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의 대반격…벼랑끝에서 탈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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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는 미 사우스 캐롤라이나州 예비선거에서 승리하기 전날 밤 유세 버스에서 이젠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버스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안개 짙은 북부 지역을 지나는 동안 참모들은 휴대폰으로 유권자들에게 막판 지지를 호소했고, 버스 앞좌석에 앉은 거물급 지지자들도 담론에 바빴다. 뒷자리에 앉은 부시도 용기가 되살아났다. 자체 여론조사 결과마저 낙관적이었다.

부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州 예비선거 승리로 당장 대통령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거운동을 위기에서 구했고, 장기전에 대비해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었으며 공화당 후보지명전에 다시 매진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보수적인 남부 지지자들의 지지를 호소하면서 8백만 달러의 거금을 동원해 존 매케인 후보에게 융단폭격을 가했다. 결과는 54% 對 41%의 대승이었다. 부시는 이번 승리를 계기로 공화당 유권자 외에도 특히 그를 못미더워 하기 시작한 거액 기부자와 공화당내 기성 정치인들의 지지에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따지고 보면 사우스 캐롤라이나州는 남부의 뉴햄프셔州로 치닫고 있었다. 매케인은 그곳에서 집중적인 유세를 펼쳤다. 그는 재향군인들 외에 美 동북부 지역에서 은퇴한 후 이곳으로 이주한 유권자들의 지지에 기대를 걸며 필승의 뜻을 밝힌 바 있다.

부시는 남부 문화의 중심지에서 거둔 이번 승리로 적어도 일시적으론 선두주자 위치를 탈환했다. 그러나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극우로 치달아야 했고 상대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진흙탕에 발을 더럽혀야 했다. 매케인에 대한 비열한 공격에 나서면서 그의 전국적인 지지도는 폭락했다. 민주당측도 부시가 사우스 캐롤라이나州에서 보인 우경화 움직임에 주목했다.

부시는 또 종교적 보수파가 많은 ‘바이블 벨트’에서의 승리확보를 위해 엄격한 낙태반대를 공화당 강령에 계속 유지하겠다고 공언했는가 하면 공화당내 동성애자 모임인 ‘로그 캐빈 리퍼블리컨스’와도 만나기를 거부했고, 사우스 캐롤라이나州 유세도 타인종 간 데이트가 금지된 밥 존스大에서 시작했다. 게다가 개혁파 유권자의 거부감을 살지도 모를 인신공격·사실왜곡·속임수 등 비열한 전술마저 동원했다.

부시가 후보지명에 성공한다면 그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전례없이 치열한 양상을 띨 것으로 예상되는 대통령 선거전에서도 그런 전략을 고수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부시가 사우스 캐롤라이나州에서 그랬던 것만큼 비열한 공격으로 효과를 본 후보는 지금까지 앨 고어 부통령뿐이다. 고어도 부시처럼 정치 명문가 출신이지만 종교적 보수파의 요구에 대한 부시의 수용을 고어가 물고 늘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런 점에서 고어와 부시의 대결은 치열한 접전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물론 공화당의 후보 경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매케인은 최소한 ‘슈퍼 화요일’(3월 7일)
까진 계속 싸우겠다는 입장이다. 그는 사우스 캐롤라이나州에서의 패배를 시인했지만 설욕전을 벼르며 부시의 비열한 전술과 우경화 문제를 계속 물고 늘어질 것임을 공언했다. 그러나 매케인에겐 시간이 없다.

그는 미시간州 예비선거(2월 22일)
에서 부시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발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신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겠지만 “백악관 입성을 위해 비열한 길을 걷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부시의 비전이 ‘두려움을 조장하는 부정적 메시지’라면 자신의 비전은 ‘낙관적인 포용의 메시지’라고 밝혔다.

부시도 반격을 자제했다. 그는 선거일 밤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TV 뉴스 프로에 출연해 매케인에 대해 “나는 그가 자신의 선거운동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엔 컬럼비아市의 한 무도회장에서 축하인사를 받으며 슬쩍 매케인을 짚고 넘어갔지만 초점은 전당대회 이후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이것은 클린턴-고어 시대가 끝나는 시발점”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나머지 지명전에서 승리해야 한다. 부시와 매케인은 이번주와 다음주 백병전에 나설 것이다. 첫 무대는 미시간州다. 부시는 뉴햄프셔州 예비선거 패배 이후 줄곧 그 州에서 매케인에게 뒤졌지만 지지도는 이미 사우스 캐롤라이나州 승리 이전부터 회복되고 있었다. 자체 여론조사 결과도 주말이 지나면서 백중세로 드러났다.

한편 매케인은 자신의 텃밭인 애리조나州 예비선거(2월 22일)
에서 승리를 확신하며 워싱턴州와 버지니아州 예비선거(2월 29일)
에서도 승리를 기대하고 있다. 그는 여세를 몰아 13개 州에서 일제히 예비선거가 실시되는 ‘슈퍼 화요일’의 대격전에서 부시를 공략할 계획이다.

매케인 진영은 부시가 공화당 후보지명을 위해 지나칠 정도로 우파쪽으로 기운 사실에 희망을 걸고 있다. 매케인의 정치담당 참모 존 위버는 “극우주의자임을 자처한 부시로 하여금 다른 곳에서 대가를 치르게 할 작정”이라고 밝혔다. 만일 매케인이 1∼2곳의 예비선거에서 승리를 거둘 경우 3월 7일 뉴잉글랜드·뉴욕·캘리포니아州에서 동시에 실시되는 예비선거에서 부시의 극우 입장을 물고늘어질 기회가 생긴다. 그러나 뉴욕州와 캘리포니아州의 예비선거는 뉴햄프셔州나 사우스 캐롤라이나州와 달리 공화당 유권자만 투표할 수 있기 때문에 매케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사우스 캐롤라이나州 예비선거는 뉴햄프셔州 못지 않게 중요한 예비선거였지만 매케인이 의도하는 방향과는 반대였다. 사우스 캐롤라이나州는 전통이 중시되고 권위있는 정치인에 대한 존경심이 있는 곳이다.

휘청거리던 공화당 선두주자가 사우스 캐롤라이나州에서 보수세력의 지지를 발판으로 제자리를 되찾은 경우는 지금까지 3차례 있었다. 1988년과 92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지명전에서 사우스 캐롤라이나州 보수파의 지지로 다시 선두에 나서게 된 사람은 바로 부시의 부친인 조지 부시 前 대통령이었다. 부시 주지사는 적절한 조언을 구할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는 곧 자신의 매너와 메시지를 수정했고, 선두주자로서의 자만심도 내팽개친 뒤 텍사스 주지사 재임시의 치적을 내세우며 ‘실적있는 개혁가’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특히 부시와 그의 참모들은 근래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로 ‘저속한 공격’을 매케인에게 대대적으로 퍼부었다. 부시는 소위 ‘이해관계가 없는’ 집단들의 지원 아래 엄청난 선거자금을 썼다. 부시측은 수많은 라디오 및 TV 광고와 우편물 발송, 전화 등을 통해 매케인이 일관성이 없고 낙태에 관대하며 노조에 호감을 보일 뿐 아니라 정작 자신은 워싱턴의 사악한 로비스트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개혁을 외치는 위선자로 내몰았다.

부시와 그의 진영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고전적인 ‘막판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상대방에게 반격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선거 바로 전날 도착하도록 전단을 우송한 것이다. “그는 보수주의자로 자처하지만 세금 인상을 지지하고 무고한 인명을 구하겠노라며 허풍을 떤다. 그는 선거자금법의 개혁가로 자칭하지만 그의 계획은 워싱턴의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주는 반면 보수 우파들은 입도 뻥끗 못하게 만들 것이다.”

부시 진영은 지역 대리인들을 통해 낙태·도박·세금 등에 관한 매케인의 다양한 ‘배당(背黨)
행위’를 비난하는 사전 녹음된 자동 전화메시지를 수십만 통이나 띄웠다. ‘무소속’ 단체와 인물들도 맹공을 퍼부었다. 전국애연가협회, 패트 로버트슨, 제리 폴웰(둘 다 극우파 종교계 지도자)
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리고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단체도 있었다. 심지어 州방위군의 부사령관까지 가세해 군의 정치중립 방침을 무시하고 부대원들에게 부시 지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낙태반대세력이 선택한 매체는 라디오였다. ‘전국 생명의 권리 연합’은 매케인이 태아세포연구에 찬성표를 던진 사실과 낙태찬성론자인 워런 러드먼 前 상원의원과의 친분 등을 떠벌렸다. 공화당전국위원회는 지난해 10월 낙태반대단체에 25만 달러를 지원했다.

역설적이지만 부시의 가장 성공적인 전술은 매케인의 선거운동 중 유일했던 비방 광고를 물고 늘어진 것이었다. 매케인의 워싱턴 진영은 지역 참모들의 의견도 구하지 않고 부시를 빌 클린턴에 비유하는 광고를 방송에 내보냈다. 한 광고에서는 “우리는 정말 미국인들이 신뢰할 수 없는 또 다른 정치인을 백악관에 들이려는가?”고 물었다. 매케인은 부시가 “클린턴처럼 진실을 왜곡한다”고 그를 비난했다.

개혁가로 자임해온 매케인으로선 분명 큰 실책이었다. 부시는 “믿을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난 ‘이 기회를 잡자’고 말했다.” 그의 선거진영은 매케인을 쓸데없는 말만 하는 위선가라고 비난하는 광고를 내보냈다. 매케인은 비방 광고를 중단했고, 사우스 캐롤라이나뿐 아니라 공화당 후보지명전 내내 공격성 광고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참모진을 펄쩍 뛰게 만들었다.

부시에게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는 없었다. 뉴햄프셔州에서의 대실패는 의도치 않은 수확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충성도를 살펴볼 기회를 준 것이다. 그는 명단을 만들었으며 “아주 주의깊게 관찰 중”이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문가가 뭐라든, 그는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언론이 매케인을 치켜세웠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부시와 지지세력이 그를 혼쭐내줬는데. 공화당의 진보진영이 부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어차피 동부 엘리트층의 표는 얻지 못할텐데. 전문가들이 그에게서 투지도, 대통령직에 걸맞은 깊이도 부족하다고 본다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매케인이 그를 클린턴에 비유했을 때 반격은 간단했다. “감히 내 도덕성을 의심하지 말라!”고 그는 일갈했다.

이 모든 것들이 선거 당일 부시에게 작용했다. 출구 조사는 그가 공화당원들 사이에서 68%대 26%의 압도적 승리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시는 비당원 표도 3분의 1 이상 얻었다. 놀랍게도 사우스 캐롤라이나州의 유권자들은 부시가 아닌 매케인이 더 지저분한 선거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건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남부지역의 공화당원들 사이에선 누군가를 제 2의 클린턴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비열한 공격은 없다. 매케인의 치명적인 실수는 그가 직접, 그것도 카메라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찰스턴市의 호텔 방에서 출구조사 결과를 읽는 매케인의 표정은 침착했다. 부시 진영은 매케인이 참전용사들의 요구를 저버렸다고 비난해 그를 격분시켰고 심각한 고통을 안겨줬다. 그는 부시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출구 조사는 부시가 참전군인들의 표를 반이나 잠식했음을 보여줬다. “어떻게 당신에 대한 그런 비난이 먹혀들죠?”하고 상심한 매케인의 아내 신디가 눈물을 글썽이며 남편에게 물었다. [뉴스위크=Howard Finema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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