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혼을 다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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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금 세계는 소프트웨어 혁명에 휩싸여 있다. 미국의 애플이 단연 선두주자다. 패자(敗者)는 딛고 설 땅마저 사라졌다. 지난 주말 세계 최대 PC 업체인 휼렛 패커드(HP)가 컴퓨터 사업을 떼어내고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인 오토노미를 10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 스마트폰 등장으로 PC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사실상의 항복선언이다. 세계의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일본의 닌텐도 역시 순이익이 전년 대비 82%나 쪼그라들었다. 게임의 중심이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옮겨가면서 자사 전용 게임기 시장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나온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의 이야기는 귀담아 들을 대목이 적지 않다. 중앙일보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그는 대기업을 향한 비난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삼성, 얼마나 훌륭하냐. 다들 애플 앞에서 쓰러져갈 때 그나마 고개 들고 버티는 게 삼성밖에 더 있나”고 반문했다. 노키아와 모토로라 등이 침몰하는데도 그나마 삼성전자만 빠른 속도와 유연성으로 ‘갤럭시’ 시리즈를 내놓아 애플과 정면승부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대기업 탓에 소프트웨어 업체가 다 죽었다는 지적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누구를 한번 욕해서 끝나면 얼마나 좋겠나”며 “대기업을 욕하면 의식 있다는 말을 들을지 몰라도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고 지적했다. 소프트웨어 산업의 부진에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벤처 1세대인 김 대표는 “돈 벌려고 벤처를 해 성공한 경우는 못 봤다”며 “자신의 분야에 대한 진지함(integrity), 혼(魂)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본 그는 “수많은 벤처들이 기술이나 열정이 없어서 망한 게 아니다”며 “룸살롱에서 술 마시고 흥청대다 사라졌다”고 쓴소리를 했다.

 게임의 룰이 바뀌면서 승자독식(勝者獨食·Winner takes all)의 무시무시한 세상이 전개되고 있다. 소프트웨어 혁명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면 국내 기업은 물론 한국 경제의 미래도 없다. 노키아가 흔들리면서 핀란드 경제 전체가 기우뚱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국내 기업들이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범한 것은 사실이다. 애플처럼 창의적인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기업의 태생적 한계로 지목돼 온 ‘따라잡기’라도 제대로 해야 살아남는 ‘혁명’의 시대다. 김 대표는 “지금이야말로 진지함을 되찾고 혼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로 비난에 열 올리기보다 모두 정신을 바짝 차리자는 주문이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