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내 무슬림들 암흑 벗어났지만 춤출 수는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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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호 06면

빈 라덴 사망 뒤 첫 예배를 연 LA 이슬람센터. 6일의 이날 예배엔 올해 최대 규모인 1500명이 모였다. 김상진 기자

“지난주 전 세계가 놀란 충격적 사건을 말하고자 합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입니다.”
이맘(이슬람 성직자) 메헤르 헤투트(76) 박사의 설교는 직설적이었다. 시작부터 핵심을 찔렀다.
성인 남성 무슬림 400여 명이 빼곡히 앉은 대예배당은 한순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예배당 문턱을 넘던 지각 교인들은 멈춰 섰다. 6일 낮 12시40분 LA 한인타운 내 4가와 버몬트 애비뉴에 있는 ICSC의 금요 예배는 불편한 정적으로 시작됐다.

중앙SUNDAY 르포 빈 라덴 사망 뒤 첫 대예배 LA 이슬람센터를 가다

개신교로 치면 주일 대예배인 이날 예배는 무슬림들에게는 의미가 깊다. 1일 빈 라덴이 사살된 뒤 열린 LA 무슬림들의 첫 공식 집회이기 때문이다. 또 알카에다가 빈 라덴의 죽음에 보복을 다짐한 날이기도 하다. 관심을 반영하듯 본당을 비롯한 4개 예배당은 빼곡했다. 본당에서 밀려나 홀 바닥에 깐 양탄자 위에 엎드린 사원 봉사자 라힘 아리프(56)는 “올 들어 가장 많은 1500명이 참석했다”고 했다.

민감한 시기에 강단 위에 선 설교자 이맘 헤투트는 사원의 설립자이자 원로였다. 그의 설교는 단단했다. ‘윤리’라는 보편적 잣대를 들어 무슬림으로서 이번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원칙을 설명했다. 정도를 벗어난 행위와 생각이다 싶으면 미국 정부와 무슬림 가릴 것 없이 날카롭게 비판했다. 설교 내용은 이랬다.

무슬림들은 빈 라덴의 죽음 뒤 ‘강요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있다. 김상진 기자

“지난 며칠간 직장에서, 학교에서 이웃들에게 ‘빈 라덴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을 것이다. 어떻게 답했는가…. 나는 빈 라덴을 두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죽음으로 우리가 암흑의 시대에서 벗어나 안도하고 있다. 하지만 백악관 앞에서 춤을 출 수는 없다…. 삶을 빼앗는 행위는 생명으로 윤리체계를 완성하는 알라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다. 살인에 대한 비난은 테러분자나, 미국 정부나 누구에게든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사진을 공개하지 않으니 빈 라덴이 살아 있다고 믿는 형제들이 있다. 또 다른 엘비스 프레슬리나 히틀러를 만들고 싶은가? 여기엔 최첨단 특수기술이 집약된 할리우드가 있다. 사진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좀 더 현명해지라…. 어떤 이들은 빈 라덴을 ‘신성한 영웅’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이들은 미국의 작전을 제임스 본드 영화 같다고 치켜세운다. 하지만 양쪽 모두 윤리의식이 없어 심각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팽배해 있지만 수단이 정당치 못하면 결코 목적도 선할 수 없다…. 나는 수십 차례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 가지만 말했다. 수장이 이슬람 관습이 맞느냐 틀리느냐는 질문에는 답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

그는 무슬림들에게 인식의 전환을 요구했다.
“대립과 언쟁, 싸움은 승리가 아닙니다. 이슬람의 가치와 무슬림의 존엄성은 우리가 결정합니다. 결코 그들(비무슬림)이 우리를 규정짓도록 허용하지 마십시오.”

평소 20분 보다 20분 더 길어진 이맘의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감동받은 듯했다. 알리 셰블리(31)는 “미국인들이 (무슬림들에 대해) 숨쉴 여유를 찾았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우리들을 좀 더 이성적으로 봐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곳 모두는 ‘빈 라덴과의 거리 두기’에 진지했다. ICSC는 빈 라덴 사망 직후 홈페이지에 공식 보도자료를 올려 “10년의 암흑기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을 환영하고 안도한다”며 “대통령이 규정한 대로 빈 라덴은 지도자가 아니라 무슬림의 학살자”라는 문장을 넣었다. 그 배경엔 무슬림으로 견뎌야 했던 설움이 놓여 있다.

지난 6일 워싱턴 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아샤드 차우드허리는 “대부분의 무슬림 아메리칸들도 9·11 테러의 또 다른 피해자”라며 “어딜 가든 손가락질을 받고, 테러리스트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견뎌야 했다”고 말했다. 빈 라덴의 사망은 그래서 그런 어두운 10년의 장막을 거두고 새 시대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빈 라덴 사망 직후인 지난주 포틀랜드의 한 사원 외벽에는 “오늘은 오사마, 내일은 이슬람 차례”라는 낙서가 발견됐다. 또 애너하임의 나이트클럽 앞에서는 업주 무함마드 알카티브가 달걀 세례를 받았다. 헤투트 박사는 “이제 이슬람의 가치와 무슬림의 존엄성을 우리가 다시 세울 때다. 교인 개개인이 무슬림 대사가 되어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이슬람의 진정한 모습을 삶으로 보여줘야 할 때”라고 연설했지만 사원을 나서는 무슬림의 표정은 밝지만은 않았다. 그 연설 속에서 무슬림은 하나라는 것은 느꼈지만 이방인이었을 기자에게는 말을 아끼는 듯했다. 그들은 ‘이제 이슬람의 가치
를 새로 정해야 할 때’라는 설교의 의미를 되짚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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