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밸리를 기웃거리는 CI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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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자금을 필요로 하는 유능한 사업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캐시 드마티니는 최고의 벤처 캐피털 회사들이 몰려 있는 샌드 힐 로드를 찾아갔다. 거기서 드마티니는 신생 벤처자본 회사인 인큐텔(In-Q-Tel)측에 자신의 사업 구상을 설명했다.

인큐텔社 경영진은 온라인 문서에 대한 저작권 침해를 예방할 수 있다는 드마티니의 설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결국 인큐텔社는 그녀의 벤처회사 미디어스팬.컴에 2백만 달러 이상을 종잣돈으로 제공했다. 인큐텔社는 또 멀리 동부에 있는 보다 유명한 모회사의 전문가들이 미디어스팬社의 기술을 시험해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드마티니는 “‘인큐텔社야말로 정말로 멋진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사업이 되게끔 만들 용의가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인큐텔社의 ‘멀리 동부에 있는’ 모회사는 바로 중앙정보국(CIA)이다. 오늘날 CIA는 ‘멋진 기관’은 커녕 고유업무인 ‘첩보 활동’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인큐텔社의 도움으로 CIA는 다시 한 번 실리콘 밸리 및 여타 하이테크 세계의 핵심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인큐텔은 CIA로부터만 자금을 지원받는 비영리 민간기업으로 지난해 말 의회의 승인을 거쳐 CIA 예산 중 2천8백만 달러를 투입해 설립됐다. 일반 벤처자본 회사와 유사하게 운영되는 인큐텔社의 이사진에는 록히드社의 최고경영자였던 놈 오거스틴과 윌리엄 페리 前 국방장관 같은 쟁쟁한 실력자들이 포함돼 있다.

인큐텔社의 임무는 첨단장비 분야에서 한때 민간부문보다 우월했던 CIA의 위상을 되찾는 데 기여할 하이테크 창업회사들에 투자하는 것이다. 냉전시절 CIA는 TRW 같은 첨단장비 연구 회사들에 투자함으로써 하이테크상의 우월한 지위를 향유했었다.

그러나 그런 지위는 1990년대 중반 일반 소비자들도 인터넷을 통해 컴퓨터와 무선통신 기술에 접하게 되면서 크게 손상됐다. 조지 테닛 CIA 국장은 “高해상도의 위성 사진과 여타 전자 정찰 분야는 정부의 배타적인 영역이었지만 지금은 테러분자를 포함해 누구라도 돈만 있으면 구입할 수 있다”고 개탄했다.

CIA는 컴퓨터 게임 디자이너였던 길먼 루이(39)를 인큐텔社의 사장으로 영입했다. 루이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비행 시뮬레이션 장치인 팰컨을 발명해 富와 명예를 얻은 인물이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회사를 장난감 제조업체인 해스브로에 7천만 달러를 받고 매각했다.

인큐텔社가 CIA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인터넷 통신상의 보안과 막대한 기밀자료의 안전한 보관 등 CIA가 당면한 각종 기술적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일이다. 또 인큐텔社가 자금상으로 독립하는 것과, 조직이 방만하지 않으면서 수익성을 갖춘 업체로 발전해 여타 정부기관들의 모델이 되게 만드는 것도 CIA의 계획에 포함돼 있다.

소수의 전자상거래 및 테크놀로지 귀재들로 구성된 인큐텔社는 젊음에 넘치고 비형식적인 실리콘 밸리의 창업문화를 의식적으로 모방하고 있다. 그리고 인큐텔社의 웹사이트는 “굉장히 멋진 일…”(CIA 안내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표현)을 수행할 기회로 구직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올해 초 사무실을 개설한 이래 인큐텔社에는 자금에 굶주린 창업회사들로부터 약 3백 건의 지원 요청이 쇄도했다. 그들 중 인터넷 보안 기술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8개 기업만이 투자 대상으로 선정됐다. 인큐텔社는 CIA에 필요한 기술을 갖춘 사업체를 창업하려는 사업가와 발명가들을 발굴하려 노력하고 있다.

루이에 따르면 대다수 창업회사들은 CIA의 후원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인큐텔社가 CIA 투자회사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기업인들도 있다.

메릴랜드州의 컴퓨터 시스템 설계사 기프 멍거가 운영하는 회사는 지난달 인큐텔社로부터 3백50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그는 인큐텔社가 CIA와 연계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CIA의 관료주의적 태도를 우려해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멍거의 엔지니어팀이 ‘네터레이저’(컴퓨터 시스템을 해커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기술)상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작업을 CIA의 전문가들이 도와준 후부터 멍거는 CIA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됐다. 멍거의 말이다.

“CIA의 컴퓨터 전문가들은 우리 회사의 컴퓨터 전문가들과 비슷했다. 그들 역시 피자를 즐겨 먹으며 일할 때는 미친 사람처럼 몰두했다. 그들은 또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얻지 못했을 높은 수준의 전문기술을 전수해줬다.”

인터넷상의 개인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는 CIA가 새로운 인터넷 기술 분야에 진출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정부기관 감시단체들은 정부기관, 특히 CIA처럼 경직된 기구에 과연 ‘융통성 있는 자본주의’를 실천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케이토연구소(워싱턴 D.C. 소재)의 분석가 이반 이랜드는 “정부는 시장(市場)의 승리자를 선발하는 데 매우 무능했다. 인큐텔社 설립은 비효율적인 관료주의를 개혁하지 않으려는 구실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인큐텔社는 스스로 거둔 성공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인큐텔社는 그 특수한 위상 때문에 수익금 중 재투자되지 않는 부분은 법에 따라 연방정부 국고에 귀속될 것이다. 반면 투자에 실패할 경우에도 인큐텔社는 실리콘 밸리의 다른 회사라면 꿈도 꾸지 못할 곳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연방의회에 예산 증액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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