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음악정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음악은 정치적일까 아닐까. ‘좌파음악’이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선율’ 같은 표현이 없는 걸로 봐선 아닌 것 같다. 음악은 태생적으로 무색무취(無色無臭)다. 반면 음악인은 정치성을 띨 수 있다. 그럴 때 진공상태이던 음악엔 빛깔과 냄새가 덧입혀진다. 음악이 갖는 이중성이다. 히틀러가 반(反)유대주의자였던 바그너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이 수십 년간 바그너 연주를 금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음악이 무슨 죄가 있으랴마는 이스라엘의 바그너 혐오는 상상초월이다. 1981년 이스라엘 필하모닉 공연이 잘 보여준다. 당시 지휘자 주빈 메타는 앙코르곡으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을 연주하려 했다. 하지만 “바그너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가스실로 보내졌던 희생자들을 잊었단 말이냐”는 성난 청중의 항의에 중단해야 했다.

 순진한(?) 음악에 기대 정치 좀 해보자는 게 소위 ‘음악정치’다. 냉전시대의 ‘오케스트라 외교’가 대표적이다. 모스크바나 베이징에서 서방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불가능해 보이던 동서 화해무드가 기적처럼 조성되곤 했다. 지휘자 카라얀이 이끄는 베를린 필도 외교사절 노릇으로 유명했다. 베를린 필이 69년 모스크바 연주회를 하던 당시 소련은 서베를린을 서독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주회 프로그램에 ‘베를린 필’이 아니라 ‘서(西)베를린 필’이라고 표기했다. 카라얀은 격노했다. 소련은 결국 ‘베를린 필’로 정정(訂正)했다.

 베를린 필의 정치적 영향력이 엄청났음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카라얀은 공연 둘째 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을 골랐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가장 미워했던 작곡가였다. 쇼스타코비치와 카라얀의 만남은 곧 ‘정치적 해빙’을 상징했다(헤르베르트 하프너,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음악정치는 핑퐁외교나 판다외교처럼 소프트파워에 기댄다. 소프트파워는 무력(武力)보다는 매력으로 승부한다. 문제는 그 매력을 얼마만큼 현실정치로 연결 짓느냐다. 최근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연말 남북교향악단 합동연주 추진을 위해 평양에 다녀왔다. 정명훈 감독은 합동공연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을 연주하길 바란다고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음악정치가 재개돼 ‘환희의 송가’가 서울과 평양에 울려퍼진다면 그 열매는 무엇일까.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따스한 햇살 같은 음악정치의 기적을 기대해 본다.

기선민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 [분수대] 더 보기
▶ [한·영 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