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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남에게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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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동생뻘 되는 먼 친척이 갑작스레 전화를 했다. 돈을 꾸어달란다. 여윳돈이 없어 빌려주지 못해 찜찜했다. 아들을 미국으로 MBA(경영대학원) 공부하러 보냈는데 막상 보내고 나니 보내줄 돈이 모자란단다. 이리저리 ‘카드 돌려막기’까지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양이다. 맘은 아팠지만 이해는 힘들었다. 빚을 내고 살림을 거덜내가면서까지 유학을 꼭 보내야 했을까. 유학 가서 학위를 받고 돌아와도 일이 없어 놀고 있거나 다단계 판매하는 곳까지 기웃거리는 졸업생들도 많다는데. 그나마 학위라도 받고 노는 것이 그냥 노는 것보다 부모 맘은 좀 편한가.

 획기적인 교육정책이 나오지 않는 한 시간과 돈과 에너지까지 올인하여 자식교육에 쏟아붓는 부모들은 계속 있을 것이다. 수명은 계속 늘어 몇 년 후면 90세를 넘기는 사람도 꽤 많아질 터인데, 자식교육 끝나면 돈도 없고 에너지도 없고 남는 건 기나긴 쓸쓸한 인생뿐이겠다. 오락가락하는 우리나라 복지정책에 노후를 맡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을 다시 하기도 쉽지 않은 나이일 터인데 긴긴 남은 세월 동안 뭘 먹고 살아야 하나. 속은 홀라당 파서 자식에게 먹이고 벌레 먹은 꽈리같이 빈껍데기만 남은 부모에게 신세대 자식이 버팀목이 되어줄까. 행여 우리 자식이 뒤질세라 눈치 보며 부모 노릇 잘 해보려다 쪽박 차는 사람들 많겠다. 좋은 부모 노릇. 그 기준은 없는 것인가.

 50대 남자의 자살률이 점점 늘고 있단다. 같은 연령대 여자의 세 배란다. 전후 베이비부머들. 특히 ‘낀세대’의 상징이 돼버린 ‘58년 개띠 남자들’. ‘부모님 노후는 부모님이 알아서…’ 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자식에게 맘 놓고 기대지도 못하고, 요즘은 부부가 돈도 함께 번다지만 막상 부인을 생활전선으로 내보내자니 가장의 체면도 안 서는 것 같고. 그저 아버지가 하던 대로 늘 보던 대로, 가장으로서의 막중한 경제적 책임을 혼자 짊어지고 살아가는, 말 그대로 ‘낀세대 남자들’. 아버지가 예전에 누렸던 가장 대접은 받아보지도 못하고 오직 그 책임만을 떠안고 사는 그들. 앞집 아이 다니는 학원이며 뒷집 아이 배우는 공부며, 자식마다 다 따라다니며 챙기자니 아무리 벌어도 깨진 독에 물 채우듯 남는 건 아픈 몸과 빈 가슴뿐인 58년 개띠들. 높은 자살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들이 하니 그저 따라 하다가 결국에는 힘이 부쳐 죽음으로 내몰린 미련한 그들.

 추석 때 TV에서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이라는 개그 프로를 봤다. ‘설날엔 조카들에게 용돈을 주지만 추석엔 안 줘도 되고, 성수기 축의금은 3만원만 내고 친구 부모님이 내 이름을 알면 10만원 내고, 유부남 직장인이 여직원과 둘이서 밥은 먹어도 되지만 술은 안 되고’ 등등. 살면서 접하게 되는 애매한 것들을 다 정해주는 남자가 있더라. 그에게 묻고 싶다. “총 가계소득이 월 XXX일 경우 자식교육비는 얼마를 쓰고 노후 준비로는 얼마를 남겨야 할지, 이 애매한 것 좀 정해주세요.” 그가 정해주면 당당하게 그만큼만 교육비로 쓰고 우리들의 노후를 대비하자. “애정남이 그러더라” 하면서.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