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더 늘리고 세금 올린다는 공약은 왜 못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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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호 30면

점심 약속이 갑자기 깨져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할 땐 서울 명동 칼국수 집에 간다. 명동성당 산책을 겸해 나서는데 칼국수 한 그릇 값이 8000원이다. 오장동 함흥 냉면으로 향하는 경우도 있는데 같은 가격이고 사리를 추가하면 1만1000원이다. 매끼 식사를 칼국수와 냉면으로 해결해도 한 사람의 한 달 식비가 얼추 100만원이란 뜻이다. 오르지 않은 것이라곤 애들 성적과 월급뿐이란 얘기가 많다. 그 비싼 우유 값마저 엊그제 또 올랐다. 거침없이 치솟는 물가를 떠올리면 ‘내가 중산층 맞나?’란 생각이 든다.

최상연 칼럼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자신이 “중하위 이하”라고 응답한 사람이 45.4%에 달한다. “중산층”이란 답은 51.3%에 불과하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의 지난해 말 조사인데 가장 최근 조사다. 여의도연구소에 물었더니 “지금 조사하면 중산층이란 답이 틀림없이 더 줄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년 전 노태우 정부 땐 “중산층”이란 답이 70%를 훨씬 웃돌았다. 노태우 회고록 하권 76페이지에 적혀 있다. 김종인 당시 경제수석에게 물었더니 “통상 75% 내외였고 80% 나올 때도 있었다”고 답했다. 당시 가계 저축률은 25% 정도였다. 지금은 3%다.

상대적 박탈감만이 아닌 게 실제 수치가 그렇다. 지니 계수는 0과 1 사이 숫자로 표현되는데 0.4를 넘기면 불평등 정도가 아주 심각하다는 뜻이다. 1997년 0.264였던 지니 계수가 지난해 0.315로 올랐다. 한가운데 소득의 50% 미만을 버는 인구 비중을 보여주는 상대적 빈곤율은 97년 8.7%에서 지난해 14.9%까지 높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10.6이다.

사회 양극화를 우리만의 고민거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불평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지구촌에 봇물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정도가 심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특임장관실 조사에 따르면 국민 72.6%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불만이다. 51.4%는 “이명박 정부가 공정 사회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쪽에 손을 들었다. 공정 사회, 공평 과세, 공생 발전이란 청와대의 국정 목표가 무색하다. 이런 불편하고 억울한 심정이 ‘도가니’와 ‘나꼼수(나는 꼼수다)’가 대박 난 비결일 게다. 너무 어려워 몇 쪽을 읽기 힘든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은 100만 부 넘게 팔려 나갔다.

선거만 있으면 ‘바꿔’ 열풍이 반복되는 이유가 다르지 않을 게다. 전임자가 하던 일이면 무조건 “원점 재검토”를 외쳐야 하는 출마자의 고민도 여기서 시작될 게다. 여야가 따로 없다. 변화와 혁신을 내세워야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마음에 다가설 수 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가 다르지 않다. 급한 마음에 공약을 쏟아내는데 뜯어보면 좀처럼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야 모두 기존 재정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개발 공약 시리즈고 재정확보 방안엔 모르쇠다. 후보마다 임대주택을 5만 혹은 8만 호 공급하겠다는데 대략 5조 혹은 8조원의 빚이 필요하다. 빚도 문제지만 “땅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조 단위의 다른 공약이 많다. 무상 급식과 복지확대 공약도 경쟁이다. 그러면서도 서울시 빚을 4조원 혹은 7조원 줄이겠단다.

선거만 끝나면 되풀이되는 공약 후유증으로 대한민국은 지금 큰 혼란과 갈등에 빠져 있다. 재정난에 빠진 전국의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선 “선심성 개발사업이 지자체를 망쳤다”는 반성문이 잇따른다. ‘뻥튀기 공약’으로 지탄 받은 강원도지사 보궐선거가 6개월 전이었다. 멀리 갈 게 없다. 후보들은 선거 초반에만 해도 “이번 선거를 정책 선거로 하자”고 약속했다. 좋은 스포츠 경기를 준비하듯 서로 좋은 모습을 시민에게 보여주자고 다짐했었다. 선거 문화를 바꾸자는 약속은 이번에도 공염불이 됐다. 요새는 과연 정책 선거라는 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의문이 생긴다.

18대 총선 때 중앙선관위 조사에 따르면 대략 15%의 유권자가 공약을 보고 투표했다. 공약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있었을 게다. 공약을 안 할 수는 없지만 제발 솔직했으면 좋겠다. 서울시 빚을 줄이려면 지금 무상 급식은 시기상조라든가 아니면 이런 저런 사업을 포기하겠다는 목소리가 곁들여져야 진정성이 있다. 개발 사업을 확대한다면 빚을 더 늘리겠다거나 세금을 대폭 올릴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함께 내놔야 한다. 전임자의 사업을 다 뒤집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고백해야 한다. 정치 불신 탈출의 출발점이다. 지금까지 그런 솔직한 후보는 한 번도 못 봤는데 만일 그런 사람이 나오면 나는 찍겠다. 다른 유권자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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