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집단 연극운동 기수 '혜화동 1번지 페스티벌'

중앙일보

입력

실험연극을 추구하는 젊은 연출가 집단 '혜화동 1번지'의 2기 동인 네명이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였다. 손정우(39.수원대 연극영화과 겸임교수). 이성열(38).박근형(37).김광보(36)가 그들. 최용훈(37)도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급한 일이 생겨 참석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리더격인 이성열의 비난이 쏟아진다. "항상 모임에 지각하더니 이번엔 불참이야. 그리고 너 근형아.술 좀 사라. 지난해부터 연극상을 9개나 독식했으면서도 입을 닦을 셈이냐." "맞아! 그럴 수는 없다." 손정우와 김광보도 압력을 넣는다.

박근형이 백기를 든다. "알았어.그만해." 겸연쩍은 듯 손사래를 친다.

혜화동 1번지는 지금은 우리 연극계의 중진으로 자리잡은 연출가 이윤택.김아라.류근혜 등 일곱 명이 연극의 도전.실험정신을 표방하며 1994년에 만든 단체. 이를 98년에 2기 동인 다섯 명이 물려받아 해마다 '혜화동 1번지 페스티벌' 을 개최하며 소집단 연극운동을 펼쳐오고 있다.

올해에도 13일부터 5월말까지 이들의 세 번째 무대 '5비이락(五飛異樂)' 이 열린다.

다섯 가지 색다른 즐거움을 주겠다는 뜻(개별 작품은 별표 참조). 역사.사랑.일상 등 저마다 자유롭게 주제를 선택해 그들 나름의 독특한 색채를 선보일 예정이다.

자신의 극단을 따로 지휘하면서도 3년째 함께 작업하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였다. 말투도 스스럼없다. 이성열이 또 박근형을 공격한다.

"오비이락이 아니라 삼비이락(三飛二落)이 될지 몰라. 셋만 뜨고 둘은 주저앉는 거지. 지난해 우리가 공포연극제를 할 때도 너만 쏙 빠져 코미디를 만들었잖아. 우리가 끙끙대며 공포물을 만든답시고 고생할 때 혼자 재미를 봤지."

지략가 스타일의 박근형이 해명한다.

"형도 못할 말이 없네. 우리가 같은 주제로 작품을 만든 적이 있었나. 다양하게 실험하자고 했잖아. 그러면 됐지, 왜 그래. " 견 다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유가 생겨 건네는 우정의 대화다.

처음 동인을 만든 2년 전만 해도 그들에겐 앞이 막막했다.

IMF 사태가 터지고, 관객은 격감하고, 작품을 올릴 공간과 예산도 없고…. 지금은 한국 연극계의 386세대를 대표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당시만 해도 세상은 캄캄해 보였다.

그래서 그들에겐 혜화동 1번지가 소중하기만 하다.

다섯 명이 함께 일어서는 지렛대가 됐기 때문. 50여 객석의 소극장 혜화동 1번지도 '대학로에서 가장 열악한 극장' 에서 '한국 연극계의 당당한 문화코드' 로 자리잡게 됐다.

젊은 동인제 연극이란 새로운 형식을 정착시킨 것이다.

과묵한 김광보가 입을 뗐다. "정말 혜화동 1번지의 덕을 많이 봤다. 연극을 계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있었기에 우리 모두가 큰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러나 불만도 생겼다. 소자본.소극장에만 자족한 것은 아닌 반성하자. "

유일하게 교수로 있는 손정우가 학자답게 정리한다. "초기의 벤처정신을 회복하자. 극장도 3기 후배에게 넘겨줄 시기가 됐다. 새로운 형식.내용을 주창했던 취지는 간직하되 각기 다른 현장에서 다시 태어나자. 외부의 평가에 자만해선 안 된다."

박근형도 추임새를 넣는다. "그렇다. 지금까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면 앞으론 우리가 공동제작한 작품에도 도전하자. 개성만을 앞세운 탓에 큰 작품을 내지 못했다. 내년엔 힘을 합해 뮤지컬을 만들자. "

이성열이 또 농을 건다. "한번 왕창 망해보자는 거냐. "

박근형의 반격도 날카롭다. "왜 망해, 돈만 바르지 않으면 되지. 진짜 한국적 뮤지컬을 만들자 이거야. 요즘 뮤지컬에선 무대장치.의상에 치여 드라마와 배우가 보이지 않아. 언더정신이 실종됐어. "

얘기가 꼬리를 문다.

연극계 현실.연극의 미래.영화와 디지털 문화의 득세 등.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손정우는 대학 강의 때문에, 김광보는 올 공연의 1번 타자라 연습 때문에 먼저 일어섰다.

이성열과 박근형은 술 한잔 더하자는 눈치다. 택시를 잡아타며 "아저씨, 대학로요" 를 외친다. 대학로는 그들의 영원한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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