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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야유 받은 그리스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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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정원
JTBC 국제부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해마다 봄이 오면 축제를 열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기 위해서다. 축제 기간에는 비극 경연대회도 개최돼 내로라하는 시인들의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오이디푸스 왕’을 쓴 소포클레스도 이 대회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 그리스에서 또 하나의 비극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59) 그리스 총리. 3400억 유로(약 526조원)가 넘는 빚 때문에 고대 문명국가인 이 나라가 부도 위기에 내몰린 게 비극의 골자다. 나랏돈을 펑펑 써대던 정부가 허리띠를 조이면서 국민의 실업률이 16%까지 높아졌다. 특히 15~24세 청년 실업률은 40%를 넘는다. 지중해의 정취를 즐기며 유유자적하던 그리스인들의 삶에 한바탕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고통스러운 외환위기를 겪었던 우리로선 이 ‘비극’을 보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에 눈물 한 방울 찔끔 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부아가 난다. 왜일까. 정통 그리스 비극과는 전혀 다른 양상 때문이다. 비극을 보는 사람들은 갖은 애를 쓰다가 운명에 굴복하는 주인공을 보며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파판드레우 총리가 국가 부도라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당장 돈 한 푼이 아쉬운 처지임에도 국제사회에서 돈을 더 빌릴지 말지를 국민투표에 부치자며 정치쇼를 벌였다. 예상 밖(?)으로 국내외 반발이 거세자 ‘아니면 말고’ 식으로 투표안을 철회한 해프닝은 한 편의 소극(笑劇)이다. 오히려 그림처럼 아름다운 6000여 개의 섬을 팔아 빚을 갚자고 주장한 스테파노스 마노스 전 그리스 재무장관이 비극의 주연으로 더 적격이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 내내 관객 노릇만 하려 드는 그리스 국민도 한심하긴 매한가지다. 돈 나올 구석이 전혀 없는데도 “내 연금은 절대 못 깎는다”며 날이면 날마다 거리로 나섰다. 재판관이란 사람들도 월급 삭감을 백지화하라며 재판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제 나라 은행이 망할까 봐 겁나서 딴 나라 은행으로 예금을 빼돌린 사람도 부지기수다. 외환위기 때 아들딸 돌반지까지 빼주며 나랏빚 갚기에 나선 한국 국민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주연급 정치인들을 탓하기 전에 조연급에 해당하는 그리스 국민 역시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리스 비극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참이다. 파판드레우 총리가 무대 뒤로 퇴장하고 2차 구제금융안 비준을 목표로 하는 임시정부가 등장한다. 내년 2월엔 총선도 예정돼 있다. 그렇다고 비극이 희극으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험난한 현실을 그리스 정치권과 국민이 한마음으로 이겨내려 하지 않는다면 국제사회는 도움의 손길을 거두고 싸늘히 외면하고 말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배우들에게 돌아가는 건 관객의 야유뿐이다.

김정원 JTBC 국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