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의지는 부질없는 것인가... 청년 괴테의 격정을 만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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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호 05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순수연극이 선호하는 주제다. 관객은 대체로 지루하다. 스토리텔링의 긴장감 없이 쏟아지는 상징적 장면과 철학적 대사의 향연은 우리의 자연스럽게 꿈틀대는 감각, 감정을 누르고 이성과 논리만을 바쁘게 움직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연극 전문 제작극장 명동예술극장이 궁극의 연극 ‘파우스트’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초빙한 본고장의 젊은 연출가는 이 따분한 존재론을 놓고 관객과의 적극적 소통을 단행했다. 예술의 격을 잃지 않으면서 대중과 소통하기. 오늘의 순수연극이 당면한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연극 ‘우어파우스트’ 10월 3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유럽의 마지막 르네상스적 천재’ 괴테가 60여 년의 집필 과정을 거쳐 말년인 1831년 완성한 인간 존재에 관한 대서사시. ‘파우스트’의 영혼이 오늘의 명동 한복판에서 숨 쉴 수 있을까? 독일의 젊은 거장 다비드 보슈가 택한 키워드는 ‘젊은 괴테’다. ‘우어파우스트’는 ‘원형 파우스트’라는 뜻으로 1774년 괴테가 스물다섯 나이에 집필한 ‘파우스트 초고’다. 18세기 중반 질풍노도의 시대, 계몽주의적 이성과 규범에 반기를 들고 격렬한 감정과 무제한의 자유를 추구했던 청년 괴테의 천재적 감성이 휘몰아치는 날것 그대로의 작품이기에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감각적 표현, 고전을 현대적 이미지로 풀어내는 감성적 상상력, 위트와 유머를 적절히 섞은 감정적 재미를 버무려 관객을 흔드는 보슈의 연출은 어쩌면 가장 괴테적인 언어다.

‘젊은 괴테’는 악마와 신의 내기,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낭만적 전제 없이 건조한 현실 속에도 어디서나 꿈틀대는 근원적 문제를 들이민다. 파우스트의 분신이자 우리 모두의 감춰진 내면인 악마 메피스토는 첫 등장부터 바지 속에 손을 넣고 무대에 침을 뱉으며 관객에게 추근댄다. 졸지 말고 파우스트의 영혼에 적극 개입하라는 제안이다. 인생을 다 산 노년에 영혼과 젊음을 거래하는, 고전 속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파우스트는 부와 명예를 얻은 뒤 인생의 허무를 토로하는 ‘방황하는 40대’로 회춘했다. 우리 삶에 밀착된 리얼리즘으로 줌인한 파우스트다. 시공간적 배경을 초월한 미니멀한 무대와 의상, 감각적인 조명과 영상 역시 그를 관객과 함께 숨 쉬게 하기 위한 장치다.

인간의 한계를 실감한 뒤 찾아오는 존재의 허무를 젊은 여인과의 관능적 사랑으로 보상받으려는 남성의 충동은 18세기나 21세기나 변함없는 모양이지만 이 무대가 확대경을 들이대는 것은 여인 그레트헨의 비극이다. 장편 파우스트에 담긴 인류애, 공동체 같은 거대한 스케일의 정치적 함의는 위선일 뿐 진정한 인간의 본질은 지극히 개인적인 내면에서 찾아야 하며 그레트헨은 원초적 본능과 초월적 자아 간 갈등의 생생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독실한 신앙인을 자처하며 ‘지은 죄도 없이 고해성사를 하는’ 순수의 화신이지만 악마의 유혹에 간단히 굴복해 버리는 나약한 인간 본성의 덩어리다. 순수란 얼마나 더럽혀지기 쉬운가? 인간의 의지란 악마의 장난 앞에 얼마나 보잘것없이 무너지는가? 인간은 결국 사랑을 위해, 사랑 때문에 사는 존재라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사랑조차 악마의 주문임을 깨닫지 못할 뿐. 사랑은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은 어떤가? 19세기 초 고전주의 시대, 숭고한 인간 존재의 모형을 꿈꾸던 노년의 괴테는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으로 인간을 끝내 구원하는 신을 의지했지만 젊은 보슈는 악마에 대한 연민을 택했다. 인간이란 그저 신이 시험관 속에 각종 체액과 머리카락 한 올을 적당히 섞어 만들어 내는 장난의 산물이라는 냉소적 시선이 동시대 우리의 정신을 더 뜨겁게 비추기 때문이다. 하물며 보슈의 신은 전지전능한 절대자도 아니라 누더기에 휠체어를 의지하며 우리가 미는 방향에 따라 다른 길을 가야 하는 불안한 존재다. 신조차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이유다.

휠체어에 앉아 지구 모양의 공을 이리저리 갖고 노는 신. 인생이란 신이 던진 공을 받아치는 것이라면 아무리 신‘악’과 형이상‘악’을 탐구한들 스스로 친 공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진리가 존재의 의미를 찾아주지 못함을 깨달은 고독한 인간은 끊임없이 사랑에서, 종교에서 구원을 찾지만 사랑조차 악마의 주술이며 신 또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다는 것이 보슈가 정의한 ‘원형 파우스트’의 영혼이다. 답답한 인간의 현존은 예나 지금이나 답을 찾을 수 없다. 시대를 넘어, 국경을 넘어 무한히 반복될 뿐이다. 덕분에 파우스트의 영혼은 오늘도 무대 위에 유효하게 살아난다. 졸리지 않을 만큼 감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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