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문제는 검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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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여성 검사는 1920년대에 러시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막사과(莫斯科:모스크바) 재판소에 ‘에프스고-’라 하는 묘령의 여자 검사가 여성 범죄자를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본명은 김연이(金蓮伊)였다. 그녀는 “머리를 깎고 남복(男服)을 입고 법정에서 당당히 준열한 논고를 하여 피고로 하여금 전율케” 했다고 한다. 김연이는 경북 안동 태생으로 대한애국부인단의 김마리아(金瑪利亞, 1892~1944)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김마리아 일파가 일본 경찰당국에 체포되자 러시아로 피신하여 귀화한 뒤 그곳의 검사가 되었다는 것이다(‘막사과에서 유명한 여검사 김연이’, 동아일보, 1923.7.16).

 그녀가 러시아로 귀화한 여성이어서인지 한국 여성사에서 그녀에 대한 연구가 상세히 이루어진 바는 거의 없는 듯하다. 그래서 그녀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그녀가 러시아에서 법조인으로 활약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1929년에도 그녀에 대한 기사가 발견된다. 그사이 그녀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간 모양이었다. ‘재외동포 몽매(夢寐)에 의희(依稀)한 고원(故園), 해외풍상 십주년’(동아일보, 1929.1.1)에서는 “해삼위에는 지금 조선 여자 한 사람이 노농 러시아 사법 인민 위원부 판사가 되어가지고 반(反)혁명자 기타 그 나라의 죄인을 법정에 세우고 법복 입은 자태에 유창한 노국말(러시아어)로 그를 심리하여 판결을 내리어 보는 사람으로 하야금 경탄” 하게 만들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여성이 김연이며 예전에는 모스크바에서 검사의 직책을 맡았음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한국 내에서 최초의 여성 검사는 1982년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 법조인 중 판사는 1954년부터 등장했지만, 검사를 지망한 여성은 근 30년이나 늦게 나타났다. 이 당시 검사 업무가 여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고되고 힘들다는 의견과, 여성 검사들이 더 잘 처리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다. 결국 두 명의 여성 검사가 임관되었지만 이들도 격무 등의 이유로 4~5년 뒤 판사로 옮겨가고 말았다.

 최근 두 명의 여성 검사가 사표를 낸 사실이 거의 동시에 이슈가 되었다. 한 명은 비리에 연루되어 사표를 내야 했고, 한 명은 검찰 조직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못하는 데 대해 회의를 느껴 검사직을 버렸다. 그 방향은 정반대지만 예전처럼 격무 때문이 아니라 검사가 가진 권력 때문에 사직한 것이라는 점은 공통된다. 그래서 두 사건 모두 검찰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비근한 예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기에 그냥 ‘검사’가 아닌 ‘여검사’라는 명칭을 붙여 ‘여성이라서’ 무언가 특수한 사례인 것으로 문제를 축소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듯하다. ‘여검사’가 아니라 ‘검사’를 문제 삼아야 한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