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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앙시앵 레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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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박경철
시골의사

‘앙시앵 레짐’은 1789년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왕정하의 전제적 지배체제를 의미한다. 혁명 이전 프랑스는 왕권신수설에 바탕을 둔 군주제 아래 전 인구의 2%에 불과한 제1신분 성직자와 제2신분 귀족들이 제3신분인 시민 대다수를 지배했고, 국가에 대한 모든 권리는 귀족이, 의무는 시민이 대신하는 극도의 수탈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의회나 법원의 권능 역시 노골적으로 무시되거나 탄압돼 법치의 균형마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프랑스혁명은 이렇게 모순이 가득한 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시민봉기의 성격을 띤 것으로, 절대왕정 해체의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이후 ‘앙시앵 레짐’이란 말은 ‘구체제’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변화를 완고하게 거부하면서 비효율적인 제도나 체제를 고수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관용화돼 쓰이기 시작했다. 즉 국가사회의 통치원리나 사회문화적 경향이 특정 계층의 이익을 편향적으로 대변하거나, 혹은 그것을 조장하는 상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경우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현재 우리나라를 감돌고 있는 사회 전반의 변화 기류 역시 ‘성장시대의 논리’에서 새시대의 새로운 ‘레짐’을 요구하는 대중의 요청일 수 있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목표지향적 질서에 대한 변화 요구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국가는 늘 높은 경제성장 목표치를 제시해 왔다. 이때 잠재성장률 대비 월등히 높은 성장 목표치는 유권자의 지지를 끌어내는 주요한 깃발이 되었고, 정치권력은 국가 보유 자원들을 성장률을 높이는 데 효과적인 곳에 모두 쏟아부으며 목표치 달성에만 주력해 왔다. 이 경우 부작용은 필연적이다. 공리적 관점에서 보면 국가의 자원배분은 경쟁력이 강하고, 효율성이 높으며, 생존능력이 탁월한 곳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력과 효율성이 낮은 곳에 투하돼 그들의 생존력을 키워주는 것이 옳다.

 하지만 현실은 늘 반대다. 국가가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기 위해 성장 효율성이 높은 수출 대기업에 자원을 집중 배분하고, 당장 빚내서 쓰는 만큼 성장률이 올라가는 재정사업에 몰두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물론 1970년대 이후 30년간 이어진 고도성장기에는 이런 방식의 성장이 사회전반적인 기회 확대로 연결되었지만, 낙수 효과가 사라지고 경제력 집중의 폐해만 드러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도 생각과 방식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사회적 기회 확대와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 등을 외면하고 단지 이익 증가만 지상 목표로 삼게 되면 월급쟁이 경영자들은 당장 고용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확대하며, 협력업체를 쥐어짜고 불공정 거래를 일삼게 되는 것이다. 즉 기업이 오로지 이익 증가라는 목표만 내세우고 과정을 도외시하면 사회가 불행해지는 셈이다.

 이 경우 기업에 인력을 공급하는 학교교육 시스템도 저절로 기형적인 모습을 하게 된다. ‘SKY에 몇 명이 진학했는가’라는 것이 명문학교의 기준이 되는 한 교육은 살아날 수 없다. 학교의 교육목표는 SKY에 진학한 30명이 아니라 SKY에 진학하지 못한 나머지 470명을 어떤 인재로 키웠는가에 있어야 하고, 명문학교를 평가하는 기준 역시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학생수가 아니라 나머지 학생이 얼마나 필요한 교육을 제대로 받았는가로 평가돼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 기업의 결과중심주의는 교육에서마저 지배원리가 되고 말았다.

 이런 국가 기업 교육 시스템하에서 가정 역시 병들 수밖에 없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이웃집 아버지의 연봉과 지위에 비교되고, 아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육 역시 이웃집 아들의 성적과 비교하며, 단지 점수를 내기 위해 지식을 저장하는 하드디스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성과 중심, 결과 중심의 ‘앙시앵 레짐’은 과거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거쳐온 생존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선배 세대들의 그러한 헌신 덕분에 가시밭과 자갈길을 무사히 통과했다. 하지만 자갈길을 지나던 방식으로 초원을 경영할 수는 없다. 즉 경험에 바탕한 과거의 성공방식은 존경스러운 훈장으로 남기고,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틀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낫과 망치의 시대가 아니다. 따라서 투쟁과 대립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이제는 기득권의 자발적 양보와 약자의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레짐이고, 그래야만 길이 막힌 청년들이 희망을 가지고 퇴장하는 선배들이 안심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박경철 시골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