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 늦깎이 등단해 ‘오발탄’으로 문단 명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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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호 09면

1981년 6월 하순의 어느 날. 필화사건의 후유증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소설가 이범선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젊은 시절 ‘오발탄’ ‘학마을 사람들’ 등을 애독했던, 내가 좋아하는 50년대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취재를 위해 혹은 이런저런 문인들의 모임에서 여러 차례 만나기는 했으나 사사로운 만남을 가질 만한 관계는 아니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11> 학처럼 살다 간 소설가 이범선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신문사 근처 다방에 가니 구석자리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내 두 손을 꼭 부여잡고 필화사건에 대해 들었다면서 간곡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눈자위가 붉어지고 있었다. 시국을 탓할 때는 분노의 표정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헤어지면서 그는 영양제라며 조그마한 약병을 손에 쥐여주었다. 건강을 잘 챙기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사실 건강을 챙겨야 할 사람은 이범선 자신이었다. 깡마른 데다 약골 체질이어서 예순을 갓 넘긴 나이였지만 열 살은 더 들어 보였다. 이듬해인 82년 초 캐나다 여행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돌아와 뇌일혈로 쓰러져 병석에 눕더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3월 13일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재직하던 한국외국어대 동료 교수와 학생 그리고 문단의 많은 조문객이 아호인 ‘학촌(鶴村)’의 학처럼 살다 간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애석해했다. 다정다감한 데다 외유내강의 강직한 면도 있어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이범선은 35세의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동년배의 다른 문인들과 비교하면 10여 년이 늦었던 셈이다. 같은 해에 등단한 이호철보다 열두 살이 많았다.
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920년 평안남도 신안주에서 태어난 그는 진남포공립상공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로 건너가 은행원,회사원으로 일하다가 일제 말기에 돌아와서는 봉천 탄광에 서 경리를 보기도 한다. 광복 후 월남해서는 더 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군정청과 전구회사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교무과 직원으로 일하면서도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49년 29세의 나이로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한다.

50년대 후반 몇 개 고등학교의 교사직을 포함하면 62년 한국외대 교수가 되기까지 이범선이 전전했던 직업은 열대여섯 개에 이른다. 쉴 새 없는 직장생활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틈틈이 소설 습작에 매달린 끝에 55년 마침내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암표’ ‘일요일’ 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휘문고와 숙명여고에 재직한 5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 그는 잇따라 문제작을 내놓았다. 그에게 첫 문학상(현대문학 신인상)을 안겨준 소설이 57년 발표한 ‘학마을 사람들’이다. 이 작품은 광복 후의 이념적 갈등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눈여겨봐야 할 것은 ‘학’이라는 향토성 짙은 신화적 상징물이다. 학마을 사람들이 산에서 애송(어린 소나무)을 파내어 안고 내려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가 추구하는 고고하고 우아한 인간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애송은 바로 학이 날아와 깃든다는 나무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위상을 굳건하게 해 준 이른바 출세작은 59년 발표한 ‘오발탄’이었다. 6·25전쟁을 겪은 한 월남 가정의 암담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리얼하게 묘사했다. 계리사 사무실의 서기로 일하는 주인공에게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다 미쳐버린 어머니,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온 뒤 좌절 속에서 방황하는 동생, 양공주로 자포자기의 삶을 이어가는 여동생, 그리고 임신한 아내가 있다. 이 소설의 결말은 동생이 권총 강도 행각을 벌이다 체포되고 아내가 난산 끝에 숨을 거두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절망감을 느낀 주인공은 실성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가자! 가자!”고 절규하면서 ‘나는 신의 오발탄인가’ 하는 번뇌에 휩싸이게 된다.

이 소설을 발표하면서부터 이범선에게 ‘오발탄’과 ‘가자! 가자!’라는 절규는 별명처럼 따라다녔다. ‘동인문학상’ 후보작에 오르는가 하면 제1회 ‘오월문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현목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한국 영화 사상 초유의 수작이라는 평가도 받았다.하지만 이 소설로 인한 후유증도 만만치 않게 겪었다. 당국으로부터 ‘반공사상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는 눈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자! 가자!’라는 절규는 북으로 가고 싶다는 뜻이고, 이는 한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간접적 저항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범선은 고등학교 교사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영화 ‘오발탄’은 오랫동안 개봉되지 못했다.

이범선이 북쪽의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중학 시절 고향 집 뒷동산의 언덕과 인근 호숫가에서 장차 소설가가 될 꿈을 키웠다고 했다. 등단은 늦었지만 그가 쓴 소설들의 많은 소재가 그때 얻어졌다는 것이다. 소설가가 된 후 등산과 낚시가 가장 중요한 취미가 된 것도 소설 구상을 위해서였다. 건강 때문에 등산은 다소 자제했지만 그는 문단의 몇 안 되는 낚시광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오영수,박연희,서기원,김시철 등과 함께 ‘문인 낚시회’를 만들기도 했고, 낚시 취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식을 줄 몰랐다.

한데 그의 낚시 취미는 특이한 데가 있었다.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낚시터를 찾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낚시할 때도 꼿꼿이 앉아 눈을 감거나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기가 일쑤였는가 하면 고기가 잡히더라도 대개는 다시 놓아주는 이른바 ‘방생(放生) 낚시꾼’이었다는 점이다. 이범선과 함께 낚시를 즐긴 문인들은 그가 낚시하는 모습을 ‘학’에 비유하곤 했다. 김시철 시인은 “저수지 근방 소나무 숲에 학들이 날아드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 거리와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찾아가 낚시를 즐기고 학의 모습을 지켜봤다”고 회고했다. 언제나 학처럼 고고하고 우아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일평생 그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그 뜻이 통했는지 이범선은 수명은 비교적 짧았지만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폈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에 피선되는 한편 ‘대한민국 예술상’을 수상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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