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다시 ‘빛 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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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3년 전 타계한 작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구한말(舊韓末)에 시작해 해방에 이르는 한민족의 비극과 애환의 드라마다. 섬진강변의 작은 마을 평사리 촌민들의 서로 얽힌 사연들이 일제하에서 찢기고 흩어지고 피 흘리고 새롭게 구성되는 삶의 비통한 진화를 식민지 민중의 장엄한 서사시로 승화시켰다. 평사리, 하동, 진주로 배경이 옮겨지다가, 연변 용정, 만주로 전전하고, 경성을 거쳐 다시 진주와 평사리로 귀환하는 소설의 구조는 결코 완결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머나먼 여정의 마지막 장에서 작가는 명희, 환국, 양현, 몽치, 소지감 등 미래의 『토지』를 이끌어갈 주인공들을 평사리로 모이게 한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 풍경 사이에서 뭔가 비장한 기운이 감돈다.

 그런 가운데, 읍내에 나갔던 집사 연학 노인이 실성한 사람처럼 덩실거리며 돌아왔다. 그가 내뱉은 말은 뜻밖에도 “독립 만세!”였다.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로 작가는 그 역사적 글쓰기의 종지부를 찍고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났다. 현대사에 기록된 그 해방이었다. 광복이었다. 마지막 장의 표제를 ‘빛 속으로’로 마감한 작가의 의도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토지』에 등장하는 1세대가 어둠 속에서 방황했다면, 2세대들을 ‘빛 속으로’ 내보낸 것이다. 말 그대로 광복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들, 『토지』의 후손들은 그 ‘빛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 광복 66주년을 보내면서 양현, 영광의 자식세대에 해당하는 필자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토지』의 2세대인 양현, 영광과 비슷한 연배의 작가로 김사량이 있다.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작가가 1939년 일본 문학의 최고봉인 아쿠타가와 상 2등에 올랐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조선인의 민족심리를 다뤘기에 1등을 주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는 그 작품의 제목이 ‘빛 속으로(光の中に)’였다. 동경제대 유학생인 주인공이 동경 빈민가 야학에서 조선인 2세이자 조선을 경멸하는 야마다 하루오라는 소년을 만나 동족의 연대를 싹 틔우는 불편하고도 주변적인 행로를 그려낸 김사량은 한민족이 결국 맞이할 ‘빛의 영역’을 밝히고자 했다. 6년 뒤, 김사량이 탈출해서 태항산 유격대에 합류했을 때, 광복은 느닷없이, 그야말로 눈부신 신부처럼 찾아왔다.

 광복의 ‘빛’이 자아낸 그 황홀감과 망연자실함을 선명하게 간직하고 살아온 유일한 세대가 1930년대생(生) 연령집단이다. 하루아침에 일장기가 태극기로, 일어가 조선어로 바뀌고, 산천초목의 모양과 생명이 낯설게 다가왔던 그 당혹감이 ‘빛 속으로’ 첫발을 내디딘 민족의 현실이었다(김윤식,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 두루 알다시피, 1930년대 세대는 세계사에서 흔치 않은 험난한 경로를 돌아 이제 노년에 무사히 안착했는데, 망연자실함은 그런대로 채워졌지만 첫발의 그 황홀감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음을 느낄 것이다. 미친 듯 춤추는 장터 군중들, 주먹으로 훔쳐낸 눈물의 환희, 지축을 흔들며 폭발한 설움의 향연이 ‘빛 속으로’ 나선 동포의 공통 언어였다면, 그것은 어디로 자취를 감췄는가? ‘제국의 그늘’에서 ‘조국의 양지’로 인도한 광복, 그것에서 시작된 새로운 ‘토지’는 왜 피식민의 상처를 치유하고 근사한 현대적 서사시를 펼치지 못했는가?

 그 황홀감을 매우 사나운 원한과 피해의식으로 둔갑시킨 것이 북한이고, ‘잘살아보세’라는 오기와 자존심으로 피해의식을 다스렸던 것이 한국이다. 광복의 ‘빛’이 북한에는 빛나는 보복심으로 응어리졌고, 한국에서는 산업화의 땀방울로 스며들었다. 빛의 눈부신 원형을 각각 그렇게 훼손한 한반도는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중이다. 북한의 인민은 굶어 죽었고, 남한은 이념의 순정성 시비로 몸살을 앓았다.

 그런데, 정작 가해자인 일본이 피해의식에 절어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우리에겐 광복이 일본엔 패전이 아닌 종전이다. 일왕 히로히토가 라디오를 통해 애통하게 선언한 바, “적이 잔학한 폭탄으로 짐(朕)의 충직한 신민을 살상하므로,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열고자 하는 짐(朕)은 미·영·중·소 네 나라의 공동선언을 수락함을 통고한다”고 했다.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위해 다시금 전진할 여지를 남긴 것이다. 이오시마 전투 영웅 다다미치 사령관의 외손인 신도 요시타카 의원이 독도 영유권 확인차 한국에 늠름하게 올 수 있었던 것도 종전 선언에 숨겨두었던 일본적 ‘빛’ 그러나 왜곡된 ‘빛’ 때문이다. 그렇다면, 1930년대 세대가 그날 눈부시게 바라봤던 한반도의 ‘빛’의 원형, 그 조건 없는 공통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뒤틀린 북한을 설득하는 길이요, 일본의 의도적 착각을 가해자의 속죄의식으로 바꾸게 하는 지혜이리라.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