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 - 정재승이 만난 사람들] (9) 고전평론가 고미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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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평론가 고미숙씨에게 고전 연구는 좋은 삶과 앎을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그는 “남을 심하게 비판하는 글은 안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독설은 결국 말한 사람의 기운을 소진시킨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전평론가-. 고미숙(51)씨에게 붙는 이 수식어는 낯설면서도 소중하다. 『열하일기』 『동의보감』 등 우리 고전을 ‘지금, 여기’ 시각에서 풀어온 그의 행보는 강단 학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본보기다. 또 여럿이 함께 공부한 결과를 활발하게 책으로 내며 지식의 소통·공유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왔다. 중앙일보와 온라인서점 예스24가 함께하는 ‘희망의 인문학-정재승이 만난 사람들’에서 고씨를 초대했다. 올 10월 그가 서울 중구 필동에 새로 마련한 연구공동체 ‘감이당(坎以堂)’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정재승=와, 필동에 이런 곳이 있네요.

 ▶고미숙=도심 속의 시골이죠. 택시 타려면 15분은 나가야 해요.

 ▶정=학부에선 독문학을, 대학원에선 국문학을 전공했죠.

 ▶고=제일 얘기하기 싫은 부분이에요. 독문과를 나온 사실 자체가 20대를 허무하게 보냈다는 걸 환기시켜 주기 때문이에요. 뭔가 근본적인 학문인 동양사상을 해야지 생각하다 중문과를 가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얼떨결에 독문과에 간 거죠. 국문과는 연애편지나 쓰는 곳으로 생각했다니까요. 1980년대를 저처럼 맹하게 보낸 청춘이 없을 걸요.

 ▶정=지금 학생들도 비슷한 고민을 해요.

 ▶고=10대, 20대의 꿈은 확실하지 않아요. 분명하다면 가짜죠. 그걸 모색하는 기간이 청년기에요. 그러기 위해선 꼭 사람을 만나야 해요. 지금 청춘을 보면 사람을 안 만나요. 너무 위험해요. 『동의보감』 공부 하면서 사무치게 깨달았어요. 그러면 저처럼 인생역전은 좀 됩니다. (웃음)

 ▶정=열정을 바칠 대상을 찾은 거잖아요.

 ▶고=4학년 때 김흥규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확 바뀌었죠. 존재의 중심과 딱 만난 것 같았어요. 아! 여기(배꼽 아래를 가리키며) 단전에 신호가 오는 것 같은. 선생님께서 『홍길동전』 『춘향전』을 읽어주셨는데, 우주가 진동하는 느낌이었죠. 매 작품을 읽고 A4 분량으로 10~15장 보고서를 내야 했는데, 모두 첨삭해 주셨어요. 진심이 오가는 관계가 형성됐죠. “아! 저 선생님처럼 글을 쓰고, 가르치고 싶다!”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정=대학원 때 얻은 것이라면요.

 ▶고=역사와 마주하게 됐죠. 역사와 글쓰기가 어떻게 결합하는지 보게 됐습니다. 문제는 글쓰기가 안 됐다는 사실이었어요. 혹독한 수련을 받았어요. 누구나 그런 훈련을 받을 수 있다면 빚이라도 내서 대학에 가라고 하고 싶어요.

 ▶정=어떤 식의 수련이었나요.

 ▶고=완전히 바닥부터 시작하는 수련? “이런 수준의 인간이 대학원에 온 건 처음이다”는 말까지 들었다니까요. 연애든 돈이든 아무 관심이 없었어요. 오직, 공부뿐이었죠. 제 석사 논문을 다섯 명이 ‘피바다’를 만들기도 했죠. 지금도 “나처럼 훈련을 받았다면 글쓰기로 못 먹고 살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정=지식공동체는 어떻게 모색하게 된 거죠.

 ▶고=윽! 박사를 하고도 실업자가 됐습니다. 사실 돈은 벌 수 있었죠. 강남에 진출한 논술 강사들은 문학 석·박사가 있으면 몸값이 뛰었거든요. 그러나 나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현장이 필요했어요. 95년에 고전문학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일을 처음 하게 됐죠. 너무 재미있는 분야인데 왜 사람들이 모를까, 뭔가 중간에 매니저가 없어서다, 이런 결론에 이른 거죠. 『고전문학 이야기 주머니』라는 대중서를 썼어요. 웅진출판사에서 그 책을 보고 고전문학을 정리해달라며 원고료를 주는데, 무려, 1000만원이었어요. “어머! 내가 선동렬보다 연봉이 높네!”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웃음)

 ▶정=그렇게 수유 너머를 만들게 됐나요.

 ▶고=새로운 공부의 길을 찾고, 네트워크를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죠. 그때 제가 임대아파트에 살았는데 책이 많아지니 공간을 넓혔어야 했어요. 그걸 포기하고 98년 서울 수유리에 개인도서관을 만든 거죠. 잘 하는 사람들 불러서 강의를 시키고, 후하게 강사료와 먹을 걸 주니 모두 좋아했어요.

 ▶정=비용은요.

 ▶고=독서지도 하는 알바를 했는데, 돈이 꽤 됐어요. 서울 생활비가 많이 든다는 건 고정관념이에요. 밥값은 세상 비용 중 가장 싸죠. 한 달에 몇 십 만원이 든다면, 그 돈으로 많은 사람이 마음껏 먹을 수 있답니다. 1년에 500만~1000만원이에요. 아파트 한 평도 못 늘리는 돈이죠. 그게 인생의 굉장한 노하우였죠. “밥이 있으면 사람이 모인다!”

 ▶정=10년간의 변화라면요.

 ▶고=왜 고전문학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만나면 안 되나, 그런 고민을 했죠. 『열하일기』는 우연히 읽었다가 완전히 몰입한 책인데요. 여행이 길이 되고 길이 삶이구나! 라는 걸 느꼈습니다. 연암(燕巖)은 길과 글이 일치되는구나, 길 위에 있으면 글이 쏟아지고, 글과 앎의 일치! 이것이 경이로웠어요. 『열하일기』 이후엔 제 몸을 더 보게 됐어요. 몸은 자본을 욕망하고, 중산층의 삶이 편한데, 이런 고민을 하다 한의학 역학까지 온 겁니다.

 ▶정=글쓰기가 왕성합니다.

 ▶고=자율적·자발적인 공부를 하면 저절로 글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글 하나 쓸 수 없는 대학생은 뭔가요. 과학자나 의사도 마찬가지에요. 왜 글 잘 쓰는 과학자, 의사가 없죠. 과학자는 최재천·정재승 밖에 없는 거죠. 의사야 말로 글을 잘 써야죠. 매일 환자들의 몸을 보는데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아요.

 ▶정=지금의 인문학은 무엇을 다뤄야 할까요.

 ▶고=몸이죠. 디지털 문명 때문에 신체가 소외됩니다. 모든 정보가 스마트폰에 있죠. 정보를 어떻게 내 삶에 가공하고 운용할 것인가가 남습니다. 이 힘은 신체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손가락, 뇌만 씁니다. 기억력을 전혀 쓰지 않죠. 치매든 아니든, 접속할 때 아니면 멍해지는 거죠. 학교현장에 가보면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있는 아이들이 없습니다. 허리가 중심인데, 그걸 못 잡아요. 제가 기차를 많이 타고 다니는데 누구나 자리에 앉으면, 폰을 꺼내 몇 시간이고 손가락을 쉬지 않아요. 그러면 언제 쉬고 언제 사색을 해요. 그 사람에게 쉰다는 건 그저 ‘멍~’한 겁니다. 신체는 계속 무능해지죠.

 ▶정=디지털의 그늘이겠죠.

 ▶고=병은 세대와 관계 없습니다. 다들 얼굴만 동안이에요. 방부제 치고 성형하니까. 그런데 정기는 흐르지 않아요. 감동도 없고 경이로움도 없고, 내 힘으로 하는 게 없어요. 그래서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동의보감』에 쓰기도 했지만, 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정은 진액대사인데 땀과 눈물, 촉촉하다는 게 그런 겁니다.

 ▶정=현대인에게 고전은 어떤 의미일까요.

 ▶고=생존의 필수전략이죠. 동서양의 어느 것이든, 삶을 통으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지 않은 책은 부분만 보게 합니다. 생체회로를 축소시켜버리는 책들입니다. 고전은 몸 전체가 동의를 해야 읽어집니다. 그래서 낭송을 해야 합니다. 치매 안 걸리려면 어려운 거 읽고 외워야 해요.

 ▶정=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합니다.

 ▶고=저의 스승이자 멘토들의 공부 비법을 하나로 요약하면 ‘자기를 구하는 건 자기다’입니다. 천고불변(千古不變)의 진리죠. 나를 구하기 위해 누굴 만나 앎을 찾아 다니고, 나를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자신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자기를 구하세요!

박정호 기자, 김민영(프리랜서·작가)

고미숙은 …

1960년 강원도 정선 출생. 고려대 독문과, 동대학원 국문과 석·박사. 지난 10여 년간 지식인 공동체 ‘수유+너머’에서 활동했고, 강연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올해 10월 ‘수유+너머’를 떠나 또 다른 공부 공동체 감이당을 실험 중이다.

고미숙의 책책책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2011, 그린비)=허준의 한의학서 『동의보감』을 삶의 비전을 탐구하는 책으로 새롭게 읽어냈다. 현대인의 생활습관과 우울증 공허함 등을 짚어가며 의학과 인문학의 통합을 모색한다. 몸과 삶과 생각은 결국 하나라고 강조한다.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2007, 그린비)=새로운 공부 방법을 통한 인생역전을 제시한다. 돈과 출세가 아닌 일상의 모든 순간을 앎의 자원으로 삼는, 삶을 위한 공부가 참다운 공부라고 말한다. 지식의 사적 소유 해체, 배움과 가르침의 경계 허물기 등을 시도한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2003, 그린비)=고전평론가 고미숙을 탄생시키고 연암(燕巖) 박지원에 대한 관심과 『열하일기』 붐을 몰고 왔다. 주류적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웃음과 우정을 사랑한 탈근대적 지식인으로서의 연암을 재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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