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봤습니다] 김동호 기자의 필리핀 한국국제학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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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별로 진행되는 영어 원어민 수업에 참가한 학생들과 선생님들. 뒷줄 왼쪽 첫번째가 김성미 교장.

지난 1일 필리핀 마닐라 중심부 글로벌시티에 자리 잡은 필리핀 한국국제학교(KISP). 영어 원어민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학교 교실에 들어서자 호주 중등교사 출신의 앨리슨 로이드(33)가 10명 남짓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거침없이 정답을 내놓자 로이드는 “맞았어요. 정확해요. 그럼 다음 페이지로 넘겨요”라며 빠르게 진도를 나갔다. 호주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정규 교사 출신답게 그는 다양한 수업교재를 사용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로이드는 “일본 국제학교에서도 가르쳐봤지만 KISP 재학생들은 어느 국제학교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영어를 구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10명 안팎의 소인원 학급이 구성돼 있어 집중도가 높고 학생들의 수업 참여가 적극적”이라고 덧붙였다.

옆 교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급반에 들어가자 수업 분위기는 더욱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국 럿거스(Rutgers)대 출신 매튜 자일스(29)는 “학생들의 적극적인 발표를 유도하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실력이 향상될 때마다 학생들에게 피자를 쏘고 있는데 오늘도 피자를 쏘는 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교육과정을 배우면서 영어 원어민 수업을 강화해 글로벌 마인드를 가진 한국인을 육성한다는 목표로 운영되는 한국국제학교의 역할과 기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내기업의 해외 진출 확대와 세계적인 한류 붐 확산으로 해외 교민 사회에서 한국 교육을 받으려는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 따라 2009년 9월 교육과학기술부가 해외에서 서른 번째로 문을 연 KISP는 한국국제학교의 성공적인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2009년 8월 부임해 학교 출범을 주도한 김성미(47)교장은 “생각과 행동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진 인재로 키우는 게 KISP의 인재 교육 목표”라며 “한국국제학교 가운데 개교 1년 만에 재학생 100명을 넘긴 것은 KISP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고 구김살이 없었다. 필리핀 현지 학교에 다니다 KISP가 개교하자 학교를 옮긴 장민우(13·중1)군은 “너무 알고 싶었던 한국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친구들도 생겨서 좋다”고 말했다. 장군은 지난 7월 한국웅변인협회가 서울에서 주최한 세계한 국어웅변대회 학생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김 교장은 “민우는 영어가 유창하고 타갈로그어(필리핀어)도 구사할 수 있는 글로벌 인재로 자라고 있다”고 말했다. 한류 붐 때문에 지난해 문을 연 필리핀 한국 문화원 원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KISP로 전학 온 황승빈(13)군은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에서 원어민 선생님에게 영어를 배우고 한국 교과과정도 배우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사업과 자신의 영어 공부를 위해 중1 때 필리핀에 온 최은수(16·고1)양은 중3 때 KISP로 전학 온 경우다. 최양은 “한국에 대해 알고 싶었고 국어 공부도 하고 싶었는데 KISP에서 꿈을 이뤘다”며 “토플 공부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어 영어 실력도 상승세에 있다”고 말했다.

KISP는 영·미계 국제학교와의 본격적인 경쟁을 목표로 운영되고 있다. 김 교장은 “영어만 잘하는 것으로 글로벌 시대에 대비하는 것은 부족한 시대가 됐다”며 “체계적으로 짜여진 한국의 교육과정을 통해 균형 잡힌 교육을 받아야 경쟁력 있는 글로벌 인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KISP는 한국어와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 비중을 6대 4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19명의 한국인 교사가 담당하는 국어·(사회교과 중) 국사 등은 한국어로 진행한다. 독해·작문·회화 등 순수 영어 수업은 초·중·고 모든 재학생이 주당 10시간씩 받고 있다. 사회·과학·수학 과목 일부는 영어로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원어민 교사는 미국·캐나다·호주 출신 교사 4명과 필리핀 교사 8명을 포함해 모두 12명이다. 영어 환경 조성을 위해 하루의 절반은 물 마시고 화장실 갈 때도 영어로만 말하게 하고 있다.

전체 재학생이 133명으로 원어민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11명가량이다. 학급당 30명에 이르는 다른 국제학교에 못지않은 원어민 교사 비율이다. 김 교장은 “입학생이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학급 정원을 25명으로 제한할 예정이기 때문에 교사들의 밀착 지도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현지 학교와의 교류를 비롯한 민간 외교활동도 활발하다. 마닐라의 명문인 타귁과학고 학생들이 매달 KISP를 방문해 공동 수업을 한다.

필리핀에서도 한류 붐이 강하게 불면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한국 학생들은 필리핀 친구를 만드는 시간이다. 이날 수업에 참가한 리자 마에(16·고1)는 “슈퍼주니어의 춤과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며 “한국에 가 직접 한류 스타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부산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과부 전문직으로 재직 중 자원해 KISP 초대 교장으로 부임한 김 교장은 “KISP는 한국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 학생들도 입학하고 싶은 학교로 만들어가고 있다”며 “졸업생 가운데 제 2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같은 인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사진=김동호 기자

◆KISP=필리핀 마닐라(아키노)공항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신흥 부촌 글로벌시티에 자리 잡고 있다. 지상 4층, 지하 1층짜리 건물을 인수해 교실 12개와 도서관·과학실·컴퓨터실·간호실·음악실·식당·체육관·시청각실 등을 갖추었다. 2000년대 들어 교민(13만 명으로 추정)이 크게 늘어나면서 현지에 진출한 기업과 교민 모금, 정부 지원을 합쳐 500만 달러(약 50억원)를 들여 건설됐다. 연간 학비는 7세 유치원생 300만원, 초등생 500만원, 중·고생은 600만원이다. 전체 예산의 40%가량은 국고로 지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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