 중앙일보 아이패드 전용 앱, 프로스펙스 홈페이지(www.prospecs.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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