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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의 출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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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한국은 반도체로 먹고사는 나라다. 무역흑자의 절반을 반도체에서 올린다. 지난 4일 미국 인텔이 3차원(3D) 반도체를 선보이며 “연내에 양산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인텔이 어떤 곳인가.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다. 당연히 뉴욕 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은 “반도체 50년 역사상 최대의 혁명적 변화”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에 비해 한국은 너무 무덤덤하다. 국내 언론들은 인텔 발표자료를 무미건조하게 다뤘을 뿐이다. 여의도의 반도체 애널리스트들 역시 “시장에 나와 봐야 한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삼성전자 최지성 대표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장담했다.

 반도체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복수의 서울대 전자공학과 교수들은 “두고 봐야 한다”는 보수적인 진단을 내놓았다. 3D 반도체는 10년 전부터 연구된 사안이며, 언젠가는 3D로 넘어갈 것으로 예측돼 왔다고 한다. 누가, 언제 3D로 넘어가느냐만 문제였다는 것이다. 서울대 교수들은 “복잡하고 비싼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꼭 3D로 먼저 갔다고 좋은 게 아니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 반도체 업계가 기존 기술로 경쟁력과 수익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상책”이란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KAIST 전자공학과의 최양규 교수는 정반대 입장이다. 사실 3D 반도체의 주인공은 한국인이다. 1998년 미국 UC버클리 박사과정 때 3D 반도체를 세계 처음으로 만든 인물이 바로 최 교수다. 그는 전화에 대고 대뜸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첫 반응을 보였다. 최 교수는 “반도체의 미래를 위해 3D는 피할 수 없는 진화(進化) 방향”이라며 “집적도를 높이고 회로선폭을 20나노 이하로 좁히려면 다른 대안이 없다”고 강조했다.

 -3D 반도체를 만들려면 복잡하고 비싼 설비가 필요한가?

 “오해다. 기존 설비를 보완하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처리 속도가 빠르고 ‘데이터 엉킴 현상’을 막을 수 있다는데.

 “속도는 조금 빠르고 데이터 엉킴이 낮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대 강점은 대기전력(stand-by power)을 최고 100분의 1로 줄인다는 점이다.”

 인텔이 3D 반도체를 휴대전화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에 집중하려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의 최강자인 인텔은 전력소모가 많아 모바일 시장에선 힘을 못 썼다. 초절전형 3D 반도체를 앞세워 삼성전자와 영국의 ARM이 장악한 AP시장을 역습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싸움이 AP시장에서 멈출 듯싶지 않다는 점이다. 수많은 장점을 가진 3D 반도체가 새로 등장한 만큼 AP는 물론 D램과 플래시, CPU 시장까지 전면적인 반도체 대전(大戰)으로 번질 게 분명해 보인다.

 삼성전자 역시 만만한 회사는 아니다.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을 뿐 끊임없이 3D 반도체를 연구해왔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삼성전자의 실력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삼성은 4년 전부터 국제 초고속집적회로학회지에 꾸준히 일급 논문들을 발표해 왔다. 수많은 3D 반도체 시제품을 만들어 수율(收率)까지 측정한 사실도 공개됐다. 삼성전자가 “우리도 이 부분에서 많은 연구성과를 축적해 왔다”고 자신하는 배경이다.

 갈수록 삼성전자의 ‘1등 유지 비용’은 커지고 있다. 이제는 속도 경영에다 방향까지 정확히 읽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플은 자체적으로 휴대전화용 반도체 인력을 확보해 삼성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여기에 인텔이 3D 반도체로 도전장을 던졌다. 상대하기 힘겨운 세계 최강의 기업들이다. 그래서일까. 이달 들어 이건희 회장이 서초동 삼성본관 사무실로 매일 칼출근을 하고 있다. 빌딩을 폭파하겠다는 협박 메일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회장의 출근이 애플과 인텔의 견제 시점과 겹치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이다. 지금은 이 회장의 입이 아니라 발을 쳐다볼 때가 아닌가 싶다. 사무실로 향하는 무거운 발걸음에서 살벌한 진검승부(眞劍勝負)를 앞둔 위기감이 묻어난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