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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판사(判事)들의 절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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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일등 사윗감, 최고의 선망 직종인 판사들이 실은 과로에 짓눌리고 윗선 눈치 보고 사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타협해도 될 일을 재판으로 끝장을 보는 ‘송사(訟事)공화국’에서 일본의 50배가 넘는 고발사건을 처리하느라 진땀을 뺀다. 최고 명예직인 대법관 한 사람이 처리하는 사건 수가 연 2700건이라면, 그건 3D 직종이다. 단독판사들은 수천 건의 송사에 파묻혔고, 부장판사와 배석판사는 주당 40건을 재판하고 주말에야 겨우 최종 판결문을 쓴다. 어떤 부장판사는 과다업무 앞에 ‘살인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였다. 정신이 좀 들면, 상관의 심기를 혹시 건드리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상관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대법원장의 수중에 놓여 있다. 그러니, 누가 감히 나서 사법부를 옭아맨 내부 모순을 혁파하려 하겠는가?

 선비 사(士)자 직업 중 대부(大夫)로 가는 길을 닦은 집단이 율사다. 이들은 정계를 장악했고, 재계 거물들을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사회를 발칵 뒤집는 거대 사건 뒤에 버티고 있다. 선비의 전형인 교수가 우유부단하다면, 율사는 현실 파악에 뛰어나고 사리판단이 빠르다. 일류 요리사가 날 선 칼로 회를 뜨듯 세상사를 법논리로 깔끔하게 재단하는 율사에게 권력과 부가 집중되지 않으면 이상하다. 판사 2500, 검사 1800, 변호사 1만2000, 이들이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파워엘리트다. 그런데 율사의 꽃인 판검사들이 정작 ‘법의 정신’보다 ‘조직의 명령’에 우선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비극이다. 내부 혁신이 안 되는 이유도 국민보다 수장(首長)과 정치권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 현실에 있다.

 정권의 마지막 검찰총장과 대법원장을 물색하는 요즘엔 그 정치적 계산이 극에 달한다. 대통령과 정권실세들의 퇴임 후 생사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사후 관리자를 제대로 낙점했음에도 부엉이바위에 올라야 했다. 문재인의 비통한 고백처럼 그게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마지막 수호천사를 고르는 청와대의 절박한 심정을 누가 짐작이라도 할까. 법무장관 권재진, 검찰총장 한상대를 투톱으로 전면 배치한 의중엔 ‘주군을 사수하라’는 특명이 들어있을 법하다. 안 그러면 혈기왕성한 50대 초반 율사를 검찰총수로 앉혔겠는가. 이 젊은 총수와 손발이 맞는 대법원장은 누구일까? 퇴임 후 철옹벽을 둘러칠 법문(法門)의 최고수, 대포를 쏴도 꿈쩍 않을 수비대장을 찾는 데 온 신경세포가 곤두서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정치적 계산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의 정의와 공익이 훼손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검사들은 기수(期數)와 의리로 총수의 운신 폭을 넓히는 데 수십 년 경력을 기꺼이 바친다. 멸사봉공! 또는 조직을 위하여! 이 통 큰 용단이 검찰문화를 얼마나 조야하게 만드는지 헤아리지 않은 채 한잔의 폭탄주로 미련 없이 봉합하는 풍경, 이게 검찰의 오랜 관행이다. 판사라고 다르지 않다. 인사권·예산권·지휘감독권이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사법부에는 분권, 자율성이란 단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대법원장의 이념과 지역색, 개인적 취(趣)와 벽(癖)을 거역하는 판사가 있다면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한다. 고등법원과 지방법원 판사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 윗선의 행보다. 급변하는 이 시대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심하는 판사의 행로는 험난하다. 그렇다고 한국 제일의 인재들이 공부할 겨를도 없다. 연공서열로 보직을 순회할 뿐, 재임용 탈락 같은 여과장치는 작동하지도 않는다. 함량 미달의 판사들이 줄대기로 요직에 진출하고, 유능한 판사들은 연공서열에 걸려 법복을 벗는 동안,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 과제는 창고에 처박혀 있다. 검찰 개혁, 사법부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다. 관료화·서열화에 짓눌린 율사들이 어떻게 세상의 정의를 곧추세우겠는가?

 주군(主君) 사수라는 정치 과제보다 더 절박한 것은 사법부의 동맥경화증을 푸는 일, 판사들이 법치주의의 빛나는 정의와 윤리를 실현하도록 제도적 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이다. 송사 공화국에서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의 복지’에 해당한다. 검찰총장 내정에 정치적 고려가 우선했다면, 대법원장만이라도 사법개혁을 주문해야 한다. 개혁 비전과 의지가 없는 사람이 또다시 6년을 눌러앉아 판사들의 절규를 즐기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것이다. 질식할 듯한 사법부 현실에 절망하는 일선 판사들은 사적 친분과 고정관념에 물든 내부자를 환영하지 않는다. 마치 의사가 환부를 도려내듯, 사법부의 중질환을 수술할 외부인사, 정치적 득실보다 법철학과 법의 정신에 복무하는 투사, 지역갈등에서 한발짝 물러선 중립적 인사를 애타게 갈망한다. 판사들이 이렇게 절규하는 나라에서 법치주의를 기대할 수 있는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