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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과 콘도미니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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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일본학

살다 보면 법원에 출두해야 할 일도 생기는 것 같다. 누구나 젊었을 때는 그런 일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평균 수명도 길어지고 복잡해진 이 세상에선 옛날과 달리 어떤 형태로든 법원에도 출두하게 되는 듯하다.

 최근 우리 집으로 서울고등지방법원에서 출석요청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걸 보자마자 내가 뭔가 위반한 게 있나? 의아해 하며 최근의 내 행동을 되돌아보면서 천천히 큰 봉투를 뜯었다. 아무래도 법원에서 출석요청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내용인즉슨 내가 갖고 있던 콘도회원권 회사가 도산했고 그 재산 처분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법원에 출석해 달라는 통지였다. 나는 1995년쯤 저렴한 콘도미니엄 회원권을 하나 구입했다. 당시 한국을 잘 모르던 나는 저가이면서도 온천이나 풀장을 겸비했다는 콘도 광고를 보고 이 정도면 괜찮다고 판단해 즉각 구입했다. 콘도이용권이라도 잘 이용하면 일본에서 온천여행 갈 때의 기분과 같으리라고 여겼다. 처음 몇 년간은 방학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1년에 한두 차례 이용하는 데 비해 관리비가 너무 비쌌다. 그 관리비만 가져도 훨씬 좋은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는 관리비를 내지 않고 회원 자격만 유지했다. 그런 탓에 최근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콘도 매매시장에 내놓아도 너무 헐값이어서 그냥 갖고 있는 상태였다. 내 회원권은 평생회원권이므로 더 나이를 먹으면 쓸모가 있을 것도 같았다.

 9월 초의 어느 날 아침 9시30분에 나는 지정된 법정에 출석했다. 8시30분까지는 등록을 종료해서 자리에 앉아야 진행이 잘 된다고 출석요청 편지에 적혀 있었지만 나는 차 번호가 그날 쉬는 번호에 해당되는 바람에 외부 주차장을 찾느라 30분 이상을 허비했다. 그래도 심의 개시 예정 시각인 9시30분에는 아슬아슬하나마 자리에 앉았다. 법정의 강당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판사진이 9시3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8시30분에 온 많은 사람들 중에는 간혹 혼잣말로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조용히 기다렸다. 일본의 법정이라면 판사가 약속시간을 어겼을 경우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와서 출석자들에게 지연 이유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참석자들도 불만은 있어도 가만히 참고 30분 이상을 기다렸다. 한·일 간의 큰 문화적 차이를 느꼈다.

 10시가 지나자 세 명의 판사가 나타났고 그들은 지연에 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바로 심의를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 이런 권위주의가 사라진 지 오래라고 알고 있었는데, 놀라웠다. 이후의 진행은 원활했다. 회사 측 설명과 관련자들의 질의가 이어졌고 합의가 안 된 사안들이 몇 가지 나왔으므로 11시30분쯤 재판장은 9월 말쯤 속행 일시를 발표하고 그날의 공방은 끝났다. 나는 다음 일시에 선약이 있어 출석하기가 어려워 법정대리인에게 위임할 작정이다.

 개인이 구입한 콘도의 구입 금액 전체를 변제해주겠다고 하니 내겐 나쁠 게 없다. 잊고 있던 콘도회원권이 법정을 통해 추억을 되살려준 사건이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일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